전염병 코로나-19의 확산으로 3월 콤파스도 취소됐다. 요즘의 확산 추세로 보아 언제 열릴 수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다. 우한과 그 주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퍼지던 코로나-19가 대구의 신천지 교인들의 집단감염으로 봇물이 터지듯 퍼져 나가더니 이젠 신도림의 콜센터 직원과 예배를 강행한 몇몇 교회와 요양병원 환자에 의한 감염에다가 역학적으로 원인 규명할 수 없는 해양수산부 직원의 감염까지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집단이 모이는 학교와 종교단체, 유흥업소의 각종 모임이 중단되고 자가격리와 재택근무가 점점 늘어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다.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부득이하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인간의 본성을 탈피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처했다. 모두가 질병에 대한 공포와 감염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행여 미열이나 잔기침만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경제다. 모든 활동이 제약을 받다 보니 경기가 말이 아니다. 여행업·숙박업·요식업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 분야가 거의 올스톱 상태이다. 진원지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나아가 세계로 확산되어 인적 물적 흐름이 멈추고 교역도 대폭 줄어 가뜩이나 장기불황에 시달리던 해운산업이 기로에 섰다. 게다가 컨트롤 타워인 해수부마저 집단감염으로 제 기능을 못하니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지금까지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위기대처와 극복의 DNA가 우리에게 있기에 희망을 건다. 이젠 늦추었던 각급 학교의 개강과 직장의 정상근무도 임박하여 하루속히 코로나-19가 퇴치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근본 해결책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료제와 백신의 개발이라고 하는데, 빨리 개발되어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슈퍼버그’
“우리는 전염병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학박사 에릭 토너의 말이다. 3초에 1명이 슈퍼버그로 사망할 수 있다는 영국 BBC의 보도를 접하며, 전염병 시대에 살고 있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른 책이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라는 부제의 ‘슈퍼버그(Super Bugs)’이다. 슈퍼버그란 강력한 항생제로도 치료되지 않는 변이된 박테리아를 의미하며, 책 ‘슈퍼버그’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과 함께 무섭게 진화하는 슈퍼버그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슈퍼버그’는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의 의사인 맷 매카시가 쓴 책으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슈퍼버그에 맞설 새로운 항생제의 임상연구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숨가뿐 순간인 임상실험이라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한 의사의 솔직한 고백이 ‘슈퍼버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슈퍼버그의 치명적인 위험을 알리는 동시에 희소 감염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의료진들의 고군분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지구촌이 큰 혼란에 빠져 있다. 2003년 사스, 2012년 메르스 사태의 원인이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다시 변이를 일으켰다. 환자는 세계 도처에서 속출하고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나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낳는 미생물이 바로 슈퍼버그이다. 슈퍼버그는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박테리아를 지칭하며 언론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주로 박테리아가 거론되지만, 치료제가 듣지 않는 진균도 포함된다. 2019년 20개국에 퍼졌던 치사율 60%의 항생제 내성 칸디다속 진균이 그 예이다. 슈퍼버그의 피해는 실로 놀랍다. 2019년 미국질병통제센터는 매년 280만명의 미국인이 항생제 저항 감염을 겪고 있으며, 3만5,000명이 그로 인해 사망한다고 보고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7년 슈퍼버그 12종을 발표하며 매년 70만명이 이로 인해 사망하며, 2050년에는 1,000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라 최근 슈퍼버그 감염 건수가 급증하여 한 해 3,400~3,900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스로 인한 사망자가 세계적으로 774명, 메르스로는 858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1928년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 인류는 병원균을 정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테리아는 끊임없이 항생제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아내며 슈퍼버그로 진화해 왔다. 이에 감염학자들은 슈퍼버그를 물리칠 새로운 항생제의 개발을 촉구한다. 슈퍼버그의 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는데, 지금 쓰이는 항생제 대부분이 1970년 전에 개발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항생제 개발이 늦어지는 이유는 한 마디로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항생제가 비싸다면 거부감을 가질 것이며, 이런 거부감에 직면한 의사들은 값비싼 항생제 신약보다 기존 항생제를 처방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제약회사들은 항생제 개발을 주저한다. 게다가 10년 이상 걸려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을 가진 병원균이 등장하여 투자비를 회수하기가 더욱 어렵다. 따라서 감염학자들은 항생제를 공공재로 인식하고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항생제 신약 개발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은 임상연구와 임상실험이다. 이 책에선 201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복합성 연조직 감염치료제 ‘달바반신’의 임상연구를 다루고 있다. 컬럼비아와 코넬이라는 두 개의 의과대학을 거느린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의 의사인 맷 매카시는 달바반신에 대한 시판 후 조사를 했다. 2017년과 201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사전, 사후 연구로 진행됐으며, 각 단계의 연구대상은 다른 환자들이었다. 사전 연구에서는 기존 항생제 치료를 하면서 환자들의 경과를 관찰만 했고, 사후 연구에서는 달바반신을 투여한 후 효과를 기존 항생제 치료와 비교했다. 맷 매카시는 달바반신이 여러 항생제를 병용한 기존 치료법만큼 효과가 있으면서 병원 체류시간을 거의 2일까지 줄여준다고 보고했다. 다른 항생제들은 입원해서 정맥주사로 맞아야 하며, 약효 지속시간도 짧은데 비해 달바반신은 1회 30분만 주사하면 약효도 1주일간 지속되기 때문이다. 병원 체류시간의 감소는 의료비 부담을 낮춰주는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감염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유럽질병통제센터에서 다섯 가지 슈퍼버그 감염병을 관찰한 결과 75%가 병의원에서 걸린다고 보고한 것을 고려하면 그 의의가 상당하다고 하겠다. 맷 매카시는 가장 강력한 항생제의 하나인 반코마이신에 내성을 가진 슈퍼버그가 출현한 지금 상황에서 달바반신이 대체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5쪽의 연구보고서로 요약된 임상연구의 과정에 저자의 해박한 전문지식이 더해져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그는 임상연구 지원자들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플래밍의 페니실린 발견에서부터 항진균제 니스타틴, 항생제 반코마이신, 자신이 시험중인 달바 등의 개발을 둘러싼 뒷이야기뿐 아니라 나치의 생체실험과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등 어두운 과거를 딛고 지금의 임상연구 원칙이 수립된 역사를 들려준다. 여기에 베스트셀러 저자다운 흡인력으로 슈퍼버그의 위협에 날마다 노출되는 의료현장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슈퍼버그의 공격을 가장 받기 쉬운 중증환자들의 치료를 놓고 고민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슈퍼버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맷과 그의 동료 의료진과 연구자들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항생제의 대안으로 추진되고 있는 최신 연구 중의 하나는 박테리오파지와 여기에서 유래하는 리신 연구이다. 박테리오파지는 자연계에 무수히 존재하는 바이러스 중에 세균을 숙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또 다른 갈래의 연구는 소위 유전자 가위라고 불리는 크리스퍼 기술을 활용하여 박테리아 내의 항생제 내성을 갖는 유전자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연구이다. 여기에 나노 기술로 항균성 펩타이드 중합체를 만들어 병원균의 외벽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비전문가에게도 이 책이 슈퍼버그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에 대한 비이성적인 반응을 보면서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인식과 이성적 대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 진균,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하며 우리 곁에 늘 존재해 왔다. 근래에 와서 슈퍼버그의 문제가 심각해진 이유는 항생제의 오남용 때문이다. 특히 사람에게 쓰는 항생제를 가축과 동물에게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관행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항생제를 요구하지 말고, 처방받은 항생제는 남기지 말고 복용하여 내성을 가진 병원균을 만들어 전파하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아울러 농작물과 가축에 쓰이는 항생제를 어떻게 규제할지와 병원 내의 슈퍼버그 감염을 어떻게 방지할지 등에 관한 관심이 필요하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대중의 관심과 인식만이 제도와 관행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남용과 내성발생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할 뿐만 아니라 항생제 내성 발생률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요인인 인구밀도까지 높은 나라에 사는 우리로선 이런 인식전환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코로나-19의 창궐과 확산을 막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인류가 슈퍼버그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을 때이다.

 

‘총, 균, 쇠’
퓰리처상 수상작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를 읽으며, 무기, 병균, 금속이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인류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명저라는 수식에 걸맞게 “왜 어떤 민족들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원주민들은 유라시아인들에게 도태되고, 각 대륙마다 문명의 발달속도에 차이가 생기고, 인간사회의 다양한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하였다. 이 책은 4부로 나누어져 1부 인간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2부 식량생산의 기원과 문명의 교차로, 3부 지배하는 문명과 지배받는 문명, 4부 인류사의 발전적 연구과제와 방향에 관해 서술하였다. 저자는 뉴기니의 청년 얄리로부터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얄리의 질문은 뉴기니인과 유럽 백인의 대조적인 생활양식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 문제를 확대시키면 현대 세계에 존재하는 더 큰 규모의 현저한 불균형도 내포하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발원한 여러 민족, 특히 아직도 유럽과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과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이 현대 세계의 부와 힘을 독점하고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은 비록 유럽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부와 힘에서 훨씬 뒤처져 있는 상태다.

 

또 다른 민족들, 가령 오스트레일리아,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단 등의 원주민들은 자기들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백인 이주민들의 손에 살해되거나 예속되고 심지어는 아예 몰살당하기까지 하였다. 세계 인간사회들을 비교할 때 생기는 의문들은 예로부터 역사학자와 지리학자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관해 깊이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에는 문명의 내적 원동력이 문자와 유라시아의 문명이라고 보아, 단순하고 문자가 없는 사회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불평등의 뿌리는 멀리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토인비 이후 역사의 인과관계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저자는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유전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궁극적인 원인은 총, 균, 쇠이며, 직접적 원인은 조밀한 인구의 특징인 병원균의 진화에서 시작하는데, 유라시아의 병원균은 유라시아의 총기나 철제무기보다 훨씬 더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기타 비유럽인들을 죽게 만들었다. 반면에 신세계가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을 기다리던 치명적인 병원균은 전혀 없거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왜 병원균의 교환이 그토록 불평등했을까? 이는 분자생물학의 연구성과를 통하여 병원균과 식량생산의 기원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볼 때 남북아메리카보다 유라시아에서 훨씬 더 밀접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얄리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환경적 요인들을 확인했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나머지 원인을 꾸준히 밝혀내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유라시아 여러 지역의 차이점 문제, 환경과 무관한 문화적 원인의 역할, 개인의 역할 등이 포함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중에 가장 큰 것은 인류사를 진화생물학, 지질학, 기후학과 같이 두루 인정받는 역사적 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역사적 과학으로 정립하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궤적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는 첫째는 가축화와 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대륙간 차이이고, 둘째는 확산과 이동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며, 셋째 각 대륙 사이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며, 넷째는 각 대륙의 면적 및 전체 인구 규모의 차이이다. 어째서 유라시아 내에서도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중국이나 인도가 아니라 하필 유럽의 사회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식민지화하고 기술을 선도하고 현대 세계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세하게 되었을까?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는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부의 인간사회는 생태적 불모지에서 탄생하는 불운을 맞이했다. 그들은 자원의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 생태학적 자살을 저질렀다. 북유럽과 서유럽이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더 강인한 환경 즉 강우량이 더 많아 식물이 더 빨리 재성장할 수 있는 곳에 사는 행운을 타고났다. 식량생산이 가능해진 7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북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상 유럽은 농작물, 가축, 기술, 문자 등을 모두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부터 받아들인 셈인데, 그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힘과 혁신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잃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가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추월당하게 된 과정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쩌다가 추월당했을까? 사실 중국이 낙후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중국이 원래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식량생산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거의 맞먹을 만큼 일찍 시작되었고, 북중국에서 남중국까지 그리고 해안지방에서 티벳 고원의 고산지대까지 생태학적으로 다양하여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 기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광활하고 생산성이 높은 땅을 차지한 덕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보다 덜 건조하여 생태학적으로 덜 취약한 환경이므로 1만년 가까이 농업을 계속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산성 높은 집약농업을 유지할 정도이다. 게다가 중국은 정치적인 힘, 항해술, 제해권 등에서 세계를 선도했다. 15세기 초에는 수백척의 배로 구성된 보물선단을 파견하였는데, 그중 가장 큰 배는 길이가 120미터에 달했으며, 총인원도 최대 2만 8,000명에 달했다. 콜럼버스가 보잘 것 없는 세 척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동해안에 도착하기 수십년전에 이미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바스코 다 가마는 허술한 세 척의 배로 아프리카 남단의 곶을 돌아 동진했고 그때부터 유럽이 동아시아를 식민지하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중국의 배들은 그 전에 희망봉을 돌아 서진하여 유럽을 식민지화하지 못했을까? 나아가 중국의 배들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서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했을까? 왜 중국은 그토록 낙후되어 있던 유럽에게 기술적 위치를 빼앗겼을까? 중국이 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였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중국은 유라시아의 다른 발전된 문명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대륙 내의 거대한 섬과 같았다. 상대적 고립상태로 각종 새로운 기술을 거부하여 낙후되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중국의 역사는 현대 세계에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즉, 상황은 변하는 것이며 과거의 우위가 미래의 우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유교와 문화적 보수주의도 중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타인에게 개종을 권유하는 종교는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는 식민지 개척과 정복의 추진력으로 작용했는데, 어째서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이처럼 환경과 무관하고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던 어떤 특이한 문화적 요소가 나중에는 큰 영향력을 가진 장기적인 문화적 특징으로 발전할 수 있다. 역사학이란 과학보다 인문학에 가깝다. 천문학, 기후학, 생태학, 진화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역사적 학문이다. 넓은 의미의 역사적 과학은 물리학, 화학, 분자생물학 등의 비역사적 과학과 구별되는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방법론, 인과관계, 예측, 복잡성 네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학분야 중에서 역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작용하는 변수도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인류사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제들을 분석하는 효과적인 방법론을 속속 얻어냈다. 그리하여 공룡, 성운, 빙하 따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인문학보다 과학에 더 가까운 분야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내성(內省)을 통하여 훨씬 더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공룡의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서다. 따라서 인간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공룡에 대한 연구 못지않게 과학적일 수 있고,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될 것을 낙관한다. 이것이 인류문명사 연구의 핵심이다.
1971년 4월 1일에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개소되었으니 올해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세워진 지 49년이 되는 해이며, 내년이면 창립 50주년이다. 과연 50년의 세월의 무게에 걸맞는 연구소로 자리매김했는지 자평할 때이다. 해사관련 민간연구소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연구와 교육사업, 해양한국 발간으로 해양사상 고양과 선진해운 진입에 얼마나 힘을 보탰는지 점검하는 백서와 50년사 발간을 통해 분석해보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열악한 환경과 만난을 극복하고 100주년을 향해 재충전하는 50주년 행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