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코해운의 전성기

선원선박관리회사인 JSM인터내셔날의 변재철 회장 회고록 ‘소동 주해기(昭東 舟海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JSM인터내셔날은 1968년 설립돼 해외선원의 관리사업을 영위한 라스코해운이 전신이다. 변재철 회장은 65년 협성해운에 입사해 라스코과 인연을 맺었고 94년 동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으며, 이듬해 사명을 JSM인터내셔날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소동 주해기’에는 우리나라 선원의 해외취업 역사의 一面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도 실려있다. 이에 관련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수회에 걸쳐 편집, 연재한다.                                  -편집자 주-

 

‘패크 로버’호 침몰(1972.12.24.)
소동(昭東)이 막 ‘갤럭시’호에서 하선한 지 한 달 만인 1972년 12월 성탄이브에 라스코쉬핑 소속선인 ‘패크 로버(Pacrover)’호 침몰 사고가 터졌다. 당시 ‘패크 로버’호 침몰 사고는 국내 신문에 소개되어 선원과 선원 가족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패크 로버’호 침몰 사고에 대한 부산일보(1972.12.26)의 기사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33명의 한국인 승무원들을 태운 채 긴급구조요청신호를 마지막으로 ‘알래스카’ 근해에서 조난한 리베리아 선적의 화물선 ‘패크 로버’호(1만 2,756톤)는 25일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및 리베리아 등 여러 나라 선박들과 함정 및 군용기들의 광범위한 수색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사람의 생존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동 ‘패크 로버’호는 24일 밤 알래스카 주 코디악 남방 1,120km 떨어진 해상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조난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구조받은 뒤집힌 구명보트 2척과 바다에 뜬 기름을 포함, 한국인 선원 33명이 타고 있던 조난된 리베리아 화물선의 침몰한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현지시간 25일 밤늦게 북태평양 코디악 남방 1,300km 해상에서 발견되었다고 미국경비대 대변인이 밝혔다. 그는 구조신호를 받은 지 15시간만인 한국시간 26일 상오 8시께 해군수색기가 이같은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코디악 남방 1,300km 해상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14척의 구조선과 항공기 6대는 이 흔적에 따라 비바람과 높은 파도에 밀리면서 수색작업을 계속 중이다.
이날 2척의 미해안경비정과 리베리아 화물선 2척 및 노르웨이 상선 1척은 알래스카의 코디악 남쪽 1,120km 지점의 해상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수색작전을 전개했으며, 전자음파기를 적재 한 미공군기 6대도 이 수색작업에 참가했으나 시속 97km의 강 풍과 16.7m에 달하는 높은 파도 그리고 해상 1,600~2,000피트로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수색활동은 큰 장애를 받았다.


한편 캐나다 해군함정 1척과 다른 선박 9척도 사고현장으로 급히 항해하고 있다. ‘패크 로버’호는 지난 18일(한국시간) 석탄 2만 2,000톤을 싣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로버츠뱅크를 출항, 일본으로 항해 중이었는데, 유조선을 개량한 이 선박은 동경의 야마시다 신니혼회사에 의해 용선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해안경비대 대변인은 ‘패크 로버’호의 자매선인 ‘이스터론 메링’호가 인근해역을 지나다가 오리건주 포틀란드 서쪽 약 1,760km쯤 되는 사고현장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전원이 한국 선원인 ‘패크 로버’호의 승무원 33명은 24일 새벽 5시 52분(한국시간 하오 2시 52분) 배를 포기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송신을 보내온 후 여태까지 행방불명 상태에 있다.
‘패크 로버’호 수색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는 미해안경비대는 사고 직후 날이 밝자 6대의 수색기화 2척의 감시선을 사고해역으로 급파했으며, 감시선들은 50노트의 강풍과 약 17m의 파도와 싸우며 현장으로 출동했다고 대변인은 말했다.

 

라스코해운의 전성기

 
 

1975년부터 1982년까지가 라스코해운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라스코해운은 1971년부터 1990년까지 부산시 중구 중앙동 4가 19번지의 동방생명빌딩에 자리를 잡았다. 관리 선박이 20척이 넘었고, 관리 선원도 500~600명에 달했다. 당시 라스코해운의 육상직에는 김동화 사장, 황병도 전무, 변재철 상무, 강도진 선원과 장, 용선담당직원 2명(김두하, 김석한), 여직원 7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갑판장 출신이었던 강도진은 협성해운에서 넘겨받은 월드와이드의 선박에 배승할 선원을 주로 관리했는데, 후에 금양해운을 설립해 독립했다.
이 시기에는 선원 모집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해대생들과 목포해전생들이 해기면허증과 선원수첩을 갖고 와서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었다. 실습생으로 태워달라고 찾아오는 재학생들도 있었지만, 라스코는 초창기에는 실습생을 태우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해대 재학생들은 취업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고, 부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해기사들은 그래도 나았지만, 부원으로 배를 타려면 몇백 달러 정도의 사례금을 선원 담당 직원에게 주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시가와石川와의 일화
라스코(도쿄)에서 공무감독으로 일하고 있던 이시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라스코쉬핑의 선박은 모두 벌크선으로 고철이나 목재를 주로 운송했기 때문에 크레인이 장비되어 있었다. 이 크레인에는 와이어 로프(wire rope)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로 일본제를 보급해주었다. 당시 라스코(도쿄)는 주로 용선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무감독은 이시가와 혼자만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와이어 로프 보급은 전적으로 이시가와의 소관 업무였다.
마침 당시 부국제강이 생겨 계류색과 와이어 로프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가격이 일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라스코 선대의 ‘로즈 에스’호(김진한 선장, 홍자언 기관장)가 고철을 싣고 대만 카오슝의 당영철공(唐榮鐵工)에 입항하게 되어 昭東과 이시가와가 함께 선박 관리를 위해 카오슝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시가와씨가 김진한 선장과 홍자언 기관장 등과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韓國製は しょうがない!’(한국제는 되먹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김진한 선장이 ‘가격대비 질을 따져야지, 질만 나쁘다고 하면 되느냐’고 했더니 이시가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선박이 출항하고 나는 한국으로, 이시가와는 일본으로 각각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로 라스코를 위해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앙금이 남은 채로 헤어지게 된 것이다.


이시가와라는 사람은 동경상선대를 나온 사람인데, 김동화 사장에게도 ‘김군’하고 부르곤 했다. 동경상선을 나온 이시가와가 김동화 사장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김군 김군’ 하고 불렀던 것이다. 그럼에도 김동화 사장은 昭東에게 한국으로 오지 말고, 도쿄로 가서 이시가와와 화해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昭東은 결국 도쿄로 가서 이시가와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자 이시가와가 ‘자신이 선배니까 선배 대우를 해달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昭東은 ‘당신하고 김동화 사장님이 어떤 사이인진 몰라도 우리 사장한테 ‘김군 김군’ 하지 말라. 내 상사인데 듣기 좋겠느냐’ 고 말했다. 이시가와나 昭東이나 모두 라스코쉬핑에서 월급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서로 업무적으로 크게 겹칠 것이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술 한 잔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즈음의 일이었다.

 

한국 조선소에서의 드라이도킹
라스코의 선대가 20여척으로 증가함에 따라 2년마다 해야 하는 정기검사에 대비하여 드라이도킹을 해야 했다. 1972년 현대중공업, 1974년 삼성중공업, 1975년 미포조선 등이 차례로 설립되면서 신조사업과 함께 수리조선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일본이나 홍콩 등지에서 드라이도킹을 했다. 1975년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되고 선거공사 기공식을 할 때였다. 당시 현대미포조선 임원으로 한국 해양대 동문인 백충기(E7)가 근무하고 있었다. 라스코는 드라이 도킹을 할 선박이 많았기 때문에 기공식에 昭東을 초대하였다. 昭東이 부산의 집에서 쉬고 있는데, 경찰이 찾아왔다. 사연인즉, 현대미포조선 기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어 있어서 신원조회를 하러 왔다는 것이다. 현대미포조선에서도 식 30분 전에는 도착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기공식 당일 초청자 20여명과 현대미포조선 근로자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헬리콥터가 도착해 박정희 대통령이 내려 착석하자 기공식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3차 5개년 경제계획 기간 중에는 조선산업을 주요 국가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며, 현대미포조선은 선박수리업에 특화하여 우리나라 경제 재건의 초석이 될 것’이라며 축사를 마쳤다. 그리고 도열해 있는 초청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昭東은 ABS 신시범 (E4) 부산소장과 나란히 서 있었다. 신시범 소장의 명찰에 ABS 부산소장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이 ‘ABS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자, 신시범 소장은 ‘미국의 선급회사로 선박을 건조할 때 검사하고 인준하는 회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월급은 뭐로 받느냐?’고 되물었고, 신시범 소장이 ‘달러로 받는다’고 대답하자 박 대통령이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Lasco’라는 명찰을 단 昭東에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뭐하는 회사냐?’고 묻자, 昭東이 ‘미국 선박회사’라고 답했다. 그러자 박대통령이 ‘월급은 무엇으로 받느냐?’고 되묻자 昭東이 ‘달러로 받습니다’라고 답하자, 역시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악수를 했다. 당시 외화가 부족했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라스코와 김영기
김영기는 해군에서 제대하고 1969년 9월 9일 한국해대의 송용기 교수의 딸인 송윤숙과 혼인을 하였다. 1969년 10월 라스코해운이 협성해운에서 독립할 당시 김영기는 협성해운의 해사부에서 공무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스코해운으로 독립한 김동화 사장이 김영기에게 함께 라스코에서 일을 하자고 해서 라스코의 해상직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김영기는 결혼을 한지 채 한 달만인 1969년 10월 9일 ‘모니크SS Monique’호에 승선한 것을 시작으로 1977년 4월까지 라스코쉬핑의 주요 선박 7척의 기관장으로 승선하였다.


라스코쉬핑은 고철 등을 주로 운송하는 회사여서 중고선을 매입해 저렴한 한국 선원을 고용해 운항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갑판부나 기관부 할 것 없이 승선하는 동안 선체 관리와 기관의 각종 기계 관리가 일상이었다. 원래 선원이란 직업은 선박의 운항 및 화물 관리가 기본적인 직무였고, 선체 관리나 기계 관리는 선박을 운항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부차적인 직무였다. 그러나 라스코쉬핑은 이것이 정반대가 되었다. 그런데 수리작업이란 것이 정규 근무 시간에 끝낼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나, 해외취업 초창기에는 초과근무수당(extra bonus)이라는 개념이 없이 월급여만 받는 것으로 계약하고 승선했다.
김영기 기관장은 ‘모니크’호를 김택문(N10) 선장과 동승했는데, 김택문 선장은 한국해대에서 항해학 교수(1965.5.1.~67.12.31)를 역임하다 해상직으로 이직하였다. 그런데 ‘모니크’호의 선체와 기계 장치 등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차대전 말기 미국이 전표선으로 건조한 빅토리형 선박인 ‘모니크’호는 선령이 30년이 훌쩍 넘은 중고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선체는 말할 것도 없고 터빈과 발전기 등 멀쩡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김영기가 일본에서 ‘모니크’호에 승선하고 보니 터빈발전기가 고장난 상태였다. 본사에서 온 보만 감독은 IHI 조선에 수리 의뢰를 내자고 했다. 김영기는 해군에서 이미 송도호에서 터빈선을 승선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일단 수리를 시도해보고 안되면 수리의뢰를 내자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당시 미해군의 함장으로 승선했던 보만 감독은 한국인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 있던 터라 ‘수리 의뢰’를 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자 김영기 기관장은 ‘현장의 기관장을 믿지 못한다면 나는 하선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히자, 보만 감독이 본사에 전화를 해 일단 터빈발전기를 분해해 보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다. 터빈발전기를 개봉해 보니 김영기 기관장이 얘기한 대로 동익(動翼, moving blade)이 부러진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교체하고 나서 ‘모니크’호는 출항할 수 있었다.


‘모니크’호는 슈니처 스틸이 해체해 고철로 활용하려다가 재사용하게 된 것으로 발전기를 살려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을 출항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항해하는 동안에도 선체와 기계 정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원으로서는 항해 중에 선체가 찢어지거나 기계가 고장나면 항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목숨까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고치고 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택문 선장은 ‘배의 상태가 너무 안좋으니 갑판부, 기관부 할 것 없이 선체 관리와 기관이나 기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라고 관리 지침을 내렸다. 김영기 기관장도 ‘초과작업수당을 회사에서 안주면 내 월급에서라도 가불해서 줄테니 열심히 정비하자. 우리 모두 죽으면 안되지 않느냐’고 선원들을 독려했다. 김영기 기관장은 일본에서 승선했는데, 군함이었던 배라 선실이 매우 어둑어둑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실내의 전등을 모두 새 것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기관부와 갑판부, 사주부 할 것 없이 선체나 기계 정비를 할 때는 모두 나와서 거들고 초과근무수당도 모두 함께 나누었다. 물론 갑판부 작업일 경우는 갑판부에 7을 배분하고, 기관부와 사주부에 3을 배분했다.


그렇게 해서 갑판부나 기관부 할 것 없이 증기선인 ‘모니크’호의 선체의 녹을 까내고, 얇아진 철판을 교체하고, 기관과 기계를 정비를 했다. 일본에서 출항해 태평양을 건너 ‘모니크’호 본사가 있는 미국의 포틀랜드에 입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본사의 레오나르도 사장, 케니스 루이스 부사장, 보만 공무감독이 방선했다. 특히 이미 일본에서 ‘모니크’호 상태를 본 적이 있는 보만 감독이 선박을 한번 돌아보더니 레오나드 사장과 루이스 부사장에게 “일본에 서 봤을 때는 선내가 어두컴컴했는데, 지금은 환해졌다”며 ‘선박관리 상태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보고했다.


김영기 기관장은 본사를 방문해 ‘선박이 침몰하면 본사가 얼마나 손해를 보겠느냐? 선원들이 밤낮으로 일을 해 배를 새 배로 만들었으면 거기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초과근무수당 지급요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본사 임원이 초대하는 선·기장 만찬에도 응하지 않았다. 레오나드 사장과 루이스 부사장도 ‘모니크’호의 상태를 이미 확인하였기 때문에 협성해운 시절에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던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작업수당 규정>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1972년에 이르러서는 ≪선원고용규칙≫으로 성안되었다.


김영기가 1975년 3월 ‘팩 머천트’호를 하선해 부산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협성해운의 왕상은 회장의 조카인 이길승이 찾아와 방해창(E6) 전국해원노동조합위원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언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방해창 위원장을 만나니 ‘김영기 기관장이 선원들에게 밥도 먹이지 않고 일을 시켜 배고파서 일을 못하겠다’는 라스코 선원 두 명의 진정서가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김영기 기관장은 점심을 먹지 않은 습관이 있었는데, 기관 정비나 수리를 하다보면 점심을 먹지 않으니 점심시간 때도 일을 계속하곤 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몰랐던 기관부 조기원들이 마치 김영기 기관장이 점심을 먹이지 않고 일을 시켰던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김영기는 1976년경 ‘팩 모나크’호를 하선한 뒤 육상에 정착하기 위해 진주에 포도농장을 매입해 두었다. 1977년 ‘팩 바론’호를 끝으로 라스코를 그만두려고 라스코쉬핑 본사에 사직 인사겸 하직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본사의 레오나드 슈니처 사장이 ‘포도 농장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 부산사무소나 동경사무소에서 공무감독으로 일을 더 해달라’고 제안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김영기는 애초에 육상근무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포틀랜드 본사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본사에서 ‘본사로 와서 근무하게 된다면 더 좋다’라는 답신이 와서 김영기는 1977년 5월 6일자로 라스코쉬핑 포틀랜드 본사의 공무 감독으로 육상근무를 시작했다. 김영기가 라스코쉬핑의 본사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는 라스코쉬핑의 선대가 20여척이었고, 모든 선원이 한국 선원이어서 입지 면에서도 좋은 편이었다.
77년 즈음 라스코쉬핑의 선대는 증기선에서 디젤선으로 바뀌는 중이었고, 화물은 고철, 목재, 곡물 등을 위주로 태평양 항로에서 주로 운항했다. 김영기는 처음에는 공무감독(port engineer)으로 선박 관리 및 수리, 선용품 보급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김영기 이후 라스코쉬핑 본사에는 조정각, 김영수, 이경태, 이용구, 이관용, 이해수, 오흠규 총 8명의 한국인이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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