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창립, 해양한국 창간, 세미나·연구활동 시동(1971.4-1985.7)

 
 

한국해사문제연구소 50주년을 기념해 2011년 발간된 창립자 윤상송 박사의 자서전 ‘삼주 윤상송’의 내용 가운데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창립과 초기활동들을 기록한 부분을 실었다.(일부 생략됨)       -편집자 주-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설립
내가 선주협회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1971년 2월로 내 나이 아직 장년인 56세 때의 일이었다. 이처럼 한창 일할 나이였지만, 달리 갈 곳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기관장이 되고 해운공사의 상무이사가 되었던 이력도 그렇거니와 한국해양대학 학장 및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이라는 요직(?)을 지낸 나로서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체면에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미국 시찰에서 느꼈던 바를 실천할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방편으로서 순수 민간기구 성격의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동지를 구하고자 해운계 여러 인사를 만났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연구소 설립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재정의 지원 등에는 말끝을 흐렸다. 결국 나는 홀로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구소로서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사진을 구성해야 했다.

 
 

그래서 본인들의 동의를 얻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의 김재근 교수, 단국대학교 법정대학의 박종성 교수, 코리아라인의 이맹기 사장, 한국해양대학의 이준수 학장 및 고려해운주식회사 박현규 전무이사 등으로 발기위원을 구성하여, 1971년 3월 1일 국제호텔 102호에서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발기총회에서 정관을 제정하고 이사진을 선임하여, 내가 이사장을 맡고, 박현규 전무가 감사를 맡고 다른 발기인 모두는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내 집에 두기로 하였다. 당시 재단법인을 설립하자면 500만원의 기금이 있어야 했는데, 그나마 마련할 길이 없어 남의 돈을 빌려 은행에 예치하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또 주무관청의 인가가 전제되어 있었는데, 설립인가가 좀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청와대 제3비서관과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장을 지낸 신동식씨가 거의 같은 성격에, 명칭도 비슷한 재단법인 한국해사산업연구소의 설립인가를 신청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교통부의 담당 국장이었던 김정학씨가 우려하는 점은, 연구기관이 전혀 없던 우리나라 해사산업계에 2개의 연구기관이 동시에 설립된다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과연 제대로 운영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2개의 연구기관이 통합하여 다시 신청하면 곧바로 인가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이었고, 김정학씨의 처지에서는 나나 신동식씨 모두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2개 연구기관의 재단법인 설립인가 서류는 담당 국장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었는데, 이를 딱하게 생각하고 있던 담당 사무관 이종순씨가 이 2건의 서류를 챙겨들고 장관실을 찾아가 인가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2개 연구기관은 1971년 3월 31일 설립인가를 동시에 취득하였다.


속셈이야 어쨌든 2개의 연구기관을 하나로 합쳐 다시 인가를 신청하라는 김정학 국장의 논리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독자적인 법인의 설립을 고집한 것은 해운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는데, 신동식씨의 경우는 전공이 조선이기 때문에 그가 신청한 법인은 조선 위주의 연구기관이 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2개의 연구기관이 하나가 된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해사문제연구소와 해사산업연구소가 각각 독자적으로 존립하면서, 협력할 일이 있을 때 협력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종순씨의 결단에 대하여 두고두고 감사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설립인가를 받은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1971년 4월 1일 사무소를 개소하고, 4월 13일자로 서울지방민사법원에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해사산업 관련 순수 민간 연구소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그러나 500만원의 기금조차 자력으로 마련하지 못한 나로서는 시내 중심가에 번듯한 사무소를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내 집을 사무소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소가 어디냐 보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중요시하는 선진국의 경우라면 몰라도 당시의 우리나라의 사정으로서는 하나의 코미디였다.
때마침 그 즈음 본사를 부산에서 서울 소공동 삼원빌딩으로 옮긴 천경해운의 김윤석 사장이 이 같은 사정을 듣고, 자신이 쓰는 천경해운의 사장실 절반을 나에게 할애하여 연구소의 사무소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루는 김윤석 사장이 날 찾아와 말했다.

 

 
 

“연구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댁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일로 박사님을 찾아뵈려 해도 댁까지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사무실을 쪼개어 쓰십시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 소장을 비서처럼 쓰셔도 좋습니다”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지만, 내가 즉각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워 며칠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하였다. 솔직히 생각해보고 말고 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야 면목이 설 것 같아서 그리 대답한 것일 뿐이다. 며칠 후 나는 그 제안을 매우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수락하였다. 이로써 서울 시내 소공동에 사무소를 둘 수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과제를 놓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연구과제를 맡기려는 기업체도 없었거니와, 설혹 어떤 기업체가 연구과제를 맡긴다고 해도 내가 지닌 재정능력으로는 그것을 수행할만한 연구진을 갖출 수가 없었다. 연구진은 고사하고 사무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2년여 계속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꿈꾸었던 연구를 통한 한국해운의 진흥이란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딱한 처지에 있음을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이러한 점에서 무능한 사람이었다.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날 수산 전문지인 월간 현대해양의 업무부장으로 있던 김효형이 내 사무실을 들렀다. 특별히 무슨 사안을 취재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옆방의 천경해운 김윤석 사장을 만나고 가던 길에 내 방을 그저 들른 것이었다. 별로 할 일이 없던 나는 그 친구를 상대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개점 휴업상태에 있는 연구소의 현황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러자 김효형 씨가 얘기했다.

 

월간 해양한국의 창간
“해운분야는 더욱 어렵겠지만,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연구소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되는 연구소가 있다면 정부의 산하에 있거나 정부의 도움을 받는 연구소입니다. 그러니까 박사님께서도 정부의 도움을 받는 방안을 생각해 보시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럴 능력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면 정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될 터인데, 그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예요” 나의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내 생활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의 방편으로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이라면 정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크나큰 도움이 되겠지만, 내 의도는 정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연구소를 운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시다면 월간지 같은 것을 발행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월간지의 발행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운계에는 해운계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월간지의 발행으로 해운계를 대변하는 것도 어렵겠습니다만, 월간지를 통해 해운에 관한 새로운 이론과 정보는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김효형 씨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능력도 없이 거창한 연구소 고유의 연구목적을 추구하기보다는 보다 손쉬운 월간지의 발행을 통하여 우선 그 기반을 갖추어 나아가는 것이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김효형  씨의 의중을 떠 보았다.


“만약에 우리 연구소가 월간지를 발간한다면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떠보자고 한 얘기였는데, 김효형 씨가 적극 동의하고 나섰다. 김효형 씨는 그 나름대로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겠다는 말에 나는 매우 고무되었다. 나는 속으로 월간지를 간행하기로 결심하였지만, 그런 기색을 내세우지 않고 적극 고려해 보겠다고만 대답했다. 나로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일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업계에서 과연 월간지의 발행 같은 것을 원하는지도 의문이었고, 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실행에는 무엇보다 잡지 전문가가 필요할 터인데, 그 비용의 염출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옆방의 김윤석 사장의 의견을 듣기로 하였는데, 김윤석 사장은 월간지의 간행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리고 발행하는 잡지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까지 소요되는 자금도 스스로 부담하겠다고까지 나섰다. 나는 김 사장의 말에 더욱 고무되어 해운계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내가 만난 해운계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우선 김효형 씨를 만나 함께 일을 추진하기로 하고 1973년 초에 문화공보부에 ‘월간 해양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신청하였다. 당시 정기간행물의 발간과 관련된 법제는 법정 요건만 갖추어 신청만 하면 등록을 받아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인가제 이상으로 요건과 절차가 까다로웠을 뿐만 아니라 반정부 언론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어떤 간행물이든 되도록 신규의 등록을 받아주지 않으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따라서 정기간행물의 등록도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월간 해양한국’의 성격이 워낙 비정치적이어서 그랬는지 7월 28일자로 등록(라-1703호)을 마칠 수 있었다.


막상 등록을 하고 나니 김효형 씨가 자기는 편집전문가가 아니므로 편집자를 영입해야 한다고 해서 김효형 씨의 소개로 이원철 씨를 영입하여 1973년 9월 1일에 10월호로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원래의 창립 의도와는 다소 동떨어진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비로소 월간지의 간행이라는 고유의 업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월간지의 간행도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해운계라는 시장이 너무 좁았다. 또 김효형 씨가 업무(주로 광고의 수탁), 그리고 이원철 씨가 편집(원고의 청탁, 취재 및 편집)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지만, 월간지의 간행은 업무와 편집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리 등 잡다한 여러 가지 사무는 물론, 김효형 씨나 이원철 씨가 해운에 대한 전문적인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해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의 영입도 필요하였다. 마침 해운공사의 업무부장을 맡고 있던 이홍택 씨가 직장을 떠난 상태에 있어서 그를 총무부장으로 영입하였다. 이들 세 분에 대한 급료도 넉넉히 약속하지 못하였지만, 세 사람 모두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이어서 월간지의 간행은 이럭저럭 지속되었다.


‘월간 해양한국’의 발간을 계기로 비로소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이홍택, 김효형 및 이원철  세 사람의 유급직원을 갖게 되었는데, 그전까지는 천경해운에서 파견하여 준 급사 한 사람만이 상근 직원이었고, 필요할 때마다 천경해운의 상임감사인 김종욱 감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이스턴 쉬핑의 서병기 씨가 이황복, 박종무 등의 대명선장을 파견하여 주었지만, 그들은 고유의 업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무실을 지켜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였다.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함으로써 해사문제연구소가 간판만의 연구소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었고, 또 그런대로 보람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언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연구소라면 마땅히 연구가 주(主)이고, 그 밖의 간행물의 간행 등은 부(副)일 수밖에 없는 일인데, 연구가 전혀 수행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다운 연구는 수행하지 못하였지만,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하기 이전 해사문제연구소는 연구소로서의 무언가 역할을 수행하고자 몸부림을 쳤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서병기 씨였다. 즉 1972년 초 서병기 씨가 나를 찾아와 심포지엄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두 번에 걸친 선원수급 관계 심포지엄
서병기 씨는 생활문제를 해결하고자 우리나라 선원이 해외로 송출되던 초창기에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해외에 취업한 사람이다. 서병기 씨는 1965년에 일본 다이와(大和) 해운의 파나마 적 ‘다이에이(Daiei)’ 호에 승선하였다. 그러나 서병기 씨가 승선한 지 1개월 만에 다이와해운의 홍콩법인이 도산하는 바람에 ‘다이에이’호의 폐선이 불가피하였다. 그 뒤 서병기 씨는 한국선원을 대만계 선주에게 알선하는 유니언라인의 소개로 ‘그레타(Gretha)’호에 승선하여 인도의 캘커타로 떠나기까지, 선원들과 함께 ‘다이에이’호의 폐선작업을 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병기 씨가 지닌 리더십과 열정이 일본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산코라인(三光海運)의 신조 1년짜리 8만톤급 광석겸용선 ‘시그후자(Sigfuja)’호에 개인 자격이 아닌 선박단위의 승선계약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승선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 뒤 서병기 씨는 산코라인이나 그 계열사에서 한국선원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국내 해운업계는 한국선원의 해외 송출이 크게 진전되어, 국적선에 승선시킬 선원을 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직도 해외 송출선원의 임금은 국적선 승선선원의 임금에 비해 3배나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국내 해운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국내 선주들은 정부 당국에 진정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 당국은 선원의 해외송출을 제한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서병기 씨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자신도 국내해운업계가 고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고, 한국선원의 근본적인 수급문제를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자고 하였다. 그에 따른 모든 비용을 서병기 씨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선원의 해외송출 제한을 완화시켜 보려는 서병기 씨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서병기라는 사람이 결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병기 씨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1972년 7월 4일에 한국일보빌딩에 있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정보센터 회의실에서 ‘해기원 수급정책 심포지엄’을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이름으로 개최하였다. 이날의 심포지엄의 제1주제와 제2주제의 사회는 주요한 씨, 제3주제와 제4주제는 이준수 씨. 그리고 제5주제는 내가 맡았는데 이날 발표된 주제와 발표자와 토론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제1주제 : 인력수급계획의 기본원칙 - 변시민(인구개발연구소 소장) / 김재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황인정(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제2주제 : 해기원 수급의 적정선 - 서병기(이스턴쉬핑 선원감독) / 강성령(해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 이종례(월간 현대해양 사장)
△제3주제 : 해기원 교육의 방향 - 양시권(한국해양대학 교수) / 이맹기(코리아라인 사장) / 서병기 △제4주제 : 선원정책의 문제점 분석과 대책 - 김호(경제과학심의회 서기관) / 김상진(교통부 선박담당관) / 손태현(한국해양대학 교수) △제5주제 : 국제환경과 선원수급의 장래 - 우기도(한양대학교 교수) / 박종성(단국대학교 교수) / 이준수.


이밖에 경제기획원, 교통부, 과학기술처, 해군본부, 노동청, 한국해양대학, 한국해운조합,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한국해기원협회, 전국해원노동조합, 한국통신사협회 관계자 25인 및 일반 토의자가 초청되어 토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 심포지엄에 가장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있어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여야 할 한국선주협회 관계자는 참여하지 않았다.
비록 서병기 씨의 제안과 지원으로 개최하게 된 심포지엄이기는 했지만, 나는 되도록 일방적 논의로 흐르지 않도록 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위에서 보듯 중립적인 입장을 지닌 분들을 발표자와 토론자로 선정하였는데, 선주협회 관계자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심포지엄 자체를 외면하였다는 점에 솔직히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선주들의 이해관계에 상반되는 어떤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당당히 그에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7월 15일에도 서병기 씨의 제안과 지원으로 한국무역협회 중강당에서 ‘외항해운 진흥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5개의 주제를 놓고 열띤 토의를 전개하였다. 제1주제는 박종성(단국대학교 교수), 제2주제는 이맹기(코리아라인 사장), 제3주제는 김재근(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제4주제는 한동호(성균관대학교 교수), 그리고 제5주제는 신태환(아세아경제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전개되었는데, 그 주제와 발표자 및 토론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제1주제 : 국제해양법회의와 한국 - 권성기(국회의원) / 이준수(한국해양대학 학장), 이민재(서울대학교 교수) △제2주제 : 무역과 해운의 연관성 - 손병순(재무부 관세국장) / 이맹기, 양영환(숙명여자대학교 무역학과장), 박현규(고려콘테이너터미널 사장) △제3주제 : 해운의 주변여건 변천과 전망 - 박한웅(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정보실장), 허동식(한국선급협회 회장), 최석환(세광종합기술단 사장) △제4주제 : 외항해운육성론 - 주요한(한국선주협회 회장) / 손태현(아진해운 사장), 박효원(조양상선 전무) △제5주제 : 한국해운 개방정책(선박등록 개방을 건의함) - 서병기(한국해사문제연구소 동경지부장) / 송기철(고려대학교 교수) / 백용흠(대한해운공사 부사장)
이날 발표된 5개의 주제 가운데 다섯 번째 주제로 발표된 서병기 씨의 발표가 폭탄적인 파문을 일으켰는데, 그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의 해운경영 현실에서 자본, 시장, 선원, 기술 등 모든 면에서의 합리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떠한 부문에 능력이 있고, 어떠한 부문에 능력이 없는지를 가려서 능력이 있는 부문에 중점을 두어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박 소유위주의 해운에 대한 개념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일정한 조건 아래 외국자본에 대한 개방정책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끌어들여 한국에 등록시키고, 한국 선원을 승선시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선박이 누구의 것이든 한국의 선장과 선원이 타고, 또 한국인이 그 운항을 관리할 수 있고, 한국에 등록한 선박이라면 국적선으로 인정해서 해운수익을 확대해 나아가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머지않아 선원은 10만명이 될 것이고, 10년 후에는 10억달러의 순수한 외화수입을 가득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운항선복도 3,000만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차제에 과감하게 해운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서병기 씨의 ‘한국해운 개방정책’은 서론, 국제해운의 실태, 한국해운정책의 문제점, 한국해운 개방정책의 구상 및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토론을 맡았던 송기철 교수는 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발상이라고 하였고, 반대토론에 나섰던 백용흠 해운공사의 부사장은 스스로 소작농이 되고 싶어 하는 말도 안 되는 매국적 발상이라고 하였다. 서병기 씨의 논지는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서병기 씨의 이와 같은 주장이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고, 또 이 심포지엄이 서병기 씨의 제안과 지원으로 열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묻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병기 씨의 제안과 지원으로 개최된 심포지엄이라고 해서, 서병기 씨의 논지를 일방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개최한 심포지엄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이든 발표되고 논의되어, 거기에서 어떤 형태로이든 결론이 유도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여 내 소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병기 씨의 논지가 어느 정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그것이 우리 현실에 받아들여져 정책으로 수용되기에는 너무 앞선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는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졌던 기우가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은 씁쓰레한 일이었지만 달리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해운특강의 개최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연구소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노력은 앞에 서술한 심포지엄의 개최 전후에도 끊임이 없었다. 그 실행으로 해운과 관련된 특강을 개최하였고, 해운관련 전문 서적을 출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충실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매우 열악하였고, 또 내 능력도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먼저 연구소가 개최한 특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1972년 6월 5일과 7일에는 일본의 해운학자이며 해운업체의 경영인이기도 한 일본의 오카니와(岡廷博)박사를 연사로 모시고, 2회의 특강으로 각각 ‘해운경영과 해운정책’ 및 ‘해운산업구조의 변화’라는 주제로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과 부산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국제해운에서의 새로운 흐름을 우리 해운업계에 인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에는 일본 이스턴 쉬핑(Eastern Shipping)의 지원이 있었다. 1972년 8월 3일에는 한일 간 교수 세미나계획으로 일본 교수단의 일원으로 내한한 일본 관서대학의 가메이(龜井利明) 박사를 맞아,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박사의 주선으로 대학무역진흥회관 수출정보센터 회의실에서
‘해수유탁과 선주책임’에 대한 특강을 주최하였다. 1972년 12월 12일과 13일에 성균관대학교와 공동으로 제1회 제2회 나누어 성균관대학교 무역대학원 강당에서 특강을 개최하였다. 제1회의 특강에서는 주요한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국제수지와 해운’이라는 주제로, 제2회의 특강에서는 이준수 한국해양대학 학장이 ‘기술혁신과 해운’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는데, 이 모두는 무역 업무에서 필수적인 해운을 무역학과 학생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는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교수와 주요한 사장 및 이준수 학장의 헌신적인 협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특강의 개최는 한동안 없었다.


한참 뒤인 1978년 4월 27일과 28일에 걸쳐서 1978년 유엔해상문건운송조약(1978 Hamburg Rules)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의 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이균성 교수와 대한해운공사의 윤민현 보험과장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한국선주협회의 지원으로 1978년 3월 6일부터 31일까지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유엔무역법위원회(UNCITRAL) 주최의 함부르크규칙 채택회의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기에, 그들이 파악한 함부르크규칙의 정확한 내용과 그것이 앞으로 한국해운에 미칠 영향을 국내 해운업계에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함부르크회의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선주협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는 해운항만청이 권장한 결과였다.


해운항만청은 날로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해운 및 항만행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1976년 3월 13일 건설교통부장관 소속하에 설치되어 해운과 항만의 운용 및 건설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중앙행정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그 뒤 1978년 12월 해운항만청으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해운항만청이 교통부 외청으로 발족한 것은 상술하였듯 전문적인 식견이 요청되는 해운 및 항만 관련행정에 전문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해운항만청 자체는 물론 그 소속 공무원들 역시 대부분 전문적 식견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해운항만청 소속 공무원들은 함부르크규칙을 채택하기 위한 유엔무역법위원회(UNCITRAL) 회의가 열리는 시점에도 함부르크규칙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나머지 선주협회로 하여금 국내 전문가 2인을 선정하여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던 바, 이들이 파악한 내용을 해사문제연구소로 하여금 널리 알리도록 한 것이 이 세미나였다. 해사문제연구소는 서울 세미나에 이어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콘테이너 수출입절차와 함부르크규칙 해설 세미나’를 부산 동해투자금융빌딩에서 개최하였다.


이 부산 세미나에서는 서울 세미나의 경우와 달리 ‘콘테이너 수출입철차와 터미널의 운영’(이윤수, 고려해운 상무) ‘콘테이너 및 내장화물의 통관’(김동수, 부산세관 분석3과장) ‘부산항 콘테이너터미널 운영제도의 발전(최재수, 부산지방해운항만청 항무국장) 및 ’함부르크규칙과 운송인의 책임(윤민현)이라는 4개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함부르크규칙과 관련된 서울과 부산의 이 2개의 세미나는 해사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유료로 개최한 세미나였다. 서울 및 부산 세미나 모두에 수많은 실무자가 참여하여 나로서는 매우 기뻐했지만, 해사문제연구소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소개해두어야 할 사람이 최재수씨이다. 최재수 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으로 교통부에 근무하기 시작한 공무원이었지만 나와 접촉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업무의 일환으로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하였는데, 당시의 사정은 4.6배판 80페이지를 채울 필자를 구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현안에 대하여 좌담회를 통하여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좌담회의에는 으레 당시 해운국장인 정영훈 씨가 참석하였는데, 정영훈 씨가 참석하는 경우 항상 최재수 씨와 함께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한 수행원인 줄 알았는데 외항과장이라는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은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담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항상 정영훈 씨의 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행정가로서 뚜렷한 식견과 과감한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해운에 대한 그의 열정이었다. 말하자면 해운에 대한 전문가가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고자, 자신이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 배우는 열정이었다. 후술되겠지만 이 사람이 해사문제연구소에 기여한 바는 참으로 컸다.


1978년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우리나라 해운업계 최초로 해운기업 최고경영자를 충청남도 도고호텔로 초청하여 ‘해운기업 최고경영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환경문제의 당면 과제’(노융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 ‘세계 해운구조의 최근동향과 한국경제의 과제’(고승제, 한국과학심의회 상임심의위원) ‘한국해운의 현황과 전망’(김창갑, 해운항만청 해운국장) 및 ‘새 시대의 경영인상’(안승욱, 숭전대학교 교수) 등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이 세미나는 최고경영인이 알아야 할 새로운 흐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해운업계 최고경영자 간의 친목과 의사소통이었는바, 소기의 목적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79년 6월 15일에 제3회 해운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해운정보센터와의 공동 주최로 해운 및 항만 관련 분야의 최고 경영자를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이날 발표된 주제와 강사는 다음과 같았다.


 △국제해운의 동향과 한국경제 : 조동필, 고려대학교 교수 △한국 해운업의 역사적 고찰 : 조기준, 고려대학교 교수 △한국 해운경제의 현황과 전망 : 강창성, 해운항만청장
이 행사는 당대의 석학인 고려대학교의 조동필 교수와 조기준 교수, 그리고 해운항만청 강창성 초대 청장을 강사로 초청하였다는 것 외에, 해운 및 항만관계 업체의 최고경영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관심사를 서로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 역시 연구소 본연의 업무와 다소 거리가 먼 것들이었고,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조달과도 거의 관련이 없는 업무였다.


연구용역의 수행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연구업무를 수행한 것은 1974년 10월의 일이다. 즉 한국선주협회로부터 ‘해상법과 국제조약’에 대한 연구용역을 수탁받아 수행하였다. 위탁기관은 한국선주협회였지만, 이 같은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선주협회로 하여금 이 연구를 위탁하도록 권장한 것은 교통부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국제해사기구를 중심으로 각종 국제협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상법과 관련되는 제반문제가 시급히 대응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교통부는 한국선주협회로 하여금 용역을 위탁하도록 하였다. 이를 적극 추진한 사람이 교통부 해운국 외항과장으로 있던 최재수 씨였다. 이러한 경위로 연구를 수탁한 해사문제연구소는 서돈각(전 동국대학교 총장), 손주찬(중앙대학교 법과대학장), 최재수(해운항만청 해운국 외항과장) 및 김선모(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등 제씨로 자문위원을 구성하고, 나와 배병태(한국해양대학 교수) 및 이균성(인하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등으로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연구에 착수하였다.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해상운송인의 책임과 국제조약’에 관한 부분은 이균성 교수가, ‘선박채권자의 채권담보제도’에 관한 부분은 배병태 박사가 각각 연구한 결과를 기초로 이균성 교수가 집필하였다. 이 연구는 1974년 12월 완료되어 보고되었는데, 제1부(해상운송인의 책임과 국제조약) 및 제2부(선박채권자의 다보제도)로 된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연구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위탁 계약에 의해 연구소가 수행한 연구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운 배병태 교수와 이균성 교수라는 인재를 발굴해내어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큰 뜻을 지니고 해사문제연구소를 주도하여 설립하였다고 해도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수행할 수 없는 연구였다.


1975년 12월에는 인천지방해운국으로부터 ‘인천항 운영효율화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위탁받아 수행하였다. 이 연구의 수탁은 뜻밖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동양 최대의 갑거 및 전면 도크화 공사가 1974년 5월 10일에 완공된 데에 따른 후속조치로, 인천항만의 운영 효율화를 모색하기 위해 당시 민영환 인천지방해운국장이 위탁한 것이었다. 연구소로서는 반갑기 한이 없는 연구용역의 수탁이었지만, 항만연구에 관한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태여서 난감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사문제연구소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항만운영에 관한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교수와 의논하였는바, 한동호 교수의 알선으로 한동호 교수를 포함하여 고려대학교 경제연구소 조덕구 총간사, 원광대학교 사회개발연구소 조갑원 소장 및 해사문제연구소의 김희석 연구위원 등으로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집필은 해사문제연구소 황근식 상무이사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재일 상임연구원이 담당하였다.


이후 한동안 뜸했던 연구용역의 수탁이 1978년에 이르러서는 폭주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가 ‘공동배선문제를 포함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연안해상수송실태조사연구’였는바 한국해운조합으로부터 수주하였다. 해상수송은 수송의 대량성과 운임의 저렴성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연안수송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내부적으로 전근대적인 경영방법, 외부적으로는 과당경쟁과 해운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못한 데에 따른 적기 배선의 차질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해사문제연구소는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였는데, 연구용역비가 지나치게 소규모여서 외부의 전문 연구 인력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대안으로 나는 연구소 월간 해양한국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이원철 씨에게 연구와 집필 모두를 위임하였는데, 해운에 대한 별다른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이원철 씨가 스스로 공부해가며 연구를 완수하였다. 나는 이로써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7월과 9월에 2개의 연구용역을 수탁 받아 수행하였다. 그 하나는 ‘한일간 콘테이너선 운항의 풀링 시스템 연구’였는데, 당시 이 연구를 위탁한 단체는 아직 실체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한일 간에서 컨테이너 피더선을 운항하는 업체와 그들이 투입한 피더선이 갑자기 늘어난 상태여서, 눈앞에 닥친 과당경쟁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일 간 컨테이너 수송협의회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주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업체는 고려해운, 남성해운, 대진해운, 동영해운, 세방해운, 조양해운, 코리아라인, 현대엔터프라이즈, 협성선박 및 흥아해운 10개 업체였고, 이들이 투입한 선박은 30척에 이르러 있었다.
이처럼 투입된 선박만으로도 과당경쟁이 명약관화한 상태였고, 1981년 말에는 부산항 제2컨테이너터미널의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한일 간 컨테이너 피더 선사들이 대국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건설적인 공동행위를 시급히 모색하여야 할 시기였는바, 그에 필수적인 풀링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이 연구를 위탁한 것이었다. 이 연구를 발주한 협의회의 업체들 중에 이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던 것으로 보였지만,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중립성의 문제로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사문제연구소도 이에 대한 전문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보험연수원의 김동수 간사와 오주해운의 안철도 부장을 연구 및 집필위원으로 선임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당시의 관행은 전문지식을 가졌든 아니든 높은 지위의 인사를 연구위원으로 선정하는 것이었지만, 해운계 내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기선사간의 풀링협정(pooling agreement)에 관한 경험을 지닌 사람은 물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도 찾기 어려웠다.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도 해운동맹의 운영방안 중 한 가지로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동수 씨는 5.16 직후 시행된 보험회사의 통폐합 방안을 주도한 사람이었고, 안철도 씨는 해운대리점 업계의 실무책임자에 불과하였지만, 그 즈음 해운동맹과 관련된 논문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어서 말 그대로 적임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을 연구자로 선택하였다. 김동수 씨를 천거한 사람은 한동호 교수였고, 안철도 씨를 천거한 사람은 연구소의 이원철 씨였다. 이 연구의 결과, 특히 선사별로 계산한 세어링(sharing)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뒷날 한일간콘테이너수송협의회의 결성과 그 운영에 매우 중요한 뼈대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관세협회가 발주한 ‘콘테이너화물의 원활한 유통에 관한 연구’로 1979년 12월에 완료하여 보고되었다. 이 연구는 당시 고려콘테이너터미날주식회사의 사장 박현규 씨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한국해사문제연구소로서 이 연구의 수주는 처음으로 해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단체로부터 수주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각별한 신경을 경주하였는바, 나 스스로 연구책임자가 되어, 민성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황근식(연구소 전무이사), 이윤수(고려해운 상무이사), 이원철(연구소 연구위원) 5인을 연구위원으로 하는 외에, 강영구(한국선박대리점협회 상무이사), 강이수(숭전대학교 교수), 박현규(고려콘테이너터미널 사장) 및 한동호(성균관대학교 교수) 4인으로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1966년부터 세계 정기선업계에 컨테이너화가 일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서, 우리나라도 1974년에 인천항, 그리고 1978년에 부산항에 컨테이너 터미널을 개발하여 개장하였지만, 사전에 이에 대한 장기계획의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여, 컨테이너 운송을 위한 시설, 제도 및 운영 면에서 하역, 보관, 통관, 감시 및 내륙운송 등의 유관시설과의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협의 및 조정과 면밀한 사전 검토가 부족한 나머지, 컨테이너의 원활한 통관에 있어서 많은 애로와 문제점에 봉착하고 있는 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이처럼 1974년 이후 1979년에 이르기까지 제법 많은 연구용역을 수주하여 완료함으로써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연구소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나로서는 어느 정도 만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연구의 수주와 완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의 재정은 아직도 열악하여 전문 인력을 스스로 갖출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물론 연구소 내부의 황근식 상무나 이원철 연구위원이 몇몇 연구에 참여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조치였다.


연구소 운영의 어려움
이상에서 서술하였듯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연구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하였고, 학술발표회 및 세미나를 활발히 개최하고자 노력하였고, 연구용역도 꽤 많이 수탁하여 수행하였으나 그런 활동이 연구소의 재정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974년 가을에 천경해운이 을지로 2가 163-3에 소재하는 보승빌딩을 매입하여 본사를 이전함에 따라 천경해운이 할애하여 준 40평 정도의 사무실을 무료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사무실 집기까지 제공받는 처지를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꿈꾸어 온 연구 활동은 아쉬운 대로 수행되어 유지되는 형편이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상의 어려움에서는 벗어나지도 못하였거니와 가까운 장래에 벗어날 비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상만 가지고 있었을 뿐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만든 연구소를 해체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김윤석 사장을 조용히 만나 연구소를 인수하여 운영하여 줄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자 김윤석 사장은 펄쩍 뛰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운영이 정 어려우시다면 범양전용선이나 코리아라인과 같은 큰 회사에 말씀을 드리세요. 저는 그런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벅찬 일이고 소질도 없습니다. 설령 저에게 소질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맡고 싶다 하더라도, 기왕에 제가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소문이 난 터이므로 제가 덜렁 운영을 맡고 나선다면, 결국은 저에게 다른 야심이 있어서 도와드린 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뒤 이 사람 저 사람 유력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천경해운 김윤석 사장에게 했던 제의와 같은 제의를 하거나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돈이 벌리지 않는 연구 사업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의 설립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원래 없는 법이지만,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을 조직하기만 하면 해외에 취업하고 있는 우리 선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설혹 처음의 뜻과 같이 이루어지 않는다 해도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 큰 부담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은 부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국해기사협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같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이 잘 하고 있는 사업을 뺏어 오는 꼴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납세조합의 설립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 납세조합이 또 생긴다면 해기사협회에서 영위하고 있는 납세조합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겠죠. 그러나 서울지역에 주거를 둔 선원가족에 대해서는 서울에 납세조합이 있는 것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한국해기사협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국해사문제연구소도 영리기관은 아니지 않습니까? 해외취업선원과 그 가족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1975년 1월 6일에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산하기관으로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제정하고, 1월 16일자로 서울지방국세청장의 설립인가를 취득하였다. 이로써 해외취업선원이 취득하는 을종근로소득세의 납세의무를 대행하게 되어 해외취업선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납세의무의 대행에 따르는 정부가 지급하는 교부금 수입은 조합 자체의 운영이나 조합원을 위해서만 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조합원들의 ‘월간 해양한국’의 구독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연구소의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이 설립된 첫 해인 1975년도의 연 납세인원은 9,622명이었고, 연간 납세액은 5억 1,740만원이었으며, 조합에 가입함으로써 납세조합 공제 혜택을 받은 금액(산출세액의 20%)은 1억 1,966만원에 이르렀다. 1976년의 연 납세인원은 7,971명으로 1975년도에 비하여 17% 정도가 감소하였는데, 이는 해외취업선원의 급여에 대하여 30만원 이상에 상당하는 금액을 비과세로 하였던 것을 1976년 1월부터 50만원으로 인상하여, 관세대상 인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간 납세액은 7억 316만원으로 늘었는데, 이는 급여가 인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간 납세인원이나 납세액은 해마다 세법의 개정이나 선원의 급여에 따라 들쑥날쑥하였지만, 이 같은 납세조합의 수입에 의한 지원(월간 해양한국의 구독료)으로 해사문제연구소의 재정은 한결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연간 결산이 끝난 어느 날 천경의 김윤석 사장을 찾아 큰 소리로 자랑하였다.
“김 사장, 김 사장 덕분에 해사문제연구소도 부자가 될 것 같아요” 김 사장은 무슨 말인가 하여 나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해사문제연구소의 결산에서 처음으로 700만 원의 흑자를 냈어요” “그래요? 축하합니다. 700만원이라는 돈이 큰돈은 아닙니다만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나는 모처럼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한국해운학회 설립의 주도
1981년 초 여름 어느 날 성균관대학교의 한동호 박사와 박은회(朴恩會) 박사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내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두 분은 학교에서는 물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자주 만나 뵙던 분들이어서 그 분들의 방문에 대하여 나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반갑게 맞았다.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에 한동호 박사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전에도 몇 번인가 말씀을 드린 일이 있죠” “무슨 말씀인데요?” “더 늦추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렇게 박은회 박사를 대동하고 찾아 왔습니다” “글쎄 무슨 얘기를 하셨더라....” “학회........... 해운학회 말입니다” “아 그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 자신 학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또 학회 같은 걸 만들어 운영할 경험이나 능력이 없어요. 한 박사님께서 주도하신다면 제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기는 하죠” “허 또 그 말씀...... 학자로서는 제가 윤 박사님보다 먼저인지 모르지만, 연세로 보아 윤 박사님께서 대 선배이시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 윤 박사님밖에 안 계십니다. 만약 제가 해운학회의 창립을 주도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사람들은 웃어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웃음꺼리가 되는 건 싫습니다” “왜 이러시죠? 해운이라고 해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좀 더 아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한 박사가 저보다 못한 점이 뭐 있습니까? 그보다도 학회를 운영하자면 학회의 운영을 뒷받침할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저에겐 그게 없어요” “재정적인 면에서 능력이 없기는 윤 박사님이나 한 박사님이나 마찬가지죠. 그 문제는 우선 학회를 설립한 뒤에 의논하여 진로를 찾아보기로 하고, 다른 무엇도 아닌 해운학회라면 아무래도 윤 박사님께서 앞장을 서시는 것이 순리입니다. 한 박사님이나 제가 윤 박사님께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윤 박사님이 엄연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박사님께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대한민국에 윤 박사님이 안 계셨더라면 저라도 앞장을 섰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박은회 박사가 이렇게 끼어드는 바람에 나는 해운학회의 설립에 대하여 두 사람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과 의논하여 한동호, 박은회, 서병기(동지상선 사장), 최재수(한국선주협회 전무), 배병태(한바다해운 대표), 이균성(외국어대학교 교수), 이원철(해사문제연구소 이사), 이준수(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민성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박현규(고려해운 사장) 및 황근식(해사문제연구소 전무) 등 제씨를 발기인으로, 1981년 8월 15일 한국해사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82년 8월 27일 한국선주협회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정관의 제정 및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에는 한동호 박사의 추대발언으로 내가 선임되었고, 부회장에 한동호, 박현규, 서병기, 신민교(한국해양대학 학장), 그리고 이사에 김광득, 김동균 등 36인, 그리고 감사에 이균성 교수와 최재수 전무이사를 선임하였다. 이 창립총회에서 제1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한국해운학회는 정식으로 발족되었지만 역시 재정상의 문제로 학회지의 발간이 여의치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업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하고, 업계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법인화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업체가 학회 등을 지원하는 경우, 학회가 법인이어야 비과세로 될 뿐 아니라 학회를 지원하는 업체로서도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법인화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실무적인 문제는 연구소의 이사를 겸한 이원철 씨가 사무국장으로서 담당하였는데, 학회 활동을 하는데 학회의 법인화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업무를 담당하는 해운항만청 해운국 진흥과는 법인승인 서류조차 접수해 주지 않았다. 이 문제는 마침 내가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의 위원장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즉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 위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학회의 법인 설립신청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1984년 5월 23일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인가(해운항만청 허가번호 제217호)를 받고 7월 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법인설립 등기(등기번호 2060)를 마쳤다.


그러나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학회지를 발간하기 위해서는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 발간 등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등록이란 절차상 모든 여건을 갖추어 제출하여 법정 공부(公簿)에 기재하는 것으로 완료되는 행정행위이지만 당시의 문화공보부가 운영한 간행물 등록제도는 일종의 인가행위로 운영되었는데, 당시 문화공보부는 반정부적 간행물 및 이적 간행물의 출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신규 간행물의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물론 신규 간행물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반정부적이 아니고 이적간행물이 아니면 등록을 받아주어야 했지만, 실무자들은 골치 아프고 까다로운 문제에 걸려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해운학회지의 등록은 (1984년 7월 13일자)로 접수되었다.
이로써 학회지를 창간하기 위한 준비는 모두 갖추었지만,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학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는데, 해운학회는 가입회원 자체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처럼 설립한 학회가 더 이상 휴면상태에 있어서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1984년 10월 20일 한국해운학회지의 창간을 단행하였다.


이 창간호에는 해운산업의 합리화에서 얻은 교훈과 한국해운의 진로(민성규), 선원재해보상에 관한 선주책임과 보험(박은회), 일본 외항선원의 임금제도에 관한 고찰(서병기), 미국의 화물우선적취정책에 관한 일 고찰(이원철), 편의치적제도의 배제론과 한국해운의 대응책(한동호), 해운생산성에 관한 제 문제(박명섭),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군산항의 개발을 위한 제문제(김덕수), 콘테이너운송 진전에 따른 동맹운영 개선방향에 관한 일 고찰(구종순), 국제해사영어의 표준화에 관한 고찰(이재우), 무역학과를 중심으로 한 상경계 대학에서의 해운교육에 관한 제안(최종수), 신 협회 적하보험약관상의 면책사유에 관한 일 고찰(서경무) 및 우리나라 고대무역에 관한 고찰(강용수) 12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한국해운학회의 창설은 내가 주도하였다고 하기보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동호 교수와 박은회 교수의 강력한 종용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재단법인의 설립인가를 받아내고, 한국해운학회지를 발간하기 위한 문화공보부의 등록을 내 이름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내가 느끼는 자부심은 매우 크다. 비록 밝은 미래보다는 헤쳐 나아가야 할 암담한 현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한국해운학회 창설과 한국해운학회지의 창간이 우리나라 해운의 밝은 앞날을 약속해 주리라는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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