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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571호] 2021년 04월 01일 (목) 14:55:37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showload@chol.com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3월 봄날, 풀과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꽃필 채비를 하고 둥지를 튼 산새들은 먹이를 찾느라 분주하다. 등교금지로 온종일 집에 갇혔던 초등학생들이 옹기종기 학교에 가는 모습이 정겹고도 안쓰럽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음에도 확진자는 줄지 않아 3월 콤파스가 또 연기됐다. 빠른 접종으로 집단면역이 형성되어 일상이 회복되고 콤파스도 열려 회원들을 만나고 싶다.


3월에 읽은 책은 피터 골든의 ‘중앙아시아사(Central Asia in World History)’다. 태고에 우리 민족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평소 한민족의 발원지이자 이동경로인 중앙아시아에 대해 궁금했는데, 국명과 지명마저 생소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큰 도움이 됐다. 럿거스대학 역사학 교수인 피터 골든은 중앙아시아 역사를 가장 포괄적으로 연구한 석학이다. 그는 투르크계 언어들과 페르시아어,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수많은 언어로 된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드문 학자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하자르 연구’ ‘투르크 민족사 개론’ ‘중세 유라시아의 유목민과 정주사회’ ‘러시아 초원의 유목민들과 그 이웃들’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는 오래전에 시작됐으며,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는 50만명 규모의 한인공동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한인공동체는 고학력 인구를 배출하여 중앙아시아 국가의 경제,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도 중앙아시아에서 폭넓게 활동한다고 전했다. 그는 ‘새 옥스퍼드 세계사’ 편찬계획에 따라 3,000년이 넘는 중앙아시아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하기 위해 헝가리대평원에서 만주와 한반도 변경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중앙유라시아 지역을 탐사했다. 이 지역의 민족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쳤으며, 중앙아시아는 여러 문명, 종교, 그리고 근대세계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집단이 만나는 공간으로 현대의 글로벌 현상이 중앙아시아 제국에서 기원했다고 해설했다. 이 책을 번역한 토론토대 이주엽 교수는 중앙아시아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세계사의 완성’을 위해서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으로는 만주에서 서로는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중앙아시아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과 서양의 교역과 인적 문화적 교류의 중간자 및 산파 역할을 해왔다. 중앙아시아는 근대 이전까지 중국, 인도, 유럽에 군사 정치 문화 산업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친 흉노, 돌궐, 몽골제국 등의 유목제국들을 배출하여, 역사가들은 이곳을 ‘역사의 중심축(Pivot of History)’이라 부른다. 중앙아시아 역사를 모르면 세계사 지식에는 큰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피터 골든의 ‘중앙아시아사’는 중앙아시아 전문가가 쓴 학문적으로 가장 엄밀하고 완성도가 높은 최신 중앙아시아 통사다. 이 책은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의 역사와 유산을 치우침 없이 다루었다. 몽골제국이나 돌궐제국 같은 유목제국의 역사도 담담하게 과장 없이 서술하였고, 유럽중심적 시각, 구소련 학계와 범투르크적 시각, 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이는 중앙아시아사의 객관적 서술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민족들의 교차로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몽골 초원과 만주에서 볼가강에 이르는 내륙유라시아 지역을 말한다. 그곳 중앙아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지역 또는 민족을 이룬 적이 없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씨족, 부족, 신분, 지역, 종교에 기반을 두었고, 이것들은 서로 중첩되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정치적 경계선은 큰 의미가 없다. 유목국가는 영토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는 샤머니즘, 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같은 종교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적, 언어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선은 유동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양식을 포괄했다. 볼가강과 서시베리아 사이의 삼림 스텝지대에는 역사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무슬림 투르크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인은 헝가리,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동까지 진출했고, 따라서 정치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는 이들 지역까지 연결되었다. 중앙아시아 역사를 보면,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오랜 기간 융합과정을 거쳐 여러 종족과 언어집단이 형성되었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 또한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계주경기처럼 또 다른 집단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집단명과 공통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다양한 민족의 혼합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었는데, 민족의 형성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유목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
약 4만년전 빙하기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가 중앙아시아에 진출했다. 인류의 이동 경로는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중동을 통하는 루트였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로 향하는 루트였으며,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루트도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서쪽으로 엘람과 수메르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와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유목부족은 종종 연합을 결성했는데, 보통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족의 명칭을 채택하였다. 부족연합이 해체될 경우 부족들은 새로 패권을 차지한 부족의 이름 아래 약간 변화된 구성으로 재집결했다. 상업 또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주었다. 중세 전기 중앙아시아는 고대 세계의 대륙횡단 교역망에 편입되어 실크로드의 중심적 연결고리가 되었다.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도시들을 잇는 교역로 네트워크로, 이를 통해 중국의 물품 특히 비단이 서방의 페르시아제국 이란으로 전해졌다. 이란은 상당한 이윤을 거두며 이 물품들을 지중해 세계에 팔았다. 전근대 세계의 기술강국 중국은 중앙아시아와 서방지역으로부터 이국적인 물품과 식료품을 수입했다. 이들 교역로엔 가파른 텐산산맥과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이 가로막혀있는데, 특히 타클라마칸은 도달하는 것도 힘들지만 빠져나오기는 더욱 어렵다. 타클라마칸은 ‘한번 들어가면 떠날 수 없다’는 뜻으로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섭씨 78도까지 치솟는 무덥고 험준한 사막을 종교, 알파벳, 기술과 수많은 문화공예품, 오락물, 물품, 도구들을 가지고 동서 스텝 교역로를 횡단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큰 정치단위로 만든 것은 유목인이었다. 상업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상인, 관료, 종교인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투르크-몽골 유목민들은 영속성 있는 도시를 거의 건설하지 않았고, 중앙아시아의 대도시들은 주로 이란계 민족이 건설했다. 옛 투르크어에서 도시를 뜻하는 단어 켄드는 이란어의 차용어이며, 도시의 다른 이름 발릭은 몽골어 발가순에서 유래했다. 유목민이 건설한 도시 오르두는 흉노시대부터 사용된 용어로 원래 ‘지배자의 야영지’를 의미했으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중엔 수도를 지칭하게 되었다. 또한 도회 중심부를 페르시아어 샤흐르에서 파생된 샤흐리스탄이라 했고, 교외 지역은 라바드라 했으며, 도시 주변의 농경 정착지는 루스탁이라 불렀다. 이렇듯 도시 관련 용어들도 여러 민족의 혼합어였다.

 

초기의 유목민-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500년까지 인도-유럽어 공동체가 해체된 후 여기에 속했던 민족들이 유라시아 전역과 그 인접 지역으로 이주했다. 신장은 중국인과 서양인 사이의 접촉이 이루어진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지역이다. 또 다른 집단인 인도-이란(아리아)인들도 동쪽으로 이주하여 시베리아, 몽골, 신장, 북파키스탄에 도달했다. 부족명 아리아는 장(長), 자유인, 외인을 환대하는 집주인을 의미하는 인도-유럽어에서 파생됐다. 페르시아인이 사카, 그리스인이 스키타이라고 불렀던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유목민은 중동과 중국에서 발전하던 문명 사이의 필수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통치하의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연결망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 카리즈라 불리는 지하 관개수로 시스템은 오늘날 신장의 농업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중앙아시아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란 정복과 중앙아시아 원정 결과 화라즘, 소그디아, 박트리아가 그리스-마케토니아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헬레니즘과 이란 및 인도의 예술전통을 농익게 융합했던 그리스-박트리아 문화는 단편적인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일부만 파악되고 있다.

 

인도 승려들이 전파한 불교는 이곳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정치적으로 그리스-박트리아는 북인도, 페르가나와 신장의 일부 지역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중국이 서방으로 진출하고, 비단을 외교 상업적 수단으로 사용하여 중앙아시아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실크로드는 안정적 형태를 갖추었다.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전역에 물품을 유통하는 육상교역 네트워크로 기능했다. 고대로부터 복잡한 루트와 불규칙적인 교환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에 전달되었던 중국의 비단이 정기적으로 지중해 세계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서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치열한 투쟁은 기원전 60년까지 지속했다. 중국이 흉노를 견제코자 내분을 조장하여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었다. 북흉노는 중국의 압박을 받아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서진을 계속하여 시르다리야강 북쪽 강거까지 옮겨갔다. 그러나 중국의 집요한 추격으로 패퇴하여 남은 흉노 부족은 훈이라는 새로운 부족연합을 형성하여 유럽 쪽으로 서진했다. 한편, 중국 변경에 남아 있던 남흉노는 220년 한이 멸망한 후 북중국 지역에 들어선 선비 계열과 티베트계 국가들에 흡수되었다. 당시 서부에는 유목민이 세운 쿠샨제국과 훈이 부상했다. 전성기의 쿠샨제국은 박트리아, 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쿠샨제국의 예술은 그리스-로마 미술양식의 특징인 인간 형상의 사실적 표현, 곡선미가 있고 유연한 인도 양식, 더욱 정형화한 이란 토착의 전통을 혼합했다. 그들은 지중해 세계의 장인, 예술가들과 함께 간다라 지역까지 와서 활동했다.

 

이런 연유로 토착 인도와 헬레니즘이 융합된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크스탄까지 전파되었다. 쿠샨제국은 대상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물품을 반출했고, 인도의 항구들을 거쳐 바다를 통해서도 수출했다. 그리고 이집트, 중국, 인도로부터 물품을 수입했다. 주요 교역품인 비단, 모피, 보석 거래에서 쿠샨은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훈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부족들의 이동으로 압박을 받아 375년에 볼가강을 건너가 알란과 그 이웃인 고트 부족연합을 격파했다. 이러한 혼란은 로마제국 변경에 거주하던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제국의 방어체제를 무너뜨리고 제국 영내로 이주하는 민족대이동을 촉발했다. 그러나 453년 훈의 왕 아틸라가 급사하자 훈 연합은 급속히 붕괴되어 다시 초원지역으로 퇴각하였고, 그후 로마제국의 용병집단으로 간혹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렇듯 흉노의 멸망은 유목민들의 서방 이동을 처음으로 촉발했다.

 

하늘의 카간들-돌궐제국과 그 계승국가들
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북중국의 타브가츠, 몽골 초원의 아바르, 쿠샨 땅에 훈의 후예가 세운 헤프탈이다. 북위라는 중국식 왕조명을 채택한 타브가츠는 황하 이북의 중국, 신장, 몽골 초원의 일부를 지배하였고, 수도 평성은 몽골 초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력확산을 둘러싼 북위와 아바르 간의 전쟁은 유목민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이동은 이란어 사용지역이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460년경 흑해 초원까지 도달했다. 이렇듯 북위의 분열과 정치적 혼란은 투르크계인 돌궐제국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궐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국가였다. 이란의 사산왕조와 우즈벡의 소그드인 상인들은 중앙아시아와 지중해 세계를 잇는 실크로드 교역에서 주된 중간자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존재한 소그드인의 교역거점은 내몽골 지역과 중국까지 이어졌다. 돌궐인은 만주에서 흑해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첫 대륙횡단 제국을 건설했고, 물품과 사상의 이동을 촉진하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했다. 돌궐제국이 당시 외교와 국제통화 기능을 한 비단의 거래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소그드인과의 밀접한 협력관계 덕분이었다.

 

이는 돌궐과 사산왕조의 동맹 관계에는 악역향을 미쳤다. 돌궐제국은 비잔틴제국에 비단뿐 아니라 철까지도 제공하며 반이란 동맹을 제안했다. 그후 돌궐제국은 742년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하였고, 744년 위구르인이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을 세웠다. 위구르인은 현지의 동이란계와 토하라계 주민들과 섞였고 결국은 토착민들을 투르크화시켰다. 위구르인은 소그드인처럼 실크로드 상인으로서 화려한 상업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마니교, 불교, 그리스도교를 모두 수용하였고, 동부 내륙아시아에서 소그드인을 대신하여 문화전파의 주체가 되었다. 소그드인이 자신의 언어를 적기 위해 도입한 다양한 아랍-시리아 문자를 사용하여 위구르어를 기록했다. 훗날 몽골인은 위구르인의 문자를 도입하여 지금까지 내몽골인은 이를 사용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위구르인을 ‘투르크 집단 내의 아랍인’이라고 불렀는데, 위구르인의 역할 변화를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위구르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은 유목과 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들은 유목제국의 전통과 달리 추가적인 정복활동을 벌이지 않다가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관계를 이어갔다. 그후 권력의 공백 상태에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은 몽골어족에 속한 거란이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 통치에 집중했다. 거란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 유목민이 투르크계 유목민을 수적으로 압도하는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다. 이렇게 ‘하늘이 내린 카간들’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돌궐제국은 흉노를 거슬러 올라가는 통치 모델을 유산으로 남겼으며, 계속 등장하는 크고 작은 유목민 계승국가들의 전형이 되었다.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
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비옥한 땅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인 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 서쪽의 화라즘이 그들이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거점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지식을 발휘했다. 그들은 대상으로서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며 교역활동을 했고, 이웃 소도시들과 물자거래도 했다. 운송 물품들은 다양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최근에 발견된 서한에 의하면, 소그드인은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 소그디아 동쪽에 위치한 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지역에 또 다른 오아시스 도시국가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유목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상태 또는 자치상태를 누려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제국의 정복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과 제국의 심장부에서 깊어진 내부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중앙아시아에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 이슬람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마침내 소그드인 도시국가 사이에 발생한 권력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 당과 그의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의 동맹국이 이슬람제국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이슬람이 승리했다. 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안녹산의 난으로 당이 중앙아시아에서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제 중동에서 아랍인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식민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중동의 셈계 언어사용 지역에서 아랍어는 현지의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가 사용하던 같은 셈계 언어인 아랍어를 대체했다. 그러나 이란은 정복지 중에 가장 먼저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되었지만, 자신의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고유문화를 상실하지 않았다. 한편, 상업 마인드를 가진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초원 위에 뜬 초승달-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
몽골 초원에서 돌궐제국이 멸망하고 위구르제국이 부상함에 따라 이동이 촉진됐다. 그 결과 투르크계 부족들은 이란-이슬람권 트란스옥시아나의 국경지대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흑해 초원까지 도달했다. 이 부족들은 이슬람제국 및 비잔티움제국과 직접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근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들로 발전하였다. 이슬람교는 정복이나 교역 또는 이슬람 신비주의자 수피를 통해 페르시아어 사용권 세계로부터 투르크인에게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소수 시아파와 다수 수니파로 나누어져 있다.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이며 그의 유일한 손자들의 아버지인 알리의 후손만이 칼리프가 돼야 한다고 믿었고, 수니파는 칼리프 지위가 반드시 알리 가문에 국한되기보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인 쿠라이시의 덕망있는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동서 투르키스탄 지역을 지배한 카라한왕조 시대에는 많은 수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의 농경지대로 이주했다. 그 결과 토착 주민들도 점차 투르크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투르크어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의 공통어가 되었다. 투르크어의 확산은 이슬람의 전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인류학자들은 처음에는 민족의 변화가 아닌 언어의 변화 현상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전 시기의 주민들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예전에 사용하던 언어들 대신에 투르크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중대한 민족언어학적 및 인구학적 변화가 발생하며 중동지역은 새롭게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 터키민족이 탄생했다. 투르크인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와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었다.

 

몽골 회오리바람
13세기 초 중앙아시아에는 쇠락해가는 카라한왕조가 있었다. 당시 카라한왕조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명목상 종주국인 카라 키타이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카라 키타이는 거란인 요가 여진이 세운 금에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거란 왕족인 야율대석의 통솔하에 중앙아시아에 세운 나라였다. 카라 키타이의 통치는 종교적 관용성, 느슨한 통치방식, 내륙아시아와 중국전통의 계승 덕분에 무슬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카라 키타이는 한때 번영했으나 13세기 초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소멸했다. 북중국과 만주지역을 지배한 금나라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족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자 그들을 계속 감시하고 분열시키고자 내분을 조장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압도했다.


몽골은 12세기 후반에 몽골과 몽골 인접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연합 중의 하나였다. 대장장이라는 뜻의 테무진은 1160년대 중반에 이러한 분열된 세계에서 태어났다. 징기스칸으로 성장한 테무진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가 군 지휘관이자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하자 패기에 찬 젊은이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몽골은 이제 정치적 명칭이 되어 칭기스칸이 정복한 몽골 초원의 다양한 민족에게 붙여졌다.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서는 이들을 타타르인이라 불렀다. 현대의 타타르인은 대부분 투르크계 민족이지만 과거에는 몽골제국에 속했다. 유목민 전사들은 계속 보상과 혜택을 주지 못하는 지도자 곁에는 오래 남아있지 않았기에, 유목세계에서 나라를 세운 지도자는 부하를 계속 휘하에 두기 위해 새로운 군사적 성공과 전리품을 제공해야 했다. 칭기스칸은 정복계획을 수립했고, 계속 승리했다. 칭기스칸은 정착생활을 하던 위구르인을 관리로 등용하여 유목세계와 정주세계의 매개자로 활용했다. 세기적 정복자 칭기스칸은 탕구트 원정 도중 병사했다. 칭기스칸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주치는 그보다 수개월 전에 사망했고, 칭기스칸은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마음이 기울었으나 둘째 차가다이 대신 온화한 성격의 셋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원칙적으로 대칸은 우두머리일 뿐으로, 각 형제는 민족, 국가 백성을 의미하는 울루스와 군대를 물려받았다. 울루스들은 몽골제국 내에서 작은 국가들을 이루었다.

 

주치의 아들 바투와 오르다는 킵착초원과 서시베리아와 그 인접지역을 물려받았고,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위치한 오늘날 아스트라한에 자신의 수도 사라이를 건설했다. 차가다이는 카라 키타이 영토와 동서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했고, 우구데이는 북신장과 남시베리아 지방을 물려받았으며 나중에 몽골 초원 중앙부를 차지하고 그곳에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막내 툴루이는 화로의 왕자라는 전통에 따라 선조의 땅과 부친의 개인 소유물,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물려받았다. 그후 칭기스 일족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우구데이 가문에 승리한 툴루이 가문은 뭉케 통치기에 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하였고, 뭉케에 이어 대칸이 된 그의 동생 쿠빌라이가 수도인 대도 칸 발릭을 건설하고 중국식 왕조명인 원을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몽골제국은 정주세계를 정복한 가장 큰 유목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평화적이고 안전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고, 세계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250~1350년 사이에 국제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를 태동시킨 근대세계의 선구자였다.

 

후기 칭기스왕조들-티무르왕조의 르네상스
분열된 칭기스 세계에서 소수의 특권층을 이루던 몽골인은 점차 자신의 속민에게 동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투르크어로 쇠를 뜻하는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티무르의 야망은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칭기스칸의 통일제국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마지막 유목민 정복자 티무르는 정주사회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티무르가 유목민 전통과 칭기스왕조의 카리스마를 중시했지만, 그는 변방 이슬람 세계의 산물이자 이슬람교도였다. 이슬람의 옹호자로 자처했으나 그는 이슬람교도를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 티무르가 건설한 사마르칸드는 자신의 정복전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전시하기 위해 꾸민 도시였다. 티무르는 다른 유목민 엘리트처럼 한 발은 도시화한 이슬람 세계를 밟고 다른 한 발은 초원의 이교도 세계를 밟고 있었다. 티무르왕조도 중국의 칭기스왕조처럼 유목민을 소외시킨 조세징수제도와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을 시행하자, 유목민들은 초원으로 후퇴하여 더 크고 강력한 부족집단을 이루어 되돌아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티무르제국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유럽에는 해상운송에 관심이 커졌다. 티무르 지배하의 중앙아시아가 혼란에 빠진 틈에 세입이 필요한 집단들이 무거운 통행세를 거두기 시작하자, 유럽인은 중간상인을 우회하여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항로개척과 해군력 육성에 힘썼다. 육상루트는 매우 위험하고 비용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티무르왕조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서시베리아와 깁착초원 일대에 킵착인과 투르크화한 몽골 부족민으로 구성된 혼합집단이 우즈벡을 세웠고, 반역자 또는 자유인을 뜻하고 러시아에 의해 코사크로 불리는 카작이 등장하여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발전했다. 현대 우즈벡 민족과 카자흐 민족은 이러한 분열을 통해 형성되었다.

 

유목민족의 쇠퇴와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
16세기 들어 중앙아시아는 점차 서로 경쟁하는 제국들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당시의 군사적 세력균형은 유목민에게 점차 불리하게 기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복합궁과 화승총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자 수발총이 더 우세한 무기가 되었다. 일부 유목민은 신기술이 자신의 전통적 전투방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유목민은 새로운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산업 역량이나 그것을 사들일 돈이 없었다. 전반적으로 유목민들은 군비경쟁에서 밀려 그들의 전성기는 이제 막을 내렸다. 이렇듯 중앙아시아 지역에 경제적 쇠퇴와 인구 감소가 이루어지자, 화약 시대에 뒤처진 유목민들은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급속한 기술진보와 혁신을 수용하는 사고방식을 갖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9세기 초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앙아시아는 쇠퇴하는 청제국 및 급속히 팽창하는 러시아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즈벡 칸국의 남부에는 파슈툰 수령 아흐마드 두라니가 정복과 외교를 통해 파슈툰인 타직인 우즈벡인 투르크멘인 몽골인으로 구성된 나라를 수립했다. 불안한 통합을 이룬 이 나라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이다. 영국은 이 나라를 인도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에 대한 완충물로 여겼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빠른 속도로 중앙아시아에 끊임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던 러시아제국은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붕괴되었고, 볼셰비키의 소련이 새롭게 등장했다. 1923년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혀 카자흐, 투르크멘,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키르기스스탄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된 후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400만명에 달하는 중앙아시아인을 수용한 새로운 공화국과 민족의 형성은 기근과 물자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자유기업 요소를 재도입한 소비에트 신경제정책(NEP) 실시 기간에 주로 이루어졌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으나 소련은 자신의 통치목적에 부합하도록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이에 따라 여러 민족은 자신의 영토를 부여받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인의 반소비에트 정서는 고르바초프와 함께 시작된 글라스노스트 시대인 1980년대 후반에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윽고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느슨한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소비에트연방 붕괴후 소비에트 체제 말기에 집권했던 다양한 수준의 권위주의 정권 통치하에 있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낙과사수(酪果思樹).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의 수고와 과일을 먹을 때 나무 심은 사람의 고통이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연구소를 50년간 한결같이 후원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자리를 만들지 못해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소를 설립하여 땀과 눈물로 이어온 분들의 수고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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