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조선공사에서 ‘코리안 퍼’호와 ‘코리언 프라이드’호 신조

미국선사 라스코쉬핑에 한국 선원을 배승하면서 2년마다 정기검사를 받아야 할 때 드라이도킹(drydocking)은 한국의 조선소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라스코쉬핑이 신조선을 건조할 때는 1970년 중반 이전까지는 주로 일본 조선소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1972년 현대중공업, 1974년 삼성중공업, 1978년 대우조선공업 등이 조선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현대미포조선이 1975년 설립되어 1982년에 도크를 건설하여 본격적인 수리조선업을 시작했다. 이에 라스코쉬핑에서도 그동안 일본 조선소에서 신조하던 관행을 깨고 우리나라 조선소에서 신조선을 만들게 되었다. 물론 이는 일본 조선소와 한국 조선소에서 견적가를 비교해보고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를 선택한 것이 한국 조선소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해서 1976년에 ‘코리안 퍼(Korean Fir)’호와 ‘코리안 프라이드(Korean Pride)’호 2척을 대한조선공사에서 신조하게 되었다. 대한조선공사는 1968년 11월 극동해운에 매각되어 민영화되었다.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한 극동해운의 남궁련 사장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조선산업을 주요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에 부응하기 위해 1973년 10월 거제도 옥포에 330만 5,800㎡에 세계 최대규모의 100만톤급 도크 공사에 착공하였다. 그러나 1973년 말 제1차 오일쇼크로 해운시장이 불황에 들어감에 따라 1978년 10월에 ㈜대우에 매각하고 말았다.


라스코쉬핑이 한국과 일본 조선소에 견적을 요청했던 1975년 전후 대한조선공사는 운영 면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렇다보니 1.8K급 살물선의 건조가가 척당 550만달러 정도였다. 신조감독은 주로 황병도 공무감독이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코리안 퍼’호와 ‘코리안 프라이드’호 2척을 1976년 5월 22일에 인수하였다.
‘코리안 퍼’호와 ‘코리안 프라이드’호는 10년 가까이 특별한 문제없이 잘 운항한 뒤 1986년 매각했다. 두 선박은 스페인 남단의 영국령 지브롤터의 조선소에서 드라이도킹을 한 뒤 폴란드 선사에 매각되었는데, 본사의 윌리 포드(Willie Ford) 공무감독과 昭東이 함께 매각 전담 감독으로 함께 일을 했다. 매각업무를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다만 영국령인 지브롤터에서 이따금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 지역으로 건너가 지중해식 저녁식사를 즐기곤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라스코의 선박관리 특징
Running repair : 라스코 본사에서는 유능한 한국해기사의 능력을 인정하여 항상 최상의 감항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소에서 정기적 수리를 하기 전에 본선에서 항해 중 또는 정박 중에 웬만한 정비는 자체적으로 실시하여 정기수리 시의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하였다. 조선소에서 1주일까지 가는 경우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라스코 선박은 주로 미포조선 등에서 정기 드라이도킹을 했는데, 조선소에서 ‘선저만 긁어내면 출항한다’는 우스운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내가 ‘팩 프린스’호에 승선 중일 때 밴쿠버의 잉글리시만(English Bay)에서 1주일 이상 대기할 때에 본사에 요청하여 강철 파이프를 조달받아, 조립식 사다리를 만들어 화물창 4개를 완전히 샌드 블라스팅(sand blasting)하여 선원들에게 많은 수당을 받아준 적이 있다. 정박 중 현측에 발 판(stage)을 설치해놓고 정비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갑판과 해치 커버는 항해 중에 정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실질적인 안전훈련과 장비관리 : 1972년과 1977년도에 발생한 2건의 큰 해난사고로 인해서인지는 몰라도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해안경비대의 안전관 출신인 밥 닐드(Robert Bob Neild(별명. 염소))를 채용하여 안전관리를 강화했다. 닐드 씨는 미서부에 기항하는 라스코 선박을 방선하여 선상안전훈련에 직접 참관해 교육시키고 각종 장비의 보관유지 상태를 점검하여 하시라도 선급 또는 PSC의 점검을 받을 수 있을 대비를 하였다.
이미 그 당시부터 제도적으로 항해 중에는 거의 매주 토요일 오전과업을 마친 후 오후에는 선내 대청소를 하고, 선기장을 모시고 1항기사가 앞장서서 탑 브리지(top bridge)부터 기관실까지 선내전반을 순찰점검을 했으며, 이어서 안전훈련(소방훈련과 퇴선훈련)을 했고, 매월 1회 정도 구명정 하강훈련을 하였다. 또한 유효기간이 지난 부품(예를 들어 line throwing gun의 실탄과 줄, 신호탄 등)은 그냥 폐기하지 않고, 항해 중에 훈련용으로 사용하면서 무작위로 선원을 지명하여 연습을 하도록 하였다.


라스코의 선박집중관리 : 라스코 선박이 미서부, 한국, 일본, 대만 등지 기항시 해무감독과 공무감독이 방선하여 본선의 항차와 정비에 관하여 본선 선기장과 긴밀한 협의를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즉각적으로 수배하여 본선의 안전운항과 정비에 막강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선원들이 과외시간과 주말에도 특별작업을 실시했을 경우에는 회사에서 충분한 작업수당을 지급하여 선원들의 심리적 피로감을 덜어줬다. 또한 당시 타 선주사에서는 거의 보기 드문 SSB 통신을 본사와 선박간 가동하여 극동시간 평일 아침 8시(미서부 시간 오후 4시)에 전선대와 공개통화를 통하여 위치보고, 공지사항지시, 특별사안에 대한 협의 등을 약 1시간 정도씩 하여 선주의 대선박 서비스 신속화와 비상상황 관리를 도모하였다.

 

전성기 라스코해운 관리선박 및 선원
라스코(부산)가 유지된 1969년부터 1995년 사이에 1988년까지는 라스코 선박 전체에 한국 선원을 승선시켰지만, 한국 선원의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1989년부터는 미얀마와 중국 선원과의 혼승이 이루어졌다. 척당 선원 정원도 1974년까지는 라스코의 선대가 중고선 위주였기 때문에 32명 선을 유지했지만, 1975년부터는 신조선 건조와 신형선 위주로 선대가 개편됨에 따라 28명으로 줄어들었다. 척당 32명과 28명 정원을 기준으로 1970년부터 1988년까지 라스코쉬핑에 취업한 선박과 한국 선원 수는 아래와 표와 같다.
미얀마 선원과의 혼승라스코해운의 선원 관리 업무는 1989년에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육상 임금의 상승 등으로 라스코해운에서 미얀마 선원을 고용해 한국인 고급사관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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