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만발한 4월의 일요일 오후 효창공원을 거닐었다. 4월은 학생들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민주주의를 회복한 달이다. 지금도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마스크 속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신선하다. 어릴 적에 학교만 끝나면 온종일 뛰놀던 곳이라 여기저기 다니며 추억에 잠겼다. 공원을 잘 꾸며놓아 산책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백범기념관, 삼의사묘, 임정요인 묘소를 둘러보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일제의 폭압에 의분을 참지 못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간 분들이다. 자기와 가족을 뛰어넘는 초아(超我)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4월에도 콤파스를 열지 못했다. 코로나 감염병이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쯤 콤파스 회원들을 반갑게 맞을 수 있을까?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Leadership : In Turbulent Times)’은 하버드대 교수이자 작가인 도리스 굿윈이 지은 책이다. 굿윈은 백악관에서 대통령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역대 대통령을 소재로 한 책들을 집필하였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시간’으로 퓰리처상, ‘권력의 조건’으로 링컨상을 받았다.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린든 존슨은 분열과 위기의 시대에 등장한 미국의 대통령들이다. 저자는 리더십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들을 관찰하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 사회를 이끌어갈 리더는 누구일까? 리더는 타고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야망은 어디서 오고, 역경은 리더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리더는 어떻게 국민의 삶에 목적의식과 의미를 부여하는가? 권력과 리더십은 어떻게 다르고, 개인적인 야망보다 더 큰 목적이 없어도 리더십은 가능한가? 그녀는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했고, 때로는 친구들과 밤을 하얗게 새우며 열정적으로 토론했단다. 네 사람의 이야기에는 혼란과 실패, 희망과 공포가 가득하다. 경험 부족에서 오는 미숙함과 자만심, 조심성 부족, 명백히 잘못된 판단, 자기중심적 행동에서 비롯된 실수를 추적함으로써 그들이 그런 실수를 인정하거나 감추고 또는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이 어떻게 국민을 인도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리더가 시대를 만드는지, 아니면 시대가 리더를 소환하는가의 퍼즐을 풀어보았다. 이 책은 1부 야망과 리더십의 자각-리더는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2부 역경과 성장-역경은 리더십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3부 리더와 시대-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가는가로 되어 있다.

 

야망과 리더십의 자각
고요한 야망-링컨

1832년 3월 9일 링컨이 일리노이주 주의원 출마의사를 밝혔을 때 그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다. 링컨의 출마선언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동포들에게 진정으로 존경받고 그들의 존경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야망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그 야망을 어디까지 충족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줄곧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젊습니다”로 시작한다. 링컨은 그런 꿈을 성취하기 위한 기회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그는 도덕적 용기와 신념을 야망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링컨은 배우는 게 느렸지만 잊는 것도 느렸고, 호기심이 굉장하여 읽은 것이나 배운 것의 의미를 알아내려는 욕망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정계에 입문한 링컨의 연설방법은 다른 후보들과 확연히 달랐다. 모든 문제에 솔직한 자세로 접근했고, 모든 사회계층을 관찰한 결과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평소 습관대로 쉽게 풀어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기회는 위험을 감수할 때 찾아오는 것”이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려야 할 때와 행동해야 할 때를 정확히 파악하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20대였던 링컨의 마음속에 형성된 리더십 개념에 따르면, 리더는 자유와 평등과 기회에 대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리더의 본성-시어도어 루스벨트
링컨처럼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23세에 정계의 문을 처음 두드렸다.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2학년생 시어도어가 주의원에 당선된 것은 루스벨트 가문의 명성과 선거구의 유리한 인구분포가 첫 기회를 얻는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공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과 야망과 근면과 끈기로 평범한 자질을 특별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개개인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시어도어는 신경질적이고 병약한 아이였다. 기관지 천식으로 밤마다 물에 빠진 듯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부림쳐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가족들은 생각했다. 이렇듯 천식이 어린 시어도어의 몸을 갉아먹었지만, 그의 정신과 의지력은 오히려 강인해졌다. 아버지의 자상한 돌봄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죽어가는 나에게 숨을 주었고 폐와 생명을 준 강인함과 용기,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겸비한 이타적인 분이셨다”고 고백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격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항상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그의 집중력은 남달랐고, 지적인 호기심과 야심적인 꿈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훗날 시어도어는 “리더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어도어는 아버지를 통해 미국인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가치로 평가하지 않는 한 누구도 더 우월하지 않고, 단점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 누구도 열등하지 않다”는 사상을 체득했다. 일찍이 시어도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선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변호사가 되는 게 공적인 삶에 진입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여 법학대학원에 진학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법학대학원생이 된 그는 교수들이 법의 당위성보다 법을 정의하는데 급급하고 정의보다 판례를 강조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후 주의회 의원선거에 뛰어들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선언문을 통해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런 약속도 없이 자유롭게, 무작정 상관에게 복종하거나 당파를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독자적인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자유롭게 전개한 덕분에 시어도어는 본래의 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공화당의 평균 득표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표를 얻어 주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자신의 약점과 신체적 결함,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리더 방식, 심지어 자신의 두려움까지 인정하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현실감각과 공감능력도 향상되어 모두에게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의 성공과정을 회상하며 “나는 로켓처럼 치솟아 올랐다”고 말했다.

 

대기만성-프랭클린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링컨과 시어도어에 비해 대기만성형이었다. 링컨의 야망과 결단력, 시어도어와 같은 의지력과 지적 능력은 없었으나, 그에게는 자신감이 넘치고 사교적이며 낙천적인데다가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상황에 맞게 행동과 태도를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정치학자 리처드 뉴스타드는 “기질이 리더를 구분 짓는 중대한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평생 경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상대의 의도와 동기를 이해하는 능력과 유연하고 탄력적인 언어 구사력으로 복잡한 문제도 기민하게 해결했다. 프랭클린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질문에 “우표에 관심을 갖게 되자 그 우표를 발행한 국가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어 백과사전을 뒤적이며 그 나라와 국민 및 역사까지 공부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특히 지도와 지리를 좋아하여 각국의 강과 산맥, 호수와 계곡, 자연자원 등을 세밀하게 기억했다. 이런 지리적 정보는 두 번의 전쟁에 세계 어디에서 어떻게 휘말려 들 수밖에 없었는지 국민에게 설명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료가 됐다. 초선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젊은 기사가 거대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소식이 언론에 자주 다뤄지자 신임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프랭클린에게 해군성 차관보 직책을 제안했다. 프랭클린은 그 제안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항상 배를 사랑했고 해군에 대해 공부했다. 유난히 바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열세 살에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외아들로서 오랫동안 집을 떠나야 하므로 허락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솔직한 말에 단념했다.


그러나 해군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중고서점들을 찾아다니며 해군사를 다룬 서적과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렇게 수집한 책이 2,500권에 달했다. 조직을 관리한 경험이 없던 31세의 젊은 차관보가 과연 해군성 행정을 관리하고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해군성에서 프랭클린을 상대하고 경험한 사람들은 그가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임을 이내 깨달았다. 한 해군소장은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는 속도에 숨이 멎을 정도였다. 지극히 복잡한 문제도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히 파악했다”고 말했다. 함대 규모와 역량 및 6만 5,000명에 달하는 병사와 군무원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프랭클린은 사무실 벽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군함과 병력이 이동할 때마다 색핀을 움직여 어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즉각 파악했다. 그는 해군을 빈사상태의 관료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로 탈바꿈했고, 또 모든 구성원이 제자리에서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거대한 조직으로 재편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멀지 않아 발발한 스페인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이 되었다.


바지를 입은 증기기관-린든 존슨
22세의 대학교 4학년생 린든 존슨은 철도위원장에 출마한 전 텍사스주시자 패트 네프를 대신해 정치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을 계기로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연속 일어나 존슨은 마침내 위싱턴DC에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다. 당시 그의 연설은 젊음의 열정과 진지한 목적의식으로 가득했다. 화려한 웅변은 아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울림이 있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휘파람과 우레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존슨이 첫 정치연설을 할 때, 노련한 정치인 웰리 홉킨스가 그를 지켜보았다. 홉킨스는 젊은 린든에 대해 “젊은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정치가의 피가 흘렀다. 유전적 요인에 의해 정치가 적성이 맞는 것이 분명했다”고 회고했다. 린든을 즉시 발탁하여 함께 선거운동을 한 홉킨스는 계속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결국 존슨의 승리였다. 린든과 함께 일한 사람들은 모두 존슨을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장 위대한 조직자라고 생각했다. 산적한 일들도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한 후 나머지도 하나씩 차례로 해결하는 능력에 경탄했다. 존슨은 현재에 집중하면서도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알고 있었다. 프랭클린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만 해도 농가 10곳 중 9곳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고, 마실 물이 없어 농민들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야 했다.


존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프랭클린 대통령을 어렵게 독대하여 최근에 완공된 거대한 댐과 화려한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린든, 이것을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뭔가?”라고 대통령이 묻자, 바로 대답했다. “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습니다. 전기는 어디에나 있지만 시골 강가의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루스벨트는 젊은 이야기꾼의 재능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그리고 젊은 하원의원은 백만달러의 지원금을 들고 백악관을 나왔다. 그 젊은 초선의원에 대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루스벨트는 “다음 세대에는 권력의 추가 남서부로 이동할 것이고, 저 젊은이가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역경과 성장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하원의원 시절을 실패로 평가한다. 링컨은 대통령선거에서 테일러 후보를 지원하여 그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으나 자신이 탐내던 직책에서 탈락하자 크게 낙담했다. “너무 힘들다. 이 땅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죽어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정치인의 꿈을 포기하려 했다. 그후 5년간 공적인 삶에서 완전히 물러나 자신을 성찰하며 자기개발에 힘써 미국에 곧 불어닥칠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리더의 성품을 키웠다. 링컨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남기를 바랐다. 운명을 극복하려면 지속적인 노력과 절제력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약점과 결함을 바로 보고, 실패를 반성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리더의 모습을 향해 달려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건국 초기부터 남부와 북부가 분열한 근원은 노예제도 문제로, 영토가 확장될 때마다 다시 타올랐다. 당시로선 노예제도가 미국 최대의 첨예한 쟁점이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획득한 광활한 영토의 일부인 미주리가 노예주로 허락받으려고 의회의 문을 두드렸을 때, 북부와 남부 사이에 험악한 갈등이 촉발했으나 다행히 켄터키 출신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의 리더십으로 미주리협정이 타협점을 찾으며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이 봉합됐다. 이 협정에 따라 미주리는 주의 자격을 얻었고, 메인주는 자유주로 인정받았다. 또한 자유주와 노예주를 구분하는 가상의 선이 그어져 훗날 확장되는 영토가 그 선의 북쪽에 위치하면 자유주로, 남쪽이면 노예주로 편입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일리노이 출신의 상원의원 스티브 더글러스가 고안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안이 오랜 토론 끝에 연방의회를 통과하자 국론이 분열하며 갈등이 재연됐다. 이 법안은 새롭게 추가된 영토인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 아메리카합중국에 편입될 때 노예주나 자유주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노예제도가 남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국으로 확산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30년간 평온한 상태를 보장해준 미주리협정도 단숨에 지워졌다. 이렇게 되자 링컨이 소망하던 노예제도가 완전히 소멸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는 새로운 법의 의미와 영향 및 심각성을 즉시 알아채고 도서관에 파묻혀 노예제도라는 쟁점이 미국 역사에 끼어들어 현재 교착상태까지 악화된 과정을 추적하며 논리적,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했다. 1854년 가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일리노이에서 열렸다. 이 법을 변호하는 더글라스가 먼저 등단하여 자치권이라는 불가침의 원칙을 주장하며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음 순서인 링컨은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이 법이 야기한 노예제도의 확장 가능성을 설명하는 식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방헌법이 채택된 당시엔 “노예제도에 대한 그 시대의 명백한 정신은 원칙적으로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노예제도가 초창기에 미국의 사회경제적인 삶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용인된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해 나갔다. 이어 자치권이라는 원칙은 옳은 것이지만, 더글러스의 제안대로 자치권을 노예제도에 확대 적용한다면 그 뜻이 왜곡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존속되어 노예제도가 확산되면, 미국의 희망은 소멸하고, 미국의 존재가 세계에 뜻하는 모든 것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합하면 우리는 미합중국을 구하고, 나아가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고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당시의 언론은 “링컨의 연설이 끝나자 광장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링컨은 자기만이 정의롭다고 우쭐대거나, 복수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거나 조롱하고 풍자하지 않았다.  “위대한 이야기꾼은 언제나 민중에게 뿌리를 둔다. 삶의 과정을 돌아보며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삶에서 자료를 모아 조언과 교훈과 지침으로 삼을만한 이야기를 꾸민다”는 수필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따랐다. 링컨의 연설은 기다림의 학습과 온유한 설득으로 청중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링컨은 참으로 위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링컨은 공적인 삶으로 되돌아갔고, 그의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그 목적을 고수했다.


 
악몽 같은 시련

26세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악몽 같은 시련이 찾아왔다. 같은 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일기에 시어도어는 “빛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내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라고 썼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루스벨트가 심지까지 잘려나간 촛불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어도어는 심지가 잘린 초가 아니었고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서부로 물러나 대자연속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하루에 16시간씩 말을 탔고, 사슴과 들소를 사냥했고, 소에 낙인을 찍고 시장으로 몰고 가는 카우보이로 살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상심한 마음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되찾았고 미래를 열어갈 자신감을 되살려냈다. 그는 강한 정신력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더욱 강해졌다. 평생 천식으로 고생했으나 자연의 신선한 공기로 폐 기능이 향상됐고, 천식 발작과 만성적인 복통에서도 벗어났다. 훗날 루스벨트는 노스다코타의 자연 속에서 보낸 시기가 없었다면 결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 후로 루스벨트는 어떤 직책이든 기회가 주어지면 그 직책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혼신을 다해 일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당신의 재능을 쏟아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라”고 말했다. 연방 인사위원회와 뉴욕경찰청, 해군성처럼 아무 공통점이 없는 부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행정의 달인이 되거나 특출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상식과 정직, 활력과 결단력, 배우려는 적극성만 있으면 충분했다”고 대답했다. 루스벨트가 시련을 겪으며 얻은 교훈은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고 앞으로 닥칠지 모를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공감하는 리더십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어려움을 겪을 때 유의미한 성장을 이루고 야망이 굳건해지며 리더십 능력도 향상된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다. 프랭클린은 젊은 나이에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도 서지도 못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결단력과 인내심 그리고 새롭게 얻은 끈기로 몸을 되찾기 위한 고행의 길을 시작했고, 그의 낙천적인 기질과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는 성향으로 그런 충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투병과 재활 과정을 통해 겸손한 자세가 몸에 배었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도 더욱 깊어졌다. 공감능력이 눈에 띄게 커진 덕분에 루스벨트는 잔혹한 충격을 운명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온갖 유형의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공직에 출마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여긴 걷는 능력을 다른 식으로 회복했다. 휠체어에 의지하는 사람도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답을 스스로 깨우쳤다. 1928년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앨 스미스가 루스벨트에게 당을 위해 뉴욕주지사로 출마하라고 제안했고, 그는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결국 승리했다. 대공황은 달이 없는 밤처럼 세상에 덮친 게 아니었다. 증권시장이 활황이던 순간에도 어둠이 짙게 깔릴 듯한 황혼의 조짐은 있었다. 노동시장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제조업체들은 일감이 줄고 금융은 경직되고 있었다. 허버트 후버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 리더십 방식이 미국을 엄청나게 짓누르던 압박과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1928년 공화당은 후버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미국이 호황을 누리던 때 행해진 후보수락 연설에서 그는 “미국은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가난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에 한층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변화된 상황에 맞춰가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지금은 대담하고 끈질긴 실험이 필요하고 또 요구됩니다. 어떤 방법이든 취해 시도해봐야 합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여하튼 무엇이든 시도해봅시다” 미국 국민은 프랭클린의 솔직한 말에 이끌려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프랭클린은 어렸을 때 대통령까지 한 걸음씩 올라가는 꿈을 꾸었으나 소아마비로 그 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치료와 재활 과정에서 그는 백악관으로 가는 길과 실천적이고 실험적이며 공감하는 리더십을 찾아냈다. 루스벨트는 어두운 시절을 극복하여 이겨냈고, 국민에게 국가의 위기와 자신의 위기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20대 초부터 린든 존슨은 “남보다 일찍 일어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늦게 잠자리에 들면 승리는 나의 것”이라는 전제에서 활동했다. 존슨이 처음 공직에 입문할 때 마음속에 품었던 가치관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가난한 사람,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주거지가 열악한 사람, 노인과 병자들을 돕기 위해 정치가 활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심각한 심장마비라는 시련에서 회복되자 존슨은 자신에게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면, 아버지의 진실한 충고를 되새기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치적인 계산을 신속히 끝낸 존 케네디가 제안한 부통령직을 존슨이 수락하자 많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다수당 대표라는 강력한 지위를 포기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는 부통령이란 직책을 받아들였을까 의아했다. 존슨 스스로 말했듯이 “일반적으로 부통령은 거대한 수소와 같다. 그가 속한 조직에서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존재였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탄 검은색 리무진이 텍사스 학교 도서보관소를 지나 딜리 플라자로 들어서는 모퉁이를 돌아갈 때 존슨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리더와 시대
처음부터 링컨은 미합중국이 공동체로서 공유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세계에 희망을 주는 횃불이라는 역할을 성찰하며, 분리독립이 야기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눈앞에 닥친 엄청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링컨은 역사상 가장 특이한 내각을 구성했다. 신생 공화당의 모든 정파를 망라하는 내각이었다. 짐을 함께 짊어질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링컨보다 공직경험이 많았고, 더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또 유명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세 부서인 국무부, 재무부, 법무부의 수장에 주된 경쟁자이던 윌리엄 수어드, 새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를 선택했다. 그들을 발탁한 이유는 국가가 직면한 위험이 엄중했고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강인하고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앞에 두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개인적으로 야심차고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자칫 지리멸렬한 집단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합중국을 향한 충성심에는 의문을 품을 수 없는 내각이었고, 융합할 자신감이 링컨에게 충분히 있었다.
링컨은 우울감이 짙었으나 비관적이지 않았고,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성실하고 겸손했지만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오만하고 야심차며 논쟁적이고 질투심이 강한 그 잘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가장 합리적인 답은 링컨의 감성지능 즉, 공감능력과 겸손함, 일관성과 자기인식, 자제력과 너그러움에서 찾을 수 있다. 링컨은 내각 구성원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욕구를 지속적으로 배려하며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참기 힘든 모욕을 당했던 스탠턴을 국무위원으로 영입하는 게 국가 이익에 부합하다는 확신이 서자, 개인적인 원한을 누르고 그를 임명했고 그는 이에 부응했다. 링컨은 겉으로 온유하고 친절했지만, 내심은 복합적이고 야심적이며 계획적인 확고한 리더였다. 링컨은 거래에 기반을 둔 실리적 전략과 함께 원칙에 기반된 변혁적 리더십을 구사했다.

 

위기관리
1902년 탄광파업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노동자 계급에서 확산된 저항 분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섬뜩한 교착상태로 여겨졌던 사건에 대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창의적 접근은 획기적인 위기관리 증거로 삼기에 충분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뻔했던 파업이 마침내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루스벨트는 국민의 대리인으로 역할하며, 그때까지 민간영역으로 여기던 노동과 자본 간의 분쟁을 공익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파업이 계속되던 5개월을 끈기 있게 지켜보며 세밀하게 준비하여 한 걸음씩 나가,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연방정부가 최초로 관여한 구속력을 지닌 합리적인 중재안을 만들어 노사 양측을 끌어들여 파국을 막았다. 그는 “국민의 삶과 건강에 직결된 사태에 대통령이 개입하여 재앙의 확산을 막지 않는다면 정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회생의 리더십
 1929년 미국경제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산업은 마비된 상태였다. 노동인구의 4분의 1이 실업자였고, 많은 사람이 집과 농지를 잃었다. 수천 곳의 은행이 붕괴되고 수백만명의 예금이 사라졌다. 굶주린 사람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마침내 식량폭동이 일어났다. 시정부와 주정부의 구제기금도 고갈됐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미래가 암울해 보였다. 후버 대통령은 “이제 모든 수단을 다 썼다”며 절망했다. 이때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등장했다. 리더는 시대의 요구에 부름받아 나타난다. 루스벨트가 맞닥뜨린 암울한 상황은 그의 위대한 성공만큼이나 참혹하고 절박했다.


대통령 당선자 루스벨트는 대공황이란 질병을 치료하려면 세 방향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적절한 회복이 이뤄지려면 먼저 무력감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 금융붕괴가 지체없이 중단되고 금융이 되살아나야 한다. 셋째,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제와 사회 구조가 개혁돼야 한다.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지금이야말로 진실을 말할 때이고 우리나라 상황을 정직하게 고백할 때입니다. 어리석은 낙관주의만이 이 순간의 암울한 현실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라고 역설했다. 루스벨트는 불구를 딛고 자신의 몸을 끈질기게 다시 만들며 자신감과 낙관적 정신력을 되찾은 정치인이다. 그의 연설로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바뀌고 마법적 리더십이 전염성을 띠었다”고 사람들은 그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외쳤다. “무기력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정부는 아직 살아있다. 리더가 돌아왔다!” 루스벨트는 연이은 노변담화를 통해 사회와 경제의 구조적인 개혁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담담히 밝혔고, 국민은 청종했고, 이 구상들이 뉴딜정책이 됐다. 그의 타고난 소통능력은 공통된 사명을 개발하고,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며, 행동을 촉구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는 수단이요 성공비결이었다. 격동의 시대에 리더의 품성과 지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한다.

 

비전의 리더십
 “모든 것이 혼돈상태였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후의 미국 상황을 말해준다. 총격에 의한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저격범 리 오즈월드의 체포와 살해, 오즈월드의 살해자 잭 루비, 두 살인자가 러시아 혹은 마피아와 관련되었다는 추측, 미국인들은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주시하며 경악했다. 훗날 존슨 대통령이 말했듯이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국가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국민이 망연자실하더라도 정부는 마비상태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또 실수하거나 회의적인 기색을 드러내면 바로 파국적인 재앙이 닥칠 수 있었다. 소떼를 늪에서 끌어내는 방법은 하나, 말에 탄 사람이 선두에서 지휘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통령 피살로 인한 혼돈의 시기에 텍사스의 카우보이 린든 존슨이 그 역할을 해냈다. 그의 위기대처 능력은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오면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오래전부터 연습한 듯했다.


그리고 그 여파를 몰아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을 실현했다. 그것이 그때 그곳에 존슨이 존재할 이유였다. 민권법과 평등한 투표권, 이민권 법안을 통과시킬 때에도 “흑인의 문제란 없다. 남부의 문제도 없다. 오로지 미국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으로서가 아니라 미국 국민으로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연설하여 상황을 역전시켰다. 새로운 이민법에 의해 출신지와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이민자에게 미국의 문을 개방했고, 다섯 명이 이민한 가족에게는 재결합의 혜택을 부여해 이민의 흐름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이동했으며, 미국의 다양성과 영향력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리더에 의해 아직도 미국이 세계를 이끌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이 수상했다. 작년의 기생충에 이어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수상 소감처럼 “나는 나다” 인생에 조연은 없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 모두가 주연이기 때문이다. 들판과 개울가에 무성한 미나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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