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오월, 신록이 무르익고 꽃향기 진동하지만, 코로나 감염병이 계절의 기쁨을 앗아갔다. 확진자가 계속 늘고 주변 사람들마저 감염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코로나 백신이 좀 더 빨리 접종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조속한 치료와 회복을 기원한다. 작년에 마스크 품귀로 고생했는데, 올핸 백신으로 마음조리고 종류에 따라 희비도 엇갈리니 이래저래 힘든 세월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콤파스 회원들을 만날 날을 기다린다.


5월에도 콤파스를 열지 못해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 연대기(A Hopeful History)’라는 부제의 ‘휴먼카인드(Humankind)’ 책을 소개한다. 요즘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이자 네덜란드의 대표적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공멸과 연대의 기로에 선 인류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질문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아니면 이기적인가?”를 성찰하고 해부했다. 저자는
“최초의 인류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인류 문명의 역사가 증명하는 한 가지 진실은 전쟁과 재난 등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인간은 어김없이 선한 본성에 압도되어 왔다”며,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프레임을 깰 때 우리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연대와 협력을 이뤄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 루시퍼 이펙트, 방관자 효과 등 인간 본성에 덧씌워진 오해를 뛰어넘어 편견과 고정관념에 은폐되었던 인간의 선한 민낯에 관한 서사를 도도하게 펼쳤다.

 

인류 보편의 속성
악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프랑스의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 심리학’을 읽으면 된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뿐만 아니라 처칠, 루스벨트 대통령도 ‘군중 심리학’을 정독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스포츠 실황 중계하듯 보여주고 있다. 르봉의 서술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은 한순간에 여러 단계 아래로 퇴화한다. 위기를 만나면 공황과 폭력이 분출하고 인간은 진정한 본성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1940년 9월 7일 348대의 독일 폭격기가 영국해협을 횡단했다. 영국대공습으로 불린 그날은   ‘검은 토요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후 9개월에 걸쳐 런던지역에만 8만개의 폭탄이 투하되어 100만채의 건물이 파손되었고 영국인 4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나라가 몇 개월 동안 계속 폭격을 받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짐승처럼 행동할까?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놀랍게도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두렵지 않았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요. 두려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영국은 마치 기차의 연착을 참아내듯 나치 독일의 공습을 견뎌냈다.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영국 사회는 대공습으로 인해 강해졌다. 히틀러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미국 기자는 “악몽 같은 조건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보여준 용기와 유머, 친절함은 계속 놀라움을 안겨주었다”고 보도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은 런던 대공습 기간에 보여준 영국인이 보여준 회복력을 영국인의 특이한 속성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인만의 특성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속성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재난 타이태닉호 침몰시 모든 사람이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대피가 매우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고, 두려워서 비명을 지르거나 우왕좌왕 뛰어다니는 승객도 없었다.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미국 대폭발 테러로 쌍둥이빌딩이 불타오를 때 수천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착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인간은 본성이 이기적이고 공격적이며 공황상태에 쉽게 빠진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이는 네덜란드의 동물학자 프란스 드발의 ‘껍데기 이론’인 “문명이란 아주 가벼운 도발에도 갈라지는 얄팍한 껍데기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에 근거하나, 현실은 그 반대가 진실이다. 우리 인간은 위기가 닥칠 때, 즉 폭탄이 떨어지거나 홍수가 났을 때 최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도시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시민들의 이기심과 무정부 상태를 야기하지 못했다. 뉴올리언스에는 용기와 자선과 협동이 넘쳐났다. 역경에 처하면 그에 대응하여 협력의 물결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지만, 오히려 당황한 당국이 2차 재난을 일으킨다. 카트리나 여파를 연구한 사회학자 리레카 솔릿은 “엘리트들이 공황에 빠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자신과 같다고 오해하는 탓”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이기심에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플라시보와 노시보 효과가 있다.

 

이는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를 만들고,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예측하는 일은 일어나게 된다는 원리이다. 왜 인간이 나쁘다고 상상할까? 우리 종이 사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된 출발점은 어딜까? 인간은 비관적인 뉴스에 취약하다. 이는 두 가지 이유인 부정편향과 가용성 편향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많이 이끌린다. 그리고 가용성 즉 어떤 대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면 상대적으로 그것이 흔하다고 추측한다. 레바논의 나심 탈레브는 냉혹하게 지적했다. “우리는 뉴스에 노출되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지난 세월 동안 노시보로 작용해 왔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는 “경제학을 더 오래 공부할수록 점점 더 이기적이 되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고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렇듯 오늘날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이며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내일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이제는 새로운 현실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자연상태의 인간
인간 본성이 사악함을 믿게 하는 비관론자 홉스는 시민사회만이 인간의 기본적 본능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선함이 자리잡고 있다고 선언한 루소는 문명이 우리를 구원하기는커녕 망치고 있다고 믿었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사회를 정의했고, 루소는 “인간은 본래 선하며 그가 사악해지는 것은 오로지 사회제도 탓”이라고 이해했다. 지난 300년간 이 두 사람만큼 정치, 교육, 세계관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제학의 기조는 이성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홉스 신봉자들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와 달리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루소는 아이들이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속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뿌리는 이 두 사람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의 진화에서 유전자가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룬 ‘이기적 유전자’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도킨스가 사람들이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다고 주장한 지 2년 뒤에 러시아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가 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길들여진 유인원이다. 가장 친화적이고 성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자식을 갖는 현상이 수만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종의 진화는 ‘가장 우호적인 자의 생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진화인류학 교수인 브라이언 헤어는 인간은 얼굴을 붉히며 눈에 흰자위를 가진 영장류라며, 우리의 특이한 눈은 인간이 스스로 길들인 것에 따른 또 다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좀 더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면서 우리는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노출하는 동물이며,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이다. 사교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울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 발달 역시 사교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투쟁과 경쟁이 생명체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협동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연대와 상호작용을 갈망한다. 우리의 몸이 음식을 갈망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조건인 유대를 갈망한다.

 

문명의 저주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홉스의 말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물학, 인류학, 고고학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은 친구에게 친절할 수 있고 외부인에게는 냉혹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전쟁을 가장 좋아하는 존재다. 다행히 우리는 문명이라는 인공물 덕분에 고귀해졌다” 사람들은 핑커의 말이 옳으며, 이제 루소의 이론은 깨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군사전문가 데이브 그로스먼은 세계 전쟁사를 연구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즉,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종 전쟁에서 모든 사람은 인간적으로 가능할 때 다른 사람을 놓아주었다.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중상을 입은 병사들을 면담하여 약 13에서 18퍼센트만 총을 발사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일반적인 증거로 미루어볼 때 인간에 대한 홉스의 이미지는 경험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인간은 상호 영향을 주면서 함께하도록 태어났으며, 이것이 폭력을 저지르기 매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초기 인류의 공격성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발굴이다.

 

고고학적 증거가 홉스와 루소 사이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 화석 기록은 연구자들에 의해 오염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상태가 홉스가 주장하듯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다면 그 시기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 동굴벽화에 그런 그림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유적지를 연구한 과학자들은 선사시대에 전쟁이 있었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인류학자 브라이언 퍼거슨은 “전쟁의 기원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만 시작은 있었다”며 얼버무린다.
그렇다면 장 자크 루소가 옳은 것일까? 인간은 천성적으로 고귀하고 문명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 모두 잘 지내고 있었을까? 인류 역사의 중심에는 미스터리가 자리잡고 있다.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면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 만약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무엇이 이를 촉발했을까?

 

정주와 사유재산
1만 5,000년전 마지막 빙하기의 지구상엔 정주인이 없었고, 단지 사람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무리를 이루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서로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생존을 위한 끌어안기였다. 그러다가 기후가 바뀌어 많은 식량이 공급되고 인구가 늘자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마을과 도시가 형성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사람들의 소유물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땅덩어리에 울타리를 친 뒤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소유권이라는 새로운 관행이 생겼다는 것은 불평등이 커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 죽으면 그의 소유물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고, 상속이 시작되자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학자들은 최소한 두 가지 원인을 들었다. 첫째, 이제 땅을 비롯해 지켜야 할 소유물이 생겼다. 둘째, 정착민의 삶은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코스모폴리탄이 외국인 혐오자로 변질됐다. 우리가 외부인들과 무리를 이루는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자신의 패기를 입증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이 등장했고, 새로운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들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정착지와 사유재산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극소수가 대다수를 억압하기 시작했고, 지휘자가 장군으로 족장에서 왕으로 등극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시대는 끝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의 발명, 글쓰기의 발전, 법률제도의 탄생 등 문명의 이정표가 압제의 도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잘못된 인용과 확대재생산
오늘날 인류역사에 관한 내용들이 바뀌고 있다. 현대 과학은 문명의 껍데기 이론을 짧은 시간에 이루었으나 반대증거가 쌓였고 지금도 추가되고 있다. 선사시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결코 완벽해지지 못할 것이다. 조상의 삶에 대한 수수께끼를 앞으로도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고고학적 퍼즐을 맞추는 데는 많은 추측이 필요하며, 우리는 현대의 인류학적 발전이 과거에 투영되는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스터섬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잘못된 인용과 확대재생산을 경계한다. 문명으로부터 고립되어 내전과 살육으로 점철된 이스터섬의 신화는 지구 문명에 임박한 파멸에 대한 묵시록처럼 비유되곤 했다. 그러나 이 섬에는 전쟁과 기아, 식인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없다.

 

잘못된 연구자료의 인용과 확대재생산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스터섬과 지구를 놓고 보면 충격적인 유사점이 몇 가지 있다. 이스터섬은 광대한 바다 위의 한 점에 불과하고,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다. 섬 주민들은 도망칠 배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지구 밖으로 우릴 데려갈 우주선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스터섬의 숲이 황폐해지고 인구는 넘쳐났다. 우리의 행성은 오염되고 과도하게 온난화하고 있다. 환경론자들은 인류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들의 냉소주의가 충족적 예언 즉 지구의 기온이 변함없이 오르는 동안 우리를 절망으로 마비시키는 노시보가 될 수 있다. 환경생태학자 얀 보어세마 교수의 견해에 희망을 건다. “사람들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해낼 것이라는 보장이 없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이스터섬이 이를 증명한다. 섬 주민들은 마지막 나무가 사라졌을 때 수확량을 높이는 새로운 기술로 농업을 다시 일구었다. 임박한 파멸에 대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희망의 원천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내가 모든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희망은 너무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에 매달린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 선하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이다. 만일 인간의 심성이 천성적으로 착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필연적인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아우슈비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범죄는 원시사회의 후미진 곳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칸트와 괴테의 나라, 베토벤과 바흐의 땅,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 독일에서 일어났다. 사회심리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드는 정확한 요인을 찾아내기 위해 깊이 조사하고 연구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악해질 수 있는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700명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받았다.

 

그 가운데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사건을 추적한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있었다. 아이히만은 재판 전에 전문가들로부터 심리평가를 받았으나 행동장애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의사들은 그가 매우 정상적이라고 진단했다. 아렌트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사이코패스도 괴물도 아니었고 보통사람처럼 그냥 평범했다.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에서 이 현상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진단했다. 평범하고 선한 일반인도 부정적이고 극한 상황에 놓이면 어김없이 괴물이 된다. 이른바 루시퍼 이펙트다.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히틀러나 상관으로부터 사전에 명시적인 지시를 받지 않고는 크든 작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총통의 정신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위해, 그를 바라보고 일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덴마크에서 벌어진 일이다. 1943년 9월 28일 코펜하겐의 의회 청사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말했다. “재앙이 임박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계획되어 있다. 선박이 코펜하겐 계류장에 닻을 내릴 것이다. 게슈타포에 붙잡힌 불쌍한 유대인들은 강제로 배에 실려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 이송될 것이다” 발언자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개종한 나치로 역사에 남을 기오르크 두크비츠라는 사람으로, 그의 경고는 기적을 낳았다. 그날 밤 독일군은 유대인들이 습격을 미리 경고받고 대부분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경고 덕분에 덴마크 유대인의 99퍼센트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깊은 밤 7,000명 이상의 덴마크 유대인들이 작은 어선을 타고 스웨덴과 국경 역할을 하는 외레순 해협을 건넜다. 그들의 구출은 암흑의 시기에 작지만 환하게 빛났다. 인류와 용기의 승리였다.

 

방관자 효과와 역방관자 효과
다음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실을 폭로하는 이야기다. 1964년 3월 뉴욕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아파트 현관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다.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는 한 목격자의 증언으로 38명의 목격자들은 모두 방관자로 전락했다.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I didn’t want to get involved)”라는 여섯 단어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연일 신문에 실렸으며 이후 역사책에도 실렸다. 살인자나 피해자 때문이 아니라 방관자들 때문이었다. 한 형사가 토로하듯 “전화 한 통화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처한 상황의 정체를 나타내는 무관심의 전염병 증상이며, 결론적으로 우리는 혼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방관자 효과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에 비상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목격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여 비상 상황에 대처했다면 역방관자 효과가 나타나 피해자는 난관과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밖의 최악의 사고와 사건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서로 도와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도 90% 이상이나......

 

선한 본성의 오작동
전쟁의 고고학적 증거가 약 1만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고 이때 사유재산과 농경의 발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시기에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대처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를 부조화라고 말한다. 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당대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가진 최고의 특성인 우정, 충성, 결속이 수백만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을 저지르도록 고무시킨 영웅적 투쟁의 역사다. 전문가들은 테러리스트들의 공통적 특징은 그들이 매우 쉽게 조종당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의견이나 외부의 권위에 쉽게 흔들린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눈에 옳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옳은 일을 하다 죽고 싶어 한다.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말하기를, “테러리스트들은 대의를 위해 죽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그렇게 한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선을 선호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아기의 세계를 깊이 연구하면서 낙관적이지 않게 되었다. 영유아의 분열된 본성, 기본적으로는 친절하지만 낯선 사람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떠올렸다. 우리는 소속 집단에 느끼는 강한 유대감 때문에 타인에게 적대감을 갖는 성향이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하면서도 잔인한 종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 있다. 공감과 외국인 혐오증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타난다.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전쟁범죄자들은 권력에 굶주린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 사례이며, 알카에다와 IS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능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연민이나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일이 거의 없다.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종인 인간이 어떻게 파렴치한 표본으로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즘과 후천적 소시오패스
무엇이든 성취하려면 거짓말과 속임수의 그물을 짜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이론을 펼친 사람은 마키아벨리다. 그의 철학의 강점은 실행 가능하다는 것이다. 권력을 원한다면 잡아야 하고, 원칙이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뻔뻔해야 하며,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그의 군주론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럽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며 비겁하고 탐욕스럽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즘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미러링을 한다. 거울을 보듯 누군가 웃으면 우리도 웃고, 누군가 하품을 하면 우리도 하품을 한다. 그러나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공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정신적 과정인 미러링을 방해한다. 의학 용어인 후천적 소시오패스는 심리학자들이 진단한 유전되지 않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로, 이를 통해 가장 착한 사람을 최악의 마키아벨리안으로 만들 수 있다.

 

권력의 본질적 속성은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이 언급한 대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고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이성이며,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굳게 믿었던 합리적 사고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에도 어두운 측면이 있다. 지난 몇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폭주했고, 소시오패스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규칙과 협약이 지배하는 사회는 전체에 치중하여 개인에겐 관심이 없거나 경시했다. 역사학자들은 계몽주의가 우리에게 평등을 가져다주었지만, 인종차별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근대 자본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새로운 현실
1959년 영국 BBC는 버트런드 러셀에게 미래 세대를 위한 조언을 요청했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어떤 철학을 고찰할 때 오로지 사실이 무엇인지, 그 사실이 뒷받침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만을 스스로 물어보라. 당신이 믿고 싶은 것 또는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라. 오직 사실이 무엇인지 그것만 바라보라” 러셀의 말을 덧붙이면, “믿고 싶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우리의 믿음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며,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확신을 피하고 단계마다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는 이런 접근법을 ‘의심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했다.

 

긍정적인 기대가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로 부정적인 기대가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골렘 효과는 우리 세계의 구조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상대에 대한 나의 기대가 상대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결정하듯, 상대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상대의 기대와 그에 따라 나에 대한 상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인간 조건의 핵심이며, 우리는 거울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수업시간에 아무도 몰라도 질문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해도 내색하지 않는 일을 심리학에서는 다원적 무지라고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생각이 실제로 다원적 무지의 한 형태일 것이다. 수만 마리의 개미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죽을 때까지 회전하듯이 우리 인간도 질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은 채 계속 빙빙 돌며 몰락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신뢰는 누군가 흐름을 과감히 거스를 때 시작된다. 새로운 현실이다.

 

내재적 동기부여의 힘
인간 본성에 대한 의심이 아닌 긍정적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볼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인간이 천성적으로 탐욕스럽다는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관리자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자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모두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당근과 채찍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자들은 돈에 의존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처벌에 의존했다. 미국의 경영과학자 프레더릭 테일러도 당근과 채찍만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은 내재적 동기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는 동기부여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뒤집었다.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스스로 무언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보다 더 강력한 동기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새로운 운동현실주의다.


비대칭적인 전략
앞에서 서술했듯 인간은 서로를 미러링한다. 누군가 칭찬하면 신속하게 호의로 보답하고, 누군가 불쾌한 말을 하면 헐뜯는 말로 재빠르게 응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간디와 루터 킹 같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은 비대칭 행동을 따랐다. 넬슨 만델라는 석방 직후 외쳤다. “당신들은 총과 칼과 풀을 베는 큰 칼 팡가를 드십시오. 그리고 바다에 던지십시오” 이 한 말로 내전으로 치닫던 아파르트헤이트의 나라 남아공의 인종차별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평화롭게 탄생했다. 치열했던 1차 세계대전 참호 속에 울려 퍼진 크리스마스 캐럴로 적군인 영국군과 독일군이 총을 거두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기억하라.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앞뜰에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심리학과 생물학, 고고인류학,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가장 최근의 증거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이 잘못된 자아상을 기반으로 지난 수천년 동안 항해해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은 내적 성찰과 너무 적은 외적 성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실적 견해는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반드시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 세월 성찰한 것을 바탕으로 열 가지 삶의 규칙을 제시한다. 1) 의심이 드는 경우 최선을 상정하라 2) 윈윈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생각하라 3)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하라 4) 공감을 누그러뜨리고 연민을 훈련하라 5)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6)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가진 것을 사랑하라. 7) 뉴스를 멀리 하라 8) 극단과 냉소주의를 버려라 9) 벽장에서 나오라 10) 현실주의자가 되라 “인간의 본성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으며 협력적이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
가정의 달 5월, 무너진 가정이 너무 많다. 가정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내와 함께 경의선숲길을 걸었다. 어릴 때 뛰어놀 던 곳이라 정겨웠다. 레일 위를 걸어가고 기차를 따라 달려가던 추억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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