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해양수산 관련 지식인 1,000인 모임’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행한 대면 행사로, 그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기쁨이 그토록 클 줄 몰랐다. 그곳에서 콤파스 회원들을 일부나마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콤파스 재개를 기다리는 마음은 모두가 한결같았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해운인들은 해양, 기후, 조선산업의 정책 분야에 대한 공동선언에 이어 최근 해운업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과 관련하여  ‘공정위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번 과징금 사태는 참으로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해운업의 존립과 근간을 흔드는 조치가 될 수 있다. 이는 장기 해운불황으로 질식 진전까지 몰리다가 이제 겨우 회생하려는 우리 해운업의 숨통을 끊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9일 부산신항에서 행해진 HMM의 컨테이너선 한울호 출항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한진해운 파산으로 무너졌던 한국해운이 기적같이 살아나 해운강국의 자존심을 되찾았다”며 “더욱 적극적인 지원대책으로 세계 해운산업의 리더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공정위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린다.


성공하는 조직의 문화는 무엇이 다른가? 실리콘밸리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철학적 혁신가 벤 호로위츠가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최강의 조직(What you do is Who you are)’ 책에 담아 답을 주었다. 호로위츠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후 벤처캐피털 앤드리스호로위츠를 창업하여 크게 성장시켰고, 라우드클라우드와 옵스웨어의 창업자 겸 CEO로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인 인물이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하드씽’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직을 변화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호로위츠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아주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색인들의 리더십을 골라 독특한 방식으로 혁신의 정의를 다시 내리며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사례를 제시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역사 속의 리더는 서반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흑인반란으로 아이티혁명의 일등공신이자 천재적 군사지도자인 투생 투베르튀르, 무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덕목을 가치보다 우선시했던 일본의 사무라이, 정복지에서 인재를 발탁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이끌었던 칭기즈칸, 갱단 두목으로서 교도소 내 문화혁명을 이룩한 인간승리의 주인공 샤카 상고르 같은 역동적인 인물들을 토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런 사례를 토대로 가장 강력하며 지속가능한 문화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경험론적 관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당신의 행동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최강의 조직’의 원래 제목은 ‘당신의 행동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What you do is Who you are)’. 당신이 누구인가는 벽에 걸어놓은 가치목록으로 설명될 수 없다.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것은 바로 당신의 ‘행동’뿐이다. 행동이 곧 당신 자신이다.
문화란 무엇일까? 조직문화에 영향을 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우드클라우드의 CEO로 있을 때 회사 문화가 자신의 가치와 행동과 성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에너지를 솔선수범의 리더십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시간의 지나면서 당혹스러운 현실에 직면하여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날로 성장하고 다양화하는데 문화를 구축하는 방법은 계속 제자리였다. 한마디로 통일성과 확장성이 없었다. 문화가 조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조직문화는 바로 그 기업의 영속성 즉 지속가능성을 의미하며, 문화를 세운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혼자 있을 때도 그 조직이 원하는 방향과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대표적 문화 모델 네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이 어떻게 조직문화를 구축했는지 살펴본다. 인류역사상 성공한 노예혁명이 단 한 번뿐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아이티혁명의 영웅 루베르튀르는 노예반란을 조화롭게 조직하기 위해 어떻게 노예문화를 재설계했을까? 일본의 사무라이 행동강령인 무사도가 무엇이기에 무사계급이 700년간 일본을 지배하고 오늘날 일본문화를 형성하는 주축이 될 수 있었을까? 또한 칭기즈칸이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또한 샤카 상고르는 살인죄로 19년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교도소 내 갱단을 이끌어 가장 단합이 잘 되고 용맹한 집단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조직으로 만든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문화’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배척했던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 문화적 도구들을 고안해냈다. 문화는 리더가 행동으로 문화에 명백히 참여하고 말로써 그것을 옹호하는 토양에서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문화와 혁명-루베르튀르와 아이티혁명
노예제는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언제나 인류와 함께했다. 심지어 1600년대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였다. 그런 노예제가 어떻게 종식될 수 있었을까? 노예제라는 악습의 고리를 끊은 것은 인류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고, 그 중의 최고봉은 아이티혁명이었다. 유구한 인류역사에서 독립국가를 탄생시킨 성공한 노예혁명은 아이티혁명 단 한 번뿐이었다. 노예로 태어난 한 남자가 노예문화의 새 판을 짰다.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투생 루베르튀르는 아이티의 옛 이름인 생도맹그에서 오합지졸 노예병사들을 막강한 군대로 변모시켜 당시 유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스페인, 영국, 프랑스를 차례로 무찔렀다. 도대체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루베르튀르는 1743년 생도맹그의 브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어릴 적 루베르튀르는 하도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그의 부모조차 아들을 병든 말라깽이라고 부르며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160센티미터의 단신인데다 외모도 볼품없었으나 눈이 날카롭고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성품도 좋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책을 좋아하여 주인의 서재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독서했고, 독학으로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경제에 관한 기초지식도 쌓았다. 그런 루베르튀르에게 은인이 나타났다. 농장의 변호사가 그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마부로 삼았다가 이내 자유인으로 풀어줬다. 그동안 루베르튀르는 마차를 몰 때마다 이를 인맥 확대의 기회로 만들어 훗날 혁명 동지가 된 거의 모든 사람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이해하고 통달할 수 있었고, 생도맹그 식민지에서 일찍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 아니라 문화라는 사실이었다. 루베르튀르는 노예반란을 기다리던 노예해방지지자 레널 신부의 유명한 글을 읽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용감한 지도자뿐이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의 명으로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억울한 처지에 놓인 어린 양들을 책임져줄 위대한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레널 신부의 글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고 자신이 용감한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 소식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에도 전해졌고, 반란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40대 후반이던 루베르튀르는 반란군에 합류하여 혁혁한 무공을 올리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유럽의 강대국 스페인, 영국, 프랑스와 차례로 전쟁을 벌이며 승리를 거뒀다. 1801년 루베르튀르는 자신이 노예로 있던 섬 전체를 다스리는 총독에 올라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였다. 새로운 헌법은 노예제도를 폐지했고, 모든 직업을 모든 인종에게 개방했으며, 생도맹그가 사실상 독립국으로 활동하도록 보장했다. 불과 10년만에 루베르튀르와 그의 군대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반란의 한복판에서 그는 두 가지 능력을 증명했다. 첫째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하는 지휘관의 능력, 둘째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비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영감을 주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노예문화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문화로 탈바꿈시켰다. 루베르튀르는 결혼, 정직, 충성의 3대 사회적 가치를 노예병사의 문화 DNA에 깊이 각인시켜 그들이 엘리트 정예병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그는 아이티혁명을 성공시키고 종국에는 위대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개인의 근면성, 사회의 도덕성, 공공교육, 종교적 관용, 자유무역, 시민의 긍지, 인종간 평등에 토대를 두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꿈꾸던 삶의 방식을 영원히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노예문화에서 자유문화로 전환하는데 유익한 토양이 됐다. 그의 영향력은 미국 땅에도 닿아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에게 영감을 주어 노예봉기에 이어 남부의 분리와 남북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종국에는 노예해방으로 연결되었다.


전사의 방식-무사도
고대 일본의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에겐 무사도 또는 전사의 도리라고 부르는 강력한 규율이 있었고 그들은 이를 목숨같이 여겼다. 이는 약 700년간 일본을 통치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일본문화의 근원적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사도는 원칙이라기보다는 행동강령이었고, 사무라이 문화는 가치가 아닌 덕목이었다. 사무라이의 4가지 서약인 사서원(四誓願)은 “무사도를 따른다. 언제든 주군을 섬긴다. 어버이를 공경한다. 큰 자비로 타인을 이롭게 한다”이다. 사무라이의 정신과 지혜를 담은 고서 ‘하카쿠레’에는 “사람이 용기가 있는지 비겁한지는 평상시엔 알 수 없고 위기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며, 무사도란 죽음으로써 깨닫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무사도는 8가지 덕목인 의, 용기, 명예, 충, 인, 예, 극기, 진실이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며 어느 것 하나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적용할 수 없다. 사무라이 정신이 그토록 오랜 기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기법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다. 첫째 사람들이 사무라이 정신을 잘못 이해하거나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적 또는 윤리적인 잠재적 딜레마의 모든 변이를 상세히 기술했다. 둘째 생생한 예시들을 제공하여 사무라이 정신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하카쿠레가 전하는 충의 덕목을 이해할 수 있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와키(磐城)의 나카무라에 살던 소마(相馬) 영주의 가족사는 치켄 마로카시라고 불리는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둘도 없는 귀중한 족보였다. 1년 전 소마의 저택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했다. 소마 영주는 애통해하며 말했다. “저택과 가재도구야 나중에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 불에 타버려도 전혀 애석하지 않으나 우리 가문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가보인 족보를 꺼내오지 못해 비통하구나.” 그때 한 하인이 나서며 말했다. “소인이 서툴고 영민하지 못해 그동안 나리께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했으나 이제 제 한 목숨 바쳐 주인님의 가보를 가져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화마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후 불을 다 끄자 엎어져서 까맣게 탄 하인의 시신이 나타났고 그의 복부에서 피가 품어져 나왔으나 자신의 배를 갈라 족보를 집어넣었기에 불에 타지 않았다. 그때부터 소마의 족보는 ‘피의 계도’라는 뜻으로 혈계도(血系圖)라고 불리게 되었다”


무사도가 일본 사회에 그토록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사무라이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정교한 심리적 기법들을 사용하여 문화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개선했기에 사람들은 그 문화를 잊을 수 없었으며, 숨쉬기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들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비장하게 행동했다. 주군을 섬기는 것은 물론 예능과 가업, 학문 나아가 정치도 진검승부였다. 사무라이 정신을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려면 명예를 불멸의 덕목으로 여기고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동, 예를 갖춘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 신조차 바꿀 수 없는 말 즉, 진실성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교도소 갱단 두목-샤카 상고르의 인생 역전
샤카 상고르는 시대와 장소를 잘못 만났다. 고대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사무라이의 삶이 아주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사무라이와는 다른 길을 가는 전사가 됐다. 상고르의 본명인 제임스 화이트는 살벌한 교도소 문화를 통해 극단적인 폭력과 위협을 체험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교도소에 처음 수감됐을 때 이제부터 교도소가 자신의 집이며 평생 그곳을 들락거리며 살게 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살인죄로 19년이나 교도소에 수감된 전과자 상고르는 특이한 문화를 구축하여 조직을 경영하는 방법에 관한 가장 통찰력이 뛰어난 한 교도소의 갱단 두목이 됐다. 그는 문화를 세웠고, 그 문화의 결함을 정확히 인지했으며, 그런 결함을 고쳐 더 나은 문화로 탈바꿈시켰다.

 

상고르는 교도소 문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세밀하게 공부하며 그 문화에 동화됐으며, 계급 사다리를 올라갈 때마다 그 문화를 주도면밀하게 개선했다. 마침내 그가 갱단의 우두머리가 됐을 때 새로운 선택에 직면했고, 그런 선택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깨달았다. 생사가 걸린 그의 결정과 진실성을 시험하는 순간들이 합쳐져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문화로 직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문화는 믿음이 아니라 여러 행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므로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문화가 만들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교도소에서 실시하던 기존의 교정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피상적이고 허접했다. 예를 들어 프로그램 중에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라(Stop, Think, Practice)’는 것이 있었다. 일명 STP로 불린 이 아이디어는 만약 사고를 칠 것 같으면, 일단 멈춰서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논리였다. 세상일이 이론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갱단의 리더 상고르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일일수업을 시작했다. ‘진짜 사람, 진짜 이야기(Real Men, Real Talk)’라는 수업에서 인간의 내면, 정서적인 부분을 깊이 탐구했다. 그의 목표는 재소자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사회로 복귀한 출소자들이 교도소에서의 경험을 발판 삼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상고르는 2010년 형량을 마치고 출소했다.

 

샤카 상고르는 어떤 사람일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전과자이자 교도소 갱단 두목일까, 아니면 교도소 개혁의 리더이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가일까? 그에겐 둘 다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문화는 추상적 원칙이고 문화의 성패는 구성원들이 어떤 결정을 하고 그것을 잘 실천하는가에 달려있다. 문화의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하며,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리더의 책무이다. 카리스마가 강한 리더는 자신의 문화를 실제와 다르게 각색한다 해도 사람들은 잠시 그 리더를 믿을 것이나 결과는 바뀌지 않으며, 조직에 필요한 행동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핵심적인 문화적 특성의 하나는 협업이다. 협업은 모든 곳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문화를 바꾸려면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것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직원들이 반드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칭기즈칸-정복왕의 놀라운 포용성
칭기즈칸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리더들이 눈앞에서 놓치는 핵심을 정확히 포착했다. 칭기즈칸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지도자였다.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최고의 정복자였다. 고작 1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3,100만㎡의 광활한 땅을 정복했다. 오늘날의 국가와 기업들은 포용적 문화를 구축하는 방법에 매우 서툴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1,000년 전에 이 어려운 방법을 완벽히 통달했다. 그는 중국, 페르시아, 유럽 등의 다양한 지역과 이슬람, 불교, 기독교 등의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식인 풍습을 가진 사람들까지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 하나로 통합했다. 그는 포용성이라는 바위같이 탄탄한 토대 위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고, 그의 사후에도 몽골제국은 150여년이나 성장을 이어갔다. 칭기즈칸의 본래 이름은 테무진으로 그는 척박한 변방의 작은 유목 부족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추방자가 되어 떠돌아다니며 성장했다.

 

개를 무서워했으며 사소한 일에도 잘 울었던 소심한 그가 어떻게 무소불위의 정복왕이 되었고 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바로 문화적 혁신이었다.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참으로 잔인했다. 그의 군대는 무자비한 만행을 일삼아 저항하는 적군을 무참히 도륙하였고 정복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칭기즈칸에게 그런 잔인한 얼굴 말고 다른 얼굴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껏 볼 수 없던 새로운 종류의 수용성과 포용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화를 구축하면서 3가지 원칙인 능력주의, 충성, 포용성이라는 토대 위에 놀랄 만큼 안정적인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테무진은 1189년 몽골을 통일한 후 기존의 계급제도를 버리고 능력주의라는 실리를 택했다. 세습되는 모든 귀족 칭호를 없애고 계층적 계급구조도 폐지했다. 모든 남자가 동등해져, 양치기와 낙타를 돌보는 소년도 이제는 장군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울러 능력주의가 정착될 수 있도록 법치의 개념을 도입하여 통치자들도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했다. 이 원칙에서 예외인 사람은 오직 칭기즈칸 본인뿐이었다. 칭기즈칸은 충성을 요구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변절자는 처형했고 비록 적이지만 자신의 주군에게 끝까지 충성한 사람은 중용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부하들은 끝까지 배반하지 않고 칭기즈칸에게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충성했다. 또한 칭기즈칸의 포용성은 혈통, 인종, 종교를 초월했다. 그는 유화정책으로 고도로 문명화한 위구르족의 항복을 받아냈고, 위구르의 많은 관리를 등용하여 능력에 맞게 제국 전역에 배치했다. 특히 의사와 학자, 기술자를 중용하여 방대한 기술지식을 축적하여 선진 무기를 갖춘 진보적인 군대조직을 편성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한 이후에도 몽골제국을 물려받은 통치자들은 그의 다문화적 접근법을 계속 유지하여 놀랄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몽골의 기술자들은 중국의 화약과 이슬람의 화염방사기를 결합하였고, 유럽의 종을 주조하는 기술을 융합하여 신무기 대포를 만들었다. 칭기즈칸은 포용주의 문화를 법제화하였고, 정복지 신민들이 그에게 충성만 맹세하면 누구도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와 법을 그대로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는 인재를 발탁하는 능력이 탁월한 실용주의와 실리주의를 추구한 리더였다.
칭기즈칸은 혈통적 한계와 추방자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정복자가 되었고, 이후에는 기존보다 더욱 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제국을 재편했다. 기업이 경쟁우위를 위해 인재를 영입하려면, 당대 최고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한 칭기즈칸의 원칙들을 활용해야 한다. 그는 단순히 국가적, 인종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인지적, 문화적 다양성까지도 섭렵했다.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는 문화를 설계하라
“아무리 좋은 덕목이라도 모든 조직에 정답은 아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피터 드러커는 “문화는 아침식사로 전략을 먹어치운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의 숨은 뜻은 “경영자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문화와 전략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먹어치우는 사이가 아니라 반드시 한 몸처럼 움직여야 성공한다. 칭기즈칸의 군사전략은 거의 모든 병사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했다. 바로 자급자족하는 기병이었다. 따라서 그의 평등주의적 문화는 그의 전략적 니즈에 완벽히 부합했다. 샤카 상고르의 전략도 교도소 내의 다른 갱단들보다 규모는 작아도 좀 더 엘리트다운 정예 갱단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동지애를 중심으로 문화를 구축했고, 이는 대형 갱단들이 꿈도 꿀 수 없는 문화였다. 가장 신속하게 혁신함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달성하고 싶은 기업에는 페이스북의 초기 슬로건인 “발 빠르게 움직이고 낡은 틀은 깨뜨려라”가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너무 앞서가다 파탄에 이른 항공기 제조사 에어버스에겐 그 슬로건이 함정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성공적인 문화구축의 핵심은 기업과 회사가 사명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덕목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문화를 설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덕목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은 첫째가 영리함이다. 이것은 IQ가 높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학습성향, 다른 말로 배움에 대한 의지를 말한다. 둘째 겸손으로 온순하거나 야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인식과 열린 마음이다. 셋째 근면성실로 단순히 오래 일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되어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 넷째 협업으로 복종이나 공손함이 아니라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며 목표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어떤 기업의 직원이든 스스로 묻는다. “내 업무가 우리 회사에 변화를 가져올까?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할까? 내 일이 회사를 성장시킬까? 내 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경영진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그런 질문에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강력한 문화의 보편적 요소인 인정과 보상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문화적 요소 중에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진실성을 덕목으로 선택했을 경우, 제품의 품질과 납품일정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진실성은 예정된 납품일정을 반드시 지킨다는 뜻일까, 아니면 고객이 기대하는 품질을 제공한다는 뜻일까? 덕목의 효과성을 점검하는 데에 유익한 몇가지 질문이 있다. 덕목을 행동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 덕목이 당신의 문화를 차별화하는 요소일까? 이 덕목이 시험대에 오르는 일이 생겨도 이 덕목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극단적 사례와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주는 교훈
“누군가 선을 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어느 정도 당신의 문화가 그런 행동이 용납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떤 조직의 문화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후는 다음과 같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자주 사직서를 낸다. 최우선 순위에 문제가 있다. 직원의 어떤 행동 때문에 큰 충격을 받는다. 위임과 통제라는 의사결정의 문화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고위직의 의사결정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내 방식을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라 2)모두에게 공평한 발언권이 주어진다 3)모두가 기여를 하되 결정은 내가 한다 기업경영에서 세 번째 유형이 대체로 효과적이다. ‘내 방식을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라’는 독불장군 유형으로 모든 구성원을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로 만든다. 반면에 ‘모두에게 공평한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민주주의적 유형은 중구난방이 되기 쉽다.

 

직원들은 의외로 첫 번째 보다 두 번째 유형의 상사를 더 싫어한다. CEO를 평가하는 기준은 결정과정의 효용성과 결정의 정확성이다. ‘모두가 기여하되 결정은 내가 한다’는 절충형의 리더는 풍부한 정보에 입각한 의사결정과 속도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회사 업무에 대한 실질적인 발언권을 가지면 업무 몰입도와 생산성 모두 크게 향상될 것이다. 반면에 결정권한을 지나치게 낮은 직급에 위임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제품군 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사업부 간의 소통이 무너지고, 최고 인재들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수 없다. 따라서 권한의 위임이냐 통제냐에 관한 문제에서 최종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지금이 평시인가 아니면 전시인가이다. 평시와 정시의 CEO의 경영방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평시형 CEO는 외교적이고 참을성이 많으며 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주 세심하게 알아차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팀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는 편이다. 반면에 전시형 CEO는 갈등상황이 오히려 편하고 조직이 나아갈 방향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에 집착하며, 완벽함을 빼고는 무엇에든 인내와 관용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는 방법
 “위대한 성공 뒤에는 위대한 문화가 있다” 지금까지 사무라이와 칭기즈칸에서부터 교도소 갱단과 아이티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문화를 두루 살펴봤다. 이런 문화 기행을 통해 어떤 문화도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사실상 어떤 덕목도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기업의 문화는 리더의 개성과 믿음과 전략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회사가 성장하고 여건들이 변함에 따라 문화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문화를 구축할 때 염두에 둬야 하는 몇 가지 점검표를 제시한다. 1)자신에게 충실한 문화를 설계하라 2)문화 오리엔테이션의 중요성을 기억하라 3)파격적인 규칙을 세워라 4)외부의 리더를 활용하라 5)본보기 교훈을 보여줘라 6)윤리를 명백히하라 7)문화적 행동강령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라 8)언행을 일치해라 9)우선순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결정을 하라 문화의 출발점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그런 덕목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요, 진정한 리더가 된다는 뜻이다.

 

‘바다와 사람들’
‘바다와 사람들’은 해양 칼럼니스트 나송진이 들려주는 바다와 사람, 그리고 선박의 숨은 이야기다. 해양대학을 나온 나송진은 항해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방문한 60개 나라와 100여개 항구, 운하, 선박과 박물관 그리고 국내의 많은 항구, 어항, 섬들을 다니며 수백 척의 상선과 어선 등에서 모은 자료와 사진을 엮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바다와 사람들’은 1장 바다로 나간 사람들, 2장 역사적인 선박들, 3장 바다 이야기, 4장 배 이야기로 꾸며져 있는데, 바다와 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선원으로 일하고 선박특허를 받은 링컨 대통령, 항해학교를 세우고 해도와 범선을 개발하며 탐험을 지원한 엔리케 왕자, 총리와 해양대학장을 역임한 영국 엑스트라 마스터 신성모 선장과 관련한 이야기와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호, 선박 안전의 영원한 교훈 바사호, 덩케르크 기적을 이룬 민간 소형 선박들, 억류를 피해 명예롭게 자폭한 그라프 즈페호, 최다 건조된 전시표준선 리버티형 선박에 얽힌 이야기, 세계 바다를 둘로 나눈 토르데시야스 조약, 영국의 운명과 세계사를 바꾼 틸버리 연설, 잠수기구를 탔고 해양도시를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 잠자는 조선을 깨운 표류자 홍어장수 문순득, 항해역사를 바꾼 선박시계 발명자 해리슨,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동로마 함락, 종의 기원 진화론의 찰스 다윈과 비글호 등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그는 유학과 국제기구 파견 및 해외출장 중에 틈틈이 해양과 관련된 역사적인 곳을 방문하였는데, 멀리 북극해 아이슬란드부터 남반부 시드니까지 두루 답사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바이킹 야외 의회장, 유럽 최북단 어항 호닝스버그와 노드캅, 노르웨이 로포텐 대구박물관, 한자동맹도시 베르겐, 로스톡, 비스뷔, 포르투갈 리스본 발견탑, 런던 해양박물관, 스톡홀름 바사호, 호주 엔데버호와 해양유적지 덴마크 크론보르성 등등... 그는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였고,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배와 바다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의 승리였다. 대국민 해양사상 고취와 함께 청소년들에게 해양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일깨워주는 해양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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