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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576호] 2021년 09월 01일 (수) 13:45:35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timkang@hanmail.net

한다 못한다 말도 많던 도쿄올림픽이 8월 8일 끝났다. 아베 전 일본수상이 일본 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야심차게 유치한 올림픽이었으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최 여부가 끝까지 불투명했었다. 1년을 연기했음에도 진정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올림픽 사상 초유의 전 경기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다. 폭염과 감염 위험으로 국내외 비판이 쏟아졌으나 강행했다. 선수와 진행요원들 모두 기진맥진했으나 이를 이겨낸 선수들의 분투와 인간승리에 지구촌이 환호했다. 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하나 됐다. 양궁과 펜싱 선수들이 뛰어난 기량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우리 국민들은 열광했고, 수영과 탁구, 체조의 어린 선수들의 활약에 행복했다. 특히 실력차이를 투혼으로 극복하고 세계 4강에 오른 여자배구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반면에 고액 연봉을 누리면서도 실망스런 경기를 펼친 축구와 야구선수들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타오르던 성화의 불도 꺼졌다. 이젠 환호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3년 후에 열릴 파리올림픽을 향해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 달려 나가야겠다. 강력한 델타변이와 거리두기 4단계 조치로 심신이 지치고, 콤파스를 기다리는 마음도 무뎌간다. 오직 회원들의 건강을 빌 뿐이다.


불볕더위 8월에 읽은 책은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이라는 부제의 ‘로마의 운명(Fate of Rome)’. 저자는 21세기의 에드워드 기번이라고 불리는 오클라호마대 역사학과 카일 하퍼 교수다. 이 책에서 그는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위대한 교훈을 제시했다. ‘로마의 운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로마제국의 몰락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더타임스와 포브스, 아마존 모두 하퍼의 ‘로마의 운명’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이후 최고의 책으로 극찬하며 올해의 책, 이달의 책으로 선정한 배경이다.


로마의 시인 클라우디아는 로마에 대한 경외감이 넘치는 언어로 연설했다. “로마는 소박하게 출발하여 웅장함을 향해 뻗어나갔으며,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태양이 비치는 모든 경계까지 그 권력을 확장해나갔다. 그 도시는 군대와 법의 어머니였다. 천 번의 전투를 치렀고, 도시의 영향력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로마는 왕비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정복자를 가슴으로 받아들였고, 그녀에게 굴복한 평범한 이름을 지닌 인류를 보호하며 그들에게 시민권을 나눠 주었다” 이 말은 시적 상상력이 아니다. 명예로운 로마인들은 세상의 끝인 시리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지배했다. 유사 이래 지리적 규모에서나 공공의 복지 능력에서나 로마만큼 성취를 이룬 제국은 없었다. 하지만 시인의 확신에 찬 연설은 곧 물거품이 되었다. 로마는 잔혹한 포위공격을 당했고, 8백년 만에 처음으로 영원한 도시가 고트족의 침입으로 유린됐다. 로마제국의 몰락이 시작되는 긴 여정에서 극적인 순간이었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세계가 멸망했다. 로마의 멸망에 대해 영국의 역사가 기번은 이렇게 정의했다. “로마의 쇠퇴는 무절제했던 위대함이 맞닥뜨리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번영이 무르익으면 쇠락하는 게 원칙이며, 정복한 범위가 넓을수록 몰락할 원인은 배가된다. 시간 또는 우연이 부자연스러운 지지를 거두는 순간, 거대한 조직체는 자신의 무게에 굴복하고 만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곧 인간의 야심에 대한 자연의 승리였다. 로마의 운명은 황제와 야만인들, 원로와 장군들, 병사와 노예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또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과 태양주기의 영향도 컸다. 최근에야 우리는 생태환경 변화라는 거대한 드라마에 로마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배역을 맡고 등장했다는 사실을 과학적 도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종말을 얘기할 때 인류와 질병 생태계를 비롯한 자연과 환경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로마의 운명’은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할 문명이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허망한 꿈을 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환경과 제국
역사상 로마의 발흥은 경이로운 이야기다. 지중해 지역의 정치권력 가운데 로마가 상대적으로 가장 후발주자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고대사를 군주제, 공화제, 제국의 세 가지로 나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인들은 로마 근처에 모여 살며 도시를 건설했고, 수백년 동안 이웃나라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 고대 세계의 지중해 해역은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패권을 잡고 있었다. 문맹의 로마인들이 가축도둑에 불과할 때 그리스인들은 서사시를 쓰며 민주주의를 실험했고, 가까운 해안에서는 카르타고의 포에니족이 야심찬 제국을 건설했다. 25킬로미터나 내륙으로 들어간 티베르강의 축축한 강둑에 자리잡은 로마는 고대 세계의 창조성과 번영을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로마가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에 지정학적 무질서가 넓게 펼쳐진 시기와 일치한다. 적절한 역사적 순간에 로마인들은 공화정과 군국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채 전례 없는 국가건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가 지배하는 해안선이 확장되어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우리 바다(mare nostrum)’라고 불렀다. 수로는 제국의 순환 시스템이나 폭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닫히는 추운 겨울에는 모든 마을이 섬으로 변했다. 에너지는 당연히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기 위한 로마제국의 수직적 공간적 성취가 절실했고, 로마인들은 지구상 서로 다른 지역들을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역사상 로마와 비슷한 영토를 차지한 나라는 몽골, 잉카, 러시아의 차르 정도였으나, 로마만큼 오래 지속되고 중위도 이상과 열대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린 제국은 없었다. 제국의 북부와 서부는 대서양 기후였으나 생태학적 중심에 지중해가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온을 배경으로 건조한 여름과 축축한 겨울이 나타나는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이 뚜렷했다. 제국의 식량창고 이집트는 완전히 다른 기후체제와 로마를 연결시켰다. 몬순에 의해 물이 공급되는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생태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나일강 홍수를 로마인들을 적절히 통제했다. 로마인들이 단지 무력으로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제국이 오래 유지되는 과정에서 제국의 권력, 그리고 경제와 협상의 논리가 효율적으로 적용됐다.


 공화제의 종말을 주도한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천재이며 타고난 긴 수명은 정치적 기반을 보장받았다. 로마인들은 3개 대륙에서 선택한 엘리트들을 지배계급에 편입시킴으로써 수백명에 불과한 로마인 관료들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제국이 약탈하는 체제에서 호혜의 연방 형식으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는 약탈이 통치로 바뀌며 제국과 더불어 많은 민족도 함께 번성했음을 뜻한다. 로마시의 인구가 백만명을 넘어섰고, 7천 5백만명이 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지구상 인구의 1/4이었다. 제국의 안정성이 인구증가와 경제적 성장의 배경이었다. 병사들이 차고 넘쳤고, 과세율이 높지 않았으나 세수는 넉넉했다. 로마군은 모든 전선에서 적과 비교해 전술, 전략, 물류의 이점을 누렸고 연승했다. 기번도 “세계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대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서 코모두스 황제 즉위까지로 꼽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퇴보
세월이 흘러, 서기 650년 로마제국은 번성했던 과거는 그림자로만 남아 콘스탄티노플, 아나톨리아 그리고 바다 건너 낙후된 쓸모없는 소유지로 줄어들었다. 서유럽은 다루기 힘든 게르만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암흑의 시대라 부른다. 사회발전의 보편적 척도를 창안한 이안 모리스는 로마제국의 몰락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퇴보라고 말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군주제의 틀을 확립했으나 왕위승계의 규칙은 확정하지 않아 운명적인 위기를 맞았다. 권력과 정통성을 얻기 위한 경쟁은 군대를 통솔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 전쟁으로 치달았고, 커진 행정전문 관료집단이 제국을 운영하던 지역 엘리트 조직망을 대체했다. 관료가 많아질수록 국가는 무너지기 쉽다. 재정압박과 관료화로 인해 시스템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국경은 영국 북부까지 뻗어 나갔으며,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프라테스강과 사하라 경계선에 걸쳐있었다. 그 너머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시간은 그들 편이었다. 로마의 적들은 점점 더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위협은 전선과 국가 심장부의 자원 모두를 고갈시켰다. 왕위 쟁탈과 함께 제국의 운명에 치명적이었다.


지구라는 행성의 관점에서 볼 때, 로마인들은 운이 좋았다. 제국은 로마 기후최적기라고 불리는 후기 홀로세 기후 시대의 경계선에서 최대 영토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2세기 중반 그 행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연은 어둠을 틈타 기습하는 군대처럼 인간사회를 붕괴시키는 무시무시한 장치를 가동했다. 기후변화와 질병이 서로 어우러져 로마제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로마제국이 야심차게 사회를 발전시킨 결과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미생물이 번성할 환경도 배양했다. 로마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었는지 이해하려면, 인류문명과 로마인들이 겪은 질병의 역사가 교차한 특정 시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병리학자 윌리엄 맥닐은 그의 저서 ‘전염병과 인간’에서 “세균의 역사를 연결하는 맥락은 신석기 시대에 서로 다른 세균집단이 등장하고 결합했다는 사실이다. 농업이 시작되며 인간은 가축과 밀접하게 지내게 되었고, 도시는 세균이 순환할 수 있는 인구밀집 상황을 조성했다. 교역망이 확장되자 한 사회에 만연한 질병이 처녀지로 몰려들면서 문명화된 질병들이 서로 수렴하도록 이끌었다”고 썼다. 로마인들은 미생물이 무작위적으로 유전자 돌연변이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로마제국의 운명이 팬데믹 태풍으로 무너졌다면, 그것은 구조와 우연의 기묘한 혼합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파멸을 향해 쇠퇴해가는 과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길고, 우회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이야기, 회복력이 강한 정치 구성체가 그 과정을 견뎌내고 스스로 재편되었다가 막을 내렸다.


인간의 문명 이야기 로마의 흥망성쇠는 모두 환경과 관련된 드라마였다. 제국이 번영을 누렸던 2세기의 황금시대,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가 유입되어 팬데믹이 돈 뒤의 파탄, 3세기의 기후와 전염병의 재앙 속에서 제국의 붕괴와 부활, 4세기의 페스트라는 핵폭탄, 은밀히 시작된 빙하기, 성전에 임하는 이슬람 군대에 의해 정복되는 과정 모두 그러하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본질적으로 로마제국은 지리적 요소와 정치적 기술이 어우러져 그 형태가 결정되는 군사 패권주의 틀을 지녔다. 로마의 황제들은 한계비용에 대한 개념이 있어 무익한 야만인의 땅으로 제국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신중하게 통치를 지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로마의 병사는 30개 군단의 16만명에 달했다. 여기에 해군과 비정규 군대를 더하면 50만명에 달해 세계 최초로 가장 규모가 큰 상비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훈련과 최고의 장비를 갖춘 군대였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려면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방위비는 국가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었다. 군대의 급여 예산은 제국 전체 GDP의 2~3%로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군사적 지배로 오랜 기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속주민과 시민 모두에게 보상이 돌아갔기에 기꺼이 세금을 냈다. 로마의 경제가 종말을 향해 간 것도 아니고, 끝없는 성장에 들어섰던 것도 아니라면 왜 곧 이어 변곡점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은 체제 내부에서 비롯된 인구과잉으로 제국의 경제가 붕괴되었다는 이론보다는 자연이 먼저 개입했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기원전 2250년부터 홀로세 후기가 시작되어 지구의 기후가 재편되었다. 이른바 열대수렴대 즉 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이 적도로 수렴되는 지대가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이로써 사하라와 근동 일대의 사막화가 급격해졌고, 계절풍은 더 약해졌다. 엘니뇨가 잦아졌고, 북대서양의 기압변동이 감소했다.

 

이렇듯 홀로세 기간에 기후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지구 시스템의 복잡한 피드백과 한계점 메커니즘으로 물리력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작동했다. 화산활동과 태양의 변동성이다. 화산폭발은 대기 속으로 황산 구름을 뿜어냈고, 방사선을 우주로 반사시켰다. 로마 기후최적기에는 태양의 활동이 높고 안정적이며, 화산활동도 잠잠했다. 로마 시대가 온난했다는 신호는 분명하다. 나무의 나이테가 로마의 기후최적기가 온난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는 로마의 곡창지대였고, 드넓은 지중해 지역이 온난함, 강수량 그리고 안정성을 보이는 등 제국의 태평성대 시절에 로마의 기후는 성장을 위한 훌륭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교역과 기술 그리고 기후는 서로 힘을 합쳐 로마의 개화에 박차를 가했다. 경작지가 확장되고, 수확량을 예측할 수 있고, 생산량이 풍부해진 농업은 교역의 핵심인 분화가 일어나도록 이끌었다. 풍부한 생산량은 기술자본이 되는 부를 양산했다. 수도의 수백만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선체가 깊은 곡물선이 소형 선단을 이루며 바다 위를 오갔다. 알렉산드리아 선대의 선두 신호용 배를 발견하면 군중은 기뻐하며 이탈리아 해변에 몰려와 넋을 잃고 선단의 도착을 바라보았다. 로마로 향하는 곡물수송이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졌고, 상인들은 곡물을 수도로 옮기는 대가로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로마인들은 제국의 힘을 과시한 파르티아 원정이 제국에 팬데믹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 전쟁은 절정기에 있는 로마의 힘과 미묘하게 전한된 흐름 양쪽을 드러냈다. 무적의 로마 군대가 압도적인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했을 때 핏빛으로 물든 소식이 동쪽에서 날아왔다. 로마 군대는 항복한 주민들이 신뢰를 깨뜨렸다며 폭력을 휘뒤르며 도시를 약탈했다. 약탈의 혼란 속에 로마 병사 하나가 사원 안에 놓인 상자를 열었을 때 역병을 일으키는 나쁜 증기가 흘러나왔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어 페르시아 국경지대에서부터 라인강과 갈리아에 이르기까지 전염병과 죽음이 곳곳을 오염시켰다. 이 대재앙은 황제 가문의 이름인 안토니누스 페스트로 불렸고, 이 전염병의 등장은 로마사와 자연사 양쪽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 천연두인 안토니누스 페스트는 우연의 산물이었고,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반복된 진화의 실험 끝에 도달한 예상치 못한 최종 결과였다. 범세계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연결망을 지닌 제국이 역사상 최초로 팬데믹이 발발할 수 있는 생태적 조건을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로마와 팬데믹
로마제국은 160년대에 신종 감염병의 진화와 운명적으로 마주쳤다. 로마세계에서 질병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제국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서식자에게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밀집된 도시 거주지, 지형의 끊임없는 변화, 제국 내부와 외부로 강력하게 연결된 교역망, 그 모든 것이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생태계 형성에 기여했다. 악취가 풍기는 제국의 도시들은 장내에 기생하는 세균을 배양하는 접시와 같았고, 밀집된 연결망을 통해 만성 질병이 제국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팬데믹 도래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중보건과 항생제가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감염성 질병은 인류의 첫 번째 공공의 적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포도상구균 감염에서부터 슈퍼살해자인 천연두와 페스트에 이르기까지 감염병은 인간의 대규모 사망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하는 치명적 세균집단들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역사적 시대와 공간과 함께 변화한다. 우리의 수렵-채취인 조상들은 지구에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기생충을 얻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균은 부담스럽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다음에 일어난 신석기 혁명이 폭력적인 감염병의 빅뱅을 일으켰다, 유랑하던 조상들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밀집된 곳을 좋아하는 작은 벌레들이 번성할 수 있었고, 질병은 인간과 붙어사는 가축으로부터 인간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인간사회 사이에서 꾸준히 이어지는 연결망들은 단지 오래된 세균집단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별 세균집단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메타개체군으로 변화하여 치명적 세균으로 유랑한다는 사실이다.

 

질병사의 주요 드라마는 야생의 숙주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세균들이 계속 출현하는 것이며, 점차 연결성이 증가하여 감염시킬 인간집단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로마시는 당대에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웅장함은 그 도시를 건설한 인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서식자에게 큰 혜택이었다. 도시는 하수, 위생시설이 근거리에서 공급된 덕분에 질병 생태계가 뚜렷했다. 도시에 모여 살던 로마인들은 도시의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지는 현상인 도시묘지 효과에 희생되었다. 도시는 성장했지만, 바로 그 성장이 건강에 해로웠다. 로마는 가장 미물인 세균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상업적 연결이 원활해지면서 로마는 국경밖 외부세계의 신흥 전염병이 노출되었고, 로마의 질병 생태계를 구성하는 가장 운명적 요소였다. 아프리카 해변에 바짝 붙어서 우기의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상인들은 보이지 않는 교류의 중개상이었다. 배와 물건이 가는 곳에는 병원균도 함께 간다. 자연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고전적 관념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야생은 새롭고 격렬하며 어마어마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팬데믹이 마을들을 휩쓸어 세금 납부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구 감소가 빚어졌다. 군대도 역병으로 큰 타격을 받아 서기 172년 무렵에 군대가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유아와 어린이들이 사망하여 제국의 연령 구조에 잃어버린 세대가 속출했다. 페스트 바이러스는 수도 주민 30만명을 감염시켜 절반을 죽게 했고, 제국의 인구 7천 5백만명 중에 7~8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역사상 최악의 질병이었다. 로마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은 팬데믹이 인구에 미친 중대한 영향 탓에 수많은 기록들이 갑자기 중단되었음을 확인했다. 역병이 끼친 경제적 충격도 심각하여 토지가격이 폭락하고 노동력 부족으로 생산성이 급격히 줄어들어 식량난에 굶주려야 했다.
“죽은 이를 매장할 준비를 하자마자, 곧 자신이 매장될 차례다. 모두 한순간일 뿐이다. 인간의 일은 정말로 덧없고 가치 없다는 사실에서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스토익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일기다.

 

기울어 가는 제국
240년대와 250년대의 로마제국은 구체적이고 갑작스러운 타격이 이어지면서 체제 회복의 탄력성 한계를 넘어섰다. 타들어가는 가뭄과 팬데믹 페스트가 고트족과 페르시아 칩입을 합친 위협보다 더 큰 충격으로 제국을 강타했다. 로마의 기후최적기 동안 미소짓던 나날들이 2세기 후반에는 신속하게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기후최적기는 조용히 사라졌고, 그 뒤를 이은 것은 후기 로마 과도기였다. 급격한 변화의 시기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변화는 지구적 규모였다. 태양의 변동성이라는 외부 강제적 메커니즘으로 인해 로마인의 머리 위에서 태양이 점점 약해져갔다. 서기 240년대에는 일조량이 급격히 감소했고,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알프스산맥의 빙하가 확장되고, 멀리 떨어진 스페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트라키아에도 얼음이 얼었다. 모든 로마권이 추워지고 있었다. 특히 지중해 지역의 남쪽에 심각한 가뭄이 있었고, 북아프리카도 가뭄으로 시들어갔다. 궁핍한 상황에서 로마는 제국의 창고 이집트를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푸른 리본 형태인 나일강 계곡 주변의 녹지대는 놀라울 정도로 비옥했다. 나일강 계곡의 독특한 생태는 지중해 기후가 미미하게 변할 때마다 제국의 울타리 역할을 해줬다. 이렇듯 로마의 빵 바구니 역할을 하는 이집트는 제국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오랫동안 유리한 조건에 놓인 이집트의 생산성에 의존하며 로마인들이 누리던 행운은 고갈됐다. 로마는 이집트에서 매년 적어도 4백만에서 8백만 아르타바를 추징해왔다. 그러나 가뭄이 들자 이집트에서 걷어 올린 것은 연간 세금의 20%인 9만 2천 아우레우스에 불과했다. 240년대에 일어난 연이은 가뭄만으로도 겨우 명백을 이어가던 제국의 시스템은 벼랑 끝까지 몰렸다. 새로운 팬데믹의 전면적 폭력은 궁극적으로 제국의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다.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역병은 제국을 가로질러 북쪽과 서쪽으로 번져갔다. 역병이 휩쓴 지리적 범위는 광범위했다. 로마의 어느 지역, 어느 도시, 어느 집도 역병의 공격을 받아 텅 비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구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였다. 키푸리아누스 페스트라는 역병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 같은 대도시를 덮쳤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시골을 동시에 삼켰다. 병의 증상은 처참하고 심각했다.  후세의 병리학자들은 병명을 천연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성 출혈열로 보기도 하나 에볼라 바이러스에 무게를 둔다.


 로마제국은 특유의 풍토병이 아닌 외부에서 침입한 역병에 의해 희생되었다. 몬순체제에 영향을 미친 지구적 기후 불안이 생태계 변화를 촉진했고, 키푸리아누스 페스트의 창궐로 이어져 제국 전체에 피해를 입히며 소진되었다. 팬데믹은 병사들과 평민, 도시 거주자와 마을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유행하던 때는 제국을 구성하고 있는 섬유조직이 닳아도 찢어지지는 않았으나 키푸리아누스 페스트의 공격에는 그나마 비축해둔 힘이 고갈되어 제국의 중심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운명의 수레바퀴
심각해지는 위기 속에서 권좌를 차지한 군인 황제들은 제국을 지키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들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수도를 옮겼고, 통화를 개혁했으며, 심지어 신까지도 바꿨다.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을 힘겹게 수행했다. 그들 가운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다뉴브 지역의 일개 병사에서 최고의 권좌에 올라 열정적인 개혁가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가 행한 가장 중요한 혁신은 네 명의 동료 황제가 역할을 분담하는 사두체제 테트라키아였다. 테트라키아는 내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무질서한 내치와 외치를 네 명의 지배자가 팀을 이루어 분담하는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이어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 콘스티아누스는 장교의 아들로 세르비아 니슈에서 태어났다. 황제가 된 그의 첫 번째 과업은 무엇보다 사두체제를 전복시키는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개혁가이자 후기 제국의 체제를 세운 창립자로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비교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엘리트와 원로원 계급의 화해를 도모했다.

 

특히 원로원에 특혜를 베풀어 지방 총독과 같은 고위 관리직을 그들에게 할당했다. 아울러 서열과 명예의 모든 체계를 재정비하여 강력하게 중앙집중화시키고 황제의 측근을 중심으로 배치했다. 이어 새로운 질서와 사회적 위계를 강화한 콘스탄티누스 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의 신앙 덕분에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집단의 충성을 얻었으며, 교회의 후원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다. 로마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동방에 정식으로 수도를 정했는데, 지리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군사적 무게의 중심이 다뉴브강 지역에 있었으나 동방과 서방을 잇는 고대의 도로에 자리잡은 콘스탄티노플은 행진의 땅으로 접근할 채비가 되어 있는 운명의 도시였다.


사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유령처럼 존재하며 수세기 동안 새로운 질서를 지탱했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역사상 가장 큰 전략적 내부 붕괴에 속한다.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단순히 3세기 위기의 여파가 남긴 긴장이 지연되어 나타난 결과는 아니다. 로마의 르네상스는 제국의 외부 세력들에 의해 중단되었다. 붕괴의 계기가 된 사건은 저 멀리 동쪽, 중앙아시아에서 팽창한 미지의 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초원의 민족이 서구 역사로 진입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을 사정없이 압박했다. 유라시아 대초원은 헝가리 평야에서 몽골의 동쪽 근교까지 생태적으로 연속된 드넓은 지역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주민들에게 대초원은 시간과 역사의 저편에 있었다. 다뉴브강 너머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무한한 스키타이 황무지가 삼켜버렸다. 다뉴브강 북쪽의 땅은 한 세기 이상 고트족 연합이 차지하고 있었다. 4세기 중반에 대초원에 무게 중심이 알타이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기 370년 무렵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서부 초원지대에 이들이 나타난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376년 훈족을 피해 탈출한 고트족 무리가 망명지를 찾아 로마의 국경선 안으로 들어왔고 국경 너머 이탈리아를 유린했다. 이어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을 포함한 야만인 연합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약탈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으나 로마는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알프스산맥 너머 지역, 특히 영국, 스페인, 북부 갈리아 지역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은 무너졌다.


종말과 심판의 날
마지막 희망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었고, 방대한 서쪽 지역을 다시 로마의 지배로 끌어들였다. 로마법 전체를 성문화하고, 재정 행정을 점검했으며, 로마 역사상 가장 웅장한 건물들을 건설했다. 무엇보다 그의 기념비적 업적은 로마법을 획기적으로 집대성한 로마법 대전이다. 천년동안 내려온 법과 법률문서를 체계적이고 일관성있게 종합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경이로운 아야소피아 성당도 건축했다. 그러나 야심찼던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에 치명적인 팬데믹 흑사병이 시작되어 500여년간 지속되었다.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가까운 페스티스는 벼룩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이다. 벼룩의 몸 안에 숨은 페스티스는 제어할 수 없는 살해자였다. 검은 쥐 혹은 배 쥐라 불리는 곰쥐는 페스트를 장착하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페스트 팬데믹을 위해 징발되었다. 검은 쥐들이 태생인 동남아시아를 떠나 서구로 마구 몰려들었다.

 

로마제국의 정복으로 인해 검은 쥐가 로마의 길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곡물을 운송하고 저장하는 제국의 물류체제 덕분에 로마제국은 검은 쥐의 천국이었다. 페스트 팬데믹이 일어날 생태적 지형이 마련됐다. 질병이 번져나가 로마와 세계를 삼켜버리고 총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생물학적 재앙이었다. 오직 사막에 거주하는 무어인과 터키인 그리고 일부 아랍인들만이 세계적 재앙에서 모면하였다. 생태학적 설명은 자명하다. 정주하지 않는 사회 유형이 쥐-벼룩-페스트의 치명적 결합을 막는 방어기제 역할을 한 것이다. 2세기 동안 지속된 페스트는 인류의 희망을 꺾어버렸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비탄과 공포로 인해 살아남은 이들도 세상이 종말로 향해 가고 있다는 오싹함을 느꼈다. 세계의 종말은 예언이 아니라,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벨사리우스가 로마를 점령하고 이슬람 정복군의 진격에 제국의 군대가 패퇴하는 사이에는 1세기의 간격이 있었다. 그 기간 내내 로마는 거대한 시류에 대항하여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거부하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언제나 허약함과 회복의 탄력성 사이에서 불안정한 상태였고, 마침내 해체의 힘이 우세해졌다. 기후, 질병, 그리고 운명이 천년제국 로마의 종말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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