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의 중국발 호황과 리먼사태로 촉발된 장기 불황은 선박금융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과거 10여 년간 진행된 선박금융시장의 변화는 유럽에서 아시아로의 지리적 이동, 상업금융에서 정책금융으로의 전환, 협조융자(syndicated loan) 중심의 전통적인 금융비중 축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유럽에서 큰 역할을 하던 독일, 영국,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선박금융기관들이 불황기의 금융부실화와 BIS규제 강화로 선박금융을 축소하거나 아예 떠나는 현상을 보이는 한편 아시아 수출금융기관(ECA)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의 비중이 확대되었고, 금융주체는 상업금융기관에서 정책금융기관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전통적으로 은행들의 협조융자가 주를 이루었던 선박금융의 ‘형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호황기에 선박의 가격과 발주량이 동시에 증가하면서 부채형태의 조달에 한계가 생겨 자본시장 즉, 주식(IPO, Initial Public Offering)이나 채권의 역할이 증대된 것, 불황기에 중국 선박금융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면서 리스금융이 증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 선박금융의 경우에도 민간금융기관의 위축과 정책금융기관의 역할 확대라는 해외의 큰 추세와 궤를 같이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역할을 분담하던 정책금융이 2018년에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설립되면서 더 확대되었고, 정책금융기관의 선대확보 지원은 우리나라 ‘해운재건’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의 발전에 있어 금융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업에 있어 자금의 흐름은 우리의 신체에 있어 혈액의 흐름에 비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을 정책금융기관이 주도한다는 것은 장기불황에 수반되는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보완하기 위한 일시적 현상으로는 긍정적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나라 선박금융시장은 ‘민간 선박금융의 활성화’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민간 선박금융의 활성화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선박투자는 호황기에 증가하고 불황기에 축소되는 특성이 있고, 해운기업의 신용도 또한 호황기에 개선되고 불황기에 악화되기 때문에 선박금융이 호황기에는 활성화되고 불황기에는 위축된다. 이것이 해운산업이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투자와 금융의 시황순행성(pro-cyclicality)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은 해운산업이 시황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는 원인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반복되는 시장실패에 정책금융기관이 ‘지원’을 반복해야 하는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므로 해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해운기업 수익구조의 안정화, 자본구조의 건전성, 투자의 시황역행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사결정역량 제고 등 많은 선행과제들은 안고 있지만 어떻게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으면 해운이든 금융이든 반복되는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하는 변화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Klaus Schwab이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언급한 이래 ‘4차 산업혁명’이 최근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기술 즉,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블록체인, 플랫폼 등이 다양한 영역에서 빠른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해운산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측, 물류의 플랫폼 전환, 블록체인을 활용한 디지털 전환, 스마트항만, 자율운항선박 등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해운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박금융에서 주의 깊게 볼 4차 산업혁명 기술영역은 블록체인 기반의 대체불가능 토큰(NFT, Non-fungible Token)이다. 이를 실물자산과 연계하여 발행하고 유통하는 것이 증권형 토큰(Security Token)인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서는 이를 DAS(Digital Asset Security)로 정의하고 있다. 증권형 토큰을 활용한 선박금융 구조를 잘 설계한다면 우리 해운이 가지고 있는 많은 과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 그림은 법적인 규제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신조선 선박금융을 STO(Security Token Offering)로 진행하는 것의 예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투자자는 특정 선박에 대해서 1,000달러 단위의 분할 소유권(fractio
nal ownership)을 가지며 해당 증권형 토큰은 거래소에서 거래된다. 투자에 대한 원리금 회수는 선박의 수명에 상당하는 20년 이후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산신탁회사는 선박을 신조하여 운영하고 20년 후 중고선 또는 해체시장에서 처분하여 자금운영회사로 이전하는 역할을 한다. 자금운영회사는 선박운영회사가 지급하는 변동 원리금 상환액을 수령하여 국채 등으로 운영한 후 만기에 일시 상환한다. 선박운영회사는 해운회사에 1년 단위의 운임지수연계(Index-linked) 용선료로 대선하여 수익을 실현하고 선박관리회사에 지불하는 운영비용(operating expenses)을 제외한 금액을 자금운영회사로 이전한다.


이러한 구조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장기투자이므로 시황 저조기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하다. 불황기에 운임지수연계로 계약하여 발생한 손실을 20년 누계로 만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선종간 또는 시점별 분산투자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적 시뮬레이션을 통한 실증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두번째 장점은 해운기업이 운임지수연계 계약으로 선박을 확보함으로써 시장위험(freight rate risk)을 크게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팟시장에서 수익곡선이 변동하는 것에 원가곡선을 동조화함으로써 불황기에는 낮은 수준의 원가를, 호황기에는 높은 원가를 부담하게 되고 그 결과는 기업성과 변동성의 축소로 나타나게 된다. 컨테이너든 벌크선이든 이런 구조가 된다면 시황 불황기가 도래할 때마다 반복되는 집단도산에 빠질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세번째는 투자자 관점의 장점이다. 투자자는 작은 규모의 자금으로 선박투자를 단행할 수 있으며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누어 담는 분산투자를 통해 비체계적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 또한 거래소를 활용하여 언제든지 시장에 진입하고 퇴출할 수 있다. 단기간에 제도의 장점을 널리 알리고 다수의 투자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세제혜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장기투자에 대한 소득세 면제, 직계 존비속에 대한 상속세나 증여세 감면 등은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을 흡수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네번째는 해운산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들 수 있다. 2016년 한진해운이 도산한 이후 우리나라의 해운정책은 원양 정기선해운의 재건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제는 다양한 사업모델을 갖춘 균형적인 해운의 미래상을 그릴 때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벌크선 오퍼레이터 모델과 더불어 아직 진입도 못한 선주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금융기법은 우리나라의 선주업을 그리스와 같이 발전시키는 기폭제로 작동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번째는 새로운 금융기법에 따라 해양진흥공사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 어렵게 설립된 해양전문 정책실행기관의 업무 연속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위 그림에서 보는 자산신탁회사, 자금운영회사, 선박운영회사 등은 신뢰성을 갖춘 주체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정책금융 수요의 변동성으로 조직운영 상의 어려움이 예상되는 해양진흥공사가 이 역할을 담당한다면 투자자의 신뢰와 조직 운영의 안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형태로 대량의 선박이 건조되는 경우 우리나라 선박관리산업 발전의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선박관리산업은 일부 대형선사 계열을 제외하고는 파편화(fragmented)되어 있어서 우수한 선박관리 역량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에서 확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확보되는 선박이 많아지고 국내 선박관리 기업이 그 선박들을 관리한다면 규모기반의 구매력, 협상력, 경제성 등이 확보되어 해외시장으로의 확장이 촉진될 것이다.


국내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으로 금융을 실현하는 것에는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한국해양진흥공사, 부산국제금융진흥원, 한국해양대 해양금융대학원 등 산·학·연·정이 머리를 맞대어 구조를 설계하고 규제샌드박스에 넣어서 실증하는 일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 지금 해운은 오랜 불황기를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다. 선박금융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해운은 천국과 지옥이 반복되는 위험한 사업’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