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도 콤파스 문을 열지 못함을 알린다. 코로나 오미크론 확진자가 60만명을 넘어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창궐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강원도 산불로 어수선한 가운데 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났고, 많은 국민이 바라던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공정과 상식의 나라를 선언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초심을 잃지 않는 초지일관의 자세가 필요하다. 갈등과 분열로 심각해진 우리 사회를 화합과 협력으로 바꾸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범사전치즉무불성(凡事專治則無不成) 어떤 일이든 전력을 다한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세종실록처럼 국민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키며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달에 고른 책은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100 Minds that made the Market)’이다. ‘전설적인 투자 귀재들의 혁신, 실수, 그리고 지혜’라는 부제와 “이 책을 읽지 않고는 결코 시장을 논할 수 없다”는 소개가 눈길을 끌었다. 뉴욕타임스와 포브스의 베스트셀러, ‘월가의 전설들이 전하는 투자의 통찰과 금융 세계’의 저자는 운용자산 220조원을 주무르는 세계적 자산운용사 피셔 인베스먼트 설립자 겸 CEO 켄 피셔다. 그는 영향력 있는 투자자이자 분석가로서 무려 34년간 시장에 관한 탁월한 견해와 방안을 제시했다.

 

월스트리트의 공룡들
세계금융 1번지 월스트리트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의 2세기에 걸친 개척, 혁신, 노력, 실수, 추문 덕분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발전과정 내내 적자생존 법칙이 적용되어 혁신은 수용되고 실수는 수정되었다. 이런 개선의 결과 지금은 대다수 사람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실 있는 시장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진화의 이면에서 시장을 주도해온 사람들은 개인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100명의 거인은 모두 교훈을 주거나 혁신 또는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활약이 혁신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오늘의 시장이 만들어졌으니, 시장을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이들의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월스트리트와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키워 유동적이며 지속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위대한 나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문명이 시작되기 전 공룡들은 닥치는 대로 행동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이들은 위협적인 덩치에서 나오는 엄청난 힘으로 환경조차 찍어 눌렀다. 초창기 자본시장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은 냉정한 무법자였다. 공룡들이 아무 생각 없이 내딛는 한 발짝에 힘없는 동물들이 쓰러져 나가듯, 거칠고 야성적인 개척자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구 저지르며 새길을 만들었다.
첫 번째 인물은 게토에서 나와 금융제국의 거물이 된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다. 18세기 말 습기차고 비좁은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 게토에 살고 있던 전당포 주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장차 서구 문명 발전에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제국을 건설했다. 로스차일드와 그의 다섯 아들이 세운 은행 덕분에 자금이 유럽 전역에 흘러 다녔고, 그 자금으로 산업혁명이 촉진되어 유럽이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아가 유럽의 제3세계에 불과하던 미국이 변방의 농업국가에서 거대한 산업국가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이어는 10살부터 일을 시작하여 아버지의 전당포와 환전소에서 돈에 대해 배웠다.


부모를 여의어 11살 나이에 고아가 된 메이어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환전에서 생긴 잔돈으로 담배와 포도주, 옷가지도 팔았다. 그후 메이어는 강인한 여자 구틀레와 결혼하여 자녀를 스물이나 낳았으나 아들 다섯과 딸 다섯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법을 가르쳤고, 어린 나이에 가업에 종사시켰다. 메이어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그의 아들 암셸, 솔로몬, 네이션, 칼, 제임스는 사업을 일으켜 강력한 수입상으로 성장했다. 수입상으로 자본을 축적한 메이어는 유럽의 여러 나라로 아들을 흩어 보냈다. 제임스는 파리, 솔로몬은 빈, 칼은 나폴리로 갔고, 암셸은 프랑크푸르트에 남았으며, 후계자 네이션은 성장하는 런던에 머물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힘을 모아 유럽 전역에 견고하고 효율적인 자금 사슬을 구축하여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였고, 처음으로 공동 자금시장을 창출했다. 1812년 메이어가 죽었을 때 그가 게토에서 품었던 포부와 야심은 아들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들은 승승장구하여 세계 최대의 개인은행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들의 유럽 자금이 신대륙 미국으로 흘러가 미국의 금융시장을 형성하여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언론인과 작가들
월스트리트 저널을 펼쳐 주가를 확인할 수 없다거나 포브스와 배런스에서 비즈니스 뉴스를 찾아볼 수 없다고 상상해보라. 또한 다우존스 지수가 없다면 시장지표와 주가 동향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1890년대 말에야 금융정보의 할아버지 격인 월스트리트 저널이 등장하였고, 그후 많은 정기간행물과 책자들이 쏟아져 나와 주식시장을 해석하고 분석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월스트리트가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보가 원활히 흐르지 못하면, 다양한 투자와 투자자들로 구성된 폭넓은 금융시장이 존재할 수 없다. 클래런스 배런이 배런스에 뉴스와 해설을 실으면서 해설이 발전했고, 아널드 버나드가 밸류라인을 통해 개별 종목에 대한 개요와 분석을 제공함으로 거래가 촉진됐다.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세계의 흐름을 읽고, 배런스를 통해 시장 거래자들의 관점을 얻게 되었으며, 포브스를 통해 해설과 최신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 모든 발전이 50년 만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반인들을 월스트리트로 끌어들이려는 메릴린치의 계획에 따라 루이스 엥겔은 이해하기 쉬운 ‘주식 사는 법’을 발간했다.


찰스 다우는 두 가지 사유로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설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시장지표인 다우존스 평균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의 바이블 월스트리트 저널을 창간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태어난 다우는 잡일을 하다가 농장생활을 접고 펜을 잡았다.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에서 수습생으로 일하다가 로드 아일랜드의 한 신문사로 옮겨 금융기사를 쓰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0세가 되자 그는 과감하게 뉴욕으로 가서 동료 기자 에드워드 존스와 함께 다우존스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들은 매일 최신 금융정보를 구독자에게 제공했는데, 대부분이 전형적인 월스트리트의 큰손이었다. 당시에는 인쇄된 뉴스를 보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이들의 서비스는 소중하게 여겨졌고,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다우가 처음으로 산출한 주가 평균을 이 신문에 실었는데, 당시에는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35개의 주요 주식과 수백개의 군소 주식이 존재하던 시절에 한 신문사에서 시장을 측정하는 기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뉴스와 정보,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함을 깨달은 혁신가 다우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내다보았다. 다우 이론을 제시한 찰스 다우에 가려 에드워드 존스는 늘 빛을 보지 못했지만, 재능과 익살이 넘친 그가 없었더라면 한 세기 넘게 비즈니스 바이블이 된 월스트리트 저널이 창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우는 시장 개념이 강했고, 존스는 철저한 언론인으로 역할 분담이 이상적이었다.


 BC로 알져진 버티 찰스 포브스는 금융기사를 인격화했고, 1917년에 창간한 포브스를 통해 대기업의 인간미를 담아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순박한 경구와 풍부한 산물을 이용하여 공장과 기계 넘어 회사 뒤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고, 독자들이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포브스는 자기 일을 사랑했으며, 인터뷰하는 일이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14세에 학교를 떠나 인쇄소 수습공이 되어 활자를 조판했다. 그후 야간학교에서 공부하여 던디 대학을 이수했다. 그후 저널 오브 커머스에서 무급으로 일하며 기사를 썼는데, 사주의 눈에 띄어 편집자 겸 칼럼리스트로 발탁되었다. 이름이 알려지자 그의 칼럼이 전국 50개 신문에 실렸고, 칼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와 기사를 다루다가 드디어 포브스를 창간하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기사를 쓰면서 일을 했다. “휴식을 취한 적이 있는가? 있다. 녹슨 적이 있는가? 없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절대로 탈진하는 법이 없다”고 고백했다. 오늘날까지도 BC의 정신은 포브스에 살아 있다. 우리가 역사를 기원전 BC로 구분하듯이 미국 금융기사도 BC 포브스 등장 시점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을 정도다. 포브스와 그의 인간적인 손길이 없었다면, 미국은 결코 오늘날처럼 기업과 금융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쌓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융시장도 불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냉정하고 건조한 방식으로 숫자와 뉴스를 보도하지만, 포브스는 그들에게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었다.


투자은행가와 주식중개인들
월스트리트와 그 사촌격인 메인스트리트를 거치는 금융시장은 중앙 계획경제보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 매일 가격이 금융시장에서 결정되지만, 실제로 자금이 오가는 거래는 중개인들이 구성한다. 거래는 금융시장의 핵심이며, 자유시장이 존재하여 자유롭게 그 역할을 다하기 때문이다. 중개인들은 거래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특히 미국 최초의 대규모 중개인 오거스트 벨몬트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로스차일드를 통해 월스트리트를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유럽 자본과 결합했고, 그 덕분에 미국 자본시장은 지역적 연고를 넘어 확장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자본이 시장에 흘러들어오자, JP 모건이 이를 활용했다. 투자은행업을 개척한 모건은 전형적인 중개인이었다. 그는 신뢰, 역량, 결단력, 공정성, 책임감의 전형이었다. 모건은 권력을 이용하여 대기업들을 세웠고, 미국을 신흥 국가에서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시켰다.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오거스트 벨몬트는 미국이 변방의 순수 농업국가에서 번영하는 산업국가로 변신하도록 기여했다. 세계 최강의 은행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주재 대리인이던 벨몬트는 50여년간 투자은행업과 정치로비 활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벨몬트의 성공은 절묘한 타이밍 덕분이었다. 1816년 프로이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4살에 로스차일드의 프랑크푸르트 집에서 청소일을 시작했다. 주인은 벨몬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신임했으며, 그는 작은 나라의 재정과 맞먹는 규모의 자금지출 권한을 로스차일드에게 위임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벨몬트는 로스차일드의 돈을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로스차일드의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워낙 대단하여 로스차일드 자금이 들어온다는 믿음과 로스차일드 연줄만으로도 누구든지 그에게 자금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빌린 자금으로 그는 주식, 상품, 은행어음을 매수했고, 이러한 활동이 공황을 막았으며, 부도 직전까지 몰린 미국은행들을 구해냈다. 오직 그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미국이 보여준 세계 최대의 개인은행에 대한 신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건 이후 그의 인기는 치솟았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벨몬트는 공화당 링컨을 지지하여 북부연합을 위해 싸웠으며, 대통령의 재정고문이 되었다. 1890년 죽을 때까지 벨몬트는 유럽 자본과 번영하는 산업국 미국 사이에서 견고한 다리를 놓았다. 그가 없었다면, 자금 부족으로 인해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존 피어폰트 모건은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자본을 다루는 마술사 모건은 혼자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당대 최고의 기업합병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미국을 공황으로부터 구해냈다. 그의 말 한마디는 금과옥조였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분위기는 전능자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자본가 모건은 공황을 해결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는데, 과도한 투기와 주식 물타기로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이 붕괴하는 월스트리트에서 그는 희망의 원천이었다. 그는 곤경에 처한 기업과 기관에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맡았는데, 지금은 연방준비제도가 이 기능을 하고 있다. JP 모건의 말은 철칙과 같아 그의 생각을 바꾼 적이 없었고, 한번 내뱉은 말은 끝까지 지켰다. 모건 가문은 미국의 금융시장을 거의 지배했으나 금융개혁 바람이 불면서 모건도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모건 이전이든 이후든 그만큼 주식 및 채권시장의 궁극적 목표, 즉 미국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몸소 구현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혁신가들
미국의 자본시장 발전은 혁신의 연속이었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모든 혁신은 소규모 공룡 집단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공룡들은 용감하게 미지의 땅을 밟고 다니면서 문명과 미래의 혁신이라는 길을 만들었다. 이들이 한발을 디딜 때마다 규칙의 토대가 마련됐으며, 이러한 규칙들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규칙이 되었고, 미래 세대들은 이 구조를 개선하거나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들 혁신가 덕분에 금융업계에 전문 주식거래소, 지주회사, 시장 통계, 벤처자본, 재벌그룹, 풋과 콜 등이 탄생했다.


광산업이 냄비로 금을 걸러내는 방식에서 노동과 자본 집약 프로세스로 전환되자, 서부 전역에서 금광 주식이 붐을 이뤘다. 수천개의 광산 주식거래소가 난립하여 자금을 끌어들였고, 이 자금은 인부를 고용하고 장비를 구입하여 금을 캐는데 투입됐다. 금을 발견할 때마다 투기 광풍이 뒤따랐다. 모두가 광란의 대열에 참여하고자 기웃거렸고, 금이 발견된 곳엔 어김없이 엉성한 작은 주식거래소가 들어섰으나 금맥이 끊기면 거래소도 사라져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이러한 영세 거래소들을 대체한 최초의 금광 거래소가 1875년 일라이어스 잭슨 럭키 골드윈이 설립한 샌프란시스코 소재 퍼시픽증권거래소였다. 그는 번창하는 경쟁적 금융센터를 통해 서부를 거친 개척지로부터 문명한 지역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미국의 자금이 동부로부터 왔는데, 동부 사람들은 미개척 서부에 관심이 컸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그 시절에 국토횡단 철도와 대륙횡단 전화선이 완공되었으나 국토를 횡단하는 금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광산업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서부 광산거래소 사이에 실용적인 경쟁을 도입함으로써 볼드윈은 경쟁이 자본주의 체제에 가져다주는 혜택을 서부 광산금융에 제공했다. 이로써 더 많은 자본이 몰려들었고, 일이 제대로 처리되자 거래량이 증가했다. 가격 경쟁이 유지되어 지나친 독점 이득을 올리지 않자, 동부인들이 투자한 돈이 묶여버리는 위험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자 많은 사람이 광산에 금융을 제공했고, 끌어들인 자금은 필요한 인력과 장비의 도입과 광석 채굴에 쓰여, 이 광석이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중부 오하이오에서 농부 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볼드윈은 잡화점, 술집, 여관, 마구간, 벽돌 제조 등 살아남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빈손으로 시작했고, 온갖 사업을 벌여 모두 성공했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첫 100달러가 아니라 첫 1,000달러를 모으는 일이었다” 그의 회고다. 볼드윈은 사람들이 자신의 별명 럭키를 경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결단과 노력에 행운 따위는 없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문화가 성공을 보장한다는 주장에 영감을 얻어, 로저 뱁슨은 거의 1세기 전에는 아무도 손댄 적이 없는 주식시장 통계 분야를 개척했다. 뱁슨은 폐결핵을 앓으며 통계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회복되자마자 통계기관 설립의 아이디어를 실천했다. 월스트리트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은행, 투자회사, 증권회사들이 각각 통계학자를 고용하여 채권회사들로부터 통계를 수집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기업의 사업보고서에 대한 분석과 도표화를 익힌 다음, 타자기, 장비, 사무기기를 구입하고 나서 구독자 8명을 확보한 뒤, 아내와 함께 뱁슨 스태티스티컬 오거니제인션을 설립하여 뱁슨스 리포트라는 뉴스레터를 발간했다.

 

이 회사가 나중에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가 되었다. 뱁슨스 리포트는 춥든 덥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언제 무엇을 사고팔아야 하는지 조언했다. 뱁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성공은 예측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바른 시점에 바르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방어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할 때 얻게 된다” 뉴턴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역학에 적용되는 것처럼, 이례적인 호황 뒤에는 이례적인 불황이 따라오고, 고물가 뒤에는 저물가가 따라온다는 것으로, “오르는 것은 내리고, 내리는 것은 오른다”는 뜻이다. 1975년 매사추세츠에서 대대로 선원이었던 집안에 태어난 뱁슨은 MIT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뉴턴을 좋아했다. 그는 늙어서도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뉴턴의 작품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항해지도, 우표, 음식에 관한 서적도 수집하며 92세로 죽을 때까지 일했다.

 

은행가와 중앙은행장들
월스트리트 역사는 은행업의 역사다. 은행업이 직간접적으로 증권 가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이자율과 채권 가격 사이에 역의 상관관계가 있고, 간접적으로는 이자율이 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통화 공급을 결정하면 채권을 매입하여 채권 공급이 줄어든다. 통화 공급이 늘어나면 돈의 가격인 이자율이 내려가고,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주가는 올라간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지갑을 풀면 주가는 올라가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을 조절하여 이자율을 조율하면, 이자율은 월스트리트에 영향을 미친다는 등식이 성립한다. 은행업이나 중앙은행제도를 월스트리트의 발전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은행업과 증권업의 겸업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월스트리트가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은행업이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앙은행제도 주창자 존 로의 사전에 보통은 없었다. 그는 무엇이든 얻으려 할 때 최선을 다했다. 그가 주사위를 던질 때는 판돈이 엄청 컸고, 한 여자를 놓고 벌인 결투에선 누가 죽을 때까지 싸웠다. 루이 14세의 타락으로 파산했던 프랑스가 다시 일어설 때 그 뒤에 로가 있었다. 수학의 달인 로는 천재적인 계획인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희망으로 20년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의 조국 스코틀랜드의 경제는 중앙아메리카 탐험이 몰고 온 투기바람에 폐허가 되었다. 은행업에 몸담고 있던 로는 이것이 자신의 이론을 시험할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하여, 부자로부터 세금을 거둬 그 자본으로 무역을 하여 국부를 증강하고 이를 뒷받침할 중앙은행의 필요함을 정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부는 즉각 거절했다. 그러자 로는 방향을 돌려 프랑스로 건너가 국왕에게 왕립은행을 세워 교역을 관리하고 세금을 거두어 위기에 처한 나라의 빚을 없애라고 제안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제시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고 1716년 방크 제네랄을 설립했다. 로의 은행은 1,200주로 자본금 600만리브르를 조달한 뒤 일상 업무를 수행했다. 일람불 지폐를 발행했고, 상업어음과 환어음을 할인했으며, 개인과 상인들로부터 예금을 받았고, 현금이나 신용을 이체했다. 이 은행이 돋보인 것은 액면가 1/4로 평가되던 정부 지폐와 달리 은행 지폐는 가치가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로의 화폐가 크게 인기를 얻자 정부는 세금을 은행 지폐로 내게 하였고, 국가 신용도도 높아졌다. 그러나 그의 은행과 앞날은 평탄치 못했다. 비록 로는 사업에 따른 위험 감수와 개인의 생활방식을 구분하지 못해 화려하고 과장된 삶을 살았지만, 그런 성품과 노력 때문에 평범한 사람보다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존 로는 오늘날의 중앙은행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세계 중앙은행제도의 아버지다.


모든 중앙은행장은 총을 맞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 알렉산더 해밀턴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결투를 신청한 라이벌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인생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정신적 대부가 추문으로 점철된 유럽인 중앙은행장 존 로가 심어놓은 생각에서 직접 아이디어를 얻었으니 말이다. 정적의 총에 맞아 싸늘한 시체로 변하기 전에 해밀턴은 미국의 경제, 금융시장 심지어 산업혁명 기반까지 마련한 공로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19세기의 경제적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유난히 말도 많던 연방준비제도의 전신 미합중국은행을 창설하여 국가의 신용을 확립하고 엄격한 조세정책을 실현했다. 미국 경제의 대부이자 초대 재무장관인 그는 미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자본주의를 육성한 선각자였다.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미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내다보았다. 해밀턴의 업적인 미합중국은행의 설립목적은 대중의 신용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전쟁을 치른 뒤 미국의 부채는 7,900만달러로 미국의 신용은 그야말로 총 맞은 상태였다. 해밀턴은 재무부 수장으로서 야심차게 전권을 휘둘러 채권을 신용의 기초로 이용하여 해외 부채, 국가 부채, 지방 부채 등 전쟁 부채를 갚았다. 해외 차입, 관세 부과, 전시 대륙달러 상환, 중앙은행을 통한 단일 통화유통은 그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중앙은행이라는 개념에 비판적이었고, 진보주의자들은 정부 인가은행을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해밀턴은 이에 물러서지 않고 “이 일반 원칙은 정부의 정의 자체에 들어있는 것이며, 미국이 진보하는 모든 단계에 필수적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정부에 대한 지출, 정부 자금의 예치, 탄력있고 통일된 화폐 유통, 납세에 대한 지원, 사업 대출을 통한 교역 및 노동 촉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재무부 채권과 공동자본회사들은 미국 금융시장에서 처음으로 증권을 발행했는데, 먼저 채권시장에 이어 주식시장이 형성됐다. 이들 모두 미국의 산업혁명에 필요한 요소였다.


1902년 폴 위버그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그는 미국의 은행제도가 구태의연하여 개혁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은행들은 산만하고 통합이 안 되어 성장하는 산업국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럽의 중앙은행제도를 미국에도 도입하자고 건의하며 홍보했다. 10년 뒤 이 투자은행가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현대 중앙은행제도인 연방준비제도를 창설하는 연방준비법이 1913년 통과되었다. 이때부터 위버그는 연방준비제도의 아버지이자 미국 최고의 은행제도 권위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연방준비 시스템’이라는 책에서 연방준비제도 창설의 역사를 설명하며 은행제도의 주요 결함은 리더십 부재라고 말했다. 1920년대에 쓰인 이 책은 우연히도 현대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 경제붕괴 공황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는 “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고속 질주하더라도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을 실제적인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1929년 대공황 1년 전에 선견지명이 있는 위버그는 곧 다가올 암울한 운명을 예측하며, 이를 ‘무절제한 투기잔치’라고 주장했으나 여전히 강세장에 도취한 월스트리트는 그의 예측을 비웃었다. 그러나 비웃음은 잠시뿐 이내 참혹한 사태를 맞이했다. 이렇듯 위버그는 시대를 앞질러 내다본 사람이었다. 그가 연방준비제도를 창설하고 초기에 지휘함으로써 미국 금융시장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최근 정치적 간섭으로 드러난 은행제도의 문제점들을 직시할 때, 연방준비제도가 외압없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딜개혁의 기수들
1930년대 뉴딜정책을 실행한 개혁의 기수들은 주식시장을 혁신하는 규제혁명을 주도했다. 그들이 만든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증권거래위원회의 설립이다. 이 개혁가들은 1929년 주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을 무대로 등장했다. 그 잔해와 파편의 험악한 모습에 놀란 미국인들은 자유시장을 무서운 경제 시스템으로 봤을 뿐 아니라 관행들을 악습으로 여겼다. 경제학자들은 연방준비제도가 통화정책의 고삐를 조이지 않고 풀어주었을 경우에도 1929년에 이은 후폭풍이 실제만큼 심각했을 거라고 보지 않았다. 1929년 주가폭락과 비슷한 낙폭을 기록한 1987년 검은 월요일 직후의 후폭풍에 비해 더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87년에는 연방준비제도가 더 현명하고 기민하게 대처한 덕분에 시장붕괴의 후폭풍이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대공황은 미국 안팎의 각국 정부가 만들어놓은 무역장벽 때문에 생긴 반작용이었고,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작용하는 경쟁이야말로 시장을 규제하는 진정한 힘이다. 지난 세기말 동유럽에서 보았듯 경쟁이 없으면 정부는 와해된다.


1930년대 월스트리트로 날아드는 미국 연방정부의 엄격한 규제로 인해 부정한 기회주의자들이 혼비백산했던 것은 EHH 시먼스가 주도한 야심찬 반부패운동의 결과였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6년간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이던 시먼스는 구태에 젖어있던 월스트리트를 믿을 수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십자군전쟁을 펼쳤다. 그때까지 월스트리트에는 파렴치한 투기꾼과 사기꾼에다가 야반도주를 일삼는 버킷샵이라는 난립증권업자들이 극성을 부렸다. 시먼스는 이들을 비난하며, “부정한 사업은 올바른 사업을 위협하는 최악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버킷샵을 일컬어 “눈에 안 띄게 시민 속으로 파고들어 도덕과 경제를 파멸시키는 암 덩어리”라고 말했다. 시먼스가 10년 내내 이들을 공격했지만, 버킷샵은 1934년에야 증권거래법에 의해 불법화됐다. “거래소의 명예와 회원들의 명예는 항상 유지돼야 한다.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길은 거래소 규칙의 준수이다”라고 선언했다. 시먼스가 회장을 맡고 나서 주식시장은 정화됐고, 뉴욕증권거래소도 제 궤도에 올라 빠르게 성장했다.


윈스럽 올드리치는 월스트리트에서 군림했던 사람들과 정면으로 대립했던 은행가였다. 금융계가 1929년 주가폭락과 대공황에서 벗어난 1933년에 올드리치는 상업은행 업무와 투자은행 업무를 분리하는 개혁안 글래스-스티걸법을 구체화했다. 이 법은 뉴딜 행정부가 이룩한 큰 업적으로 100년을 이어온 월스트리트 은행업계의 특권적 관행을 철폐했다. 신중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도덕관이 철저했던 올드리치는 늘 “캐널스트리트 남쪽을 보면 웃음이 사라진다”고 말하곤 했다. 캐널스트리트의 남쪽에 월스트리트가 있는데, 월스트리트가 달갑지 않았다는 뜻이다. 투기 풍조를 상업은행 경영에서 도려내야 한다는 그의 뉴딜 개혁은 은행업계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이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겸하는 기존의 은행 시스템은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더 나아가 예금을 취급하는 합자회사와 주식회사는 상업은행과 똑같은 규제조항을 준수하고, 유가증권 업무를 다루는 회사는 예금을 받을 수 없고, 유가증권 업무를 다루는 합자회사의 임직원은 은행 직무를 겸직할 수 없으며, 은행 임직원은 유가증권 업무를 다루는 합자회사의 직무를 겸직할 수 없도록 했다. 집단 전체가 개혁에 반대할 때는 그 집단을 개혁할 수 없다. 어느 집단을 개혁하려면 그 집단에서 개혁에 앞장서줄 분파를 골라내야 한다. 이 일을 올드리치가 정확히 해냈다. 올드리치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의 개혁된 증권업계와 은행업계 나아가 월스트리트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작품 청와대 이전이 용산으로 확정됐다. 광화문 정부청사로 이전하여 광화문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으나 시민 불편 때문에 이태원 국방부 청사로 변경했다고 한다.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국민 소통이라는 면에서는 아쉽지만, 탈권위 청산이라는 뜻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탈권위와 국민과의 소통은 집무실의 위치보다 대통령의 마음가짐과 실천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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