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이른 새벽 히스로(Heathrow) 공항에 내렸다. 네 개의 여객 청사 건물 중 가장 좁고 낡아 마치 서울 지하철 1호선 역사를 연상시키는 제3 청사를 지나 시외버스 내셔널익스프레스(National Express) 정류장에서 사우스햄턴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좌우측 승객 좌석열이 조금 엇갈리게 되어 있어 혹 옆 승객의 불편한 시선을 피할 수 있고 각 좌석에는 3점식 안전벨트가 부착되어 있었다. 낡은 공항 청사, 세심한 배려와 안전함이 느껴지는 버스 좌석. 장차 영국 생활에 대한 예지였을까? 낯선 나라에 막 도착하여 피곤한 몸을 쉴 수 있었던 새하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런던의 빨간 이층버스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더 영국스러운 이미지이다.

 

두 번째 아시아인 가족
내가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 영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군대 동기 P가 고맙게도 처음 자리 잡는데 이것저것 도와주겠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나 함께 와사시 인근 대형 마트를 갔다. 이리저리 물건을 찾아 고르고 있는데 “저거 봐. 어린 애들이 계속 우릴 쳐다보네. 보통 애들이 아시아 사람 처음 보면 저러는데. 이 동네는 정말 영국 사람만 사나 보다” P가 말했다.


첫 두달은 학교에서 자전거로 10분쯤 떨어진 한 가정집에서 자취하였다. 학교에서 소개하는 학생 주거 웹사이트를 통해 찾았는데,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미 디태치드 하우스(Semi-Detached House)였다. 아파트는 물론이거니와 연립, 단독주택도 콘크리트로 짓는 것이 보편화된 우리나라와 다른 모양인지 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복도에서도 걸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 처음에는 좀 불안감을 느꼈다. ‘이거 층간 소음이 아니라 집이 무너지는 거 아냐’ 한번은 내 방에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다 좀 들떠서 콧노래를 불렀더니 잠시 후 옆방을 쓰는 그 집 딸아이가 내 콧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 정숙. 집에서 키우는 골든리트리버종 개 ‘바니’가 치즈를 좋아 한다기에(!) 내가 식사할 때마다 치즈나 빵을 조금씩 떼 주었더니 나중에는 아예 내 방에 올라와서 날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대충 만들어 먹는 식사를 딸아이가 신기하게 쳐다보기에 이게 전형적인 한국 음식 스타일은 아니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나중에 자신이 만들었다며 사탕, 과자의 일종인 퍼지(Fudge)를 맛보라고 주기도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너희 나라에서는 중국어를 쓰냐고 묻기도 했지만, 가족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마 이번에 다시 가면 BTS 덕을 보리라.


이민법이 강화되기 전 영국은 유학생들에게 관대한 나라였다. 가족을 동반하여 입국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학업 후 취업 비자(Post Study Work Visa)’라 하여 학업을 마치고 난 후에도 재학기간 만큼 영국에 거주하며 취업할 수 있는 혜택이 있었는데 내가 공부하던 무렵에는 없어진 상태였다. 가족 동반 학생 비자는 석사 과정이상부터 가능하지만 부모 중 한 쪽이 전업 학생(Full Time Student)이라면 아이의 공립학교 입학이 가능했다. 아내의 직장 문제, 영국 내 주택 임대 계약기간 등을 고려하여 아내와 아이는 6개월 관광 비자를 이용하여 함께 머물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엄마와 떨어져서 생김새도 영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사람들과 있기 싫다고 하여 학교에는 보내지 못하였다.


사우스햄턴 시내와 와사시에서 몇 군데 집을 알아보다가 학교 근처에서 가족과 함께 최대한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에 학교 근처 와사시에 집을 구했다. 와사시 마을 중심 회전교차로(Roundabout)에 있는 상가 건물 2층의 방 두개짜리 플래트(Flat)를 6개월 동안 계약했다. 가끔 보도되는 런던의 놀랄 만한 집값에 비하자면 이곳은 예상외로 적당하고 감당할 만한 가격이었다. 마을 중심이라야 커다란 슈퍼마켓 하나와 문구점, 이발소, 미용실, 안경점, 부동산소개소 등 열댓 개 상점이 전부였다. 중고차 판매점,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화랑, 마을역사협회가 운영하는 와사시 유산센터(Warsash Heritage Center)가 눈에 띄었다. 버스 정류장이 바로 집 앞에 있어 번잡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주중에 20, 30분, 주말에는 근 한 시간마다 한 대씩 지나가는 버스와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아내와 아이에게 적당한 인기척과 구경거리가 되어 주었다. 집이 2층에 있는 바람에 아침에 창문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내려다 보며 구경을 하던 아이가 버스 정류장에 멈춘 학교버스 2층에 탄 여학생들과 눈이 마주쳐 여학생들이 귀엽다고 손을 흔들자 부끄러워 숨기도 하였다. 


어딜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우리나라 ‘김밥00’ 마냥 영국 어느 작은 마을이라도 그들 전래의 피쉬앤칩스(Fish and Chips) 가게와 인도음식점 또는 중국음식점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와사시에도 중국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나라 중국집 음식과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주말 저녁에 자주 사다 맛있게 먹곤 했다. 그때마다 주인이 포장용기가 터질 정도로 음식을 꾹꾹 눌러 담아 주었는데, 이 중국음식점 주인 가족이 와사시 마을에 사는 유일한 아시아인 가족,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 가족이었다. 영국 사람들을 커튼 트위쳐(Curtain Twitcher)라 하여 ‘커튼 뒤에서 훔쳐보기를 즐겨보는 사람’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정말 창문에 엷게 비치는 -밖에서 들여다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는 하얀 커튼이 집집마다 쳐져 있었다. 영국 시골 마을 공동체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우리 집 창문에도 그 커튼을 사다 달고서 유니언 잭이 그려진 상자를 밖에서 잘 보이게 놓아 두었다. 나중에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날 보더니 그 중국음식점 위에 살던 학생 아니냐며 아이는 잘 있냐고 물었다.    


대부분 혼자 공부하러 온 동기들은 가격이 좀더 저렴하고 제반 생활 시설이 많은 사우스햄턴 시내에 방을 하나 얻어 살았다. 방학이 되어 아내를 데려와 런던과 인근 윈체스터(Winchester)를 둘러보는 인도 친구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학교 식당에서 사 먹거나 자취집으로 와서 저녁을 해먹고 다시 학교 도서관으로 가곤 했지만, 아내와 아이가 영국에 온 뒤로는 세끼를 모두 집에서 먹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십 분 정도 걸어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서 오후 수업을 들었다. 저녁 역시 마찬가지로 집에 와서 해결하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 갔다. 가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아내, 아이와 함께 학교 식당이나 와사시, 사우스햄턴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인도 친구들은 대부분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 등으로 점심을 먹었고 영국 친구들은 학교 식당에서 사 먹거나 차를 몰고 나가 와사시에 있는 펍에서 먹곤 하였다. 학교에는 학생 식당과 단기교육 과정에 참석하는 상급 사관들을 위한 식당, 교수 식당이 있었다. 각종 잡지와 당구대, 오락기기, 커다란 TV가 있는 휴게실이 있었는데 마치 일반 상선의 사관 휴게실을 학교 교실 두개 정도의 넓이로 키워 놓은 듯했다. 휴게실에는 영국 커피 체인 코스타(Costa) 커피점과 간단한 칵테일과 맥주 등 주류를 파는 바(Bar)가 있었다. 학교 체육관의 운동시설과 학교 부두의 요트, 카약 등도 이용할 수 있었다. 


영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1만달러 정도 높았고 부가가치세율도 20%로 우리나라의 두 배이지만 기본적인 식료품과 의류 등은 부가가치세가 면제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대형 마트 가격보다도 저렴했다. 내가 학교에 가면 아내는 매 끼니를 준비하고 아이와 동네 산책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 책을 아이와 함께 읽곤 했는데 집에서 인터넷으로 한국 드라마와 코메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내가 원하던 공부를 하는 동안 아내는 아이를 돌보고 우리 세 식구의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매우 영국스러운
그래도 영어를 일이 년 배운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영어권 국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우리 나라에서 살면서 영국식 사고와 문화에 대해 막연히 뭐 별 다른 것 있겠나 했는데, 실상 예상과 다른 경우들이 제법 있었다. 가령, BBC 라디오 4에서 하루에 몇 번씩 방송하는 ‘Shipping Forecast’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해양강국이라 해운업 전망을 하는 별도 프로그램도 있구나’ 했는데 듣고 보니 해상 기상 예보 프로그램이었다. 영국은 우리나라와 자동차 차선 방향이 반대라 운전석 위치도 반대였고 방향지시등과 앞유리 와이퍼 스위치의 위치도 반대였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방향 지시등을 켠다면서 앞유리 와이퍼를 작동시키곤 했다. 우리 나라에서 맞은편에서 오는 차에게 상향등을 깜빡이면 경고 내지 주의를 뜻하는데 영국에서는 당신이 먼저 가라는 양보의 신호였다.    


사우스햄턴은 시내에 모스크, 시크교사원, 힌두교사원이 있고 거리에서 히잡을 쓴 여성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다문화 공동체인데 반해, 와사시는 여전히 앵글로색슨 백인들이 대다수인 전통적인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면 길냥이 마냥 건물 사이를 여우가 어슬렁거리고, 주말 저녁 무렵 빈 교정에는 가끔 사슴이 지나갔다. 아이가 제 눈으로 직접 말을 처음 보고 말 울음 소리를 들은 곳도 이곳 어느 목장이다. 길에서 마주쳐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국제학생에게도 “Hello”, “Hi”하며 인사를 건네고, 차를 운전하고 가다 동네 우체부를 발견하고서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워놓고 함께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가 아이 약을 사러 동네 약국에 갔더니 먼저 줄을 서 있던 노인이 “Beautiful lady first”라고 양보를 했다며 기분 좋아했다. 유모차를 밀면서 조깅하는  빠른 걸음도 아니고 말 그대로 뛰어 가는 레깅스 차림의 아이 엄마도 보았다. 오후 네 시만 넘어도 날이 어둑어둑해지는 겨울과 달리 한 여름에는 밤 아홉 시가 되어도 밖이 환하여 아직 밤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빨리 자라고 하냐고 불평하는 아이를 재우느라 애를 먹었다. 트레인스포터(Trainspotter)가 지나가는 열차의 번호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와사시와 사우스햄턴 인근에는 쉽스포터(Shipspotter)들이 있다. 사우스햄턴항을 오가는 온갖 종류의 화물선들의 선명을 기록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그들의 페이스북 그룹이나 유튜브에 올려 놓는다. 특히 사우스햄턴항에는 여러 회사의 화려한 크루즈선들이 연중 내내 드나들어 더욱 눈요기거리가 된다. 사우스햄턴항만공사(Associated British Ports Southampton)에서는 아예 6개월치 크루즈선 운항일정을 게시해놓았고 번화가 상점 계산대에서도 이를 팜플렛으로 만들어 비치해놓았다. 토요일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가서 옆 마을 농장 무인 가판대에서 계란을 사오는 것은 단순히 운동을 넘어서 기분마저 상쾌하게 했다.


 주말 오후에는 옆 마을에 있는 경찰지구대도 문을 닫는지 건물에 불이 다 꺼져 있고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사우스햄턴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조차 주중에는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열지만, 토요일에는 밤 10시에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아예 느즈막이 오전 11시에 열어 저녁 5시에 문을 닫았다. 대형 마트가 토요일, 일요일에 오히려 일찍 문을 닫는 것이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마트 노동자들에게도 최소한의 정상적인 휴일을 보장하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일요일 휴식의 의미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타당하게 느껴졌다. 11월초가 되고 날씨가 쌀쌀해지자 인근 대형마트 테스코(Tesco)에서 벽난로용 장작 묶음을 팔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혹 밤 늦게 학교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잠시 멈춰 서서 온 마을에 엷게 퍼진 장작불향을 맡으면, 내 몸 역시 서서히 녹아내려 공기 중으로 스며 퍼지는듯했다.


여름 방학과 마지막 학기 동안 구술시험 연습을 하고 생활비도 보탤 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다. 영국에서 일을 하려면 국가보험번호(National Insurance Number)가 반드시 필요하여 영국 정부 웹사이트에 나온 절차에 따라 신청을 하였다. 먼저 담당기관에 전화를 해서 용건을 설명하고 우리 집 주소를 불러 주었다. 며칠 뒤 신청서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나는 그 신청서를 작성하여 이를 다시 우편으로 부쳤다. 며칠 뒤 마침내 우체부가 나의 국가보험번호 발급통지서를 배달해줬다. 보름은 걸린 것 같았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집 월세 계약을 하고 나니 시청에서 햄프셔(Hampshire)주와 시에 납부하는 일종의 주민세, 경찰 및 소방 관련 고지서를 보내왔다. 이걸 학교 학생지원센터에 물어 보려다 그냥 납부했는데, 얼마 안 되어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에 투표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투표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린다는 으름장과 함께. 이건 시청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어 간단히 해결했다. 원래 전업 학생이면 이 세금은 당연히 면제여서 나중에 환급받긴 했다.


영국인들 사이에 전통을 중시하고 당장 새로이 고치기보다 불편해도 그걸 감수하고, 그러한 행동을 어떤 멋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풍조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늘 오가는 주택가 길 양편에 주차된 차들로 시내버스가 다니기 힘들어 맞은편 차와 교행하는 지경인데, 길을 넓히던가 주차 단속을 철저히 하던가 하다 못해 운전사가 욕을 하던가, 버스에 탄 승객 중 나만 속이 터졌던 것 같다. 이첸강(River Itchen)을 가로질러 사우스햄턴 중심가로 연결되는 다리가 두 개 있는데 그중 북쪽의 노쓰햄(Northam) 다리는 1799년에 최초로 놓여졌고 1954년에 현재의 다리가 새로이 건설되었다. 남쪽 중심가를 있는 이첸(Itchen) 다리는 1977년에야 개통되었는데 그때까지 그 자리에는 백년 넘게 운행하던 플로팅 브릿지(Floating Bridge, 부교)가 있었다. 말이 다리지 그냥 두 척의 배가 차량과 사람을 교대로 계속하여 실어 나르던 것이었다. 속초 아바이 마을의 조그마한 갯배도 아니고, 그 물살 쎈 울돌목에 남해대교를 세운 것이 1973년인데 영국 최대의 여객항이자 첫 번째 수출 항구의 중심가를 연결하는 다리가 그제야 개통되었다니. 영국인들 사고의 일면이긴 하지만 이런 나라에서 경천동지할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와사시에는 항해서적과 관련 문구류를 파는 전문서점이 있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한 적도 했고 이곳에 와서 레이다플로팅 도구를 사기도 했는데 어느 날 폐점 세일을 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오프라인 매장과 함께 온라인으로도 책을 판매함에도 온라인 서점들과 가격 경쟁에서 밀린다는 이유였다. 영국에서도 오래된 동네 서점이, 더군다나 해양대학 앞 해양도서 전문 서점이 사라지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마지막 세일 날, 흥미 있어 보이는 책들을 몇 백 파운드 어치 샀는데, 그중에는 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일본 해군 전투기에 격침 당한 영국 해군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함(HMS Prince of Wales)의 함장 존 리치(John Leach)대령에 대한 전기도 있었다. 존 리치 대령은 전사하기 이틀 전, 해군 소위였던 그의 아들 헨리 리치(Henry Leach)와 싱가폴 기지에서 마지막 부자의 시간을 가졌다. 헨리 리치는 그 후 군 복무를 계속하였고 나중에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 and Chief of Naval Staff)이 되어 1982년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Falklands) 침공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빼앗긴 영토를 두고 외교 협상이냐 무력 탈환이냐를 결정해야만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대처 총리가 그에게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자, 그는 탈환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대처 총리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묻자 리치 제독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가 모호하게 행동해서 완벽한 성공을 이루지 않는다면, 몇 달 안에 우리는 우리의 말이 하찮게 여겨지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리치는 결국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해군 원수가 되어 군복을 벗었다. 이 부자가 하늘에서 다시 만났다면,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에게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헨리 리치 경의 자서전은 나중에 따로 구입하였다.  


2학기 말이 되자, 시험도 떨어지고 지쳤는지 인도 친구 S가 하교길에 불평을 해댔다. “이 나라는 뭐든지 다 비싸. 날씨도 맘에 안 들어. 마트에 가도 감자 밖에 없어. 큰 감자, 중간 감자, 작은 감자, 더 작은 감자. 지긋지긋해” 그저 S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힘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간의 여름 방학이 지나고 S를 다시 만났다. 표정이 훨씬 밝아지고 달라진 모습이었다. 방학 동안 글라스고(Glasgow)에 있는 친척집에 가 있었다고 했다. “욱, 이 나라가 꽤 괜찮은 것 같아. 방학 동안 여기저기 오래된 성들을 방문했어”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성들의 이름을 쉬지 않고 나열하며 너무 멋있었다고 자랑을 했다. “S, 그렇지. 여기 괜찮지? 너 지난 번에 감자에 대해서 불평한 거 기억나? 야, 셰익스피어도 감자 먹으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썼어. 그러니 괜히 애꿎은 감자에 대해 불평하지 마” 함께 웃었다.


긴 여름방학도 끝나갈 무렵 지인이 자신의 아들 수학 과외를 부탁했다. 말이 과외이지 전문대학을 막 입학한 아들 녀석이 – 영국은 9월에 입학과 더불어 첫 학기가 시작한다 – 수학이 좀 딸리니 한번 봐 달라는 것이다. 아들을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 얘길 들어 보니 방정식 계산에서 ‘이항(移項, transposition)’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5x + 5 = 20에서 좌변의 +5가 우변으로 넘어가 5 x = 20 – 5 가 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 마이 곳! 몇 번을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이게 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풀어서 하나하나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뭘 어떻게 더 이상 풀어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마침 도서관 근로장학생으로 있는 항해학과 학생 K가 다가왔다. K가 나보다 나을 것 같아 사정을 설명하고 K에게 부탁하여 인계하였다. 한국에서는 바닥이던 내 수학 실력이 OECD 상위권 국가에서는 대학생을 가르칠 만큼 결코 부족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외국에서 테솔(TESOL,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영어전문교사 양성과정)을 이수하고 돌아와 치열한 경쟁 속에 영어강사를 하는 것 보다, 어느 대통령은 취업난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중동으로 가라 했다는데, 차라리 살기 좋은 영미, 유럽 선진국에서 와서 그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수학 강사, 과외 선생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교회
영국의 국교(國敎)는 성공회(Anglican Church 혹은 Church of England)이고 과거 이를 따르지 않던 청교도(개신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청교도들이 영국에 남아 성공회 신도들에 비해 비국교도(非國敎徒)라 차별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영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2016년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 중 53%가 자신이 무종교인이라 답했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중 15%가 성공회, 17%가 개신교라고 답하였다. 와사시에는 성공회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하나씩 있었고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있었다.


마을 성공회 교회에서는 매월 교구 소식(Parish News)을 발행하여 배포하는데 성공회 교회에 출석하여 무료로 받거나 마을 간이우체국에서 50펜스에 구입할 수 있었다. 제법 두툼한 책자에는 성공회와 개신교 양 교회 소식뿐만 아니라 학교와 마을 내 각종 협회와 모임 소식 – 거주자협회, 역사협회, 정원가꾸기협회, 합창단, 밴드 등등–, 생활 광고 등이 실려 마을이 돌아가는 상황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늘 재미있게 읽었다. 마을 해양스카우트(Sea Scout) 기금 마련 점블 세일(Jumble Sale)이 열린다기에 온 가족이 가봤는데, 처음 간 티가 났던지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쓰레기장에 온 걸 환영한다며 웃어 댔다. 마을 강당이 옷, 책, 식기류, 가전제품, 장난감 등 갖가지 물건과 사람들로 가득찼고 한 켠에서는 간단한 다과류도 판매하고 있었다. 아이 장난감 몇 개와 그림책, 아내와 나의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 옷을 다 합쳐서 10 파운드도 안 주고 샀다.


우리 가족이 출석하던 개신교 교회는 서른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교회여서 전임 목사님이 계시지 않고 매주 다른 분들이 오셔서 설교를 하였다. 예배 후 티타임에 함께 하고, 매월 한 차례 갖는 단체 식사와 예배당에서 상영하는 영화 관람, 저녁 모임 등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교회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는 5월에 하는 ‘레미제라블’ 자선 콘서트인데 직장 동료, 친구, 마을 사람들에게 티켓을 나눠 주고 공연 당일 각자가 낼 수 있는 만큼의 금액을 모금함에 넣고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5월 공연을 위해 3월 중순부터 매주 연습을 하였는데 주중 저녁에 시작하여 밤 늦게 끝나곤 했다. HND와 SQA시험을 앞두고서 나 역시 자원하여 죄수 3, 간수 2, 그리고 앙졸라(Enjolras) 역을 맡아 참여했는데, 시험 걱정을 하면서도 연습을 즐겼던 것 같다. 교회에서 세 번을 공연했고 마을 성공회 교회에서도 한 번 더 공연했다. 모금된 돈은 모두 기독교 선교단체에 기부하였다. 영국에는 각종 자선 단체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여러 곳 있어 중고 물품을 사고 팔아 그 수익금을 자선활동에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개인들이 우울증환자 돕기, 치매 환자 돕기 같은 목적으로 자선 달리기를 하는 등의 모금 기부 활동이 활발했고 이를 위한 웹사이트도 있었다.     


교회 친구 PS는 카리브해 지역 사람들을 돕는 자선단체에 나가 봉사하곤 했는데, 하루는 내게 시간이 되면 토요일 오후 자기가 참여하는 단체에 가서 함께 봉사하자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도움의 대상이라면 동남아 국가들을 먼저 떠올리는데 반해, 영국에서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와 현재 영연방으로 이어지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을 우선 떠올리는 것 같았다.  PS의 픽업트럭이 30분쯤 후에 도착한 곳은 옛 왕립하슬라병원(Royal Hospital Haslar)이었다. 1753년에 개원하여 해군병원이 되었다가 2009년에 폐원한 이 병원은 영국 해군 군항 포스머스(Portsmouth)의 맞은 편 고스포트(Gosport)에 위치해 있다. 일반 민간 거주시설로 바뀔 때까지 PS의 단체는 역사 유적이 된 병원을 관리하면서 방치되고 낡은 의료기기들을 분류하고 떼어내어 이를 처분하거나 카리브해 지역 현지로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날도 PS는 나와 함께 형광등이 달린 낡은 엑스레이 사진 판독기를 몇 개 떼어냈다. PS가 이곳 저곳 다니며 설명을 해줬다. 범선 시대의 영군 해군 수병들이 입원 중 탈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는 해안 쪽 출입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었다, 본관 1층에 놓인 철로는 부상자들을 운송하기 위해 병원 전용 부두까지 이어진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서 왕립하슬라병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검색하여 시청했는데, 과거 선원들에게 치명적이었던 괴혈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의사이자 군인 제임스 린드(James Lind)가 바로 이 병원에 근무하면서 연구하여 괴혈병 치료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PS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앞에서 보면 승용차 두대 정도 세울 수 있는 너비의 평범한 2층 집 뒤로 어마어마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먼저 본채와 이어진 유리집으로 된 응접실 겸 식당이 있고, 한참을 걸어가면 P의 작업실과 첫번째 간이 울타리, 그리고 또 한참을 걸어가야 튼튼한 마지막 울타리가 나왔다. 영국인들이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다던데 집에 와 구글 어스(Google Earth)로 PS의 정원 길이를 재어 보니120m나 되었다.
교회에서 친구 S의 아들이 결혼하게 되었는데 신부 역시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아가씨였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 교회 쪽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귀족부인이 탄 것 같은, 영화에서나 본 듯한 무개마차가 나타났다. 장식을 한 말 두 마리, 높다란 검은 실크햇(Top hat)과 정장을 갖춰 입은 마부,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부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앉아있었다. 마차는 마을을 한 바퀴 돌고서 결혼식장으로 돌아왔다.  


 
나들이
아이와 시골 마을에서 지내려 한다니까 영국에 살고 있는 군대 동기 P가 생활 편의와 만약을 위해 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거라 권하였다.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가서 아내와 아이가 영국에 온 후, 차를 대여하였다가 동네에 익숙해지고 막상 별 쓸모를 느끼지 못해 처음 두 달만 사용하고 반납하였다. 사회 전반적으로 임금이 높고 공공 서비스 부문도 적잖이 민영화가 되어 승용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가는 우리 세 식구 왕복 버스비가 소형 승용차 하루 대여료보다 비쌌다. 그리하여 어디 나들이를 갈 때면, 교통이 특히 혼잡하고 주차가 어렵다는 런던을 제외하고는 모두 차를 빌려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왔다. 초보운전을 표시하는 ‘P(Probation)’ 자석판을 차 앞뒤에 붙이고 뒷유리창에 ‘Baby Onboard’ 표지까지 붙이면 오히려 주위 차량들이 조심하여 지나가고 운전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와사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에도 자동차 운전자들이 도로에서 주행하는 자전거를 마치 한 대의 차가 가는 것처럼 대등한 상대로 여겼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여 주인공이 런던 거리에서 트럭에 받쳐 즉사하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다들 하듯 자전거 앞뒤로 전등을 켜고 헬멧과 형광색 자켓을 착용하고 타는 한 특별히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승용차이건 트럭이건 앞쪽 라디에이터 그릴에 손바닥 만한 빨간 플라스틱 꽃을 달고 다니는 차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영국에 사는 군대 동기 P에게 물어보니 로얄 브리티시 리전(Royal British Legion)을 후원한다는 의미인데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젊은 층보다는 나이 든 세대들이 많이 달고 다닌다고 했다. 그 빨간 꽃은 개양귀비꽃인데 – 아편과는 상관없다 – ‘레드 파피(Red Poppy)’ 라 부르며 매년 11월 11일 현충일(Remembrance Day)이 포함된 주에는 일주일 동안 총리부터 일반 시민까지 종이로 된 빨간 개양귀비꽃을 꽂고 다닌다. 우리나라 재향군인회원인 나는 로얄 브리티시 리전에도 가입하여 차 앞에 빨간 플라스틱 꽃을 달고 다녔다.   


 셰익스피어의 생가와 그의 무덤이 있는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본(Stratford-upon-Avon)을 방문했다. 아내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셰익스피어 고향에 직접 와볼 줄은 정말 몰랐다면서 연신 좋아했다. 셰익스피어 생가 안을 둘러보다 중국 명나라 때 극작가 탕시안주(湯顯祖)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셰익스피어와 동 시대를 살다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고,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작품도 써서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을 대하는 영국의 자세랄까, 세계 무대에서 부상하는 중국의 힘이 느껴졌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온 후, 생가 뒤 한산한 정원 한 켠에 있는 인도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흉상을 발견하였다.       


주위에 빼곡히 모인 낯선 사람들과 군악대 소리 때문이었는지 아이가 울어대는 바람에 런던 버킹엄궁(Buckingham Palace) 근위병 교대식은 보는둥 마는둥했다. 빅벤(Big Ben) 시계탑과 국회의사당, 웨스터민스터사원(Westminster Abbey)과 궁전들이 기대보다 대단해 보이지 않아서 나 스스로 놀랐다. 널리 알려진 곳이고 사진을 이미 봐왔다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보낸 반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고유의 전통이 이어지는 영국풍 건축물들에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사우스햄턴과 와사시의 시계탑을 보고, 시청과 중심가의 고풍스러운 호텔들, 우체국 건물을 보고, 와사시에도 백년이 넘은 집들이 수두룩했다. 우리나라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 아파트의 평균 수명은 29년이채 안되는데 반해 영국의 주택 평균 수명은 128년이다. 우리 고유의 역사적 건축 양식과 단절된 대도시 고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난생 처음 서울 경복궁에 가서 옛 궁궐을 보고 느낄 문화적 간극과 충격이 내가 런던에서 느낀 그것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 영국 외무영연방개발부(Foreign, Commonwealth and Development Office) 건물 외벽에 각 대륙을 명칭과 함께 여신(女神)으로 형상화한 조각상 장식들은 지나간 세기 대영제국의 융성함과 우월감의 끝자락을 보는 듯했다. 한여름 뙤약볕에 아내와 아이를 끌고 가기 미안하여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 본부는 템즈강(River Thames) 너머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다.


해안가의 새하얀 석회암 절벽들이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영국 해협 도선사를 태우고 내리면서 멀리 영국 해안의 하얀 절벽을 본 적이 있긴 했다. 세븐시스터스(The Seven Sisters)라 이름 붙인, 높이가 160m나 되는 일곱 개의 주요한 절벽을 중심으로 20km 넘게 이어지는 새하얀 절벽군을 바로 눈 앞에서 보자니 정말 장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석회암 중에서도 백악(白堊, Chalk)으로 이뤄진 것이라는데 영락없이 분필이 떠올랐다. 와이트섬에 있는 니들스(The Needles)는 이 새하얀 백악 절벽의 끝단이 아예 바다 위로 뻗어 나간 것이다. 바늘처럼 뾰족하게 서 있는 순백 바위섬들의 모양을 따서 ‘니들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정말 바늘을 연상시키는 백악 기둥이 서 있었는데 1764년 태풍으로 무너져 사라졌고, 니들스 끝단에는 적백색 칠을 한 등대가 있다. 또한 1897년 세계 최초로 영구적인 무선통신국이 이곳에 세워졌다. 와이트섬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여름 별장 오스본하우스(Osborne House)도 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 너머로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느껴졌다. 왕자와 공주의 놀이방 한 가운데에 그들이 가지고 놀았음직한 성경 속 노아의 방주 모형와 동물 장난감이 전시된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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