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 구술시험

영국선장 면허를 취득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서문욱 ㈜ 씨엠에스마리타임 선장의 기고문을 연재한다. 이번 5월호에는 △선장 구술시험1급 항해사 면허, 영국 재입국, 선장 구술 과정, 친구들, 수업과 시험 준비, 시험 그리고)를 편집했다. 다음호에는 △두 번째 영국 선장(두 번째 영국 선장, 사우스햄턴 해양 유산, 그리고 다시 신성모, 세 번째 영국 선장)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1급 항해사 면허
귀국하여 한 배를 승선하고 나서 다음 해 1월 중순 시작하는 선장 구술시험 준비 4주 과정을 등록했고 집에서 영국 선장 구술 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간 공부를 한번 정리하고, 또 경험해보니 영국 구술시험에서 한국 2급 항해사 면허보다 선장 면허인 1급 항해사 면허를 제시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 1급 항해사 시험에 먼저 응시하기로 하였다. 운이 따랐는지 필기와 면접시험을 모두 한 번에 합격했다.
계획했던 만큼 집에서 공부가 잘 안되고 마음만 조급해지는 것 같아 12월 초에 나 혼자 영국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출국 전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챙겨 가라고 아내가 사 줬는데 유통 기한이 다음 해 3월 중순까지였다. 그냥 다녀와서 먹기로 했다. 

 

영국 재입국
사우스햄턴에서 나이지리아 친구 J를 만났다. J는 남은 SQA시험 중 적하 및 구조학 과목을 다시 치르고서 일등항해사 구술시험에 응시하고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용케 며칠이 나와 겹친 것이다. 1년 만에 다시 만나 정말 반가웠지만 J의 시험도 있고 해서 식사만 간단히 하고 헤어졌다. J의 합격을 진심으로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또 불합격됐다고 알려왔다. 


지난 번에는 가족과 와사시에서 살았지만, 이번에는 24시간 개방하는 솔렌트대학교 도서관도 이용할 겸 사우스햄턴 시내에 숙소를 잡았다. 솔렌트대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비교적 신축인 4층 건물 – 콘크리트 - 로 학생과 미혼 직장인을 위한 쉐어 하우스(ShareHouse)인데 최소 거주조건이 6개월이라 별 수 없이 계약했다. 각 호별로 복도를 따라 예닐곱 개의 방이 있고 반대편에 커다란 공용 주방 겸 응접실 그리고 화장실 겸 세면장이 있었다. 내가 있던 호실에는 포르투갈 학생들과 영국 학생, 직장인이 함께 살았다. 1인용 전기밥솥을 가져 갔고 내 딴에는 이제 영국 생활이 두 번째라고 금새 단출한 살림 채비를 마쳤다. 아직 등록된 학생은 아니기에 나이지리아 친구 J가 일러준 대로 지난 와사시해양대학 학생증을 제시하고 매일 임시 출입증을 받아 도서관에서 공부하였다.      


오랜 만에 교회에서 만난 교회 친구들도 모두 반가워했다. 마침 한 달에 한 번 있는 교회 식사 날이어서 그간 지낸 얘기들을 나누며 다 같이 점심을 들었다. 교회 친구 PS가 크리스마스 때 자기 집에 와서 자신의 가족, 자식들과 함께 지내자는 걸 시험 준비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말 고맙지만 괜찮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사우스햄턴 시내는 마치 어느 영국 좀비 영화에 나온 좀비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거리를 연상시켰다. 회색 하늘 아래 모든 상점들, 편의점마저 문을 닫았고 차와 사람이 사라진 대신 까마귀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비닐 봉지들이 바람에 날아 다녔다. 그저 어쩌다 나와 같은 국제 학생이나 외국인 근로자 같아 보이는 사람 두서넛만 정처 없이 마치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1년 만에 다시 뵌 서성기 교수님은 사우스햄턴에서 가장 맛있다는 피쉬앤칩스 음식점에서 점심을 사 주셨다. 서 교수님께서 유인선박조종시뮬레이션센터(Manned Ship Handling Simulation Centre)에서 실험을 진행하니 함께 한 번 가보자고 제안하신 걸 역시 구술시험 걱정에 사양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한 겨울 대서양 날씨가 나빠져 대형 마트 바나나 진열대가 비게 되
었다. 영국이 섬나라인 걸 실감했다. 

 

선장 구술과정
친구들

첫 수업 시작을 기다리며 학교 도서관 복도에서 게시물을 뒤적이고 있었다. 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회사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인 두툼한 형광색 해상(海上) 코트를 걸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걸 굳이 지금 왜 여기까지 입고 왔지?’ 게시물을 다시 읽고 있는데 옆에서 다른 포스터를 보던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선장 구술(Master’s Orals) 과정에 등록했다며 내 과정을 물었다. 나 역시 선장 구술 과정에 등록했다고 하자 자신은 스리랑카에서 온 JP라며 간단한 소개를 하기에 나도 내 소개를 했고 우리는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되어 강의실에 들어가 우리는 첫 줄에 나란히 앉았고 이후 시험을 치를 때까지 구술시험 짝이 되었다. JP는 그 날 이후 그 형광색 코트를 두 번 다시 학교에 입고 오지 않았다.


열두어명 정도 되는 동기들 중 3분의 2가 영국 학생이고 나머지는 인도에서 온 VA와 AM, 캐나다에서 온 SS, 스리랑카에서 온 JP 그리고 나였다. VA는 머스크 탱커스(Maersk Tankers A/S) 제품유선 일등항해사, AM은 티케이 탱커스(Teekay Tankers Ltd) 제품유선 이등항해사였고, 인도계 캐나다 친구 SS는 홀란드 아메리카 라인(Holland America Line)에서 크루즈선 일등항해사, JP는 MSC(Mediterranean Shipping Company S.A.) 컨테이너선 일등항해사로 승선 중이었다. 인도계 영국 친구 RK 역시 머스크 탱커스(Maersk Tankers A/S) 제품유선 일등항해사였고, 영국 친구 T는 보기 드물게 포츠머스에 있는 톨쉽(Tall Ship) 일등항해사였다. 톨쉽은 크기에 따라 등급이 나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선체 길이 40m 이상 되는 전통적인 형태의 범선을 칭하며 배의 높다란 돛대에서 비롯된 애칭이다. 이외에도 크루즈선, 유조선 등에 승선하는 동기들이 있었다. 

     
인도 친구 VA와 AM은 선장 구술과정에 와서 알게 되어 가까워진 사이인데, 둘은 내가 살던 쉐어 하우스 근처 에어비앤비(Airbnb)에 숙소를 잡았다. 선장 구술과정 4주와 총정리 및 시험 응시 2주 해서 한달 보름을 계약했다는데, 그 액수가 내 숙소 6개월치와 맞먹었다. VA와 AM은 내게 구술시험 한번 더 치려고 6개월 계약했냐고 웃었고 나는 너희들 두 번째 시험 칠 때 내 방을 빌려주겠다고 농담을 했다. JP와 런던에 산다는 RK는 와사시에서 같은 집에 숙소를 잡았다.  
지난번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 동기인 영국 친구 JD를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덥석 안았다. JD는 다른 단기교육 과정을 수강하러 왔는데 지난번 일등항해사 구술 시험에 합격한 이후, 선장 구술 과정을 수강하지 않고 그냥 혼자 준비해서 선장 구술 시험을 합격했다고 했다. 자신의 선장 구술 시험지를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수업과 시험 준비
선장 구술과정 과목은 기상, 구술, 법, 선원술(船員術, Seamanship), 항해장비, 나침반 및 나침반 실습으로 총 여섯 과목이다. 나침반 및 나침반 실습이 전체 강의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구술, 법, 기상의 순이다. 구술 과목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학교 교수님과 사우스햄턴항 현직 도선사 두 사람이 출강하여서 강의한다. 앞서 선장 및 일등항해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에서 뵈었던 교수님들도 다시 수업에서 반갑게 뵈었다.


첫 수업은 나침반 및 나침반 실습이었는데 AJ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사우스햄턴 시험장에서 선장 구술시험에 응시할 때, 나침반 강의를 AJ 교수님이 했다고 하면 시험관이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는 얘기가 학생들 사이에 돌았다. AJ 교수님은 선장 구술과정은 한마디로 ‘복습 과정’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이제부터는 선박에서 최종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리는 선장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흔히 초급 사관 구술시험 응시자는 자신의 대답에 확신이 없을 때 ‘Call captain (선장님께 보고)’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킨다는데, 이제 우리가 그 ‘Call captain’이후를 맡아 대응하고 처리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침반 수업은 4주 내내 강의와 실습이 있었다. 나침반 실습은 조를 짜서 예전 선장 및 일항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에서도 이용한 적이 있는 나침반실(Compass room)에서 진행하였다. AJ 교수님은 아쉽게도 플라스틱 비나클(Binnacle) 자기 나침반이 고장 났기에 나무 비나클 자기 나침반만 이용하여 실습한다고 하셨다. 얘기하시는 표정과 말투가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것이었는데, 요즈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보다 예전 장인이 수제작한 물건이 오히려 더 견고하고 신뢰가 간다는 말씀도 웃으며 덧붙이셨다. 그 고장 난 나침반은 1년 전 실습 시간에 JE 교수님이 고장 났다고 애석해하셨던 그 나침반이었다! 1년 전 상태 그대로인지 혹 수리를 하였다가 다시 고장이 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저 간단히 수리할 수 있어 보이는 부착물의 문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크게 내색하지 않았으나 동일한 실습 장비가 고장 나서 실습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반복됨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우리 조는 JP, 영국 친구 M과 나 세 사람이었는데 매일 한 번씩 각자가 나침반 조정인(Compass Adjuster)이 되어 나침반 수정을 해본 후, 다른 조와 나침반 수정 결과를 비교하였다.  


구술과목은 예전 과정에서 뵈었던 학교 AB교수님과 사우스햄턴항 도선사 BH교수님, 그리고 또 다른 사우스햄턴항 도선사인 BS교수님이 나눠서 맡았다. AB교수님은 국제 조약과 법규를 중점적으로 다루셨고, BH교수님은 해상충돌예방규칙, 선박조종술과 영국 MCA에서 발행하는 각종 주석과 통보를, BS교수님은 선장의 법적, 상업적 직무와 각종 증서, 규정 등에 대해 강의하셨다. 다루는 분야가 넓다 보니 암기를 해야 하는 중요 핵심 사항에 대해서는 단순화하거나 약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가령 BS 교수님은 ‘5C’s for Sea Worthiness(선박 감항성을 위한 5C)’라 하여 Compliance(적합성), Certification(인증), Condition(상태), Crew(선원), Conduct(수행)를 꼽았다. 선주가 선장(Shipmaster)에게 원하는 것을 영어 단어 철자대로 하나하나 풀어 ‘S’는 Safety of crew, ship and cargo(선원, 선박과 화물의 안전), ‘H’는 Honest / hard-working(정직 / 근면)하는 식으로 해서 마지막 ‘R’까지 Relations with shore personnel(육상 직원과의 관계)로 설명한 책도 있었다. 법 과목을 맡으신 SD교수님은 Stand up(꼿꼿이, 자신 있는 자세를 가져라), Speak up(큰 소리로 단순명료하게 말하라), 그리고 Shut up(쓸데 없는 건 말하지 말고 입을 다물어라) 이 ‘3S’s for OralExam(구술시험을 위한 3S)’라고도 했다.


도통 짐작이 가지 않고 웃겼던 약어는 BH교수님이 해상충돌예방규칙을 설명하면서 쓴 ‘CCBABAGWVA’였다. 피항선의 조선만으로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최근접 범위를 의미하는 약어인데 풀어 보자면 Collision Cannot Be Avoided By Action of Give-Way Vessel Alone(피항선의 단독 동작으로는 피할 수 없는 충돌)였다. 설명하시는 BH교수님도 웃으셨다. 현직 도선사들이 학교에 출강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대학에 출강하며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과 경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법 과목 역시 예전에 뵈었던 해양법 변호사 SD 교수님이 맡으셨다. AB교수님이 각종 국제 협약과 법규들을 해제하고 실무에 필요한 부분들은 중점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다면, SD 교수님은 선장 구술 기출 문제들을 정리하기도 하였지만 실제 법정 분쟁 사례들을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당장 낼 모레 시험을 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뭔가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콕 집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단순히 시험을 넘어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법적 분쟁들을 접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기상과 드라이독(Drydock)은 예전 F 교수님과 R 교수님이 강의하셨다. 선장 출신이신 F 교수님은 열대성 저기압 피항법, 기상도 등을 중심으로 기상 과목을 총정리해주시면서 기상뿐 아니라 시험 과목 전반에 대해 질문하라고 하셨다. F교수님 수업이 없는 날에도 연구실로 찾아가 질문을 드리고 아예 학교 항해학 교재를 받아온 친구도 있었다. 드라이독은 건선거(乾船渠) 입출거시 절차와 주의 사항을 중심으로 예전 과정의 간략한 복습과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R교수님은 열심히 준비하면 다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며 감사하게도 특별히 나를 언급하면서 격려해주셨다.   
항해 장비(Nav Aids)는 한 시간 동안 GM교수님이 ECDIS(Electronic Chart Display and Information System.전자해도정보표시시스템)을 중심으로 최근 동향과 관련된 MCA 주석, 통보 등에 대해 강의하였다. GM교수님은 학교와 영국 롤스로이스(Rolls-Royce)간에 진행 중인 자동화 선박(Autonomous Ship) 관련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선원술은 구술 과목을 담당하신 AB 교수님이 함께 맡으셨는데 특별히 독립적인 과목이라기보다 구술 과목의 연장선상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선장 구술 과정은 과목별, 교수님별로 수업 내용이 분명하게 나뉘기보다 구술시험 특성 탓인지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장 구술 과정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에 집중하는 건 차치하고 자신의 구술시험 파트너와 문답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었다. 주중이나 토요일에는 수업 후 빈 강의실이나 JP의 방에서 문답 연습을 하였고 일요일에도 오전에 교회에 다녀온 후 역시 학교나 JP의 방에서 문답 연습을 하였다. 당락을 결정하는 ROR(Rule of the Road) 문제는 학교 도서관에서 선박 등화 형상 카드(Marine Flip Cards Lights and Shapes)와 부표 체계 카드(IALA Buoyage System Flip Card)를 빌려 서로에게 보여주며 묻고 답하거나 JP의 방 침대 위에 늘어 놓고서 부표 체계를 따라 항해하는 연습을 하였다. 선박 적하 및 구조학 분야가 부족한 것 같아 서성기 교수님께 부탁을 드려 찾아가 뵙고 한참을 다시 설명 들었다.    


AJ교수님은 우리들의 선장 구술 시험 준비 상태를 곡선 그래프로 전자칠판에 그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곡선이 서서히 올라가다가 시험 일주일 전부터 급상승하여 시험날에는 합격선에 다다르거나 아예 합격선을 넘어 최고조에 이를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험일 당일 저녁 펍에서 한잔하면서부터 다시 급속하게 떨어질 것이라 하여 다들 웃었다.
서성기 교수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셨다. 마침 가르치시는 기관학과 학생 중 우리나라 중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를 한 적이 있는 영국 친구 K가 있어 교수님 댁에 나와 함께 초대하신 것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K는 한국에 다녀온 후 와사시해양대학에 다시 입학했다고 했다.  

 

시험 그리고
개인적으로 구술 시험을 접수하여 과정이 끝나기 전에 응시한 친구들이 있었고 구술 시험 준비과정인 만큼 학교에서 희망자들의 자격통지서(Notice of Eligibility)와 구비 서류를 받아 사우스햄턴 시험장에 대신 접수하여 주기도 했다. 1차 응시는 모두 사우스햄턴 시험장에 신청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청하였는데 알고 보니 내 차례가 우리 과정 중에 가장 마지막이었다.


제일 먼저 응시했던 영국 친구 L이 시험에 떨어졌다. 자신이 기억하는 문제들을 우리 과정 왓츠앱(WhatsApp) 그룹에 올려 놨고 다음날 학교에 와서 상세하게 얘기해주었다. 내 이웃에 살던 인도 친구 VA와 AM은 좀 유별나게 구술 시험을 준비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솔렌트대학교 도서관에 갈 채비를 하는데 AM에게서 근처 펍에서 한 잔하자고 문자가 왔다. 기분 전환도 할 겸 가서 합석했더니 이 친구들은 맥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들며 문답 연습을 하고 있었다. VA 왈 자신들은 매일 저녁 펍에 와서 하루 배운 것을 정리하며 문답 연습을 한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예전 일등항해사 구술 시험 적에는 사우스햄턴 시험장 시험관이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란 걸 전해 듣고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앙숙 관계가 혹시나 시험 당락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어 파키스탄 스타일로 수염을 기르고서 구술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AM과 얘기하다 보니 예전 과정에서 만난 인도 친구 AK가 AM과 절친한 사이임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AM이 AK결혼식에 참석하여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런 넓고도 좁은 세상이란! AK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AM과 내가 영국에서 만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재미있게 되었다면서 시험에 꼭 합격하라고 했다. AM왈 원래 자신이 선장 및 일항사 상급국가학위 과정을 먼저 마쳤는데 그 다음에 영국에 가게 된 AK가 자신에게 부탁하여 AK에게 모든 수업 자료와 과제, 시험 정보들을 줬다고 했다. 어쩐지 AK가 둘째 학기에 수업과 학교 시험에 별 부담을 갖지 않고 구술시험 준비에 몰두하더라니. 선장 구술시험 후 AK가 선장 구술 과정 자료를 부탁하여 나 역시 보내주긴 했다.    


VA와 AM은 같은 날에 시험을 쳤는데 VA는 합격, AM은 불합격이었다. VA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과 이뤄지는 모의 구술시험에서도 워낙 출중함을 보였기에 다들 합격을 의심치 않았었다. VA가 자신의 시험 문제를 설명하면서 시험관이 주기관 스캐빈지(Scavange, 소기(掃氣) 공간) 화재 발생시 대처법을 물었다고 했다. 주기관을 감속하여 정지시키는 동시에 송풍기를 정지하고 해당 실린더에 증기나 이산화탄소 소화 장치를 작동시키는 등 기관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지만, 긴급 상황 발생시 기관사는 물론, 때론 기관장까지도 적시에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 있기 때문에 선장이 주기관 관련 긴급 대처법을 숙지하고 당황한 기관실 인원들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시험관이 과연 이런 문제까지 질문했을까 나를 포함한 다수의 동기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구술시험의 네 가지 분야인 항해, 화물 취급 및 보관, 긴급 대처, 선상 운용 중 하나에 해당하고, 알아 둬서 나쁠 것은 없기에 다시 한번 답안을 숙지하고 긴급 대처 부분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AM은 이등항해사 경력 만으로 선장 구술 시험에 응시한 것이 무리였나 스스로 여기면서도 계속 응시하였다. 가끔 AM의 페이스북에 영국 어느 도시의 쓸쓸해 보이는 풍경이 올라오면 ‘거기 시험장에서 응시하는구나’ 짐작하였다. AM이 몇 번 다른 도시의 사진들을 올리는 동안에도 합격 소식은 듣지 못했고 대신 일등항해사 진급 소식을 먼저 알려와 축하해주었다.          

  
와사시에서 JP와 함께 한 집에서 자취하던 RK도 합격하였다. JP왈 그리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던 RK가 합격했다고 의아해하며 부러워했다. RK는 머스크 탱커 제품유선 일등항해사를 그만두고, 영국 쉘 쉬핑(Shell Shipping and Maritime)에서 액화천연가스운반선 전환 교육을 받을 예정이라 했다. RK 왈 머스크는 컨테이너 부문은 강하지만 다른 부문, 특히 탱커 부문은 약하여 원유선, 액화천연가스운반선 선대를 다 매각하고 이제는 제품유선 선대만 겨우 남아있다고 했다. 크루즈선에 승선하는 영국 친구 B가 불합격하였는데, 늘 조용히 있지만 주어진 질문에는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 잘 대답하던 친구여서 다들 합격을 예상했기에 놀랐다. 어찌 보면 수업 시간에 조용하게 주어진 질문에 정답을 말하기보다 매일 저녁 펍에서 한잔하면서 복습한다는 둥 허풍 비스무레한 언행을 일삼던 녀석들이 오히려 더 합격한 것 같았다. 전자의 경우는 시험장에서 좀 경직되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4주 선장 구술과정이 끝나고 구술시험까지 2주 남은 기간 동안, JP가 자신이 예전 일등항해사 구술 시험 때 개인 교습을 받았던 U 박사님에게 함께 개인 교습을 받자고 내게 제안했다. 이미 JP와 단짝이 되었기에 고민을 해 보다 수락했다. 선장 출신인 U 박사님은 사우스햄턴대학교(University of Southampton)에서 해양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 출강하였고 선박회사와 MCA에도 근무한 적이 있고 지금은 해운선박 관련 자문을 하는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험에 앞서 세 번의 개인교습을 갖기로 하였는데, JP가 나보다 구술시험을 일주일 앞서 치르기에 첫 시간은 함께,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간은 각자의 시험 일정에 맞춰 따로 받았다. JP와 함께 U박사님 댁으로 간 첫 날, 수업에 앞서 박사님은 노틸러스 인터내셔날(Nautilus International) 가입 신청서를 나눠 주었다. U 박사님은 해상충돌예방규칙에서 간과하기 쉬운 개념 정리부터 시작하여 각종 국제협약과 법규에 대해 요약하고 우리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간의 공부를 다시 한번 총정리하는 시간이었지만, 시험이 채 열흘도 안 남았는데 ‘아!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시험 쳐 볼만 하겠다’라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JP의 시험날이 되었다. 11시에 크루즈선 일등항해사 SS가 시험을 치르고 14시가 JP 차례였는데, JP가 함께 시험장에 가달라고 하였다. 시험에 대한 정보도 얻을 겸 SS가 시험을 끝낼 무렵에 맞춰 JP와 만나 시험장으로 향하는데 SS가 합격했다는 메시지를 우리 과정 왓츠앱 그룹에 올렸다.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SS와 길에서 마주쳐 합격을 축하해줬다. SS는 크루즈선, JP는 컨테이너선, 나는 원유선으로 선종은 모두 다르지만, 참고할 만한 공통 질문이 있는지 SS의 얘기를 듣고 또 물어봤다. 한참을 셋이 길에서 떠들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SS의 부인이 미소를 띄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남편의 합격을 축하해 주려는 부인을 기다리게 두고서 방금 막 시험을 치고 나온 SS를 붙잡고 그렇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니. SS와 다시 한번 축하의 악수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JP와 나는 솔렌트대학교 도서관으로 와 JP의 마지막 시험 준비를 하였다. JP는 식사 생각이 없다 했고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문답하며 조용히 각자 시간을 보냈다. 시험 시간이 되어 JP와 MCA본부로 갔다. 솔렌트대학교 도서관에서 내 숙소는 도보로 5분 거리이고 MCA본부는 내 숙소에서 10분 거리이니, 도서관에서 대략 15분 남짓 걸렸던 것 같다. 시험실(Exam room)로 들어가는 JP를 마지막으로 격려해 주고 숙소로 돌아왔다가 시험이 끝날 즈음에 MCA 본부로 가서 JP를 기다렸다. 본부 1층 로비 의자에 앉아 전시되어 있는 MCA 소개 게시물들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감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배를 타다 보니 어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이곳 역시 훗날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실에서 JP가 나왔다. 합격했단다. JP에게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여주고 얼싸안아주었다. JP 왈 시험관이 일찌감치 자신이 시험에 통과했음을 알려주고서 남는 시간 동안 자신에게 승선 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농담도 나눴다고 했다. 더 이상 시험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JP가 저녁을 사겠다고 해 숙소 근처 펍에서 함께 저녁을 들었다. JP를 만난 이후로 그렇게 자신 있어 보이는, 기고만장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귀국 전날 JP는 사우스햄턴 시내에 들릴 일이 있으니 잠깐 보자고 했다. 약속을 잡고 솔렌트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도서관 바로 앞에서 만났는데 JP가 다음주 시험 잘 보라고, 합격을 미리 축하한다며 샴페인 한 병을 선물해주고 갔다.       


집에서 어머니가 좀 편찮으시니 다만 며칠이라도 일찍 올 수 없냐고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 응시해도 다시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U 박사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상의를 했다. 만약 지금 구술 시험을 취소하면 접수를 다시 해야 해서 사우스햄턴에서는 두세 달 뒤에나 재시가 가능할 것이고, 연기하면 그보다 일찍 응시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간단한 병원 진단서라도 필요하다고 했다. 아내와도 상의를 한 다음 그냥 시험을 치고서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귀국하기로 했다. 어차피 숙소 계약 기간도 남아 있으니 합격하면 짐을 찾으러 올 것이고 불합격하면 재시를 위해 다시 올 터였다.


시험날이 되었다. 평소처럼 일어났고 전날 잠은 잘 잔 것 같았다. 11시에 시작이니 일이십 분 앞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었다. 아침에 뭘 공부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자기 최면에 도달하였다.
‘나는 시험 보러 가는 게 아니다. 예전 싱가폴 선사에서 승선할 때 회사 감독(Superintendent)과 차 한잔하며 서로 농담 따먹기 했듯이 지금도 친한 회사 감독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시험실 책상에 시험관과 마주 앉았다. 상호 소개를 마치고 시험 시 주의사항을 들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양해를 구한다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았다. 한국 1급 항해사 면허 증서와 자격통지서(Notice of Eligibility)를 살피던 시험관이 내 SQA 시험 점수를 물어보더니 자신이 갖고 있는 서류와 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사무실에 가서 확인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별안간 오기 비슷한 게 생겼다.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자!’
시간이 얼만큼 지났는지도 모르는 새 시험관이 돌아왔다. 서류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시험을 시작하자 했고 첫 질문을 던졌다.
“네가 다른 회사에 입사하여 유조선에 승선하는데 갱웨이(Gangway)부터 선장 사무실까지 여정과 확인사항을 말해 봐라”       
시험관이 질문을 이어 갔다. 내 대답이 좀 부족한 듯 싶었는지 확인을 하거나 되묻기도 하였다. 마침내 ROR문제에 이르러 시험관이 문제를 내기에 앞서 주의 사항을 얘기했다. 단 한 번의 대답 기회가 주어질 뿐이니 잘 생각하고 답하라 했다. 모형 선박을 내 앞에 두고서 내가 조선중인 선박으로 가정하고 답하라고 했다. 시험관이 어선처럼 보이는 모형 선박을 내 우현 선수에 두었다.


내 진로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우현 선수의 선박을 묘사하고 해상충돌예방규칙의 해당 조항을 말하여 상황을 정의한 후, 내가 취해야 할 결정에 대해 답했다. 시험관이 내게 그렇게 답한 이유를 물었다. 내가 상대 선박 선미의 데릭(Derrick)과 그물 같아 보이는 구조물의 상태로 보아 조업중인 어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시험관이 자신은 응시자들을 골탕 먹이지 않는다며 상대선의 형상물을 찬찬히 살펴보라 했다. 다시 보니 상대선은 아무런 형상물도 갖고 있지 않았고, 나는 재차 묘사하고 정의하고 내 결정을 답했다.
시험관이 다음 ROR 문제를 차례대로 물어 답했다. 시험관이 모형 선박들을 한쪽으로 밀어 둔 다음 스마티보드를 책상 위에 세워 두고 색깔 자석들을 움직여 선박 등화 형상을 만들어 냈다. 선박의 등화를 식별하고 통과 방법에 대해 차례대로 물어 답했다. 스마티보드를 치우고서 모형선박과  모형 부표들을 늘어놓고 해당 부표의 등화와 통과 방법에 대해 물어 답했다. 시험관이 모형 부표들을 치우고서 이제부터 제한 시계(Restric
ted Visibility) 상황을 가정하고 시험을 진행한다고 했다. 제한 시계 시선장의 야간 당직 명령(Night Order)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다. 답변을 마치자 시험관은 레이다 플로팅(Radar Plotting) 용지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주변 선박들의 위치를 표시하고서 내게 내밀었다.


“제한시계에서 네가 취할 동작은 무엇인가?”
정선수와 우현 선미에서 선박이 한 척씩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연필을 들고 레이다 플로팅을 끝낸 다음, 두 선박을 묘사하고 규칙에 따른 상황을 정의하고 내 결정을 말했다. 시험관이 레이다 플로팅 용지를 되가져 간 후, 다른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더니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MCA에서 발행한 MIN(Marine Information Note, 해사 정보 주석) 653(M)에 의거해 무제한 선장(Master Unlimited) 구술 시험을 시행했고, MCA를 대신하여네가 이 시험에 합격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축하한다”


합격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험관이 내 자격통지서에 ‘합격’이라 적어 돌려주었다. 행운을 빈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선장 구술 과정 친구들과 교회 친구들에게 알렸고, 학교의 가까운 교수님들과 JP, 군대 동기 P와 아내에게도 알렸다. 다들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점심을 먹고서 내 방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마치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아까 시험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합격이라 쓰인 자격통지서를 다시 반납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작은 트렁크에 간단한 짐만 챙겨 넣고 다음날 아침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