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와 진도, 제주도를 잇는 바닷길-

신록의 계절 가정의 달 5월이다. 거리두기 완화로 거리에서 마스크를 벗게 되었으나 콤파스를 당분간 열지 않기로 했다. 가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콤파스 강사로 나와 미국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준 연세대 유종해 명예교수가 최근 타계했다. 유 교수는 20여년전 로타리클럽에서 실시하는 연구교환단(GSE) 단장으로 단원들을 인솔하고 영국의 옥스퍼드와 템스 밸리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바 있다. 그 후에도 두 달마다 함께 만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며 영국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며 지내던 중 코로나-19로 인해 만나지 못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 당시 단원들은 영국의 7개 마을을 한달 동안 다니며 영국인 가정에서 숙식하며 영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또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였다. 소중한 경험이요 아름다운 추억이다.


 해양사의 관점에서 본 우리 역사를 서술한 논문 목포대학교 강봉룡 교수의 ‘한국 해상세력 형성과 변천’ 가운데 고려말 최씨무인정권의 ‘대몽항쟁과 바닷길’을 정리하여 콤파스에 게재한다. 고려가 무려 40여년간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골에 맞서 항쟁할 수 있던 저력은 해양력에 있었고, 삼별초의 진도정부가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상왕 장보고에 이어 삼별초 정부도 제해권을 확보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하려한 것은 해양사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공도화 정책으로 이어져 중앙정부의 해양에 대한 중요성이 희석되고 해양사상에 대한 인식까지 해이해진 것은 애석한 일이다. 강화도와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옮기며 최후까지 몽골에 항쟁하다가 옥쇄한 삼별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가옥쇄하능와전(可玉碎何能瓦全)-차라리 옥쇄할지언정 어찌 하찮은 기와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리요!” 외세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삼별초의 충절, 민족정신과 함께 바다와 해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대몽항쟁의 원동력 고려의 해양력 13세기 들어 칭기스칸이 몽골의 부족들을 결집하여 대대적인 정복에 나섬으로써 동아시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몽골 기병부대가 1240년대까지 북중국은 물론 유라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을 유린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고 마침내 1270년에 고려를 굴복시키더니 1276년에는 남송마저 멸망시켰다. 유라시아 대륙을 속전속결로 석권했던 몽골이 동방의 작은 나라 고려를 굴복시키는데 무려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몽골은 1231년 고려 침략을 개시한 이후 무려 9차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끝내 무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1270년에 가서야 고려왕조 유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고려와의 강화를 유도하였다. 고려가 이처럼 장기간 버텨낼 수 있던 것은 몽골이 알려진 것처럼 해전에 약해서라기보다 해양국가 고려가 막강한 해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최씨정권은 몽골의 침입을 받고 개경에서 강화도 강도(江都)로 전격 천도하여 40년간 몽골에 대항하며, 관민들에게 전란 동안 산성과 해도에 들어가 피신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어찌 보면 무책임한 조치였다고 하겠으나 산성의 나라, 해양의 나라 고려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였다. 바다와 강은 강화도 고려정부의 주요 유통로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바닷길과 수로를 통해 유입되었다. 바닷길은 강화도 고려정부의 생명줄이었다.

 

팔만대장경 조판과 물류
팔만대장경 조판사업은 무인정권 2대 집정자 최우(崔瑀)의 주도하에 1236년 착수하여 16년만에 완료한 대대적인 국책사업이었다. 이는 불력으로 몽골을 퇴치하려는 신앙심의 발현이기도 했으나 이를 통해 고려의 생명줄인 바닷길을 지켜내려는 최씨정권의 주도면밀한 정치행위였다. 1232년 부인사에 소장되어 오던 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즉각 대장경 조판을 관장하는 대장도감을 강화도에 설치하고 남해도에 분소인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였다. 이는 대장경 조판사업이 강화도와 남해도를 잇는 바닷길을 통해 수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남해도를 포함한 진주 일대는 최충헌(崔忠獻)이 진강후(晉康侯)로서 식읍(食邑)을 받으면서부터 최씨정권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광대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강화도와 남해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 조판이라는 대역사를 일으킨 것은 강화도와 남해도를 잇는 바닷길 물류를 유지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강화도와 남해도를 잇는 바닷길을 정상 가동하기 위해서는 서남해 해상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서남해 지역은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해양요충지로서 전통적으로 해상세력이 강했다. 장보고, 능창, 왕건, 삼별초,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해양사의 주목할만한 인물들이 모두 이곳을 기반으로 흥기하고 활동했다. 최씨정권도 강화도와 남해도를 연결하는 대장경 조판사업과 함께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했다. 일찍이 왕건이 서남해 지역 해상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불심이 깊은 고승을 이용한 것처럼 고승과 토호세력을 활용했다.


막강한 몽골군이 고려를 집요하게 공격했으나 강화도의 고려정부는 엄청난 재정과 자원이 소요되는 팔만대장경 조판사업을 벌이면서 수십년을 버텼다. 그 저력은 불심을 이용하여 서해와 남해 바닷길을 정상 가동시킬 수 있던 고려의 해양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몽골도 이를 간파하고 1256년부터 바닷길 길목에 해당하는 섬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바닷길과 물류를 차단하지 않고서는 강화도 고려정부를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의 몽골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남해의 여러 섬을 공격하게 했으나 고려는 300여척의 배를 보내 이를 막아냈다. 이에 차라대는 자신이 직접 전함 70여척의 대규모 함단을 이끌고 서남해 바다의 길목 압해도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을 감행했다. 이에 대해 압해도민들은 큰 배에 대포를 설치하고 섬 곳곳에도 화포를 비치하여 결사항전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다. 압해도에 대한 공략이 실패했음에도 몽골은 도서 연안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예컨대 요충인 아산만과 북계의 애도, 신위도 및 창린도를 계속 공격했다. 이렇게 도서지역에 대한 공방전을 계속 벌인 까닭은 바닷길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전쟁물자 유통로를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압해도가 몽골의 집중공격 대상이 됐고, 고려 역시 이를 사수하기 위해 300척의 배를 동원하며 몽골의 주력부대를 퇴치했다. 특히 바닷길을 방어하려는 압해도민의 의지와 능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삼별초가 진도에 건설한 해양왕국
압해도 공격실패로 바닷길 차단 작전에 실패한 몽골은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도서 연안 지역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고려와의 강화에도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지금까지 강화조건으로 집요하게 내세운 ‘고려국왕의 친조(親朝)’에서 한걸음 물러나 ‘태자의 입조’ 조건으로 하향 조정하여 제시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60년간 장기집권을 유지하며 항몽 전선을 주도하던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고려정부의 항몽의지가 급속히 꺾이고 강화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침내 1259년 고려 태자의 몽골 입조가 결행됨으로써 고려와 몽골 사이에 강화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후 최씨정권에 이은 무인정권 김준(金俊)과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 정권마저 무너지자 고려국왕 원종과 문신의 주도하에 1270년 개경 환도를 전격 단행했다. 이는 곧 몽골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왕조는 이후 80년 동안 몽골의 정치 간섭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최씨정권의 충실한 신복으로서 항몽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삼별초 전사들에게 개경 환도는 충격적이었고, 특히 몽골에 포로로 있다가 탈출한 신의군(神義軍)으로선 사형선고나 진배없었다. 이는 항몽 과정에서 최씨정권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던 서남해 지역 해상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조정의 출륙 환도 방침에 불응하였다. 이에 원종은 김지저(金之氐) 장군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삼별초를 혁파하고 명부를 거두어갔다. 이것이 삼별초 전사들을 더욱 분개하게 만들어 봉기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삼별초는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지휘하에 난을 일으켜 강화도를 점령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王蘊)을 추대하여 고려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추대 3일 후 1,000여척의 배를 동원하여 자녀와 재물을 싣고 강화도 구포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강화도를 떠난지 70여일만에 최종 목적지 진도에 도착했다. 이렇게 긴 시일이 소요된 까닭은 항해 과정에서 서해안의 도서, 연안지역을 경략하면서 이에 대한 지배권을 점검하려는 일종의 해상시위를 전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별초가 서남해 재해권을 강화하려는 사전 포석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삼별초가 최종 목적지로 진도를 선택한 것은 몽골과의 항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서남해해역 해상세력이 최씨정권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왔음이 고려됐을 것이다.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은 항몽의 동반자로서 삼별초의 진도 입거 과정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별초는 진도의 용장사를 중심으로 주위의 산세를 활용하여 대규모 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것이 용장산성(龍藏山城)이다. 그리고 용장산성의 내부에 산을 의지하여 계단식 축대를 쌓아 올려 터를 잡고 여기에 궁궐을 축조하였다. 용장산성의 궁궐터는 개경의 궁궐 만월대를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장산성은 진도의 주요 출입항인 벽파진에 면한 천연의 요새지였다. 더욱이 용장사는 일찍이 최항이 머문 적이 있을 정도로 최씨정권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삼별초의 진도 입거는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삼별초 세력과 서남해지역 해상세력이 연대하여 만들어낸 주도면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진도정부
삼별초는 진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해갔다. 우선, 진도에 입거한지 3개월만에 제주도를 점령했다. 당시 개경정부가 피해상황을 몽골에 알린 기록에 의하면, 그즈음에 삼별초는 30여개의 섬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흥, 나주,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거제 등의 전라, 경상 연안을 장악하여 내륙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유존혁(劉存奕) 장군을 파견하여, 그 주위의 섬들을 통솔하고 제해권을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서해의 도서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점검했으리라는 점까지 염두에 둔다면, 삼별초는 진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의 해상세력을 결집하여 일종의 해상왕국을 건설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는 온을 고려 황제로 칭함으로써 몽골과 대등한 고려의 정통왕조임을 자처하였으니, 이는 몽골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개경의 고려 정부를 명분에서 압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양을 매개로 일본과 정치 군사적 연대를 시도하였다. 최근에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 진도의 삼별초 정부는 “강화도에 천도하여 약 40년을 지냈고 또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삼별초의 진도 입거가 천도 차원에서 단행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진도정부의 영향력은 날로 확대되어 갔다. 경상도 만성(밀양)의 군민들이 봉기하여 수령을 죽이고 진도정부에 호응하였고, 개경에서는 관노가 들고일어나 다루가치와 고려 고위관리를 죽이고 진도정부에 투항하였으며, 경기도 대부도 주민들은 몽골인 6명을 죽이고 진도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진도정부가 위세를 크게 떨치자, 멀고 가까운 여러 지방의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고려황제 온을 알현하려는 무리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진도정부의 해양국가 건설 시도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삼별초 진도정부의 항전과 붕괴
1270년 용장산성(龍藏山城)에 도읍을 정한 삼별초 고려정부가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 경상지역 대부분의 섬들을 장악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본토의 삼남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해나가자, 개경정부와 몽골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진도정부가 일본에 국서를 보내 정치 군사적 연대를 추구해나가자 긴장감은 극도의 위기감으로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여몽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도정부 토벌을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전라도추토사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아해(阿亥) 원수가 1,000의 여몽연합군을 거느리고 진도로 출진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여몽연합군은 초전부터 대패하여 퇴각하였다. 이로써 삼별초의 고려정부 위세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 여몽연합군은 전국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전함을 대량 건조하는 등 진도 공격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김방경과 흔도(忻都)를 두 우두머리로 삼고 중군 좌군 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진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여몽연합군이 전세 탐색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진도 공격을 감행한 것은 1271년이었다. 김방경과 흔도는 핵심군대로 위장한 중군을 이끌고 해남의 삼지원(三枝院)을 출발하여 용장산성의 출입구인 벽파정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며, 그 동태를 살피던 진도정부 군대는 지체없이 전 병력을 기울여 벽파정 사수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진도정부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여몽연합군은 중군을 허병으로 세우고 정예군단을 좌군과 우군에 배치하여 용장산성 후방에 진입시켰다. 진도정부의 군대가 중군의 허병에 매달려 벽파정 사수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주력부대인 좌군과 우군은 용장산성을 넘어 궁성을 일시에 점거해버렸다. 이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진도정부는 여몽연합군의 양동작전에 말려들어 어이없게 붕괴되고 말았다.

 

진도정부 황제의 최후와 진도의 낙화암
예기치 않은 궁성의 함락으로 혼란에 빠진 진도정부 군대는 겨우 사태를 파악하고 곧바로 3군으로 나누어 용장산성을 탈출하기 위해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이미 삼별초 군대가 점거한 제주도로 탈출하여 항전을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일군은 진도정부의 황제 왕온을 호송하는 군대였다. 그러나 왕온은 그의 아들 환(桓)과 함께 침계리 고갯길에서 여몽연합군에게 생포되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오늘날 논수동 고갯길을 왕무덤재라고 부르는데, 왕온의 무덤일 가능성이 짙다. 왕무덤재를 넘으면 의신천이 흐르는 큰 평야가 있는데, 그곳을 떼무덤이라 부르고 있어, 이 평야에서 왕온의 수비대와 여몽연합군 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져 수비대가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를 시종하던 비빈들도 황제가 죽자 의신천에 투신하여 따라 죽었다고 전해져 이곳이 진도의 낙화암이요 백마강인 셈이다. 또 다른 일군은 삼별초 군단의 최고 우두머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부대다. 배중손의 군대는 제주도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남도포로 향하던 중 여몽연합군과 마주쳐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가 모두 전사했다. 마지막 일군은 삼별초 군단의 부장인 김통정(金通精)이 이끈 군대로, 김통정 군대는 금갑포를 통해 진도 탈출에 성공하고 제주도에 입거하여 최후의 항전을 전개한 삼별초의 마지막 세력이 되었다.

 

제주도 해상항전과 몰락
1271년 5월 진도정부가 무너지자 김통정은 진도 포위망을 뚫고 이미 삼별초가 점령하고 있던 제주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진도정부가 남해도에 파견했던 유존혁 장군도 80여척의 선단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제주도민들을 사역하여 항파두성(缸波頭城)을 축조하고 항몽의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이어 주변의 섬들을 점거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나포하는가 하면, 전라, 경상, 충청, 경기의 연안지역을 공격하여 수령을 체포하거나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삼별초 세력은 자체 경비를 충당하고 개경정부에 대해 경제적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서남해 지역에 대한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상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파두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경고한 요새지로 축조되었고, 서남해 지역 해상세력이 진도 함락 이후에도 의연히 제주도 삼별초 세력과 연대하고 있었다. 이들을 방치할 경우 삼별초의 해상왕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고, 반면에 개경정부는 해로를 통한 세곡 운반이 차단됨으로써 경제적 난관이 가중될 것이 뻔했다. 더욱이 이들이 일본과의 군사적 연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면 개경정부의 정권 자체에도 심각한 위협요소가 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몽골은 1273년부터 전국에서 군대를 징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그 군대와 전함들을 나주의 반남으로 집결시켰다. 마침내 160여척의 전함에 분승한 1만여 여몽연합군은 김방경과 흔도의 지휘하에 반남을 출발하여 3군으로 나누어 제주도를 공략하였다. 중군은 합덕포에 상륙하고 우군은 애월읍에 상륙하여 삼별초 군대를 유인하였으며, 그 사이에 좌군은 전함 30척으로 서쪽의 비양도를 통해 항파두성을 직공해 들어가 이번에도 양동작전으로 함락시켰다.

 

최후의 항전을 이끌었던 김통정은 패잔병 7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라산에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으나 재기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3개월만에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1270년 6월 1일 강화도에서 처음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거치며 해상왕국을 건설함으로써 한때 개경정부와 몽골을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뜨렸던 삼별초의 항몽전은 3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별초 군단의 몰락은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이로써 몽골의 고려 지배의 걸림돌이 완전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집요한 저항은 몽골로 하여금 유화적인 고려 지배정책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로는 삼별초 군단의 몰락은 곧 고려의 해상세력 몰락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몽골제국의 막강군단을 상대로 고려가 40여년간 버텨낼 수 있던 힘이 바로 고려의 해양력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별초의 저항과 몰락은 고려 해양력의 마지막 불꽃이 소진됨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와 몽골은 삼별초에 협조했던 서남해 해상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도 조치와 해상세력의 몰락
왕건을 위시한 해상세력의 힘으로 건국한 고려가 말기에 공도(空島)라는 초유의 조치를 발동했다. 공도 조치란 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통째 비워버리는 극단적인 조치를 의미한다. 문헌에는 그 원인을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적어놓고 있으나 아울러 삼별초 세력과 저변인 해상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가면서 3년 동안 고려의 해양국가 재건을 꾀하던 삼별초 세력이 1273년 5월 완전 진압되자, 여몽연합군은 삼별초에 동조하던 서남해 해상세력을 불온세력으로 낙인찍어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했다. 더구나 그즈음에 때마침 왜구의 침탈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삼별초의 몰락과 왜구 침탈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에서 왜구의 침탈행위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223년이고 그후 4년동안 소규모 산발적인 왜구 출몰이 이어졌다. 이에 고려왕조는 12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엄중 항의하였고, 일본에서는 서신을 보내 왜구 침탈행위를 사과하고 우호통상 관계를 맺을 것을 청하였다. 이후 왜구의 출몰은 기록상 30여년간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당시의 고려왕조가 왜구의 침탈을 압도할 수 있는 해양력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왜구가 자취를 감춘 30여년의 기간이 강화도 고려정부의 대몽항쟁기와 겹치는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왜구를 압도한 고려의 해양력이란 곧 강화도 정부와 삼별초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찍이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삼아 또 하나의 고려정부 수립을 공언하며 일본과의 정치군사적 연대를 시도한 전력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여몽연합군은 삼별초 동조세력과 왜구와의 연계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와 그에 동조했던 서남해 해상세력을 적도로 규정하고 탄압했던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왜구와 삼별초 세력이라는 두 변수를 염두에 두고 고려말기에 취해진 공도 조치의 원인과 해양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조선조 역사서를 살펴보면, 조선의 사가들은 고려말의 공도 조치에 대한 냉철한 역사비평을 가하지 않았다. 이는 공도 조치의 엄중성에 비추어볼 때 뜻밖의 일이었다.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말 공도 조치의 원인으로 왜구의 침탈을 들고 있다. 이 책엔 당시에 공도 조치 대상이 된 섬으로 남해도, 거제도, 진도, 압해도, 장산도, 흑산도 등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이 섬들은 하나같이 군현이 설치될 정도로 비중 있고, 전통적으로 해상세력의 중요 근거지가 된 큰 섬이다. 따라서 왜구의 침탈을 이유로 이들을 공도화 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섬들의 방어 능력을 충실히 하여 왜구의 침탈을 저지하는 것이 왜구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대비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거제도의 공도화 시점에서 더욱 커진다. 거제도를 공도화한 1271년을 전후한 시기엔 왜구의 침탈이 단지 소규모의 산발적 수준에 그치고 있어, 거제도란 거대한 섬을 통째로 비워버리는 공도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1271년 시점은 삼별초 세력이 진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안을 석권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치고 있어, 거제도 공도화 조치는 왜구의 침탈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도 삼별초 세력과 거제도 해상세력의 연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당시 삼별초 세력은 남해도에 유존혁 장군을 파견하여 서남해 제해권을 확대 강화해가고 있었으니, 이런 추세를 경계했을 고려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삼별초 세력이 거대한 섬 거제도마저 장악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1271년에 취해진 거제도 공도화 조치의 원인은 왜구보다는 삼별초 세력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해상세력 탄압과 해양사상의 퇴조
고려말 공도화 대상이 된 섬들은 대체로 대몽항쟁의 중심지였던 섬이었다. 압해도는 몽골의 차라대(車羅大)로부터 대규모 해상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고, 남해도는 강화도 정부가 팔만대장경 조판사업을 일으키면서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할 정도로 대몽항쟁에서 중시되던 곳이다. 진도는 삼별초가 입거하여 대몽항쟁 기지를 건설한 곳이니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이들을 공도화한 조치 역시 거제도와 마찬가지로 저항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군사적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삼별초 세력과 그 동조세력을 적도로 간주하던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삼별초 동조세력과 왜구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충분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고려말 공도 조치는 1차적으로 서남해의 저항 해상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그들과 왜구의 연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도 조치는 이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을까? 첫째 서남해 해상세력의 붕괴를 초래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극렬한 왜구 침탈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2차 공도화 조치가 취해졌던 1350년대 이후부터 왜구의 침탈이 그 빈도와 규모에서 급격히 증대되고 있었음이 이를 반영한다. 요컨대 고려말 공도 조치는 해양국가 고려의 해양력을 약화시키고 해방체제(海邦體制)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마침내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나라 해양사상의 퇴조를 상징하는 일대 전환이 되었다.

 

바다 사랑과 해양사상 고양
반도국이며 북쪽이 휴전선에 가로막힌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바다만이 살길이며 해양산업 발전이야말로 국운이 융숭해지는 길이다. 세계사의 부침을 보더라도 해양개척과 해양산업 육성발전에 힘쓴 나라들이 세계를 이끌었고, 이에 소홀한 나라들은 퇴보하거나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국사에서 해상세력은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소멸했다. 공도 및 후속 조치로 말미암아 해양세력의 활동무대인 섬과 바다의 삶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한국사를 이끌어온 해상세력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겉으로는 소멸된 것처럼 보일 뿐, 실제 사회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 해상세력의 잠재력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출해낼 것이다. 16세기말 일본의 해양침략전쟁인 임진왜란에서 이것이 구현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극복하면서도 해상세력의 잠재력은 화려하게 부활하지 못하고 완전 소진되어 국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였다. 이제 나라를 다시 찾은 지 80년이 가까워도, 우리는 아직 해양에 대한 인식을 되찾지 못했다. 아무쪼록 바다와 해양산업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해양세력의 잠재력과 불씨가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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