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을 다룬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Sternstunden der Menschheit)’를 정리하여 콤파스 대신 게재한다. ‘인류의 황금시간’ 또는 ‘인간의 별의 순간’을 뜻하는 이 책은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물에 대한 객관적 내면 탐구를 바탕으로 집필한 유럽의 지성 츠바이크의 대표작이다.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과 빈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배웠고, 역사비평과 시대적 통찰로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을 쓰다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하였다. ‘발자크’ ‘마리 앙트와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등 그의 작품들은 그가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전 세계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
어떤 예술가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예술가로 살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만들어낸 불멸의 걸작들도 드물게 찾아오는 짧은 순간의 영감으로 생겨난 것이다. 예술과 삶에서도 그렇듯이 역사의 장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숭고한 순간이란 드문 법이다. 천재 하나 나오려면 수많은 범인이 태어나야 하듯이 역사적 순간,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억겁의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야 온다. 오직 한번 ‘예 혹은 아니오’라는 말을 함으로써 또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행동함으로써 사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어,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한 민족의 미래와 심지어는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러한 순간은 개인의 삶에서 쉽지 않고 역사에서도 드물다. 다만, 이러한 순간들이 부질없이 지나간 후에야 무심한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을 뿐이다.

 

키케로의 죽음과 로마공화국의 종말
영리하기는 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남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와 마주칠 때 가장 현명한 처신법은 강자를 피해 가는 것이다.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시절이 바뀌어 자신이 나설 때를 묵묵히 기다리면 된다. 로마제국 최초의 휴머니스트이며 웅변가이자 법의 수호자인 마르쿠스 키케로는 물려받은 법을 지키고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30년간 온갖 힘을 다했다. 그의 주옥같은 연설문은 로마 연대기에 실려 있으며, 그의 저작은 라틴어의 틀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당시 그의 저서 ‘국가론’은 이상적인 국가를 위한 윤리 헌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키케로보다 강한 자가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보다 연장자이며 유명인사였던 키케로는 처음엔 아무런 의심 없이 카이사르를 밀어주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어느 순간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지배자 자리에 올랐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1인 지배 체제를 막으려 했으나 이미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며 법 위에 우뚝 섰다. 키케로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능욕하는 자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라고 간절히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무력은 언어보다 효과적이라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카이사르가 완벽히 승리했다. 적수로 돌아선 비판자 키케로가 힘을 잃었으나 카이사르는 관용을 보이고 경고 수준에서 목숨을 선사했다. 키케로는 당대에서 가장 매력이 넘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마리우스로 시작하여 카이사르로 끝나는 파란만장한 40년 세월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키케로와 끈끈이 얽혀있었다. 키케로만큼 이 시대와 역사를 뼈저리게 온몸으로 겪은 사람도 없었다. 시골의 자택에 진중히 은거하던 키케로는 60세가 되면서 궁극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중 선동가에서 철학자로, 웅변가에서 저술가로, 민중의 총애를 갈구하던 머슴에서 여유를 부리는 주인으로 변모했다. 진정한 현자는 나이가 들수록 품위를 갖추고 체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 키케로는 사랑하는 딸을 잃는 불행까지도 기품있는 철학으로 승화시켜 위로의 글 콘솔라티오로 비슷한 슬픔을 겪는 수많은 사람을 위로했다.


그러던 그가 세계사에 남을 실수를 저지른다. 어느 날 조국 로마의 자유를 위협하던 카이사르가 살해되었다는 전갈이 집으로 왔고, 더욱이 심복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가슴에서 피로 물든 단도를 뽑아내며 공화국을 신봉하는 스승 키케로의 이름을 외쳤다고 전했다. 로마의 정국이 어찌 될 것인가? 그러나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은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뒷감당할 그릇이 못 됐다. 후속 조치를 해야 할 상황이 오자 당황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이때 당대의 사상가답게 신중하던 키케로가 주저 없이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아직 카이사르의 피가 마르지 않은 바닥에 우뚝 서서 원로원 전체를 상대로 독재자를 제거했으니 우리는 자유를 되찾았고 공화국이 승리했다고 선포했다. 사색하는 인간은 생각이 많고 책임감의 무게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를 주저하여 사람을 해치는 일을 회피한다. 불가피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저하고 주변을 배려하다 보니 행동력은 마비된다. 로마의 권력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의 삼두정치로 이어지고 마침내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가고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됐다. 키케로가 그토록 수호하려던 공화정은 폐지되고 제정이 시작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작성한 살생부 맨 앞에 키케로가 올라갔고, 키케로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도피했으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힘들었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나자는 하인의 눈물 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늙고 지친 몸을 자신을 추적하던 용병대장의 칼에 맡겼다. 이렇게 로마의 자유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던 사상가이자 변호사 마르쿠스 키케로는 의연하게 죽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수많은 시간 중에 마지막 순간이 가장 영웅적이고 사내답고 결연했다.

 

동로마 제국의 종말
1451년 2월 술탄 무라드의 아들 스물한 살 메흐메트는 소아시아에 머물던 중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숨에 120마일을 달려 배를 타고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왕위를 넘보지 못하도록 어린 동생을 죽인 후 이 일을 위해 고용한 살인자마저 제거하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신중한 무라드의 뒤를 이어 다혈질이며 공명심에 불타는 메흐메트가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에 비잔티움 제국은 경악했다. 이 젊은 야심가가 세계의 수도 비잔티움을 수중에 넣겠다고 맹세하고 밤낮없이 전략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염탐꾼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당시의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일구어낸 대제국의 마지막 남은 찬란한 보석이었다. 전쟁을 준비하던 메흐메트는 완벽히 갖추기까지 음흉하게도 평화를 강조했다. 그리고 헝가리 및 세르비아와의 3년간 상호중립조약을 맺었다. 3년 안에 방해를 받지 않고 비잔티움을 수중에 넣을 심산이었다. 메흐메트는 평화를 거듭 약속하고 맹세하다가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돌변하여 협정을 위반하고 전쟁을 선포하였다.

 

반면에 바람 앞에 등불인 비잔티움이 내세울 것이라곤 오직 성벽밖에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만큼 빼어난 방어력을 갖춘 도시가 유럽에 둘도 없을 정도이긴 했다. 성벽을 부수는 온갖 무기와 신형 대포의 포탄들도 탄탄한 돌벽에 부딪히는 순간 맥없이 튕겨 나올 뿐이었다. 전략가 메흐메트는 기존 대포로는 파괴할 수 없다는 이 성벽의 장점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더 센 대포, 이전보다 사정거리가 더 길고 파괴력이 더욱 강한 대포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드디어 강력한 청동 괴물 신형 대포가 완성되어, 천년에 걸쳐 동로마 황제들이 쌓은 성벽과 새 술탄의 대포가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거대한 대포들이 번갯불을 내뿜으며 무서운 힘으로 비잔티움 성벽을 부수었다. 대포알이 적중할 때마다 성벽의 돌이 떨어져 나가고 틈새가 생겼다. 지금까지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없던 성벽이 신형 대포 앞에 힘을 못 썼다. 성벽이 무너지면 15만 대군이 몰려 들어올 것이고, 8천명의 시민들은 죽어갈 것이다. 모든 시민이 성당 앞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바티칸 교황과 기독교 국가들이 보낸 구원선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저 멀리 제노바 함대가 쇠뿔처럼 생긴 금각만으로 진입하더니 비잔티움 항구에 접안한 후 병사와 식량, 무기들을 내려놓자, 절망하던 시민들은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제노바 소속의 도시 갈라타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금각만 입구에는 차단용 쇠사슬이 가로막고 있어 오스만 함대는 정면 공격으로 금각만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메흐메트는 천재다운 아이디어를 냈다. 함대 전체를 육지로 끌어올려 산을 넘어 금각만에 들어가 내려놓는 방식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실천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 공격을 하는 한편,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밤새도록 산을 넘어 함대 전체를 옮기는 엄청난 기적을 조용히 계획하고 진행했다. 아침에 비잔티움 시민들은 금각만에 진입한 배들을 보고 처음엔 제노바와 베네치아 함대인 줄 알고 좋아했으나, 튀르크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이윽고 술탄이 총공격 명령을 내리며, 도시를 함락시키면 사흘 동안 마음껏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고 병사들에게 약속했다.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백성들과 하기아 소피아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렸고, 모든 주민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장엄한 행렬에 동참했다. 황제의 진두지휘와 병사와 성민의 결사 항전으로 거센 공격을 막아낸 덕분에 비잔티움은 한순간 구원된 듯 보였다. 이때 비극적이고 우연한 사고가 일어나며 비잔티움의 운명을 단번에 결정지었다.

 

몇 명의 튀르크 병사가 비잔티움 성의 외벽과 내벽 사이를 서성이다가 여러 쪽문 중 하나인 케르카포르타가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케르카포르타는 큰 성문이 잠겨 있을 동안에 보행자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작은 문인데, 이곳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처음에 병사들은 적이 파놓은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재차 확인한 후 이 사실을 지휘관에게 알려 이내 부대 전체가 봇물 터지듯이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외벽 쪽에서 방어하기에 바쁘던 비잔티움 병사들은 등 뒤에서 달려드는 오스만 병사들을 보고 소스라쳐 놀라, “도시가 점령당했다”고 외치자 이것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판이 났다. 술탄의 약속대로 밤새도록 승자들의 약탈이 벌어졌다. 다음날 수많은 시체 더미에서 황금 독수리 수가 놓인 자색 신발이 발견되어,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침입자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여느 병사와 다름없이 전사한 것을 사람들은 확인했다. 케르카포르타를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하찮은 우연한 사건이 세계사를 결정지은 것이다.


 
두 개의 대양을 동시에 바라본 발보아의 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콜럼버스는 인파가 가득한 세비야와 바르셀로나 거리를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며 값지고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불그레한 피부의 인디오, 오색 앵무새와 희귀한 동물들, 옥수수, 담배, 코코넛 등 처음 보는 식물과 과일들이 즐비했다. 환호하는 군중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눈을 떼지 못했지만, 정작 왕과 왕비, 신하들은 원하던 황금이 별로 없어 불만스러웠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내는 위업을 달성했고, 지금 가지고 온 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허풍을 떨었다. 새로 발견한 섬들에는 흙을 조금만 들추어도 금들이 쏟아져 나와 그 나라 임금과 귀족들은 황금 잔으로 술을 마신다고 말했다. 항상 돈에 쪼들리던 스페인 왕은 새로 얻은 영토가 솔로몬왕이 찾아냈다는 황금 왕국이라는 얘기에 열광하여 즉시 두 번째 항해를 위한 대규모 함대를 꾸렸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험가와 용감한 병사들이 모집에 응했지만, 인간쓰레기 같은 불량배들도 모여들었다. 유명인사였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법학자 엔시소가 책임자가 되어, 병사와 선원을 모집하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건달들과 범법자들이 합류했다.

 

거기엔 바스코 발보아도 있었고, 그의 승선 과정이 대담했다. 출항준비를 마친 엔시소의 배가 돛을 세우고 항해를 떠난 지 얼마 후 그의 충실한 개가 이상한 냄새를 맡고 킁킁대며 식료품 궤짝 주변을 맴돌자, 갑자기 상자가 열리며 그 속에 숨어 있던 칼과 방패로 무장한 사내 발보아가 나타났다. 그는 포르투갈에 가까운 소도시 카발레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병사 생활을 하다가 싫증 나자 신세계로 나가 할당받은 토지를 경작했으나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파산하는 바람에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빚쟁이 신세였다. 지휘관 엔시스는 법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가다가 섬이 보이면 무인도에라도 발보아를 내려놓을 심산이었다. 위기에 처한 발보아가 허튼소리로 다리엔이라는 곳에 금이 무궁무진한데,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자기가 잘 안다고 말하자, 모든 대원이 이에 동조하여 엔시소에게 반기를 들어 발보아가 지휘관이 됐다. 간신히 도망친 엔시소는 반란을 일으킨 발보아를 왕에게 고소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발보아는 죄를 사면받고 불멸의 명예를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했다. 최초로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인도로 통하는 남쪽 바다로 가서 스페인 왕국을 위해 황금의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세비야에 있는 궁정에 이렇게 전했다. “군사 천명만 보내주십시오. 전에 어떤 스페인 사람도 해내지 못한 새로운 대양을 찾아내고 황금의 땅을 발견하여 정복하겠습니다. 콜럼버스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발보아가 지켜내겠습니다” 그러나 발보아는 미지의 대양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병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식민지 주민들을 불러 모아 험난한 지협횡단 계획을 밝히고 동참자를 찾자, 190명의 용감한 병사가 자원했다. 이렇게 하여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한 발보아는 부상자와 탈진한 사람을 마을에 남겨두고 아직은 힘이 남은 67명과 함께 정상 부근까지 행군했다. 이윽고 발보아는 대원들을 멈추게 한 후 바다가 보이는 정상에 혼자 올라갔다. 미지의 바다를 처음 바라보는 순간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구상의 거대한 바다인 대서양을 건넜고, 또 다른 미지의 대양 태평양을 처음 목격한 스페인 사람이자 최초의 유럽인이며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영원히 남고자 했다.

 

드디어 정상...... 그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미지의 바다, 지금까지 꿈에 그리기만 했지 볼 수는 없었던 바다, 오래전부터 콜럼버스와 추종자들이 찾아 헤매던 전설의 바다, 아메리카와 인도와 중국을 품은 그 바다였다. 자신이 이 보석처럼 빛나고 광활한 바다를 최초로 바라본 사람이라는 감격과 황홀함으로 넋을 잃을 정도였다. 이렇게 발보아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보았고, 후발 부대에 이 바다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1513년 9월 25일 이후 인류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던 대양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 발보아는 전에 행한 선상반란 죄로 체포되어 총독에게 재판을 받고 불공정한 판결로 충직한 심복들과 함께 허무하게 처형됐다. 이렇게 유럽인들 중 처음으로 지구를 채우는 두 개의 대양을 동시에 바라보았던 눈은 영원히 빛을 잃고 말았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의 부활
1737년 4월 13일 오후 프리드리히 헨델의 하인이 브루크가에 있는 건물 1층 창문 앞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며 일에 몰두해 있었다. 리허설을 마친 헨델은 화를 잔뜩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불거진 채 현관문을 요란스럽게 닫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우당탕 소리가 나며 온 집안이 요동쳤다. 2층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진 듯했다. 하인은 단숨에 층계를 올라 2층 주인의 작업실로 갔다. 주인의 안락의자는 비어 있고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인은 침실로 서둘러 가다가 바닥에 쓰러진 헨델을 발견했다. 헨델은 꼼짝도 못 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헨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귀를 갖다 댔다. “끝이야. 난 끝이야. 힘이 없어. 힘을 잃고 살고 싶지 않아....” 의사가 방을 나서자 하인이 따라 나와 불안해하며 물었다. “무슨 병이지요?” “뇌졸중이오. 오른쪽이 마비됐소” “나으실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마비된 상태로 말입니까?” “그럴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을 못 하신다면 선생님은 사실 수 없을 겁니다” “일하는 건 이제 불가능하오. 음악가로 일하지는 못할 거요. 충격이 뇌에까지 미쳤거든요” 그 말을 남기고 의사는 가버렸다.


넉달 동안 헨델은 힘을 잃은 채 살았다. 몸 오른쪽이 죽어버린 듯했다. 그는 걸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으며, 오른손으로는 오르간 건반 하나 누르지 못하는 신세였다. 헨델의 운명은 거기까지였을까? 그러나 땅속에 신비로운 온천수가 흐르듯이 그의 마비된 껍데기 속에서 불가사의한 힘이 살아 꿈틀거렸다. 바로 헨델의 의지였다. 그의 원초적인 힘이 치명적인 뇌졸중을 이겨낼 수 있었고, 몸속에 담긴 불멸의 예술을 그냥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왼손으로 시험 삼아 건반을 눌렀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주저하며 오른손도 시험해 보았다. 오랫동안 마비되어 있던 손이다. 아, 이럴 수가? 오른손이 건반을 누르자 은빛 샘처럼 소리가 솟아나지 않는가! 서서히 연주를 시작했다. 즉흥곡이었다. 빛과 소리가 하나가 되어 주위가 환해졌다. 기도하던 수녀와 신자들이 연주를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그의 내부의 어떤 힘이 계속 꿈틀댔다. 그 신비로운 힘은 호기심을 부추기며 그를 재촉했고, 그 힘을 거역할 기운이 없었다. 헨델은 일어나서 작업실로 갔다. 흥분된 상태에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촛불을 켰다.

 

앞서 마비된 신체가 회복되는 기적을 한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신은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헨델은 원고 옆으로 촛대를 끌어당겼다. 첫 장에 메시아라고 쓰여 있었다. “아, 오라토리오구나! 지난번엔 실패했지” 불안해하면서도 그는 표지를 넘기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로를 받으리로다!” 이 말이 울리며 무기력한 영혼을 뒤흔들었다. 또 한 마디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바로 그 손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 하신다. “주께서 너를 정화하시리라” 하나님은 진정 도움을 주시는 분이다. “신께 영광을 돌리세” 죽음을 겪은 자의 자격으로 사람들 앞에서 메시아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들을 표현하고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이 피조물의 의무가 아닌가. “할렐루야!” 은혜로운 말씀과 신비로운 이야기가 메시아의 가사가 됐다. 헨델은 한 작품 메시아를 유난히 좋아했다. 메시아가 그를 낭떠러지에서 구해냈고, 마음의 평온을 주었으며, 창작의 열정을 키워주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다. 1759년 4월 중병이 든 일흔넷의 헨델은 코벤트 가든의 무대에 섰다.

 

시력을 잃어 연주자와 합창단원들을 볼 수 없었지만, 음악이 철썩이는 파도처럼 힘차게 밀려들고 청중들의 환호성이 홀에 울려 퍼지자 지친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팔을 박자에 맞춰 내저었고 진지하고 경건하게 합창단과 함께 노래했다. 그는 평소 그리스도의 수난절인 성 금요일에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는데, 운명의 손이 그를 바닥에 쓰러뜨린 날도,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처음으로 세상에 울려 퍼진 날도 성 금요일인 4월 13일이었다. 그 4월 13일에 헨델은 기운을 잃었다. 텅 빈 소라껍질에서 파도소리가 울려 퍼지듯 찬란한 음악이 그의 영혼을 지친 몸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청아한 선율은 저 높이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원한 세계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부활절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육신은 생명을 잃었다.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운명은 힘 있는 자와 그 힘을 휘두르는 자를 찾아와 오랫동안 단 한 사람만을 주인처럼 섬긴다.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의 경우가 그렇다. 파악할 수 없는 원초적 존재인 운명이 자신을 닮은 원초적 힘을 지닌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운명은 야릇한 변덕을 부리며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기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벌벌 떨다가 손에 잡은 운명을 놓쳐버리고, 기회는 놓친 사람에게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열린 빈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에게 사슬에 묶인 사자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잇따라 전령들이 들이닥쳐 나폴레옹이 리옹을 점령했고 왕을 몰아냈고 군대가 나폴레옹에게 투항했으며, 파리의 튈르리궁이 나폴레옹 차지가 되었다고 전했다. 지난 20년 동안 숱한 목숨을 잃어가며 전쟁을 치렀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강력한 나폴레옹을 제압했건만 이젠 허사가 되었다. 유럽의 황제와 왕들은 위태로운 순간이 닥치자 단단히 하나로 뭉쳤다. 영국의 웰링턴이 북쪽에서 프랑스를 향해 진군하고,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대가 영국군의 측면을 보강하며, 슈바르첸베르겐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라인강 부근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고, 예비병력인 러시아 연대가 중무장한 채 독일 땅을 가로질러 행군하고 있었다. 전략가 나폴레옹은 단번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인지 간파했다. 프로이센, 영국,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 제국을 무너뜨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들을 차례로 격파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서둘러 치열한 싸움터 벨기에로 향했다. 마침내 국경을 넘어 전투가 시작되어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군대를 선제공격하여 격퇴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패배했지만 괴멸되지 않은 채 브뤼셀로 후퇴했고, 언제든 웰링턴 군대에 가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군대 일부를 떼어내 이 부대에 프로이센군을 바짝 추격하여 영국군에 가세하지 못하게 막으라는 임무를 맡기고 명령권을 그루쉬 원수에게 넘겨주었다. 그루쉬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용감한 기병대장이었으나 그 이상의 인물은 아니었다. 영웅이나 전략가도 아닌 내려진 명령과 주어진 임무만을 수행하는 수동적인 군인이었다. 드디어 유럽의 운명이 결정되는 워털루 전투가 시작됐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프랑스군은 언덕을 공격하고 마을과 진지를 점령했다가 쫓겨나고 다시 돌격해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진흙이 질척대는 언덕에 만명의 시체가 뒤덮일 정도로 모두 기진맥진하자 양측 사령관은 모두 초조해졌다. 둘 다 지원군이 먼저 오는 쪽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블뤼허가 먼저 오면 웰링턴이 이기고, 그루쉬가 앞서 오면 나폴레옹이 이길 것이다. 한편, 나폴레옹의 운명을 손에 쥔 그루쉬는 지정된 방향으로 프로이센군을 뒤쫓고 있었다.


멀리서 워털루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포성이 울렸다. 그루쉬는 참모회의를 열었다. 부지휘관과 다른 장교들이 한목소리로 건의했다. “대포 소리 나는 곳으로 신속히 가야 합니다” “빨리 그리로 갑시다” 그러나 복종하는 데 익숙한 그루쉬는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적힌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1초 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과적으로 이 1초가 그루쉬의 운명뿐 아니라 나폴레옹과 19세기 유럽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루쉬는 부하의 간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소규모 부대를 다시 나누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내 임무는 프로이센군을 추적하는 것이다”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이며 대치상태에 있던 웰링턴과 나폴레옹 앞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것은 그루쉬가 아닌 블뤼허였다. 이 소식이 삽시간에 프랑스군대에 퍼지자 사기가 꺾인 프랑스 병사들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웰링턴은 이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총공격 명령이 떨어졌고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프랑스군은 정예의 친위대가 아닌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덕에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 나와 시골 여인숙에 지친 몸을 던진 나폴레옹은 이미 황제가 아니었다. 소심하고 단순한 인물이 머뭇거린 탓에 용감하고 탁월한 전술가였던 영웅 나폴레옹이 20년 세월을 걸쳐 이룩한 업적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남극 정복을 둘러싼 경쟁
지구 최후의 수수께끼는 20세기까지도 그 수줍은 자태를 아무도 못 보게 감추고 있었다. 속속들이 난도질한 지구의 몸뚱이 중 작은 두 점은 인간의 욕망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지구의 등뼈를 잇는 남극과 북극이다.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막연한 이 두 점을 축으로 하여 지구는 수천 년 전부터 자전하고 있었다. 지구는 이 최후의 비밀을 얼음 빗장으로 잠가두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극심한 혹한과 폭풍을 헤지고 나가야 한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무섭고 위험한 길인지라 용감한 사람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태양조차도 꽉 닫힌 지역을 잠시만 엿볼 수 있을 정도이니 이곳을 본 사람이 있을리 만무다. 수십년 전부터 탐험대들이 잇따라 극지방을 향했지만, 누구 하나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다. 이때 우리가 사는 공간의 마지막 비밀을 밝히고자 자원자가 나타났다. 피어리와 쿡, 아문센과 스콧이다. 미국의 피어리와 쿡은 북극을 향해 떠나고, 두 척의 배가 남극으로 나갔는데, 그중 한 척에는 노르웨이인 아문센이, 다른 한 척에는 영국인 스콧이 지휘하고 있었다.


스콧은 영국의 해군 지휘관이다. 그는 다른 지휘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냉정하여 낭만적인 기색은 없으나 억센 의지와 실용적인 감각이 가득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스콧 같은 사람은 한번 일을 시작하면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준다. 스콧은 하고 싶던 남극탐험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붓고 빚까지 졌다. 그의 젊은 아내는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지만, 큰 뜻을 품은 영웅답게 그는 주저 없이 아내 곁을 떠났다. 그 무엇도 심지어 가족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들이 빙하가 시작되는 곳까지 타고 갈 테라노바는 특이한 배였다.


한편으로 노아의 방주이며, 다른 한편으론 수많은 기구와 책들을 갖춘 현대적 실험실이라는 이중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1910년 6월 1일 탐험대가 영국을 떠났다. 그들은 뉴질랜드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후 이듬해 1월 영원한 얼음 왕국의 끝자락 에반스곶에 도착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썰매차를 시험해 보고 스키를 배우며 개를 조련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쪽을 둘러보고 온 선발대가 가져온 소식에 할 말을 잃었다. 행군하다가 아문센의 겨울 숙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문센의 겨울 숙소가 자신의 숙소보다 110킬로미터나 더 남극점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모두 낙담했다. 이제부터 스콧은 자나 깨나 아문센이라는 이름을 뇌리에서 떨쳐내지 못했다. 그들은 밤이면 텐트를 치고 말을 보호하기 위해 눈으로 벽을 쌓았고, 아침이면 다시 차가운 대기를 뚫고 단조롭고 지루한 행진을 시작했다. 악천후가 이어지며 하루에 30킬로미터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지친 말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더욱이 대원들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생겼다. 눈에 반사된 자외선 때문에 염증이 생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팔다리에 심한 동상이 걸려 걷기조차 힘들었다. 탐험대의 행군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더는 썰매를 타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12월 30일 탐험대는 남위 87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여러 대원을 돌려보내야 했다. 남극점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섯 명의 정예 대원뿐이었다. 스콧은 사람들을 골라냈다. 돌아가는 사람이나 계속 가는 사람이나 모두 비장했다. 어쩜 살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미지의 땅을 향해 가는 선택된 다섯 대원의 이름은 스콧, 보워즈, 오츠, 윌슨, 에반스였다.


마지막 날의 기록을 보면 불안감이 극도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나침반이 극점에 가까이 가면 바르르 떨 듯이 남극점이 가까워질수록 대원들도 사시나무같이 떨기 시작했다. 오른편에 있던 그림자가 왼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끔찍하리만치 길었다. 그러나 스콧은 희망을 잃지 않고 지나온 거리를 기록했다. 1월 14일이 되자 희망은 확신으로 변했다. “50킬로미터만 더 가면 된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거기 도착해야 한다” 1월 18일 이날 일기를 보면 처음엔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었으나 이내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극점에 도착하는 순간 모두 소스라쳐 놀랐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가 자신들보다 먼저 다녀간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2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스콧의 일기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 지친 몸을 이끌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슬픈 마음으로 영국기 유니언 잭을 승자 아문센의 깃발 옆에 꽂았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끝났다. “돌아갈 길이 두렵다” 되돌아가는 그들에게 운명은 가혹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이 얼어붙어도 허기진 몸을 녹일 연료와 식량은 바닥이 났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소서. 이 시련을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스콧과 대원들은 꽁꽁 언 손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남극의 봄인 10월 29일에야 시체라도 찾아내기 위해 구조대가 출정했고, 11월 12일 탐험대원들의 시체와 남긴 편지를 발견했다. 그후 대영제국의 대성당에 그들의 시신이 옮겨졌고, 국왕이 영웅들을 추모하며 무릎을 꿇었다. 비록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목표를 향해 끝까지 정진한 스콧과 대원들을 영국국민과 인류는 오래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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