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가 된 외부자(Outsider as Insider)-

모처럼 열린 콤파스를 2월엔 쉬고 가기로 했다. 콤파스회원 중에 연로하신 분도 여럿 계셔 건강과 안전에 유의해야 하고, 소요경비도 적지 않아 올해부터 격월제로 시행하자는 의견이 더 많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시작되는 3월에 다시 뵙겠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90년 전인 1933년에 소멸했지만, 벌써 전설이 됐다. 짧고 열병에 들뜬 것 같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은 매혹적인 삶을 살았다. 기억에 희미해졌을지라도 위대한 업적을 남겨 인간의 정신세계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원제목이 ‘내부자가 된 외부자(Outsider as Insider)’인 ‘바이마르 문화’의 저자는 유럽 근대사상사와 문화사의 권위자 피터 게이다.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독일 베를린에서 보냈고,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웠으며, 예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역사가를 위한 프로이트’ ‘부르주아 경험’ ‘모더니즘’ 등 역사학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바이마르 문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4년간의 전쟁으로 붕괴하고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할 때 태어나 1933년 1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더는 권좌를 지키지 못하고 나치당 지도자 히틀러를 국가 수상으로 임명했을 때 바이마르공화국은 생을 마감했다. 정치적 격변기에 안정을 꾀하려던 과감한 노력은 상승보다는 하강이 더 많은 경제적 부침으로 침몰했다. 정치적 격변은 우익 반민주주의 세력과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르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사보타주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문화가 만발한 시대였다. 세계의 관심이 온통 독일의 무용, 건축, 영화, 소설, 연극, 미술과 음악으로 쏠렸다. 단지 14년이라는 짧은 기간과는 결코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흥분과 벅찬 감동을 제공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외부자는 민주주의자, 유대인, 전위예술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내부자가 되어 박물관과 극장, 오케스트라와 학문의 중심에서 의사결정자가 되었다. 15세기초 비잔티움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로 밀물처럼 쓸려갔던 그리스 학자들과 17세기말 프랑스에서 서유럽으로 흘러 들어간 위그노 부르주아들이 정열과 학식과 희귀한 기술을 가지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바이마르는 독창적이고 억압이나 부채감도 없던 문화이며, 전정한 전설적 황금시대였다. 

 

탄생의 진통
바이마르공화국은 실현되기를 갈망하던 하나의 이상이었다. 독일 제헌의회를 괴테와 실러가 살았던 튀링겐 주의 작은 마을 바이마르에서 개최한 배경은 수도 베를린이 혼란스럽고 불안했으나 적어도 바이마르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예언과 희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두 개의 독일이 있었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나는 군사적 허세와 권위에 비굴하게 복종한 독일이 공격적으로 대외진출을 꾀하려는 강박증의 발로이고, 또 하나는 서정시와 인문 철학의 독일로서 평화적인 세계주의를 지향하기 위함이었다. 공화국 내부자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외부자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인간성 부활의 필요성을 둘러싸고 표출됐다. 하지만 신의 소멸과 기계의 위협, 지배계급의 우둔성, 부르주아계급의 속물주의로 인해 시급한 문제의 해결이 요원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엔 경계가 없다. 바이마르 양식에 강인성을 부여했던 것은 자유로운 의식과 평범한 세계주의였다. 무의식적인 국제주의 속에서 바이마르 양식은 유럽의 다른 문화적 운동의 활력을 공유했다. 그러나 히틀러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의 탁월성을 보여주듯 바이마르공화국은 임무에 성공했으나 탄생의 진통은 너무 가혹했다. 그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전체는커녕 다수의 헌신적 충성조차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바이마르공화국의 태생적 비극이었다. 


베르사유조약이 바이마르에 부담이었다면 그것은 국제적인 것 못지않게 국내의 산물이었다. 혁명과 그 여파로 전쟁이 끝났다. 프로이센의 지배 가문과 크고 작은 독일의 영주들이 일소됐으며, 독일인에게 실용적 정치를 일깨워주어 민주주의 국가도 건설됐다. 또한 제국에선 높은 지위로 발탁될 수 없었던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부여됐으며, 진보적 교수, 현대적 극작가와 제작자, 민주적 정치사상가들을 명성과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바이마르헌법의 설계자 후고 프로이스는 혁명의 상징이었다. 그는 유대인이자 좌익 민주주의자였기에 그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학에서조차 배제되었다. 하지만 외부자인 그가 새로운 공화국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34년에 망명 중인 사회민주당은 후회하며 자신의 비극적 실수를 인정했다. “전쟁 통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독일의 노동계급이 실용적으로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 조직을 양도받아야 했던 것은 슬픈 역사적 과오”라는 평가는 실로 옳은 지적이다. 바이마르인들은 트로이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여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제작을 지켜보고 그 설계자를 자진하여 숨겨주었다. 

 

이성의 공동체-절충자와 비판자
바이마르에는 나치를 증오했으나 공화국을 사랑하지 않던 많은 교수, 기업가, 정치가가 있었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으나 제국의 가치를 민주주의의 의심스러운 통치와 교환하기를 꺼렸다. 공화국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웠고, 공화국 출현을 역사적 필연이라고 판단했으며, 일부 지도자들을 존경했지만, 결코 공화국을 사랑하지는 않았고 그 미래를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열정적 신념이라기보다 지적 선택에서 출발한 공화주의자였기에 ‘이성적 공화주의자’라고 불렸다. 나치가 집권한 지 3개월 후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커는 동료 발터 레넬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독일 국민은 특히 베르사유 평화협정의 압력 아래에서는 의회민주주의를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 확실해” 이것이 이성적 공화주의자의 참된 목소리였다. 마이네커는 “독일이 존속할 유일한 가능성은 민주주의화하고, 보수적 관념이라는 무거운 짐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복고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하면서 합리적이고 과감한 결단을 통해 진보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 확신했다. 이성적 공화주의자들의 지적 성향도 당파를 만들거나 정강을 규정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군국주의자로서 탁월한 정치가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독일 정치에서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했다. 
슈트레제만은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출발하여 이례적인 독일인이 되었다. 이성적 공화주의자인 아르놀트 브레히트는 슈트레제만을 설득하여 프랑크푸르트 성 바오로성당에서 열릴 자유혁명 75주년 기념식 계획에 동조하게 했다. 그 당시 기념식에서 사용한 삼색기가 바이마르의 국기가 됐다. 학생들이 3월혁명 희생자를 위한 추념식에서 검정, 빨강, 노랑의 삼색기를 걸었는데, 이것이 바이마르공화국을 거쳐 나중에 독일연방의 국기가 됐다. 이렇듯 이성적 공화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성을 화해를 위해 사용했다. 계급 간, 당과 국가 사이, 독일과 다른 나라와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스스로 공화주의에 만족하려 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는 지성적 공화주의자가 아닌 공화주의적 지식인들이 다수 있어 자신의 이성을 오직 비판에만 사용했다.


정치학은 독일제국의 희생물이었다. 1850년~1860년대에 독일의 정치학은 비교정부론과 공공행정학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제2제국의 출현과 함께 정치가들은 다른 자유주의자들처럼 정치학에서 덜 위험해 보이는 공법에 집중했는데, 이에 따라 자유로운 지식인이라기보다 복종적인 관리들이 양성되었다. 학문은 사색과 도서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막스 베버는 예외였다. 그는 방대한 양의 자료에 숙달했고 결합된 이론적 체계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학자의 정치적 의무감에 충실했으나 독일 국내에선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실제로 소생한 곳은 미국이었다. 개혁을 위한 추진력은 간절한 현실적 필요에서 나온다. 독일의 정치가와 공공관리들은 개혁이 필요함을 깨닫고 파리의 정치학교에 관심을 돌렸다. 이 학교가 1871년 프랑스 궤멸 이후 지적, 민족적 재건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고위관리들은 정치에 익숙하지 못한 독일인에게 정치의 실재를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했다. 주입이나 구호가 아닌 통찰과 훈련, 정치사회적 진실과 명확성에 대한 갈망을 학교가 충족시켜야 했다. 교과목은 넓은 의미의 정치과학에 집중하여 정치사, 정치사회학, 외교정책, 국내정책을 비롯해 언론강의를 포함하는 문화정치학과 정치의 법률적, 경제적 기초에 관한 이론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들은 연구기관의 기능보다는 혁명적인 기능이 강조되었다. 관료 즉 공무원 그것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충복의 양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올바른 지적이다. 대부분의 독일인이 무엇을 갈망했든 그것이 절충적 형태든 비판적 형태든 이성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비밀스러운 독인-힘으로서의 시학
1913년 어느 봄날 정오에 젊은 학생 하나가 하이델베르크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시인이자 예언가이며 엄격하고 유머가 없으며, 젊은 문학동호인 집단의 지도자로서 정신적 매력으로 제자들을 이끌던 현대판 소크라테스 슈테판 게오르게였다. 바이마르 정신을 상징하는 게오르게 집단은 공화국보다 앞서며 독일과 외국 모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게오르게는 자신의 계획을 펼치면서 문화적 가치를 전수하기 위해 괴테를 해설하고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번역하며 고귀한 삶의 의미를 쇄신하는데 힘을 쏟았다. 게오르게 집단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호헨슈타우펜가의 위대한 황제 ‘카이저 프리드리히 2세’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숨막히는 중세 역사 속의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라고 평가했다. 모범적인 자료정리, 인내심 있게 조사한 세부 사실, 박식한 학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을 인정했다. 게오르게 집단은 현대적인 과학적 연구의 차가운 실증주의를 경멸하고 분석이 아니라 생동하는 직관을 통해 위인과 역사적 순간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당시에 게오르게와 견줄 수 있는 경쟁자는 오직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뿐이었다. 릴케는 자신의 시를 고된 작업과 지칠 줄 모르는 경험축적의 결실로 이해했다.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그는 “시란 어릴 때부터 충분히 갖출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시를 위해 많은 도시와 인간과 사물을 보아야 하고, 동물들에 대해 알아야 하며,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를 느낄 뿐 아니라 아침에 피어나는 작은 꽃의 움직임도 알아야 한다”고 기술했다. 게오르게와 릴케는 괴테시대의 규범화한 고전을 의무적으로 때로는 진실로 찬미했지만, 이들이 실질적으로 발견한 사람은 거의 잊혔던 사람 횔덜린이었다.

 

우익으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일 지식인이 인정한 유일한 문학자는 횔덜린이었다. 횔덜린은 시, 철학, 사회학, 정치학적인 관용어가 된 소외라는 말을 오히려 암울하게 진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현대 세계는 인간을 분열시키고 파괴하여 사회와 자신의 진정한 내적 본질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새로운 젊은이들에게 괴테는 지나치게 차갑고 딱딱했다. 이들이 보기에 괴테는 자신의 내부에 충분한 혼돈이 없었다. 청년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불평등한 고통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며 자신의 혼란스러운 운명에 대한 설명을 계속 추구했다. 반면에 시인 클라이스트는 인간 유형을 작품 속에서 언어로 구체화하여 표현하였고, 그의 시가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실체화하여 걸어들어왔다. 2차 세계대전이 남겨놓은 폐허와 미증유의 범죄에 대한 수치심 속에서 고령의 역사가가 작은 소망을 그려낸 프리드리히 마이네커의 마지막 작품 ‘독일의 비극’은 독일의 자기고발적 문헌으로 이보다 더 심각하고 애처로운 구절을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이네커는 시와 종교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함으로써 고전주의 시대의 시인과 사상가들이 계몽주의의 경박한 사고를 극복했던 것처럼 독일의 철학적 사색의 성격을 특정지은 모호한 종교성을 고수했다. 

 

전체성의 갈망-현대성의 시련
독일인들은 정치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다. 18~19세기의 크고 작은 권위주의적 국가들은 대체로 지배자의 인가 아래 존속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설립된 제국의회를 한층 우월하게 보이려 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더 나빴다. 독일의 의회제도란 “절대주의라는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이었다. 의회는 단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수상은 의회가 아니라 황제에게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대체로 실권자로부터 지령을 받는 자들이었다. 독일인의 세계는 자기완성과 교양, 정치가 배제된 문화 자체를 위한 문화의 달성이라는 고급한 영역과, 현실적 문제와 타협 등으로 얼룩진 인간사라는 저급한 영역으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냉담을 우월한 형태의 실존으로 격상시켰고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의 장사꾼 같은 심리상태를 교양있는 독일인의 정신성과 비교하는 우를 범했다. 이러한 이원론은 단순한 슬로건 정도로 쉽게 통속화할 수 있었다. 실지로 서구의 가치로부터 독일을 분리하여 독일을 서구보다 격상시키려던 시도가 독일적 이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비장하고 용감하게 말하며 자신이 여전히 외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외부자, 다른 독일의 대변인, 최고의 바이마르 정신인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이성으로 파당적인 독일의 분열을 치유하려 했다. 청년에 대한 집중적 연구는 실제적인 필요성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그 연구조차도 집착의 결과였다. 과거로의 도피를 통한 미래로의 도피, 향수를 통한 개혁 등의 사고는 궁극적으로 청소년 자체를 이념화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배낭 속에 횔덜린과 하이데거의 작품을 넣고 러시아나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죽어간 젊은 독일 병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용어는 불안, 근심, 무, 실존, 결단으로 가장 비중이 큰 죽음 같은 단어들은 키르케고르의 저술을 읽지 않았을지라도 표현주의적 시인과 극작가들에 의해 이미 완전히 친숙해진 용어였다. 하이데거는 어려운 시기에 많은 독일인을 지배했던 반이성과 죽음에의 사랑에 대한 철학적 진지함과 학문적 품위를 부여했다. 


초인이며 생생한 비스마르크 등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바이마르는 창백하고 허접했다. 바이마르의 괴테는 모든 사람이 인용은 하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는, 인간성에 관해 그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있는 후박하고 무력한 세계주의자일 뿐이었다. 바이마르에선 역사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요구가 절박했으나 그 달성에 대한 기대는 별로 크지 않았다. 역사학자 테오도어 몸젠은 주목할만한 예외였다. 일반적으로 독일 역사가들은 제국의 체제에 쉽게 적응했다. 직업적으로 사물에 대한 보수적 관점을 고수하고 변화를 촉구하기보다 기존 가치를 보존하려는 경향이 더욱 컸다. 이로써 독일 역사가들은 새로운 사상을 배격했던 것과 비슷한 열정으로 새로운 인물들을 배격했던 독일의 대학체제 속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 역사가 중에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레오폴드 랑케를 꼽을 수 있다. 역사가는 자율성을 가지고 과거의 각 부분을 내부로부터 속속들이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랑케의 중심 원칙은 역사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역사가로서 랑케의 성공은 찬란했던 만큼이나 숙명적인 것이었고 그의 유산은 비참했다. 랑케의 후계자 중의 대다수가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그들은 랑케의 자존심을 독단으로, 근면을 현학으로, 권력의 인정을 국내에선 비굴하고 외국에 대해서는 허세라는 혼합물로 바꾸었다. 이러한 논리의 결과는 불가피했다. 즉, 제국주의 시대의 유일한 해군국가인 영국에 의해 독일이 지배권을 위협받기에 무장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강대국 속에서 합당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 영향력을 지구 위에 전파해야 할 책임과 추진력이 독일 국민에게 있다며 민족주의를 정의했던 민주적 제국주의자 프리드리히 나우만의 언명에 동의했다. 그의 이론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명백하게 우월한 독일의 산물인 문화를 보존하고 세계에 전파하려 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야만적 우중사회, 프랑스의 퇴폐주의, 미국의 기계주의에 대한 몽상, 영국의 영웅답지 못한 상업주의로부터 독일문화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무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하여 독일의 특수한 사명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일제히 옹호했다. 


 
이성과 반이성

바이마르의 상황은 복합적이었다. 결속과 통일성을 갈망하던 1920년대의 모든 사람이 퇴행의 희생자는 아니었다. 반이성주의가 아닌 이성을, 허무주의가 아닌 건설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려 했다. 여기서 건설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철학이 건축가들의 저술 속에서 등장하여 이들의 건축물로 수행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축가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에리히 멘델존으로 그가 1927년 세운 건축물은 세계극장과 켐니츠의 쇼켄백화점이 있다. “건축가는 분석과 역학, 이성과 반이성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성과 반이성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 나의 본성, 생명, 작품이 움직이고 있다”라고도 말했다. 고전적 기하학 양식의 옹호자 발터 그로피우스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철학을 견지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앞서 몇몇 훌륭한 건물을 건축하여 유명세를 탔지만, 공화국이 탄생할 무렵 세운 바우하우스로 실질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로피우스는 종전의 예술학교와 응용예술학교를 합병하여 1919년 바이마르 시대의 상징 바우하우스를 창립했다. 그는 전쟁 이전에 독일예술연맹이 천명한 원리들을 명백히 하는 동시에 과감하게 이를 넘어 예술적 창조의 통합체인 건축에 전념했다. 그는 창립선언문에서 “건축가, 화가, 조각가는 전체와 부분에서 다면적 형상을 재인식하고 파악해야 한다”며 그런 연후에만 이들의 작품이 현재의 살롱예술에서 사라지고 있는 건축학적인 정신으로 충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로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 장인과 예술가 사이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예술가란 최고의 장인”이라고 주장했다. 바우하우스는 위대한 스승들이 자신의 어린 복제판을 만들어내는 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이 교사들을 자극하고 교사들이 학생들을 자극하는 순수한 연구소였다. 바우하우스는 접근방법의 전체성을 통해 오늘날의 건축과 설계를 사회적 예술로 복원시키는데 공헌했던 진정한 공동체였다. 이로 이해 전체적 건축이 발전했다.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공화국 이후 겨우 반년만 존속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

 

아들의 반역-표현주의 시기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바우하우스 다음가는 훌륭한 결실은 아마 1920년 베를린에서 공개된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작은 방’일 것이다. 평론가 빌리 하스는 훗날 “거기에 기괴하고 악마적이고 잔인하고 고딕적인 독일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악몽과 같은 줄거리와 표현주의적 배경, 음울한 분위기의 ‘칼리가리’는 그로피우스의 건물, 칸딘스키의 추상화, 그로스의 만화와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각선미만큼이나 확실하게 바이마르 정신을 후세에게 각인시켰다. 영화사에서 결정적 작품이었던 ‘칼리가리’는 초기 표현주의 시기의 바이마르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표현주의처럼 의도적으로 즉흥적이고 격렬할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양식은 반역성이나 의미 전달을 넘어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예스너의 연극 ‘빌헬름 텔’조차도 어떤 관객들에겐 프로이센 군부의 참모들보다 베르사유의 평화라는 이름 아래 독일인들을 핍박하던 프랑스의 관리들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1925년의 대통령 선거유세는 부자 갈등을 훨씬 넓은 무대인 현실에서 재공연한 것과 다름없었다. 힌덴부르크의 선출은 사회주의자의 소심성, 공산주의자의 방해공작, 부르주아 정치가의 멍청한 판단과 분파적인 자기 위주의 정치의 결정판이었다. 힌덴부르크가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1,450만명 이상이 1918년 휴전때 애걸하며 맺은 평화조약 책임을 남에게 전가했다는 사실을 쉽게 잊은 채 노령의 타넨베르크 영웅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당파를 초월한 위인으로서 그리고 독일정신에 대한 거의 신화적 존재이자 전통적 가치를 구현하는, 한마디로 엄한 가부장적 인물로서 선동적인 유세 속에서 대중에게 소비되었다. 그의 선출과 함께 아버지의 보복이 시작됐다.

 

아버지의 보복-객관성의 성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의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옹호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는 민간인처럼 즉 대통령으로서 공화국을 전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에 따라 앞으로 나쁜 일들이 다가오리라는 전조로 선거를 받아들인 회의주의자가 많았다. 마이네커는 공화국을 걱정하며 한 가닥 희망을 품었던 반면에 케슬러는 힌덴부르크 선출이 독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을 초래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대다수의 독일인은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느니 새롭고 안정된 분위기를 즐기려 했다. 바이마르의 문화와 정치의 유사성은 명백했다. 문화는 사회와 연속적이고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정치 현실의 표현이자 비판이었다. 예술과 삶 사이에는 친밀감과 적대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혁명, 내란, 외국의 점령, 정치적 살인, 경악스러운 물가폭등 등으로 점철된 1918년부터 1924년까지의 기간은 예술에 있어서 실험의 시기였다. 표현주의는 회화나 연극만큼이나 정치를 지배했다. 


1924년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이 출간된 해였다. 이 책은 토마스 만의 정치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이마르에 대한 중요한 징후적 의미를 띠고 있다. ‘마의 산’은 젊은이의 인생을 통한 교육 이야기 즉, 성장소설이라는 현대소설 장르의 대표작이다. 만은 ‘마의 산’에 대해 논하며, 낭만주의와 역사를 사랑하는 귀족주의는 어느 정도 죽음과 결합하여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삶과 친밀하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사랑은 관능적이며 그 야만성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면서도 죽음에 직면하여 삶을 긍정하고 감정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이성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과 대립하고 있다. ‘마의 산’의 주인공 청년 한스는 교육을 통한 것이지만, 자기만의 사색으로 위험스러운 휴머니즘에 도달한다. 그는 설원을 혼자 산책하다가 폭설을 만나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탈진해 있다가 깨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며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들을 해결한다. 죽음은 삶 속에 있지만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인간은 모순의 극복자이며 모순은 인간을 통해서만 존재하기에 인간은 모순보다 고귀하다. 인간은 죽기에는 너무나 고귀하며, 이것이 인간 사유의 자유다. 인간은 살아 있기에 진정 고귀하며 이것이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경건심이다. “나는 죽음이 나의 사고 위에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리라! 선과 자비심이 바로 나의 사고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외친다. 그는 정치적 신화와 형이상학적 몽상에서 완전히 깨어난 자유주의자였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청년 정치사는 아이러니하면서도 가장 통절한 것이었다. 나치는 단순한 반동들이 아니었다. 허무주의건 전체주의적이건 이들의 관념 중엔 죽어가는 공화국의 현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죽은 제국의 전통적 권위주의도 배격했다. 우익의 일부 청년지도자들은 진정한 혁명가였거나 죽음에 도취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완전한 복종을 강요할 영도자를 요구하여 군주제로 복구하려 했든 아니면 프로이센 사회주의 독재를 요구했든 간에 젊음을 스스로 배반하고 정치적 모험가들과 정신병적 공론가의 노예가 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영웅숭배에 집착했다. 영웅이 없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정신적 결여, 경제적 부족에서 그들은 반지성적으로 바뀌었다. 훈련을 사랑하고 명령을 내릴 자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이려 했다. 얼마 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바이마르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그들과 함께 바이마르 정신은 내적으로 변화하여 이솝우화가 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소멸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바이마르 정신을 실험실에서 병원, 언론, 무대, 대학에서 소생시켜 위대한 발전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얻게 하여 망명지에서 바이마르 정신의 진정한 고향을 찾아주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간략한 정치사
바이마르공화국은 1918년 11월 9일 사회민주주의자 필리프 샤이데만에 의해 선포되었다. 4년 이상 이어진 유혈전쟁의 뒤를 이은 것으로 여전히 외국 영토에 있던 독일 군대는 무질서 상태였고, 군 수뇌부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제국의 행정은 타락해 있었다. 1981년 킬 해군기지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확산하자 혁명은 불가피해 보였다. 이상주의적 독립 사회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는 바이에른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수상이 됐고 다른 도시와 주들도 이에 동조했다. 수상은 황제의 폐위를 단호히 요구했으며,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나서자 힌덴부르크 장군과 추종자들은 수상의 요구에 합세했다. 그날 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독일 정전위원회는 합병주의자에서 평화주의자로 전환한 가톨릭중앙당 대표 에르츠베르거의 주도 아래 연합국과 협상을 벌였다. 평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전쟁은 끝났다. 1919년 1월 19일에는 바이마르 시에서 열릴 제헌의회 대표자 선출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의회는 같은 해 2월 9일 엄숙히 개회되어 에베르트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그는 샤이데만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최초의 내각은 3대 정당인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민주당 출신으로 구성된 바이마르 연합내각이었다. 바이마르 의회는 비교적 짧은 시일에 헌법에 동의하여 1919년 7월 채택되어 8월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드디어 독일이 민주적 공화국이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는 20세 이상의 보통선거였고, 주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으나 독일은 여전히 연방국가로 남았다. 


헌법은 일반 선거에서 7년 임기로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을 천명했다. 국가의 상징이자 대외적으로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고, 수상을 지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으며, 공공의 안정과 질서가 심각하게 혼란하거나 위협받을 때에는 전권을 맡을 수 있었다. 헌법은 민주적 유권자 규정만큼이나 현대적이었으나 기대를 모았던 경제에 관한 조항과 사회개혁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했다. 행복한 시대에는 역사가 없다는 주장은 신화일 뿐이지만 바이마르공화국의 중간 기간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1925년 사망한 에베르트 대통령의 계승자를 뽑는 선거에서 과거의 분파가 재현됐다. 첫 선거에서 아무도 필요한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선거에서는 최다 득표만으로 충분했다. 정당들의 오랜 절충으로 일부 후보들이 사퇴하고 새로운 후보들이 등장한 끝에 48%인 1,450만표를 얻은 최대득표자는 1차 세계대전의 영웅 힌덴부르크였다. 힌덴부르크는 신중하게 처신하여 고령으로 허약해지기 전까지는 충실한 행정수반으로 효과적으로 행동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부국경을 결정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분란을 평화적으로 타결하기로 요구한 로카르노조약에 서명했고, 1926년 6월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9월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했으며, 1928년 켈로그 브리앙조약을 수정하여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상은 불편한 현실을 가리고 있는 아름다운 장막과 같았다. 퇴역군인들로 결성된 반바이마르공화국 집단인 철모단은 “우리는 현 체제를 증오한다. 현재 국가를 지배하는 체제, 그리고 타협의 정책으로 이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자에게 선전포고한다”고 선언했다. 


한편, 1927년 뉘른베르크에서 1차 전당대회를 개최한 나치당은 인종차별 논리와 독일의 정치체제 개선 및 독일정신의 전반적인 정화를 요구했다. 1932년 치러진 선거는 나치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1,350만표와 230석의 의석을 획득했다. 힌덴부르크가 신임했으나 인기가 없어 수상에서 물러난 폰 파펜은 히틀러를 만난 뒤 노회한 힌덴부르크에게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라고 설득했다. 힌덴부르크는 처음엔 주저했으나 승복하여 1933년 히틀러를 독일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바이마르공화국은 구조적 결함, 마지못한 옹호자들, 분별없는 귀족과 기업가, 권위주의라는 역사적 유물, 세계의 악화한 상황 그리고 의도적 살인의 희생물로서 이름만 남은 채 사멸했다. 적법을 강조한 히틀러는 바이마르헌법의 허점을 이용해 정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으며, 취임 즉시 자신이 방금 수호하겠다고 선약한 헌법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법성이라는 전략을 혁명이라는 전략과 결합하여 짧은 시간 내에 정치사회적, 지적인 모든 반발세력을 제거하거나 통제할 특수한 권력장악 방편을 만들어냈다. 마침내 총통이 된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사를 서술하는 일은 문화사와 대조적으로 좌절하는 작업이지만, 그 뒤에 계속될 타락과 부패, 기존의 문화적 동력의 억압, 체계적인 허위, 정치적 암살과 이어진 조직적인 대량 학살의 역사와 비교하면 엘도라도와 같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볼 때 바이마르의 죽음이 암흑시대의 출발을 예고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이었다.


2월 6일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하여 진앙지 가지안테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마을이 초토화하여 지금까지 사망자가 5만명을 넘어섰고, 아직 수많은 사람이 매몰되어 있어 사상자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여진의 위험, 장비와 물자 부족, 영하 10도라는 기상악화까지 겹쳐 구조가 늦어져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면서도 안타깝게 가족을 찾는 이재민들의 절규가 처절하다. 여기저기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 정말 눈물겹다. 악조건 속에서도 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생존자 수색과 구조, 복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각국의 지원이 이어지고 우리나라도 형제의 나라를 돕기 위해 장비와 물자 지원과 함께 118명의 긴급구조대를 급히 파견했다. 다른 나라의 재난과 역경을 돕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천재지변과 자연재해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야말로 지구 최후의 날이라는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한다. 부디 구조와 복구가 빨라져 마지막 생존자까지 찾아내고, 이재민들도 삶의 터전으로 속히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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