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술의 발전
가장 중요한 기술 혁신 요소의 하나는 조선기술의 발달이었다. 전전까지만 해도 강제기선을 제작하기 위하여 철판을 연결할 때 리베트를 이용하여 접착하였으나, 대전 직전에 미국에 의하여 전기용접방식이 개발되면서 전기용접으로 쉽게 철판을 붙일 수 있게 되었고, 대형 크레인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선체를 여러 개의 불록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곳에서 만들어 대형 크레인으로 나중에 이를 조립하는 불록공법이 개발되어 공기와 조선단가를 크게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건조된 선박의 성능과 운송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조선기술의 혁신에 의한 이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인력소요의 감소(5-60%),
② 공기의 대폭단축(종전 방식의 반이하의 공기로 가능),
③ 조선자재의 절약(철판을 연결하기 위하여 겹치는 부분이 없어짐으로) 
④ 선박성능의 대폭향상(선체중량 감소로 운송능력 증대, 철판이음새가 없어져 물의 저항감소로 속력향상과 연료절약)
⑤ 조선단가의 대폭인하
그 이외에도 전쟁을 위하여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기술이 민간 산업에 이용되게 되면서 선박을 중심으로 한 해운업의 기술혁신도 크게 진전되게 된다.      

   

대형 전용선화 기술혁신
1) 대형선의 이점과 단점
운송 기관이 대형화될수록 운송 단위 당 운송 원가가 저렴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건조 단가가 대폭 인하된다. 그것은 바로 면적과 부피의 차이만큼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박이란 운송할 수 있는 용적을 만들기 위하여 외부와 차단될 수 있는 선체를 만드는 것이므로 대형선일수록 일정한 용적을 만들기 위하여 이를 둘러싸는 선체를 만드는 면적이 작게 되기 때문이다.

 

대형선의 다른 장점의 하나는 운항비가 적어진다는 점이다. 4-5명이 승차하는 승용차와 4-50명이 탈 수 있는 버스가 한사람의 운전수에 의하여 운행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박도 대형선을 운항하는데 소요되는 선원과 중소형선을 운항하는 선원수가 거의 비슷함으로 운송 단위당 노동소요량은 대형선이 훨씬 유리하다.

 

이것은 선박이 자동화되고 기계화되면 될수록 더욱 그런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 외에도 연료비도 물의 저항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물과 마찰을 일으키는 선체의 표면적의 양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운송 단위당 연료 소비도 그만큼 감소하게 된다.

 

그 외에도 항비등에서 선박의 크기에 따라 사용료가 책정되는 것인 원칙이면서도 대형선의 체감(遞減)제도가 있기 때문에 운송 단위당으로는 대형선이 유리할 수 있다. 어느 분석에 의하면 5만 DW/T 탱커를 기준으로 한 운항비를 100으로 보았을 때 10만 DW/T은 78, 15만 DW/T은 70이고, 건조비는 5만 DW/T을 100으로 볼 때 10만 DW/T은 81, 10만 DW/T는 76이 된다고 한다.


대형선은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있게 마련이다. 가장 큰 단점은 대형선일수록 화물을 선박에 적양하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져서 체항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이다. 일반 잡화를 재래화물선에 적양하할 경우, 하루 작업기준량이 1,000톤 내외다. 만약 2만톤짜리 재래화물선에서 만선된 화물을 양하하고, 이 선박에 출항을 위하여 화물을 만재하려고 한다면 계산상, 하역 소요 일수가 40일이된다.

 

이것이 5만톤짜리 선박이 될 때에는 100일로 늘어난다. 그 외에 대형선은 중소형선에 비하여 이용할 수 있는 항로나 항만에 제약이 따르고 또 시장에 그러한 대형선에 알맞은 규모의 운송수요가 있어야 한다. 위에서 본바와 같은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단점을 최소화하는 것이 대형화 기술혁신의 요체다.

 

2) 전용선화와 대형화의 결합
위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도 단점 중 하역 소요 일수의 증가로 인한 선박회전율의 악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채택된 기술혁신이 대형화와 전용선화의 기술혁신의 결합이다. 전용선화라 함은 2차 대전후 대량으로 운송되는 벌크화물의 전용운송을 위하여 화물과 선박을 가장 잘 결합시키도록 한 기술혁신을 말한다.


화물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박을 화물에 적합하도록 설계 및 건조하여 하역능률을 극대화하는 소위 전용선화의 효시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탱커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석유를 비롯한 유류도 용기에 담아서 일반선박으로 운송하였으나, 수요가 늘어나면서 정유회사들이 자사의 석유를 운송할 때 탱커를 사용하면서 액체의 해상운송에 탱커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두차례의 대전을 겪으면서 석유의 대량 해상운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이 벌크 전용선에 의한 운송은 2차 대전이 종전되고 난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


초기의 전용선은 2차 대전 때 석유를 운송하기 위하여 대량 건조되었던 T2 탱커를 개조하여 곡물운송전용선으로 활용하면서다. 1950년대 이후 세계해운시장이 격동하면서 선형의 대형화와 전용선화가 결합되면서 세계 해운업계에는 대형전용선화라는 기술혁신이 거세게 불게 되었다. 이 기술혁신은 50년대 중반 이후에 시작되어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완성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전용선의 경우 하역능률이 대폭 향상되고, 화물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박의 크기와 설계를 결정하기 때문에 동형의 선박이라도 운송효율이 월등하게 향상된다. 벌크화물 중 가장 하역이 용이한 것은 액체 화물이다. 액체 화물의 적양하는 펌프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 펌프의 펌핑능력만 향상시키면 하역 능률은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VLCC의 경우에도 10시간 이내에 적하 또는 양하를 완료하도록 설계된다. 곡물의 경우도 일일 작업량이 10,000톤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철광석이나 석탄의 경우 2만톤 정도 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대형화는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5만 DW/T의 탱커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급속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여 1967년에 일어난 중동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탱커의 대형선화가 절정에 이루게 된다. 수에즈운하의 폐쇄로 세계의 3개 석유수입지역 중 2개 지역인 북미와 유럽대륙으로 운송되는 원유가 희망봉을 경유하게 되자, 운송거리의 장거리화에 따른 운송원가의 증가를 대형화로 삭감해 보자는 생각에서 대형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에 더욱 촉진되었다.

 

60년대 말의 수에즈 운하의 폐쇄 직후의 대형화는 일반적으로 VLCC(Very Large Crude Carrier)로 불리는 23만톤급의 원유 운반선이 나오면서 주춤거리는 듯 하였으나, 수에즈 운하 폐쇄의 장기화 전망과 석유수용의 급팽창으로 다시 급속하게 진행되어 33만톤급의 ULCC(Ultra Large Crude Carrier )를 거쳐, 55만톤급 대형선이 건조되었으며, 100만톤급 탱커의 건조계획이 검토되는 단계에서, 73년과 79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그 중간에 수에즈 운하가 다시 재개통되므로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지역의 수요도 덩달아 VLCC급으로 급격하게 대체되었다.  


드라이 벌크 분야의 대형전용선화도 처음에는 T2 탱커의 개조 등 소극적인 전용선화가 이루어지다가 50년대 후반 이후 탱커를 뒤이어 대형 정용선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져서 곡물운반전용선, 철광석운반전용선, 원목전용선, 비철금속 전용선 등 화물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전용선이 출현하게 되었다.


전전까지만 해도 해상운송시장에서는 다양한 화물을 한 선박에 다 같이 적재하여 운반할 수 있는 다목적선 내지는 재래화물선으로 불리는 일반화물선(general cargo ship)이 선박의 대부분이었으나, 벌크 전용선이 나오면서 일반화물선이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컨테이너화의 물결은 재래정기선시장을 급속하게 컨테이너화 시키면서 일반화물선의 일자리가 더욱 좁아지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용선화는 대형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대형전용선은 전술한 바와 같은 제약이 따르므로 무한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곡물운반선의 경우, 생산지와 수요지를 연결하는데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파나마 운하의 통과 능력의 제약에 따라 크기가 파나막스(6만DW/T 내외)로 제한된다. 시장 여건으로 항로를 희망봉 경유로 잡아야 하는 철광석과 석탄 운송선의 경우, 희망봉 경유에 적합한 12만 DW/T 이상이 선호된다. 이러한 선박을 케이프 사이즈라고 한다. 그 외의 전용선들도 전술한 제약인 수요규모와 항로 및 항만 등의 제약에 따라 최적의 선형이 결정되게 된다.

 

3) 장기운송계약제도의
일반화와 인더스 트리얼 개념의 발전
대형전용선은 장점 외에 단점도 만만치 않음을 전술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이에 알맞은 수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래서 구체적인 화물수요를 가진 기업과 해운회사가 서로 협의하여 선박과 화물수요를 최적의 상태로 결합시키는 장기운송계약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선주와 화주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원유, 철광석이나 석탄, 비료 공장에서 사용하는 인광석 등 원료들은 생산지와 소비지가 원거리인 경우가 많고, 수요 규모가 방대하고, 수요량도 어느 정도 사전에 예측이 가능하므로 화주와 해운회사가 공동으로 수요 사정이나, 항로 및 항만 사정 등을 감안하여 어느 정도 크기의 어떤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이 최적인가를 협의하여 결정한다. 이렇게 결정된 내용이 계약이 되고, 선주는 선박을 확보한다.

 

물론 계약할 때와 선박을 확보 할 때 양자가 계속 긴밀하게 협의한다. 이렇게 확보된 선박에게 운항 원가에 약간의 이익을 더한 운임으로 장기운송하도록 한다. 이 경우 선주와 화주 양측에게 다 유리한 결과가 된다. 화주에게는 이론 상 가장 저렴한 운임으로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수송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선주에게도 안정된 업무량의 확보와 시장의 격변에서 예외가 될 수 있어 경영이 안정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러한 대형전용선에 의한 장기 운송계약은 매우 안정된 사업경영방식이고, 선주와 화주가 다 같이 이익을 보는 윈윈 게임이므로 선주와 화주간의 관계가 매우 긴밀해진다. 그리고 그 긴밀도는 단순한 고객 관계를 넘어서서 자본적인 연계로 발전하여 인더스트리얼 케리어라는 새로운 해운업 경영 형태가 탄생하게 되기도 한다.

 

민간항공산업의 발달과 여객선의 몰락
전쟁과 과학기술의 발전
1950년대에 있었던 국제해상교통에서의 가장 큰 변혁의 하나는 항공기의 출현에 의한 원거리 해상여객선의 몰락이다. 항공기가 개발되어 실용화된 것은 1차 세계 대전에서였다. 그러나 항공기가 전쟁용 무기로 위력을 나타낸 것은 2차 대전에서였다.

 

2차대전에서 항공모함의 출현과 이 이동하는 비행장인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함재기(艦載機)가 전쟁의 대세를 크게 가름하였고, 뒤이은 대형폭격기인 B 29가 전쟁의 대세를 결정하였다. 항공기 산업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하였던 주축국들이 패전하였고, 가장 앞선 항공기 산업을 자랑하던 미국이 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2차 대전을 통하여 항공기가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쟁은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옛날에 상상할 수 없었던 첨단무기들이 등장하면서 전쟁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차대전후 오늘까지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보면 2차대전 당시의 필요성에 의하여 연구가 되어, 겨우 초보적인 단계의 기술이 개발되었거나, 연구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 그후 계속된 연구에 의하여 결실을 맺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전쟁중에는 군사기밀로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전쟁기술이나 무기와 관련된 기술들이 점진적으로 민간 경제로 전파되었다. 이런 것의 하나가 바로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항공기의 민간교통용으로의 사용이다.

 

민간여객기의 등장과 항공기의 비교우위
2차 대전 중 폭격기를 비롯한 전투기의 개발로 상당한 수준에 이른 항공산업은 그 기술을 이용하여 군용여객기도 개발하여 실용화하였다. 다만 이 군용여객기는 군의 장성 등 주요인사나 미국대통령 등 정부고위인사들의 장거리 여행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어느 정도 세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자 군 전용으로만 사용되던 항공 기술이 민간용으로도 활용되었고, 민간항공산업이 발달하였다. 즉 장거리 여행객을 대형항공기로 수송하는 항공여객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 항공기가 민간용으로 활용하게 되었지만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하였다. 항공기에 의하여 하늘을 나는 여행을 불안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항공기에 의한 교통의 안전성이 입증되면서 민간항공산업은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장거리 해상여객의 운송은 여객선의 전유물이었다.

 

가장 각광을 받던 항로는 북미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서양항로에서였다. 이 원양여객선항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알려진 황금항로였으나 동시에 이를 노린 해운업체들의 과당경쟁이 매우 치열하던 항로였다. 그래서 이 황금항로에서의 영업주도권을 잡고, 특히 고급여행객들의 유치를 위하여 여러 가지 영업정책이 채택되었다. 고급여개의 유치전략은 크게 두가지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가 보다 빠르게 대서양을 횡단하는 시피드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호화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쟁이다. 전자를 위하여는 불루 리본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매년 전개되었고, 보다 호화스러운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호화여객선의 건조경쟁이 격화되었다.


호화여객선가의 치열한 경쟁에 여객선과 비교가 안되는 스피드를 자랑하는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경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초기에는 그런대로 아주 급한 여행객을 제외한다면 여객선을 이용하였으나, 항공기의 안전성과 편리성이 확인되면서 대서양 횡단에 한달여(항해시간은 그렇게 걸리지 아니하였으나, 기항지가  여러 개이므로 이만큼 걸렸다)가 소요되는데 여객선에 비하여 불과 몇시간이면 끝나는 항공기에 의한 여행이 월등하게 앞서는 것은 당연하였다.

 

운임면에서도 경쟁이 어려웠다. 항공기는 몇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함으로 두세끼의 식사만 제공하면 되었으나, 선박으로는 한달여를 여행해야 하기 때문에 식사비와 선실의 넓이도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대서양 횡단 여객수의 변화
항공기가 처음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여객선도 항공기와 같이 꾸준한 증가세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항공기의 안정성과 편리성이 일반적으로 인식된 1950년대 중반부터 항공기 이용객의 여객선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여객선은 사양화의 길로 빠져 들게 된다.

 

기술혁신을 이해하지 못한 여객선사업자의 실수
경영학도에게 참고되는 격언으로 “경험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다만 지나간 후에만 알려주는 가혹한 스승이기도 하다”라는 말이 있다. 경험하고 나서 보면 결론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기 이전에는 이를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시속 400-500km의 항공기와 시속 30km 내외의 선박은 바쁜 장거리 여객 운송에서는 결코 경쟁이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사실도 경험하기 전에는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항공기로부터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은 호화여객선업자들은 항공기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들이게 된다. 그들도 스피드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인식하였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무기인 편안함으로 항공기의 신속성을 커버하려고 하였다. 항공기의 도전이 거셀수록 그들은 보다 호화스럽고 안락한 여행을 보장해 주는 호화여객선을 건조하는데 돈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객선의 호화스러움과 안락함을 광고하는 돈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여객선의 패배였다. 1957년을 기점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공기 여객수가 여객선의 그것을 추월하면서 여객선은 급격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후 10년도 안되어 원양 여객선은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항공기의 도전에 응전하기 위하여 거액을 투자하여 건조한 호화여객선들은 취항도 제대로 못 해본채 부두에 계선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를 미리 예견하였다면 적어도 1950년대 중반이후로는 원양여객선에 대한 신규 투자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경험한 후에야 그것을 알았고, 그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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