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인(臺灣人)의 정체성(正體性)과 의식(意識)

콤파스 모임에 가끔 아들 김동현 사장을 대신하여 참석하던 코모스손해사정엔지니어링의 김석기 회장이 별세하셨다. 지난 50여년간 수많은 유류오염사고 현장을 누비며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로 유류유출오염사고의 최고 권위자로 불렸던 영원한 청년 김석기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해운인 모두 안타까워했다. 하늘나라에서도 열심히 일하실 분! 부디 고이 잠드소서! 
조정제 시조집 ‘등대, 시조를 밝히다’가 출판되었다. 여기에 실린 127편의 주옥같은 시조 중에 어청도(於靑島) 등대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읊으신 ‘구유정(鷗遊亭) 법설’을 소개한다.
“푸른 바다 누가 오나 말없이 말을 걸고/ 구유정 누가 오나 귀 없이 듣는다네/ 꿈꾼다 법 없이 살아가는 흰 갈매기 한 마리”
‘대만의 역사와 문화’는 대만의 역사학자 황준걸(黃俊傑)이 지은 ‘대만(臺灣)의 역사(歷史)와 정체성(正體性)을 찾아서’를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만인의 의식구조와 정체성을 학자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소개하였다. 가까운 이웃인데도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국교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 제국주의 침탈로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대만의 정서, 역사와 함께 대만인의 정체성과 의식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다가 황준걸 교수의 ‘대만의 역사와 정체성을 찾아서’를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 이 책을 통해 대만의 역사와 문화, 대만인의 의식과 정체성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만대학의 특임교수와 인문사회고등연구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소양과 학식을 갖춘 저명한 유학사상가이자 대만을 대표하는 대만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다. 


글을 시작하며
한국과 대만은 20세기 전반기에 비슷한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받았으며, 식민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두 지역 사람들은 식민지시대의 피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민간 차원의 깊은 우정을 맺었다. 다만 한국과 대만의 민간사회에서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한국 사회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거의 없지만, 대만 사회는 그 분열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화 이후 중화민국의 총통(대통령)선거는 그 정체성 분열의 양상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곤 했다. 보편적으로 민주국가에서 최고 지도자 선거의 결과는 정권교체로 이어지지만, 대만에서는 통치권의 교체 외에도 항상 국가정체성이 교체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치정체성 사이에서 그리고 문화정체성과 정치정체성의 분열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신음했다. 이는 대만의 비극이자 대만역사의 숙명이기도 하다. 지난 수년간 치러진 총통(대통령)선거 또한 필연적으로 이렇게 다른 정체성의 대립을 또다시 극명하게 드러냈다.

대륙중국과 해양중국의 토대 대만
세계 근대사 차원에서 보면, 섬나라 대만의 지리적 위치와 인문적 풍토는 모두 심원한 특수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대만은 지구에서 최대 대륙판인 유라시아와 최대 해양인 태평양의 접경지에 위치한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나 국제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삼백년간 동서문화교류의 중요한 토대로 기능했다. 동서 문화교류의 세계도(世界島)이자 동남아와 동북아 두 지역의 문화가 상호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중국사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은 한족의 가장 큰 해외 이주민의 섬이고, 대륙중국과 해양중국이 만나는 토대이며, 더욱이 21세기 중국대륙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전개하여 해양문화권으로 다가가는 가장 중요한 핵심지인 섬이다.
이러한 지리상 우월성을 바탕에 둔 대만의 인문적 풍토도 매우 특수하다. 17세기 이후 대만문화의 발전사는 잡음 많은 교향곡과 같았다. 네덜란드부터 명정(明鄭), 만청(滿淸), 일본을 거쳐 중화민국정부에 이르기까지 통치의 주체가 계속 교체되었다. 즉, 삼백년여년간 대만을 통치한 정부들은 모두 서로 다른 문화가치와 생활방식을 가지고 섬에 와서 교향곡의 서로 다른 악장을 연주한 셈이다. 더구나 정치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대 대만의 통치자들은 모두 이전의 통치자가 남긴 역사의 흔적들을 열심히 지워버리는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구축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것이 결국 대만이 정치정체성과 문화정체성이 분열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대만은 한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다원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족 이주민들이 대만에 도달하기 전에 남도어족(南島語族)이 수천년동안 이 섬에서 살아왔다. 17세기 한족 이주민들이 가져온 문화는 민남(閩南)문화와 객가(客家)문화가 주류였으며,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나면서 중국대륙 각 성 사람들이 단기간에 대량으로 대만에 유입되었다. 일제가 대만을 식민지로 삼았던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문화가 대만에 유입되었고, 동시에 일본을 통해 근대 서양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에 대만은 다원적인 문화교류와 융합의 섬이 되었다. 역사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이곳은 17세기 이후 동서문화 교류의 토대였다. 대만은 대중화권에서 최초로 서양 민주주의 등의 가치관을 접해본 화인(華人)사회였다. 물론 전통적인 중화문화의 가치관인 자비(慈悲)와 왕도(王道) 등을 가장 잘 보존하면서 최대로 발휘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만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동서의 문명교류(文明交流)와 융합(融合)의 토대라는 데에 있다. 

현대화운동 실패와 험난한 민주화의 길
아편전쟁 이후 백년동안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탈과 능멸로 현대중국을 향해 가는 길에 많은 좌절과 고난을 겪었다. 근대의 중국대륙은 현대중국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선 기술의 현대화에 힘을 쏟았다. 증국번(曾國藩)과 좌종당(左宗棠) 그리고 이홍장(李鴻章) 등이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자강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던 북양함대는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제국에 패배하면서 기술 측면에서 현대화운동의 실패를 선고해야 했다. 또한 후스(胡適)와 천두슈 등을 비롯한 5.4운동의 지식인들이 민주와 과학을 목표로 삼는 사상인 현대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그리고 1949년 이후의 혼란 때문에 중국 민주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게다가 1949년 이후 중국대륙은 계속되는 혁명에 휩싸이게 됐다. 1950년 10월부터 진행된 반혁명 분자 진압 운동, 1957년부터 1958년까지의 반우익 운동, 1958년부터 1962년까지의 대약진운동 등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여기에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에 걸쳐 진행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전통문화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러다가 1978년부터 감행된 개혁개방정책(改革開放政策)으로 대륙은 경제발전과 국력상승을 발판 삼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1세기로 접어들어 일부 서구인들이 “중국이 세계를 통치할 시대”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구미 지식계층에 중국 대변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번영 뒤에는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불안정, 자금과 인재의 외부 유출 그리고 대기와 수질오염 등 많은 문제가 급성장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국대륙에 비해 20세기 전반의 대만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많은 고난을 겪었다. 1927년 설립된 대만민중당은 현대 서양식 민주정당이 대만에 출현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34년까지 지식인들이 추진한 의회설치운동도 대만인의 서구식 민주정치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87년 계엄령이 폐지된 후 진전되어온 대만 민주화의 물결 속에도 숨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대만정치는 정당이 주체가 되는 대의민주주의가 효력을 잃고, 그저 정당이 조종하는 포퓰리즘 정치와 재벌정치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정치정체성의 대립과 분열로 정당이 교체될 때마다 국가적 방향성이 총체적으로 재조정을 강요받았다. 대만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서구식 근대 민주정치를 화인(華人)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고, 대만문화 발전의 세 번째 특징과 의의는 대만이 중화문화의 수호자라는데 있다. 유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전통중화문화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은 대만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 21세기 중국대륙이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거시적 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대만의 전략적 위상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대만은 역사상 한족이 남쪽으로 이동해온 최고점에 등극함으로써 해양중국의 첨단으로 여겨진다. 중국문화 수호자로서 대만의 역사적 역할은 전후 대륙의 지식인들이 바다 건너 대만에 들어옴에 따라 유가사상(儒家思想)과 불교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유학과 불교가 전후 대만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대륙을 석권하던 시기에 대만은 정치상으로는 일당독재였으나 문화와 교육 차원에서는 중화문화(中華文化)에 대한 교육을 추진하면서 전통문화의 가치를 수호하고 발양했다. 이로써 대만은 중화문화의 등대가 되었다.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거의 사백년 동안 대만의식의 발전은 늘 정치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일제강점기 대만의식의 형성과 존재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기 위한 것이었고, 광복 이후의 대만의식은 중국공산당의 대만 탄압에 반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만의식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항쟁과 반항 성향이 짙다. 

신대만의식으로 인류문명에 공헌
근자의 아시아 각국에는 민족주의가 팽배하면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상에서 야기되는 영토분쟁 탓에 국가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급변하는 21세기 국제정세에 따른 신대만의식의 재구축 과정에서 중국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할 때, 21세기 신대만의식(新臺灣意識)은 반드시 그 문화적 깊이와 높이 그리고 폭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대중화문화권(大中華文化圈)에서 대만이라는 섬은 큰 동란을 겪지 않고 전통적 중화문화를 보존해왔기에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대륙이 부상할수록 대만의 위상은 더욱 중요해진다. 대만이 한문화를 토대로 삼는 신대만문화의 잠재력을 점차 확장해나간다면, 대만은 21세기 대중화(大中華)의 진정한 부흥을 이끌 것이다. 21세기 대만과 중국대륙이 각자 진정한 마음이 바탕이 된 상호교류를 통해 그간의 역사적 상처와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양안(兩岸) 민중 간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상호주체성이다. 상호주체성의 이념에 바탕을 둔 인(仁)과 지(智) 두 가지 유가(儒家)의 핵심가치야말로 앞으로 양안 관계 회복은 물론 인류문명(人類文明)의 발전에까지 공헌할 열쇠가 될 것이다. 

 

대만 약사(略史)와 주요 역사적 사건
1652년 9월 17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인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 점령인들은 복건성 남부 지역의 많은 한인(漢人)을 대만으로 이주시켜 개간사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당국의 통제와 압박이 나날이 심해지고 가혹한 조세징수와 착취에 많은 한인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중에 농민의 수령으로 있던 곽회일(郭懷一)은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네덜란드 정권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가 나는 바람에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를 곽회일의 난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대만 점령과 정성공의 대만공략
1661년 3월 정성공(鄭成功)이 진먼(金門)에서 출발하여 대만공략에 나섰다. 그의 군대는 녹이문(鹿耳門)에 상륙한 이후 네덜란드군의 수비가 허술한 프로방시아성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 젤란디아성을 차례로 함락시키자 궁지에 몰린 네덜란드군이 항복함으로써 네덜란드의 지배가 종식됐다. 정성공이 이곳에 승천부(承天府)를 설치하고 대남을 동도(東都)로 개칭하여 명나라의 동천을 선포했다. 그해 정성공이 39세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후계자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1674년 4월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난(亂)이 발발하자 정경은 이에 호응하여 대만에서 출병하여 삼번과 함께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은 경정충(耿精忠)이 청에 투항함에 따라 청나라 공격에 실패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하문(廈門)으로 물러났고 이어 동남 연안지역의 모든 거점을 포기하고 완전히 대만으로 후퇴했다. 정경이 사망하고 그의 12살 아들 정극장(鄭克臧)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후 삼번의 난이 평정되자 1683년 청조(淸朝)는 복건성 해역에 출정하여 대만공략의 전초전으로 팽호열도에서 정씨의 군대와 싸웠다. 계속된 전투에서 참패한 정극장은 사신을 보내 투항을 요청했다. 청군은 대만에 도착하여 정극장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대만을 청조 판도에 편입할지 말지를 고심했다. 수군(水軍)을 이끌고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청해부에 책봉된 시랑(施琅)은 공진대만기류소(恭陳臺灣棄留疏)를 제출하여 대만 포기를 거부했다. 이듬해 1684년 4월 강희제(康熙帝)가 대만을 청나라 판도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대만을 복건성 대만부로 하고 시랑의 의견을 따라 대만편사류예칙례(臺灣編査流預則例)를 반포했다. 여기에는 대만 주민을 엄하게 다스릴 것 그리고 한인이 대만으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이 들어있었다. 1686년 청조는 시랑의 견해에 따라 반병(班兵)제도를 실시했다. 대만 주둔 병사는 3년 안에 한번 교체한다는 내용이다. 1721년 4월 주일귀(朱一貴)가 대만 민중을 이끌고 청조에 반항하는 깃발을 들었고, 주일귀는 중흥왕(中興王)으로 자칭했다. 이 사건은 대만 민중봉기에서 대만 전도를 점령한 첫 번째 반란이다. 그 후 1786년 11월 임상문(林爽文)의 난이 일어났다. 
 

모단사 사건과 일본의 출병
1810년 8월 청조(淸朝)는 갈마란청(噶瑪蘭廳) 설치를 인정하고, 청의 행정기관 소재지를 오위(五囲) 지금의 의란시(宜蘭市)로 하여 처음으로 대만 동북쪽을 직접 통치했다. 1862년 4월 창화지역의 지도자 대조춘(戴潮春)이 팔괘회(八卦會)를 통솔하여 반청운동을 일으켰다가 복건성 육로 도독 임문찰(林文察)이 이끄는 청군에 의해 4년 만에 진압됐다. 이 반란은 대만역사상 가장 긴 시간에 걸친 농민봉기였다. 대조춘의 난이라고 부른 이 사건은 강희시대 주일귀의 난과 건륭시대 임상문의 난과 함께 삼대 민중봉기 중의 하나다. 1862년 6월 대만의 담수(淡水)가 개항되고 이듬해 기륭(基隆)이 개항되었다. 1865년 1월 안평(安平), 고웅(高雄)이 계속 개항되어 통상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외국 상인들이 잇달아 상점을 개점하였다. 1871년 12월 유구(琉球)의 선원 66명이 태풍을 만나 대만 항춘(恒春)의 팔요만(八搖灣)에 표착하여 산간으로 들어갔다가 모단사(牡丹社)의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이것이 모단사 사건의 발단이다. 1874년 5월 일본정부가 이를 빌미로 사이고 쥬도(西鄕從道)를 대만번지 사물도독으로 임명하고 대만에 파견했다. 사이고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사키로부터 대만으로 건너와 항춘에 상륙했다. 그는 모단사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장기주둔을 시도했다. 청조는 곧바로 선정대신 심보정(沈葆楨)을 순찰 명목으로 대만으로 이동시키고, 대만의 해방 및 대외적 외교업무를 맡겼다. 같은 해 10월 청조(淸朝)는 모단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베이징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의하면, 청조는 대만 원주민이 일본인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할 것, 일본 출병은 민중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거임을 인정할 것, 청조는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 일본군이 건물이나 도로를 건설하는데 사용한 비용 40만량을 부담할 것, 일본군은 대만에서 철퇴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1875년 2월 심보정의 건의에 따라 청조는 내륙 인민에 대한 대만 입식(入植) 금지령을 해제하고 대만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며, 하문, 복건, 홍콩에 초간국(招墾局)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입식자(入植者)는 무료로 대만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고, 식료품, 경우(耕牛), 농기구와 종자를 지급받았다. 1884년 10월 프랑스 함선이 대만으로 들어와 기륭과 담수를 공격했다. 유명전(劉銘傳)이 이끄는 청군이 담수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1885년 대만은 복건성에서 독립하여 대만성이 되었다. 청조는 유명전을 대만의 첫 번째 순무(巡撫)에 임명했다. 유명전은 대만에서 지속적으로 서구화한 새로운 정치를 추진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대만과 팽호도 할양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조는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대만과 팽호도(澎湖島)를 일본에 할양했다. 같은 해 5월 대만총독부(臺灣總督府)가 수립되어 가바야마 스게노리(樺山資紀)가 초대 총독으로 임명됐다. 대만에 있던 일부 청조 관원들은 대만의 할양에 반대하여 대만의 유력자들과 협력하여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을 건립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당경숭(唐景崧)이 총통으로 추천되고 유영복이 대장군, 구봉갑이 의용군 지휘관이 되었다. 6월 일본의 대만총독부가 타이베이에서 시정식(始政式)을 하고, 대만민주국을 압박하자 대장군 유영복이 샤먼으로 도주함으로써 대만민주국은 붕괴하였다. 1896년 하라 다카시(原敬) 총독은 대만사무소에 동화와 비동화(非同化) 정책인 대만문제이안(臺灣問題二案)을 제안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 통치방식을 활용하여 내지연장주의를 주장하고, 이를 대만 통치의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같은 해 3월 육삼법(六三法)이 실행됐다. 육삼법은 대만총독부가 그의 관할 범위 내에서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명령을 반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대만총독부의 절대적 권력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1906년 4월 일본정부가 법률 제31호를 공포했다. 이 법률의 명칭은 ‘대만에 실행된 법령에 관한 법률’로 약칭은 삼일법(三一法)이다. 이는 총독의 법령이 본국 또는 대만에 실행된 법률과 충돌하면 안 된다고 명시한 것으로, 이에 따라 육삼법은 삼일법으로 대체됐다.
1912년 12월 손문(孫文)이 동맹회 회원들을 비밀리 대만으로 도항시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5년 8월 서래암사건이 일어났다. 주모자 위칭팡 등이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은 일본 통치시대에 대만인에 의한 무장 항일사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희생자의 수가 가장 많은 사건이었다. 1920년 7월 대만 지방행정제도가 개정되었다. 대만의 지명이 대폭 변경되고 대만의 행정구역이 확립되었다. 대만의 본토 유학생이 도쿄에서 월간지 ‘대만청년’을 창간했다. 1921년 1월 신민회가 일본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대만에서 의회 설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대만의회설치청원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일본정부가 일본 본토의 법률을 대만에 적용하기 위해 법삼호(法三號)를 만들어 삼일법을 대신하여 실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총독의 입법권이 약해지게 됐다. 이 법규는 종전 때까지 실행됐다. 10월 대만문화협회가 설립되어 린셴탕(林獻堂)이 총리에 양지천이 총리보조에 취임했다. 이 협회는 문화적 계몽과 민족운동의 추진을 목적으로 한 사회단체로, 1920년대의 대만 도내에서 비무장운동의 선도자가 되었다. 12월 치안경찰법이 대만에서 실행되었다. 1927년 7월 대만문화협회가 분열되었고, 그중의 일부 회원이 새로운 지방자치를 요구하며 대만인 최초의 정치단체 대만민주당을 결성했다. 1930년 8월 대만민중당이 분열되고 대만지방자치연맹이 설립되었다.

카이로선언과 대만의 독립
1937년 7월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했다. 일본정부가 다시 무관의 총독을 파견했다. 대만지방자치연맹이 해산되고, 이후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정치단체가 사라졌다. 1941년 2월 대만혁명동맹회가 충칭에서 설립되었다. 1943년 11월 중화민국, 미국, 영국 삼국의 정상이 카이로에서 회담을 하고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종전 이후에 일본이 대만, 팽호열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표명했다. 연합군이 대만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1944년 9월 일본이 대만인에게 징병제도를 실시했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됐다. 국민당 정부가 천이(陳儀)를 대만성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고, 9월 그에게 대만경부총사령을 겸임하도록 명령했다. 같은 해 10월 대만투항 수락식이 타이베이 공화당에서 열렸다. 천이가 중국 전쟁지역의 최고 원수로 일본측 대표 안도 요시토시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대만행정장관 기구가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10월 25일을 대만의 광복절로 제정했다. 1947년 2월 2.28사건이 발발했다. 이는 대만민중봉기사건으로, 일제통치를 벗어났으나 또다시 시작된 새로운 중화민국 관료들의 폭정에 못 견딘 대만 본토인들이 불만을 터뜨리며 일으킨 항쟁으로 진압 과정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행정원은 회의를 통해 대만성 행정장관 기구를 폐지하고 대만성 정부로 개편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5월 대만성 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고, 웨이다오밍(魏道明)이 첫 번째 대만성 정부의 주석에 임명됐다. 1948년 4월 삼칠오감조(三七五減租)가 실행되어 토지개혁이 시작됐다.

 

중화민국 정부의 대만으로 철퇴와 샌프란시스코조약
1945년 5월 장제스(蔣介石)가 첫 번째 총통에 취임했다. 그는 헌법을 전면 동결시키고 총통의 임기에 기한을 설정하지 않아 계속 연임할 수 있게 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실시했고, 이로부터 장제스의 군사적 강압정치가 시작됐다.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하고 타이베이로 천도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병하여 경비에 임했다. 같은 해 9월 미국 등 48개 국가와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체결됐고, 일본은 대만, 팽호열도에 대한 주권의 포기를 표명했다. 1952년 4월 중화민국이 일본과 화일(華日)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4년 12월 중화민국이 워싱턴에서 미국과 공동방어조약을 체결하여 1979년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까지 지속됐다. 1958년 8월 진먼도에서 포격전이 발발하여 44일간 계속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제2759호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이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연합국에서 중국의 대표권을 획득하자 국민당 정부는 연합국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장제스 총통의 사망과 민주화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고 옌자간(嚴家凎)이 후임자가 되었다. 1978년 12월 미국이 1979년부터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한다고 발표했다. 1987년 7월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38년에 걸친 계엄시대가 종료되면서 동시에 각 당파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령이 해제됐으며, 신문사의 설립 및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1988년 7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사망하고 후임 총통에 리덩후이(李登輝)가 취임했다. 1992년 8월 한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2000년 3월 제10대 정부총통 선거가 행해졌다. 투표에 참가한 유권자수는 1,200만명을 넘었고, 투표율은 82.69%에 달했다. 민주진보당의 총통후보 천수이볜(陳水扁)과 부총통후보 뤼슈렌이 당선되었다. 2002년 1월 대만이 ‘대만·팽호·금문·마조 관세영역’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 가입했다. 2004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타이베이101’이 완공됐다. 2005년 6월 국민대회에서 헌법수정안이 가결되었다. 같은 해 7월 중국국민당 주석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 마잉주(馬英九)가 당선됐다. 2006년 중화민국 총통 천수이볜이 국가통일위원회와 국가통일강령의 적용 종료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시밍더(施明德)가 백만 시민의 천수이볜 타도운동을 추진하고, 30만 시민을 이끌고 총통부 앞의 카이다거란 대도에서 며칠동안 밤낮으로 농성을 벌이면서 천수이볜의 사임과 보편적 민주주의와 도덕적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했다. 2007년 5월 중국국민당이 전 주석 마잉주를 2008년 총통선거 출마후보로 확정했다. 중정기념단의 명칭이 대만민주기념관으로 개칭되었다. 10월 타이베이현이 직할시로 승격됐다. 2008년 5월 선거에서 이긴 마잉주가 중화민국 제12대 총통에 취임했다. 그 후 2016년 5월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당선되었고, 2020년 1월 총통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외가가 원주민 출신인 차이 총통은 반중친미의 자주독립 성향으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내세우는 중국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tim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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