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원양항해 마니아로 만든 ‘첫 원양항해’(소련체제 체험)

 

1991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세계정세는 소련 고르바초프의 페로스트로이카로 사회주의 체제가 크게 몸살을 앓고 있을 때였다. 우연한 기회에 ‘한바다’호(이번에 타고 간 ‘한바다’호의 전신)가 원양실습으로 소련의 항구에 기항하기로 되어 있고. 가는 김에 그곳에 사는 교포들을 위하여 모금한 “사랑의 쌀”을 싣고 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실습생 말고도 몇 사람이 더 타고 가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나도 동승할 수 없을까 알아 본 후 어렵게 한자리 얻어 동승하게 되었다.


필자가 꼭 동승하고 싶어 한 이유는 ① 해양대학 교수이면서 원양항해 한번 안해보았다면 교수로서 결격사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고, ② 사회주의에 관하여 글을 통하여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몸으로 느껴야만 학생들에게 바르게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 생생한 사회주의 속에 들어가 단 며칠이라도 생활해보고 싶다고 늘 생각하여왔기 때문이다.

 

소련을 보고 느낀 것


내게 첫 원양항해는 1000%의 만족을 주었다. 당시 소련의 공산주의는 붕괴직전(그해 가을에 소련 붕괴)이었다. 개혁개방으로 외국인도 어느 정도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어 왕래가 잦았으나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의 몹쓸 병균(마피아, 마약, 매음, 밀수, 관료들의 부패 등)으로 병들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첫 기항한 사할린은 소련의 가장 변두리이고 낙후된 섬이었기 때문에 소련 공산주의체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내가 원하던 사회주의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고, 둘째 그곳 사할린에는 2차 대전 때 일본에 의하여 강제 징용된 5만여명의 교포들이 1945년 8월 15일부터 1992년 6월초 우리가 탄 한바다호가 들어올 때까지 남쪽바다만 바라보고 자기들을 싣고 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현지 교포들의 공통된 의견). 그들의 애환을 생생한 목소리로 직접 듣고 느낀 충격은 너무나 컸다.


나의 첫 원양항해는 나를 원양항해 마니아로 만들어버렸다. 첫 항해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승선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걱정하는 멀미문제가 승선해보니 나에게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망망대해의 항해가 내게는 이 세상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평온하고 아늑하고 자유를 만끽시켜주었다. 그래서 해대교수 재직 중 기회만 있으면 실습선에 타고자 노력하였다.

 

출항


평소 내가 실습선에 동승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해원회(해대정년퇴직 교수들의 친목모임) 총무로부터 한바다가 원양항해를 나가는데 운 좋게 정년퇴임 교수들이 탈만한 스페이스 여유가 있다고 하니 한번같이 가자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한바다’호에 올랐다. 승선하고서야 안 일이지만 전 세계 사람들을 떨게 하는 신종 풀루 때문에 출항식이나 기항항의 입항식 등 번잡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의식들을 생략하고, 원양항해 일정도 대폭 단축하였고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가 탈 수 있는 여유 공간도 생겼다고 한다.


일행은 모두 9명이나 되었다. 정년 후 1년에 한두 번 만나 회포를 푸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출항전의 여유시간에 우리는 여행 중 절대로 현업에 종사중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것과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되자는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도움을 주기 위해 학생들의 빈 시간을 활용하여 돌아가면서 특강을 하기로 하였다(물론 담당 교수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경우). 실습선은 아주 훌륭하였다. 몇 년 전에 신조한 선박인데 첫 번째 ‘한바다’호보다 훨씬 대형선이어서, 선내 공간도 여유가 있었다. 우리 생활이 아주 쾌적할 것이라는 안도감과 현역들의 업무에 지장을 주지 말자는 원칙을 지킬 수 있을 것에 만족하였다.


망망대해와 청정해역


입항식이 없으므로 출항절차가 끝나자 바로 출항하였다. 부산항을 출항하자 바로 선수를 북으로 꺾어 동해로 접어들어 북상하여 첫 기항지인 일본의 본섬과 북해도를 가르는 스가루(津輕) 해협의 혹카이도(北海島) 쪽에 있는 하코다데(函館)항으로 가기 위해서다.


육지가 가물가물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쯤 갑판에 모인 우리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그리고 검푸르면서도 티 한 점 없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완전한 자유인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살아있는 것이 이 지구이듯이, 지금 우리를 제약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상하좌우 모든 공간은 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뿐이고 그 위에 떠있는 한 바다호는 또 하나의 딴 세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고 모든 자질구레한 걱정거리에서 해방된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천국이 따로 있나 이것이 천국이지”하면서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였다. 또 우리가 공감한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즐겁고 호화스러운 크루즈 선보다 더 재미있고 값진 여행을 공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우리항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우리나이는 2~30년 전의 현역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우리일행 아홉 명 중 6명이 해양대학 해기사출신이기 때문에 해운이나 승선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우리들의 소주 안주가 되었고, 그때 마다 폭소가 터지면서 “웃으면 복이 와요”하는 천진스러운 하루가 저물고 다시 뜬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고, 이것이 천국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대양(大洋)을 질주


항해 중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누구든 약간의 읽을거리를 가지고 타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 일행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출항 후 허 선장이 잘 보이지 않는다. 궁금해서 선실을 찾아가보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나 보니 바로 “낭만 바이크”(해양한국 11월호 88쪽 참조)라는 해대졸업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험준한 남미대륙 2만 킬로를 질주한 체험기였다. 내가 관심을 표시하니 다 읽고 나서 바로 내게 건네준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책속에 푹 빠져 버렸다. 그 첫 페이지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업무상 출장을 제외하면 여행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은 우리를 항상 옥죄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내가 원양항해를 하고 싶어 하는 목적도 일상에서의 탈출과 자유의 만끽이다. 바로 이 친구도 오토바이를 탄 이유가 일상에서의 탈출과 새로운 자기를 찾기 위한 것이다. 유형은 틀리지만 나도 그도 일상에서의 탈출과 무언가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라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 한 시간여를 정신없이 책속에 빠졌다가 갑판으로 나와 망망대해를 바라보니, ‘한바다’호가 북을 향하여 힘차게 대양을 가르며, 항진하고 있다. 순간 ‘한바다’호가 오토바이가 되고 나는 허민(책의 저자이고 직접 오토바이로 남미를 종단한 사람)이 되어 신나게 대양을 뚫고 달리는 착각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한바다’라는 오토바이로 태평양(동해이지만)을 멋지게 질주해 보자! 그럼 대양의 종착점에서 무언가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못 찾으면 어때 이만큼 즐겼으면 됐지---” 이런 상념에 빠지면서 이번 여행을 한바다를 오토바이로 나는 허민으로 한번 신나게 질주해보기로 했다. 이런 나의 상념은 이번 여행 내내 나를 ‘한바다’라는 오토바이로 대양을 질주하도록 만들어주었다      

 

특강


꿈같은 시간이 지나서 내일 아침이면 첫 번째 기항지인 하코다데에 도착한다고 한다. 교관장이 내게 와서 특강을 부탁한다. 시간은 하코다데에 입항하여 접안 후 입항수속(CIQ 수속포함)에 약 두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 시간에 학생들은 아무할 일이 없으니 특강을 해 달라는 것이다. 항해 중에 학생들은 조를 짜서 승무원들의 근무시간과 똑 같이 당직에 임한다. 물론 실제항해에 필요한 업무는 승무원들이 다하지만 그와 똑 같이 학생들은 항해실습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바다’호의 브릿지 바로 뒤에 브릿지 안에 있는 것과 똑 같은 장비를 갖춘 실습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담당교관의 지도하에 실제 항해하는 것과 똑 같은 업무를 그대로 해보는 것이다. 기관과도 똑 같다. 그 외에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선박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장비와 기기들을 조작해보는 시간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해 중에는 좌학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활짝 열린 해대생들의 미래 - 세계의 해운무대는 해대생들의 것이다.


나는 특강 첫머리에 “학생들은 정말 행운아다. 내말을 잘 들어보라 학생들의 미래는 매우 밝다! 내말을 잘 듣고 이 항해에서의 경험이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기회는 잡는 자의 것이고, 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잡는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약간 허황하고 선동적으로 들리는 말로 강의를 시작하자 학생들이 어리둥절하면서도 경청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원직의 매력상실


2차 대전 후 잘살게 되면서 선원직의 매력이 점진적으로 상실되었다. 그래서 젊고 유능한 청소년들이 해양계 학교와 선원직을 기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난하던 시절 해양대학은 대단히 인기있는 학교였으나 잘살게 되면서, 해양대학의 인기도 점진적으로 사그라졌고, 졸업생들의 승선기간도 짧아졌다.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엄청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다.


즉 선원직의 매력이 없어지면서 선진국의 유능한 선원들은 모두 하선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 선원들이 메워나갔고, 개도국들도 조금 잘살게 되면 하선해 버린다. 선진국 선원들이 다 하선해버리자 해기사를 양성하던 학교들도 모두 문을 닫거나 다른 교육으로 전환해버렸다. 이것이 대체로 80~90년대에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그렇게 해도 큰 문제없이 잘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2천년대가 되면서 서서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전통해운국의 비상상황 - 육상해기직의 공급두절


세계에는 우리나라 해대 졸업생 정도의 수준의 해기기능을 가진 해기사들이 승선해야 할 만한 선박들이 대체로 1만여 척이 있다. 이들 선박을 소유하고 운항하는 해운회사만도 수천 개가 된다. 그 외에 해운과 관련된 산업이 부지기수다. 해운금융, 해상보험, 해사법률, 해사중재, 해운대리점, 해운브로커, 조선, 선급, 항만 등 헤아리라면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관련 산업의 직종 중에는 상선에 승선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거나, 승선경험이 있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직들이 많다. 그런 자리만도 수만 자리가 될 것이다. 해운계에서는 이러한 자리를 육상 해기직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러한 자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해운선진국들의 해기사들은 적정기간을 승선하고 나면 하선하여 이러한 육상 해기직에 취업하였다. 젊은이들이 상선을 아예 타지 않게 되자, 해상 해기직 뿐만 아니라 육상해기직의 공급도 끊기고 말았다. 해운회사의 공무감독이나 해무감독을 구할 수 없어 쩔쩔 맨다. 일본에서는 돈 잘 벌기로 소문이 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던 도선사직도 후속인사가 안되어 외국에서 도선사를 수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해상직과는 달리 육상직의 경우 단순한 전문기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급관리직이다. 그 자리를 개도국 해기사들이 취업하기는 아직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는 해운업뿐만 아니라 해운 관련 산업들도 더 이상 영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오면서 아차! 하고 후회하고 있으나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것이다.

 

OECD 국가 중 거의 유일한 고급해기사 대거양성

 

다행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급해기사들을 양성하는 제도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해상해기직도 그렇지만 육상해기직의 경우, 고급직으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한국해대 출신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해대졸업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선박을 알고, 해상생활의 어려움과 특성을 알고,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육상의 중요관리직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다. 이번 항해 중에 항만에 가서 보라. 여러분의 선배들이 세계의 중요 항만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 대체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니 학생들의 눈빛이 빤짝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운의 발전과 문명서진설


특강의 나머지 시간은 인류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해운의 역할과 해운사적인 관점에서 본 문명 서진설에 관하여 한 시간여를 강의하였다. 지면관계로 여기서 그 내용을 소개하기는 어려우나 학생들이 관심있게 경청해 주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코다데항에서 3박4일의 정박


출항 후 계속 항해하여 19일 아침 첫 기항지인 하코다데(函館)항에 도착하였다. 대략 40여 시간의 항해였다. 접안 후 갑판에서 바라본 하코다데시는 자그마하고 조용한 도시로 보였다. 입출항 수속을 다 마치고 학생들에게 상륙이 허용된 것은 선내에서 점심을 마친 후였다. 우리 일행도 상륙하여 도시를 한번 돌아보기로 하였다. 작은 도시고 도심과 접안부두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아니하기 때문에 도보로 가기로 하였다. 한바다호가 접안한 곳이 분명 보세구역인데 철조망이 쳐지거나 세관직원이 경비를 서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외부로 개방되어 있었다. 부두 곳곳에서 시민들이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시내는 아주 깨끗하고 한산하였다. 총무격인 김 교수가 관광지도를 얻고, 하코다데 인근의 관광지에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그 결과를 가지고 오후에는 구 시가지를 걸어보고, 저녁에는 로프웨이 (우리의 케이블카)를 타고 야경을 즐기기로 하였다.

 

페리제독의 유적


구시가지까지는 천천히 걸어 한 시간 정도였다. 그곳에는 오래된 건물과 이 도시의 역사적 유적이 제법 있었다. 그 중 일행이 관심을 가진 것 중의 하나가 폐리제독과 이 도시와의 관계다. 페리제독은 1858년에 군함으로 일본근해에 와서 대포로 시위를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풀고 개항하도록 한 미국의 제독이다. 일본사람들은 페리제독이 타고 온 검은 색의 철로 된 군함을 처음보고 놀라서 이 선박을 구로후네(黑船)라 불렀다. 미국이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미국의 포경선단이 북태평양과 동해 등에서 고래잡이를 많이 하였는데 이들 선단의 보급기지가 필요하여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포경선단을 호위하기 위하여 북태평양으로 여러 차례 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일에는 하코다데에서 살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기념비에는 그가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하코다데에서 살면서 서양악기의 연주를 자주하여, 서양음악을 처음 들어 본 이곳 주민들이 굉장히 감동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영국의 영사관이 입주하였던 건물이나 오래전에 건축한 교회건물 등이 아주 깨끗하고 잘 관리된 상태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북해도의 일본편입


이번 북해도 여행에서 알게 된 것의 하나는 북해도의 일본영토 편입과 관련된 상식이다. 우리는 북해도가 명치유시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원시부족 수준의 추장들이 지배하던 곳을 명치유신 후 국토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북해도를 일본영토로 흡수하였다고 알고 있으나, 이번 여행에서 확인된 바로는 일부 지역이기는 하지만 일본 봉건 영주인 다이며(大名)가 성을 쌓고 통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코다데에 있는 그 성은 오릉곽(五菱廓)이라고 하는데, 일본 최초의 서양식 축성법에 의하여 조성되었다고 하며, 명치유신을 위한 막부와 유신파의 전쟁에서 막부가 유신측에 항복하자 이에 불복하는 막부측의 일부 강경파가 추종병력을 이끌고 선박으로 북해도로 도망와서 이 오릉곽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하코다데 출항과 황천항해


3박 4일간의 하코다데 체류 일정이 끝나고 다음 기항지인 오사까로 출항하였다. 날씨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우리가 지나가야하는 쓰가루 해협은 원래 바다가 거칠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출항하자마자 선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심한편이 아니었으므로 심하게 멀미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 원로교수 일행 중 한분이 멀미로 고생했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나니 바다도 잔잔해지고, 멀미도 멎어 다시 유쾌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항해와 명상


출항 직후 허교수가 빌려준 낭만 바이크를 다 읽었으므로 내가 가지고 간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책 제목이 ‘거지 성자’이다. 이 책은 오래전에 길가에서 팔고 있는 것을 제목이 관심을 끌어 사서 읽어보았고, 이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가지고 온 것이다. 내용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는 등으로 망신창이가 된 한 젊은 불교도 학생이 현실 도피를 겸하여 독일에 유학을 왔다가 대학근처의 공원에서 무소유와 노숙으로 명상을 계속하는 범상치 않은 한 거지 성자를 만나서 그와 사귀면서 그로부터 여러 가지 명상과 사색에 관하여 배운 것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거지 성자는 무소유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의 일상은 옷은 남이 입다가 버린 망토 같은 것을 주워다가 입는다. 이것이 헤어지면 자기가 손수 헝겊을 대어 기워서 누더기가 되도록 입고, 먹을 것은 자연식품을 파는 가게에서 유효기간이 지나서 버리는 것을 얻어다가 먹으며, 잠은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공원의 나무 밑 같은 곳에서 노숙한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나무 밑에서 잘 때 추위를 가릴 덥개 하나와 약간의 먹을 것을 조그마한 손수레에 싣고 다닌다. 낮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거나, 떨어진 망토를 깁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힘닿는 대로 도와준다. 그가 특히 열심히 돕는 사람 중에는 이란에서 망명해온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이니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 없다. 그래도 어쩌다가 돈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볼펜이나 노트, 그리고 자기가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줄 조그마한 선물을 살 돈이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성자는 공원에 버려진 빈병을 주워 자기가 숙소로 사용하는 나무밑 같은 곳의 땅을 파서 묻어두었다가 돈이 필요할 때 꺼내서 고물상에 팔아 돈을 마련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발한 발상 하나를 실천하기로 했다. 그것은 그 책을 얼마간 읽다가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그 글귀를 몇 번 곱씹어 읽어보고 그것을 화두로 명상하거나 갑판에 나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사색을 해보는 것이다. 망망대해위의 일엽편주, 조용한 갑판에서의 맑은 공기를 힘껏 들여 마실 수 있는 환경은 명상과 사색에 안성맞춤이었다. 부산-하코다데간의 항해가 오토바이로 대양을 질주하는 역동적인 항해였다면, 이번 항해는 젊은 불교 철학도와 거지 성자,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 하는 명상과 사색이니 생각보다 근사하고 깊은 명상이 가능하였다. 이 명상항해는 이 책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성자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생활기록을 읽으며, 많은 종교에서 흔히 강조하는 무소유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느꼈다.

 

자네는 당나귀 말은 믿으면서 내말은 안 믿는 군!


책속의 에피소드 같은 일화 두어 토막 짚고 넘어가자.
오래전에 어느 성자가 있었는데 가난하였다. 그래도 여행을 좋아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소중하게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찾아와 이 당나귀를 빌려달라고 하는데 평소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터라 빌려주기 싫어 당나귀가 일을 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나귀가 힝힝거리고 운다. 친구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히 “자네는 당나귀 말은 믿으면서 내말을 안 믿는군”이라고 대답하였다.


당나귀는 잃어도 나를 잃지 말자


이 성자의 당나귀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이 걱정되어 여럿이서 당나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같이 나선 성자가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동네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당나귀를 잃어버렸는데 무엇이 그리 좋아 춤을 추느냐”고 물었다. 성자 왈, “당나귀에 내가 타고 있었더라면 나까지 잃어 버렸을 텐데, 내가 안탔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답한다. 그렇다 우리는 당나귀에 너무 집착하여 나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를 뒤 돌아 보게 하는 성자의 가르침이다.
 
오사카 기항과 일본의 인상


이틀 정도를 항해하여 오사카 항에 접안하였다. 우리 일행 대부분이 오사카는 여러 번 방문하였으므로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었다. 공식일정의 하나로 전세버스로 고오베항의 록코산(六甲山) 정상에 올랐다가, 일본에서는 가장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성이라는 히메지(姬路)성을 관광하고, 옛 고오베 부두지역을 재활용하여 건축한 해양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오사카에서의 일정도 3박 4일로 하코다데와 같았다.


우리 일행이 이번 여행 중 공통으로 느낀 인상은 일본경제가 굉장히 침체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코다데에서는 시골이라 그런가 했지만 오사카라고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거리에 점포는 많은데, 손님은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점심시간의 식당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다. 해기사 출신의 원로교수들은 항해하면서 자기들이 오갔던 세토나이가이의 선박통행량이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필자의 느낌은 일본경제가 노령기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으로 치자면 곱게 늙기는 하였지만 무언가 힘이 없어 보이고, 패기 같은 것이 안보이고 허리도 꾸부정한 초로의 정년퇴직자와 같은 인상이랄까.

 

내년에는 세계일주항해를


학생들이 상륙할 때는 순백색의 하정복 차림이다. 경기 침체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 한 일본 도심에 훤칠하고 늠름한 해대생들의 활보는 길 가던 일본인들이 한번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정도로 돋보였다. 길 가던 어느 일본인들이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미국해군사관생도인 것 같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이 저렇게 키가 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해대생들은 정복을 입고 걷기만하여도 국위를 선양하고 다닌 셈이다.


필자는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오는 마지막 항해에서 너무 멋진 항해가 끝난다는 아쉬움 속에서 문득 이렇게 자랑스러운 실습선을 가지고 왜 세계 일주항해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머물렀다. 우리가 탔던 ‘한바다’호는 한바다 2세다. 그 전신인 한바다 1세는 이보다 작은 실습선임에도 불구하고 76년인가에 세계 일주 항해를 하였다. 이렇게 좋은 실습선으로 세계 일주 항해를 단행한다면, 세계가 한국해운에 대하여 주목할 것이고, 세계 해운업계는 늠름한 한국해대생을 고용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것은 해대졸업생과 한국해기사들의 세계해운업 진출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하선하자마자 총장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총장실로 가던 중 총장을 길에서 만났다. 간단히 인사하고, “저렇게 좋은 배를 가지고 왜 세계 일주를 하지 않는가? 세계 일주를 해서 한국과 해대를 세계에 자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더니 의외로 “그렇잖아도 내년엔 세계일주항해를 한번 해볼까 한다”는 답변이다.


글을 맺으면서 20세기 초,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국력과 해군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하여 대서양함대의 전함 16척을 모두 백색으로 도장하여 백색함대(Great White Fleet)를 만들어 1년 반에 걸쳐 세계를 일주하는 대항해를 성공시켰다. 이 대항해의 성공은 세계인들이 미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였고, 그 후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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