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500년 역사는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왜 그랬을까?”

새 연재에서 다룰 주요사항들

1. 교통은 문명이다(Transportation is Civilization)라고 하는데 교통과 문명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런 말이 나왔을까?
2, 해운적인 관점에서 본 문명서진설의 진실
3. 근대사 500년은 왜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가 되었는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는데 왜 그럴까?)
4. 근대 국가와 국제사회의 형성에서 해운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5. 근대화 초기 강대국 간의 시 파워 쟁탈전의 전개
6. 미국의 독립전쟁과 미영간의 해운경쟁의 전개
7. 산업혁명 후의 해운업의 보조정책 경쟁과 그 결과
8. 일본의 근대화와 해운의 역할
9. 1. 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해운의 역할
10. 2차 대전 후의 세계해운의 발전과정 개관

 

최 재 수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최 재 수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필자는 어디서나 처음 가서 강의하는 곳에서는 수강생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질문하나가 있다. “세계근대화 500년(콜럼버스 이후)의 역사는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하는 갑작스러운 질문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이 질문에 대한 필자가 바라는 정답을 내놓는 사람을 아직은 한사람도 못 만났다. 왜 그랬을까? 독자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를 딴 이야기를 좀하고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의 해운사와의 인연
해양대학에서 해운사라는 것을 강의하면서 여러 가지 느낀 것이 많다. 우선 그런 강의를 해야 할 때까지 나 자신이 해운의 역사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책을 읽어본 일도 없고, 해운사를 생각해본 일도 없다. 그러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나 업계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리 쉽지 않은 해양대학의 교수라는 직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굉장한 기회였고, 행운이었지만 교수사회의 특성상 다른 사람이 맡기를 싫어하는 과목의 강의는 신참이 해야 한다는 대학사회의 오랜 관행 비슷한 것에 밀려서 해운사를 내가 강의하여야 하게 되었다. 또 당시 상황으로 나는 거창하게 해운사는 잘 모르지만 해운의 발전과정 정도에 대하여는 남에게 강의할 수준은 되었으므로 나 이외에는 또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정년퇴임하신 선배교수가 맡았던 해운사라는 과목을 강의하게 되었다.


도서관과 서점을 순례하면서 해운사라는 제목이 붙었거나 오래전에 발행된 해운교과서(아무래도 옛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까)를 사모으고 꿍꿍거리면서, 일주일중 엿새를 해운사 공부해서 한 시간 강의하는 식으로 한 학기를 지내면서 해운사라는 것도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보고 연구
내가 봉직하던 한국해양대학은 교명에서 보는바와 같이 바다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대학이다. 그래서 교가에도 바다가 많이 들어간다. 그 교가 중에 장보고가 등장한다. 장보고는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제독과 함께 드물게 보는 바다와 관련된 인물이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순신 제독이 해군이라면, 장보고는 해운인 겸 제독정도였고, 해운, 무역업이 본업이고, 제독으로서의 일은 자신이 영위하는 해운, 무역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부업격인 것이었다. 


이러한 장보고이기 때문에 해양대학에서는 장보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몇몇 교수님들이 연구도 하였으나,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고, 그나마 이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정년퇴임하시자, 그것도 대가 끊길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몇몇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이 모여 장보고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어 중국과 우리나라에 있는 장보고 유적지도 찾아가 보는 등 활동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연구해보자고 해서 중국의 해운사 연구하는 교수들과 합동으로 장보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장보고는 9세기 전반기에 활동하던 사람이므로 역사의 시대구분에서는 고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활동무대가 황해를 마당으로 한 한중일 삼국을 연결하는 항로이므로 중국역사와 일본역사, 그리고 중국과 무역을 하였던 유럽과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로인 실크로드 같은 것도 파악하여야 하였고,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실크로드로 이름 지어진 고대에서 중세로 이어진 동서간의 무역은 사막길보다 오히려 바닷길로 더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중국에서는 이 무역로를 해상실크로드(Sea Silk Load)로 부르고 있다.


전술한 해운사의 강의는 주로 콜럼버스, 즉 대항해시대 이후의 해운사를 중심으로 강의하였다면, 장보고의 연구를 통하여 고대 및 중세의 해상교역로와 교통로를 어렴풋이 나마 파악하게 되었다.

 

“근대화 500년의 역사는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왜 그랬을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근대화 500년의 역사는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왜 그랬을까?”를 탐구해 보자.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콜럼버스 시대인 16세기 이후의 세계에서는 백인이 가장 선박을 잘 운항 할 줄 알았고, 그들이 용감하게 탐험항해에 나섰고, 그 탐험항해가 성공하면서 부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부는 강병을 양성하는 원천이 되었고, 강병의 호위를 받은 상선단은 무역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을 선박에 가득 태워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여 그곳을 식민지로 삼고, 원주민의 노동을 착취하여 식민지의 부를 약탈하여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것은 바로 다음의 강병으로 이어지는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선(善)순환(循環)을 계속하였다. 이 사실은 식민지로 전락하여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는 원주민들로서는 악순환(惡循環) 중의 악순환이지만 당시로서는 첨단무기인 총과 대포로 무장한 백인세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불과 200여년 후에는 세계의 땅 중 쓸만한 땅의 대부분이 백인들이 주축인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원주민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백인 강대국들 사이의 타협과 쟁탈전으로 세계가 멍들어갔던 것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
해운사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필자는 역사라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각 분야별로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분야별 역사는 크든 작든 전체역사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음악가나 미술가들이 음악발달사나 미술발달사가 세계사의 정신세계와 어떻게 링크되어 있고, 그 당시의 시대사상을 어떻게 미술이나 음악이라는 예술로 승화 시키고 표현하였는지를 기술한 출판물들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필자 자신도 해운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것을 느꼈다. 바로 전술한 근대 500년이 왜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가 되었는지 라는 의문이 필자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나, 그 결론으로, “백인이 유색인종들보다 배를 잘 운항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모두 해운이라는 각도에서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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