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범주해운과 동고동락해온 ‘협성맨’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으로 CEO된 관리통

<이상복 사장 약력>△1948년 부산출생 △67년 부산상고 졸업 △71년 부산대학 상학과 졸업 △71년 협성해운 입사 △75년 협성쉬핑 입사 △82년 협성쉬핑 감사취임 △83년 협성쉬핑이 범주해운으로 상호변경 △91년 범주해운 전무이사 △93년 공동 대표이사 부사장 △94년-2001년 범주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겸무) △2003년 한국국제해운대리점협회 부회장 겸 운영위원장, 범주해운 공동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4년 일본 고베항 한국대표 △2005년 2월 한국국제해운협회 회장 취임
<이상복 사장 약력>△1948년 부산출생 △67년 부산상고 졸업 △71년 부산대학 상학과 졸업 △71년 협성해운 입사 △75년 협성쉬핑 입사 △82년 협성쉬핑 감사취임 △83년 협성쉬핑이 범주해운으로 상호변경 △91년 범주해운 전무이사 △93년 공동 대표이사 부사장 △94년-2001년 범주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겸무) △2003년 한국국제해운대리점협회 부회장 겸 운영위원장, 범주해운 공동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4년 일본 고베항 한국대표 △2005년 2월 한국국제해운협회 회장 취임
아무리 잘난 사람도 운을 타고나야 한다는 평범한 말은 삶의 나이테가 두터워질수록 되새겨지는 진리이다. 개인이나 기업의 명운이 주변상황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음이다. “좋은 선배들을 만나 그 밑에서 원없이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운이 좋았다”고 해운인 생활을 회고한 이상복(李相福) 범주해운 사장의 말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70년대 협성해운에 입사해 회사의 성장발전 과정에서 관리부문의 핵심역할을 하며 범주해운과 35년간 동고동락해온 이상복 사장이 올해 2월 한국국제해운협회의 회장에 취임했다. 이상복 사장은 MOL의 대리점사이면서 국적선사이기도 한 범주해운(전신 협성해운)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업종의 기능에 비해 위축된 협회의 위상을 높이고 기능을 활성화해 나갈 것을 주문받고 있다.

 

상학과 출신답게 ‘관리통’ 평판
이상복 사장은 졸업후 대학의 학과장 권유로 협성해운의 사원모집에 응시했다가 그대로 협성맨이 되어 CEO자리까지 오른 인물로 상고(부산)와 상학과(부산대학) 출신답게 관리통(通)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컨테이너화물의 수출이 증가하면서 화주를 상대로 한 영업이 시작되자 항만부근에 사무실을 두었던 해운기업들이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역군의 선두에 섰던 대부분의 종합상사들이 서울에 위치해 있는 까닭에 협성도 그 시절 서울에 사무실을 갖게 되었다. 李사장은 당시 주변환경의 변화와 운명을 같이하며 범주해운의 핵심인력으로서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李사장이 입사할 당시 협성해운은 21년의 역사를 지닌 대표적인 국내 해운기업이었다. 부산항에 입항한 선박의 40%를 처리할 정도의 지위를 가졌던 협성은 극동선박과 함께 당시 외국선사들의 업무를 도맡다시피한 양대 대리점이었다. 여러 외국선사들의 대리점을 맡았다가 선사들의 업무를 하나 둘 떼어내는 과정에서 MOL도 동성쉬핑이라는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 독립된 업무를 하게 된다. 이후 동성쉬핑은 삼협해운과 협성쉬핑을 거쳐 현재 상호인 범주해운에 이르렀다.  

 

범주해운 초창기 관리기틀 실무맡아
이 과정에서 李사장은 협성해운에 입사한지 2년반만에 경리·관리부문의 실무자로서 범주해운(당시 동성쉬핑)의 서울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서울 사무실의 관리체계를 갖추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던 것. 출장자로서 서울에 파견돼 2달간 밤낮없이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이일선 사장에게 발탁돼 74년 1월 범주해운으로 적을 옮겨 상경했다. 이후 李사장은 영업을 제외한 전분야에서 범주의 조직틀은 물론 성장발전에 실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주도면밀하고 철두철미했던 이일선 사장의 밑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으면서 ‘원없이 일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회사 중요한 전기마다 빛났던 업무능력
李사장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인터뷰동안 시종 강조했다. 때론 혹독하기까지 했지만, 좋은 선배들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고 원없이 일하면서 관리총책임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들을 쌓게 되었다는 말이리라. 범주해운의 초창기부터 회사의 관리체계 구축에 관여하고 중요한 시기에 핵심기능을 담당하면서 오늘에 이른 李사장에게 운이 따랐다는 것은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준비된 자만이 운을 만났을 때 기회를 잡는 것처럼 그에게도 운을 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이 더 주목할 만하다.   


李사장의 업무능력은 회사의 중요한 전기마다 그 빛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리에서부터 기획, 관리에 이르는 조직의 질서확립에 참여했던 일이 그 첫째이며, 양양운수(77년)의 인수가 두 번째다. 오일쇼크이후 중동지역 건설붐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트레일러기사 부족현상이 일어남으로써 운송회사들이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때 하루를 둘로 쪼개어 오전에는 범주에서, 오후에는 양양운수에서 동분서주하며 일했던 기억은 힘들었지만 보람된 일로 또한 그의 중요한 이력으로 기록돼 있다.

 

‘작지만 건실하고 알찬회사’ 경영비전으로 제시
李사장은 82년 감사로 취임했고 회사는 83년 범주해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회사가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경영진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려도 신입사원을 채용해 우리사람을 키우자’며 공개채용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로 인력운영 방향을 정했다. 공채로 사원을 충원하던 초창기, 수습기간이 지나면 모두 퇴사하는 통에 회사는 고민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이직률의 원인이 급여와 비전에 있다는 것을 안 회사는 당시 종합상사보다도 높은 급여를 채택하는 한편 대리점업종에서 나아가 국적선사로서 성장한다는 경영목표를 비전으로 내세웠다. 우수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의 비전을 보다 크게 잡은 것이 범주가 국적외항운송사업을 시작한 동기였다고 李사장은 전한다.


범주는 81년 4척의 선박을 운용하는 국적선사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선주의 지위는 커진 조직에 상응할만한 수익을 안겨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국적선사로 커야하지만 대리점업무를 맡긴 오너사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사업으로 근해항로의 서비스를 선택하고 그에 주력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후 회사는 ‘작지만 건실하고 알찬 회사’ ‘재미있게 일하는 회사’를 비전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비전아래 범주해운은 81년 한일항로 정기항로를 개설한데 이어, 국적선사로는 최초로 부산-청도 간 컨테이너항로를 개설해 한중간 정기선항로를 선구적으로 열었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경영철학
李사장이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했던 또다른 사례로는 범주산업의 위기탈출을 꼽을 수 있다. 계열사인 포워더 범주산업이 어려움을 겪을 당시(94년) 대표이사를 맡아 청산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李사장은 조직을 재정비해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청산위기의 범주산업을 추스려 이익을 내는 회사로 부활시킨 것. 최소한의 직원으로 조직을 슬림화해 재기한 뒤 잠식되었던 자본금을 회복하고 잉여이익을 내며 범주산업의 위기극복을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대리점직원의 해외파견으로 세계화 필요 있다”
이상복 사장의 경영철학은 ‘기본에 충실하자’이다. 준비와 실행, 그리고 확인... 업무처리의 기본에 충실하자는 말이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탈이 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이는 철두철미하게 일을 배운 사람다운 생각이다. 그는 개인이나 사업은 수명이 있는 반면 회사는 영속할 수 있기에 CEO는 회사의 뿌리가 깊이 내리도록 하는 것이 임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신의 임기를 ‘대나무의 마디’에 비유하는 그는 자신의 임기에 맡겨진 마디를 튼실하게 하는 것을 소임으로 여긴다.


지금 범주해운이 처한 사업환경은 복잡다난하다. 대리점업은 현지화 추세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고, 근해항로의 국적선사들의 사업은 더욱 치열한 경쟁의 한 가운데 있다.


대리점의 현지화와 관련해  李사장은 “오우너가 원하는 이상의 업무수행으로 대리점을 유지할 것”이라면서 “현지화를 통해 오우너 선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관리부문이지 영업은 힘들다는 점을 이용해 최대한 대리점체제가 유지되도록 경영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현지법인체제가 되더라도 경영진의 일부가 바뀔 뿐 직원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오히려 李사장은 범주직원들의 세계화 추진 계획을 말한다. 대리점직원이 해외의 책임자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한다는 것. 이미 MOL로부터 홍콩과 싱가폴 사무소에 파견근무해줄 것을 요청받아 놓고 있다고 한다. 李사장은 “한국은 다양한 종류의 화물을 가진 나라이고, MOL 또한 모든 선종의 배를 보유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력이 세계적으로 흔치않다. 다양한 형태의 운송경험을 가진 직원이 필요한 해외로 우리직원을 내보내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작금의 트랜드하에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직원들의 앞날까지 염려하는 CEO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궁극적 경쟁력은 일반관리비 절감
한중간 컨항로의 개척자로서 동항로의 완전개방과 대비책에 대해 묻는 질문에  李사장은 서슴없이 한일항로의 상황을 반추해 답을 제시했다. 한일항로와 달리 운임경쟁력에서 중국에게 뒤지기 때문에 우리선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궁극적으로 본사의 기능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경쟁력있는 코스트를 갖기 위해서는 대동소이한 자본비와 선원비, 운항비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관리비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일본선사들이 이미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본국에는 정책결정 기능과 최소한의 관리기능만을 남기고 중국의 지사기능을 대폭 강화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본사기능의 해외이전은 한국인력의 일자리 상실이라는 큰 문제와 직결되기에 고통이 따르는 해결책이기도 하다고.

 

외국선사대표모임 협회로 끌어들여 활성화 유도
올해 2월 李사장은 한국국제해운협회의 회장에 취임했다. 외국선사들의 한국내 영업과 업무를 처리해 주는 업종의 기능에 비해 이들 업체의 권익단체인 협회의 위상이 날로 위축되는 상황이어서 李사장의 역할에 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외국의 대형선사들이 한국법인을 현지화하는 추세 속에서 협회의 명칭조차 대리점을 달아야 하는냐 마느냐는 문제가 거론되는 것만 보아도 협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에 협회의 향후 운영방안에 대해 이상복 사장에게 물었다.


그는 “회원사간의 결속을 다지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형식적이던 분과위원회와 정책위원회 등의 회의를 활성화해 협회를 활성화하려 한다”고 밝혔다. 특히 협회기능이 강화되려면 내국인법인과 외국인법인, 합작법인들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여긴다. 선사들의 주재원들 모임이 있지만 협회에 소속돼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이들 주재원 모임을 직접 컨택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임을 협회에서 흡수해 한목소리를 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 문제가 성사되면 협회의 위상제고와 해운관행의 선진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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