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바다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중국 항만견학과 문화탐방이 5월 15일에서 20일까지 4박5일의 일정으로 있었다. 지난해 같은 행사 때 일본 규슈지방을 탐방했던 나는 ‘중국은 일본과 어떤 다른 매력을 갖고 있을까’ 기대하며 여행길에 올랐다.


신·구시가지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청도와 공자의 묘가 있는 곡부, 하늘 아래 뫼인 태산을 볼 수 있는 태안, 해상왕 장보고 기념관이 있는 석도까지 대륙의 동쪽에서 서쪽, 그리고 다시 북동쪽을 가르며 중국의 곳곳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중 소상인 경제교류 현장 ‘뉴골든브리지Ⅴ’호
오후 3시. 인천항 제2국제터미널에 다다르자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가 타고 갈 위동항운의 ‘뉴골든브리지Ⅴ’호가 만선이라 그런지 출국장은 여행객들과 중국으로 돌아가는 소무역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소상인들은 자체적으로 협회를 결성해서 규율을 정하고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다. 또 1년에 한 번씩 배 안에서 투표로 협회장을 뽑기도 한다고 한다. 매년 회원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한국과 중국 간의 대규모무역 뿐만 아니라 개인 사업자들 간의 경제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출국 수속을 밟고 ‘뉴골든브리지Ⅴ’호에 승선했다. 뉴골든브리지Ⅴ의 선사인 위동페리는 한국과 중국 간의 수교가 있기 전인 1990년대 한중간 최초의 카페리항로 인천-위해 항로를 개설하고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는데 밑바탕이 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해운회사이다. 3만톤급 뉴골든브리지Ⅴ는 유럽형 구조를 갖춘 카페리선박으로 객실 내부가 넓고 로비에 앉아서 담소를 나눌만한 장소들이 많았다. 작년 일본탐방 때 탔던 객실이 비교적 좁은 일본형 여객선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오후 7시, 뉴골든브리지Ⅴ가 인천항을 떠나 갑문에 들어갔다. 갑문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있는 서해바다의 특성상 배가 출항하기 위해서 바닷물의 높이를 조절하여 배를 위로 올리거나 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항만시설이다. 일행이 탄 배는 갑문 안에 물이 차고 바깥 바다와 수위가 같아지고 나서 갑문이 열리고서 본격적으로 출항하였다.


배가 떠난 후에는 장보고에 관한 선상세미나가 있었다. 장보고는 황해를 무대로 한 무역상인으로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 기동성 있는 선단 운영으로 극동항로를 장악하고 나·당·일 3국 무역을 독점했던 인물이다. 이미 1,000년 전에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것을 내다본 위대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선상 세미나 이후에는 마술쇼로 진지했던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 한국시간 밤 10시에는 불꽃놀이로 선상의 분위기는 중국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청도 신·구 시가지 중국의 과거와 현재 공존
5월 16일 아침 7시, 아직도 배는 청도항을 향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전날 밤 심한 롤링

이 없었는지 편하게 잤던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중국 여행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내 식당에서 아침을 맛있게 먹고 짐을 정리하니 9시쯤 중국 청도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준비했다. 이 과정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중국 공안의 모습이었다. 어느 나라든지 입국장은 다소 경직되어 있지만 짙은 카키색 복장을 한 공안을 보니 중국이 우리나라와 이념이 다른 국가임이 떠올라 다소 위축되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관광버스를 타고 청도의 신시가지를 지나가면서 입국장에서 공안을 보고 경직되었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노점에서 과일을 파는 아줌마, 만두가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념은 달라도 사람들 사는 모습은 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국의 거리를 생각하면 자전거가 항상 떠올랐는데 이곳 청도 신도시에서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청도는 중국에서도 자전거를 많이 타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대신 삼륜차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마티즈 같은 디자인의 삼륜차들이 많았는데 처음 보는 삼륜차라 그런지 신기했다. 주로 택시들이 삼륜차들이었다.


청도 신도시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도시의 모습과 비슷했다. 대형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고 주상복합건물과 상점들이 많고 거리도 깨끗했다. 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시가지를 지나면서 중국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버스의 차창 밖으로 잔교가 보였다. 잔교는 1891년 독일군과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된 간이부두라고 한다. 다른 부두와 별달라 보이지 않는데 이곳이 왜 유명한 관광지인가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잔교에서 보는 전망이 청도10경 중 첫 번째라 할 만큼 전경이 뛰어나다고 한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뒤늦게 찾아왔다.


청도의 주요 관광지중 하나인 영빈관은 1897년 독일군이 침입한 후 독일 성을 모방하여 만든 건물로 전 독일 총독의 공관으로 이용되었고 이후 모택동이 여름을 보내던 휴양지로도 사용되었다. 청도에 있는 건물 중에 가장 독일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일본군의 청도주재 수비군 사령관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영빈관의 고가구들에서 거쳐 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모택동은 이곳에서 중국인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이념을 생각했겠지…….”

 

모택동의 여름 휴양지 영빈관· 소어산 주변 풍광은 유럽풍
영빈관을 지나서 소어산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어산공원은 청도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공원이었다. 영빈관과 구시가지의 독일식 건물들과 현대화된 신시가지 모습이 묘하게 어울린 것이 장관이었다. 저 멀리 잔교도 볼 수 있고 청도해변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현지인들도 이곳에서 데이트도 즐기고 쉬어 가는 곳이란다.


청도의 명소들을 돌아본 후 식사하러 갔다. 청도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한국식당이 꽤 많아 한국음식을 쉽게 먹을 수 있다. 점심과 청도의 유명한 ‘칭다오’맥주를 곁들였더니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녀서 피곤했던 몸이 이완되었는지 노곤노곤한 기분이었다. 청도 맥주가 유명한 것은 독일이 청도지역을 조차지역으로 점령했을 당시, 독일인들이 이곳에서 맥주를 제조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술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 노산의 광천수를 사용해서 칭다오맥주만의 ‘가벼우면서 톡 쏘는 맛’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이후 급발전하고 있는 청도 신항만시설을 견학하러 갔다. 청도항만시설은 세계 9위의 컨테이너항으로 세계 5위인 부산항을 맹추격하고 있는 곳이다. 현지인들은 황도항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2002년 컨테이너항으로 개발되면서 중국 북부나 일본, 미주로 가는 수출품들의 이동 거점이 되면서 짧은 기간 동안에 부산항과 중국의 천진항과 비견될 만큼 급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항만의 곳곳에 컨테이너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여러 척의 선박들이 항만에 들어와 있었다.


 항만시설들을 둘러본 후에 곡부로 이동해 궐리빈사호텔에 짐을 풀었다. 곡부는 청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공자마을이 있는 곳이다. 중국식으로 준비된 저녁을 먹었는데 일행들 중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오신 분들도 많았다.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에 대비해서 고추장과 김치를 챙긴 것이다. 그러나 한국식으로 개량된 중국음식들은 다행히 입맛에 맞아서 고추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호텔 안에 기념품 파는 곳이 있어서 둘러보러 들어갔는데 도장을 파시는 분이 있었다. 중국 여행 다녀온는 분들이 도장을 많이 사온 걸 본 터라 이모와 함께 도장을 사고 판매하신 분이 이름을 새겨주셨다. 한문으로 새겨진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도장을 판매하고 파주신 분이 우리나라로 치면 무형문화재급의 유명한 서예가이자 조각가라는 후문을 듣고서 도장을 보니 내 이름이 마치 예술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권력에 놀라고 궂은날씨로 태산 못오른 아쉬움
17일 아침, 전날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그치질 않고 있었다. 공자마을과 태안의 태산을 관광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날씨가 개기를 바라며 그날의 여정을 시작했다.


공자마을은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자손이 거주했던 공부, 공자와 그 자손의 가족묘인 공림이 중심으로 구성된 지역으로 공묘, 공부, 공림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묘는 춘추시대의 사상과 공자를 기원하는 사당인데 북경의 고궁, 태산에 있는 대묘와 함께 3대궁전 건축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공묘는 2500년 전에 세워졌다. 공묘의 거대한 고목과 닳은 돌들은 유구한 세월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공자의 묘비를 보면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새겨져 있다. 공자 사후에 왕들이 참배하러 왔다가 묘비를 보고 노여워하며 참배하지 않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후에 왕(王)자를 길게 늘여 써 간(干)자처럼 보이게 제단을 놓은 이후에야 왕이 참배하러 왔다고 한다. 공자의 묘 옆에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의 묘가 있고 공자의 앞쪽으로는 공자의 손자인 공사의 묘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묘자리인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자식을 품에 앉고 손자를 무릎에 앉힌다’는 의미라고 한다.


공부는 공자 가족들의 거처이다. 공자의 가족들이 대대로 집무를 보거나 거주하던 곳으로 송나라 때 인종황제가 공자의 46대손인 공종원에게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벼슬을 봉하고 이후부터 곡부지역을 다스리면서 1038년에 공부가 지어졌고 명대에도 증축이 계속되었으며 청대를 거쳐 현재와 같은 공무를 집행하는 곳, 가족이 거주하는 곳, 후원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 손님을 접견하는 곳 등 총 463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공자 후손들의 권력이 어느정도 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공자 후손의 묘지인 공림은 지성림이라는 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되어 10만여 그루의 나무가 있고 묘가 약 2만기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는 벌초의 개념이 없어서 묘지에 수풀이 무성한 것이 신기했다.


이날 후에 일정은 태안으로 이동해 태산을 돌아보는 것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학창시절 처음 배웠던 시조이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시조에 나오는 그 산.  태산은 중국에서도 예부터 명산으로 유명했고 중국이 지금처럼 넓지 않고 평원에 높은 산이 없던 시절, 가장 높고 신령한 산으로 추앙받던 산이라고 한다. 태산이 높다하여 가보고자 했더니 여행도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일행에게는 여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나보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치질 않고 오히려 빗발이 더욱 굵어졌다. 태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하는데 비가 오고 안개가 끼면 사고위험이 있기 때문에 운행을 할 수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일행은 태산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내일 좋은 컨디션으로 여행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일찍 청도의 숙소로 돌아가 개인 시간과 휴식을 취하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의 나라, 중국
곡부에서 청도로 돌아오는 긴 시간동안 창밖의 풍경을 실컷 관찰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원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한국에서는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 적은 있지만 지평선을 본 기억이 없다. 시선이 산에 가로 막히든지 강이 놓여 있거나 건물이 세워져 있거나 하는데 중국에서 본 평지는 시선이 미치는 끝까지 평지인 것을 보면서 중국이 거대한 대륙임을 실감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 평지와 산에 나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나라까지 황사가 말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이 모래와 흙을 잡아주면 황사가 나아질 텐데. 곳곳에 심은지 몇 년 안 되는 어린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들이 자라서 울창해질 때쯤이면 우리나라도 황사로 인한 고충을 덜겠지 생각했다.


청도에 돌아온 후, 나는 개인시간 동안 청도의 거리를 걸었다. 숙소가 청도의 신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시가지는 마치 우리나라의 테헤란로와 같은 분위기다.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밤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지인들을 많이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현장에서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18일. 며칠만의 화창한 날씨 속에서 장보고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서 석도로 향했다. 장보고는 황해를 무대로 한 무역 상인으로 한국, 중국, 일본 삼국 정사에 언급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보고 기념관 앞에는 장보고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해상을 호령하던 장보고의 기상이 느껴지는 듯하다. 기념관 안에는 해상왕 장보고의 전기적 일생을 그림과 사진, 실물로 재현해 놓았다. 기념관을 빠져나와서 법화원을 둘러보았다. 법화원은 여행자 숙소 기능을 겸하는 사찰로써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절로 장보고가 시주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 일본인 승려 엔닌이 머물렀다고 한다.

 

장보고 기념관의 커다란 엔닌동상 못마땅해
장보고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고개에 커다란 엔닌 동상이 있었던 것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신격화된 인물이라고 하는데 장보고 기념관에 장보고보다도 더 크게 자리한 엔닌의 동상이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는 이 자리를 퇴색시키는 것은 아닌가하는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다. 장보고 기념관과 법화원을 둘러보고 물 쇼를 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불상의 입과 작은 동상에서 불과 물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물쇼가 진행되는 동안 일행의 불자들이 복을 기원하며 절을 하기도 했다.


장보고 기념관 견학을 끝으로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위해 국제항만에서 출국수속을 밟았다. 일행을 한국으로 인도할 ‘뉴골든브리지Ⅱ’호에 승선했다. 짐을 정리한 후에는 뉴골든브리지Ⅱ의 브릿지를 견학했다. 브릿지는 배를 운항하고 배의 모든 것을 감독하는 지휘실 같은 곳이다. 브릿지 안에 있는 중요한 첨단 기기들의 기능을 배우고 또  뉴골든브리지Ⅱ의 1등 항해사와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중국문화탐방의 일행으로 참가했던 인천항의 도선사분께서 배에 관한 설명과 인천항의 갑문, 예인선의 역할 등을 설명해주었다.


중국 산둥성지역의 동서를 오간 여정이 빠듯하게 진행되는 동안 쌓였던 피로가 몰려와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해 시간동안 푹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한국 항계내에 다달아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서 입항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인천항과 가까워지자 뉴골든브리지Ⅱ도 점차 속력을 줄이고 멈췄다. 그러자 예인선이 여객선에 접근하여 갑문에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여객선 뒤쪽에서 붙어서 방향을 잡아갔다. 예인선은 마치 여객선의 방향키와 같은 역할을 하며 뉴골든브리지Ⅱ를 갑문 앞에 정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인천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행을 통해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둘러보는 시간이었다. 다시 중국여행을 하게 된다면 이번에 올라가지 못했던 태산을 꼭 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