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산업력이 승패를 좌우한 전쟁이었다. 開戰 초기 최초의 연합군(영국과 프랑스)의 총 GDP는 최초의 추축국(독일과 이탈리아)의 그것을 약간 상회했다(1990년 달러 가격으로 연합군 4,750억달러 對 추축국 4,000억달러). 사기(士氣)와 장갑차 및 공군력에서 우위에 있던 독일군은 1939년 9월에는 폴란드, 1940년 5월에는 프랑스를 점령했다.
그런 다음에야 영국은 독일의 경제력과 군장비의 實體를 인지했고, 영국의 생존도 매우 불확실해 보였다. 프랑스 함락 직후 영국도 거의 항복할 뻔했다. 패배주의적 야당인사였던 핼리팩스 경에 반대하여 열린 小內閣會期 동안에 보인 처칠의 능숙한 책략으로 영국은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영국은 1941년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19개월 동안 매우 힘들었다. 미국의 참전을 계기로 참전국들의 경제적 대차(貸惜)가 1조7,500억달러(미국, 영국, 소련) 對 6,000억달러(독일, 이탈리아, 일본)로 바뀌었다. 처칠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어둡고 혼란한 전략적 전망 속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히틀러의 운명은 정해졌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정해졌다. 일본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오직 압도적인 힘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 또는 ‘결정적’ 교전으로 간주된다. 비록 연합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적의 의도를 간파했지만, 전투의 결과가 미국의 승리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군은 산발적인 공격을 퍼붓던 와중에 우연히 일본군 항공모함 4대 중 3대가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즉,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가 상공에 도착한 찰나에 항공모함들은 비행갑판에 연료와 폭탄을 가득 싣고 있었다.

군사역사가 리델 하트(Liddel Hart)는 미드웨이 해전을 새로운 형태로 치러진 광범위한 海空作戰에 우연성이 작용한 예로 들고 있다. 戰史의 상식에 따르면, 미국이 미드웨이에서 패배했다면, 태평양에서 연합군의 전망은 파국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했을 것이고, 미국이 강화를 요청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세계 2차대전 美日 각 6척의 항공모함으로 전쟁 시작해
그러나 피상적일지라도 수치를 보면 전혀 달라진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6척의 대형 항공모함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에 6척 모두를 투입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4척을 잃었다. 1942년 말 미국의 항공모함 4척도 수장되었다. 렉싱턴호는 산호해에서, 와스프호는 잠수함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호넷호는 과달카날 인근에서, 요크타운 호는 미드웨이에서 침몰했다.

그래서 1942년 말 양측 각각 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중 1척은 통상 수리나 재보급을 위해 기지에 정박해 있었다. 이후 3년 동안 일본은 2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한 반면, 미국은 16척을 건조했다. 또한 일본은 14척의 소형 항공모함을 건조했지만, 미국은 118척을 건조했다(이들 대다수는 대서양에서 호송임무에 사용되었다).

1943년 말, 니미츠 장군은 12척의 항공모함으로 길버트 제도를 탈환했고, 이로써 미국은 바다와 하늘에서 절대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이 승리했더라도 양측의 항공모함 대차는 미국 9척 對 일본 5척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미국은 잃은 3척의 대형 항공모함을 6개월 안에 건조할 수 있었지만, 일본이 나머지 2척을 건조하는 데에는 각각 1년 이상 걸렸을 것이다.

 

주력함, 잠수함, 항공기에서도 비슷한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압도적 힘의 적절한 사용이 일본의 정해진 운명을 분명히 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해와 섬들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뿐만 아니라 미국의 조선소에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이처럼 항공모함의 우위와 함께 군수물자 수송을 맡았던 리버티(Liberty)와 빅토리아(Victoria) 戰標船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1) 특히 리버티는 한국해운의 출발이었던 점에서 원로 해운인들의 애환이 서린 선형이다. 그런데 전표선의 건조기간이 채 5일이 안되었다고 한다. 해운인들의 관심사로 보여 소개한다.

 

군수물자 수송에 역할한 전표선 리버티 한국해운의 출발점 ‘주목’
1939년 나치가 폴란드,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영국이 참전하였다. 영국은 나치의 잠수함 공격으로 많은 선박을 잃었다.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보급품을 운반할 상선이 필요했다. 1940년 가을 영국은 미국에 특별팀을 파견하여 60척의 화물선을 건조할 조선소를 물색했다.


마침 그때 콜로라도강의 후버(Hoover) 댐, 캘리포니아의 샤스타(Shasta) 댐, 콜롬비아강의 그랜드 쿨리(Grand Coulee) 댐 등의 대형공사를 완수한 헨리 카이저(Henry J. Kaiser, 1882-1967)2)와 손이 닿았다. 이는 카이저에게 매우 적합한 사업이었다. 어려서부터 선박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랜드 쿨리댐을 완공한 뒤 그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선박을 건조한 경험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역시 그가 계획보다 일을 빨리 완수하는 유능한 기업가임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카이저가 선박건조에 있어 초심자라는 것에 만족하였다. 루스벨트는 선박을 필요로 하는 영국을 동정하였지만, 미국보다 영국을 더 위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에 예민해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영국이 카이저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번 계약이 미국의 선박건조계획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조선프로젝트의 첫 단계는 선박을 건조하기 전에 지금껏 그가 해온 각종 건설공사와 같이 조선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면에서 같았다. 오클랜드 북쪽 이스트베이에 위치한 리치몬드의 개펄에 흙을 퍼부으려던 최초의 트랙터는 水面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나 카이저의 트럭들이 엄청난 속도로 23만㎥의 암석을 퍼부은 후 지면은 어떤 크기의 선박이라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1941년 4월 Ocean Vanguard호의 龍骨이 최초로 세워졌고 4개월 후 진수되었다. 그 사이에 카이저는 포틀랜드에 2번째 조선소를 건립했다. 1941년 5월에는 Star Ocean호의 용골이 세워졌고 역시 4개월 만에 진수되었다. 1941년 12월 일요일 아침 3시간 동안에 미국의 선박수요가 폭발했다. 워싱턴은 진주만 공습 1개월 후 병력수송선을 대량으로 주문해 왔다. 이는 1주일 후 리버티(Liberty) 화물수송선 60척의 주문으로 이어졌다.

 

카이저는 이미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고, 이제 연방정부는 얼마나 많은 선박을 얼마만에 건조할 수 있는지 만을 알고 싶어했다. 카이저를 아는 사람들은 이전부터 그가 마치 전쟁을 하듯 일해 왔다고 평했다. 이제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고 효율적이었다. 카이저의 고용담당자들은 엔지니어, 배관공, 용접공 및 기타 숙련공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더 이상 숙련공을 찾을 수 없어 비숙련공들을 속성코스로 교육시킨 후 현장에 투입했다.

 

포틀랜드조선 10일 건조기록 욕심 용골후 4일 15시간 26분후에 진수
리치몬드 및 포틀랜드 조선소 일대에 새로운 도시들이 들어섰다. 이 도시들은 조선소와 마찬가지로 24시간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두 조선소의 입지결정은 병참과도 관련이 있었으나 리치몬드와 포틀랜드를 경쟁시키려는 카이저의 의도가 있었다.
연방정부와 카이저의 도급계약에는 150일 이내에 선박을 인도하도록 명시되어 있었고, 전시상황에서도 60일이 업계표준이었다. 그러나 포틀랜드 조선소는 10일 이내에 건조하는 기록을 세우려 했다. 포틀랜드 사람들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진수식 초청장을 미리 보냈다. 배는 대통령의 박수와 국민들의 경탄 속에서 시간에 맞추어 진수되었다.


카이저는 “많은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옆에 있는 배는 용골이 세워지고 진수되기까지 열흘밖에 걸리지 않은 위대한 선물이다. 그리고 이 배는 우리의 동맹국과 우리의 군인들에게 보낼 보급품을 수송할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하느님과 미국 노동자들의 천재성이 합쳐져 일으킨 기적이다”고 기염을 토했다.

 

한 기자가 카이저에게 10일 기록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질문하자, “난 그 기록이 머지않아 깨질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기록은 리치몬드에서 깨졌다. 캘리포니아인들은 그들의 북쪽 경쟁자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5일 이내에 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한 조선전문가가 이 소식을 듣고 단언했다. “용골을 찾는 데만 5일은 걸릴거요” 배가 북적거리는 노동자로 뒤덮여 용골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찾아냈다. 이 경주의 절정에 있었던 한 사람이 말하기를, “볼 만하더군요. 한 덩어리의 판금공, 용접공, 목수들, 10명의 목수들이 한 줄로 서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이란....”

 

용골이 세워진 후 정확히 4일 15시간 26분 후에 배는 수로를 통해 샌프란시스코만에 진수되었다. 기록갱신은 어느 정도까지는 戰時 사기증진의 선전효과가 있었다. 이런 주목받는 행위를 빼더라도 카이저 조선소의 성과는 놀라웠다. 카이저의 리치몬드 및 포틀랜드 조선소를 합하면 리버티(Liberty), 빅토리(Victory) 화물수송선, 다양한 종류의 병력수송선, 상륙정, 유조선, 항공모함 호위함을 포함해 1,490척의 배를 건조하였다. 1941년의 뒤늦은 출발을 고려하더라도 전시에 카이저는 하루 1척 이상의 배를 건조한 것이다.

 

전쟁은 카이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처칠은 “미국과 영국 사이를 끝없이 오간 리버티 수송선의 행렬이 없었더라면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것이다”고 칭찬했고, 또 다른 영국 관료는 “카이저는 말 그대로 산을 움직일 수 있는 신념을 가졌다. 회상해 보면 확실히 그 당시 상황으로는 그의 배가 없었더라면 영국은 항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카이저와 개인적인 안면은 없었으나 그의 공헌을 높이 샀다. ‘미국의 전시 생산능력에게’라고 건배했고, “그가 없었더라면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전후 승리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전쟁이 카이저에게 富를 얼마나 가져다 주었는지가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1946년도 연방회계국의 계산에 의하면 카이저는 단지 250만달러의 투자로 1억2,9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회계국의 자문관은 카이저 및 비슷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시와 평시를 통틀어 미국자본의 역사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미미한 위험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두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

 

카이저의 회계사들은 각자의 數値를 발표했는데, 황당하게도 몇몇은 카이저가 전시물자 납품으로 인해 1,86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고 결론지었다. 카이저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침묵을 지켰다. 실은 그마저도 선박건조에서 생긴 정확한 이익을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종반에 그의 비용계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철강과 같은 선박건조에 필요한 물자를 자신이 소유한 제철소에서 구매했기 때문이다. 또 그와 같은 공장들은 연방정부가 다른 전시 재정지출과 마찬가지로 막연하게 서명해 준 것이었다.

 

용접기술로 급조한 전표선 4,700척 사고 잇달아 1/4이 원래 모습 파괴
캘리포니아 남부에 제철소를 세운다 하여 카이저가 재건금융기업에 1억달러를 요청했을 때 그는 철강에 대해 무지했다. 터보블로워(turbo-b1ower)의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자 카이저는 경솔하게 회의론자들에게 직접 만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는 터보블로워가 선박에 사용되는 터빈블로워(turbin-blower)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기에 정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었으나 결국 그는 자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무지가 명백해지기 전에 우격다짐으로 진짜 터보블로워를 만들어 냈다.
선박건조의 부수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戰後에는 主業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선박에 대한 수요가 사라졌다. 전시에 건조했던 수천 척이 차후 오랜 기간 시장을 포화시킬 터였다. 그러나 철강과 같은 기초소재는 진주만 이후 모자랐던 소비재와 같은 다양한 생산품에 사용될 수 있었다.


한편 그렇게 급조된 배가 완전할 수가 없다. 용접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전표선은 대략 4,700척에 달했다. 하지만 이 배들은 1942-1946년에 걸쳐 취항하자마자 사고를 계속 일으켰다. 선체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파괴된 것이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1,200척이나 되었다. 그 중 230척은 파괴로 인해 침몰하거나 사용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선체가 앞뒤로 두 동강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사고는 북쪽 바다에서 주로 寒冷期에 많이 발생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대규모 조사가 실시되었고 용접결함과 저온취성(低溫脆性)이 그 이유로 밝혀졌다. 특히 온도가 낮아지면 금속 자체가 부서지는 저온취성이 주원인으로 분석되었다. 이 배는 강판을 용접하여 접합시켰기 때문에 종래의 목재선처럼 리벳 이음매와 어긋나는 선체 분열을 리벳구멍으로 막을 수 없었다.

 

우리가 쇠로 만드는 대부분의 것들은 실제로는 철과 탄소의 합금인 鋼을 사용한다. 이러한 강철은 강도가 높은데, 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질 때 신축함으로써 외부의 힘을 분산시켜 강도를 유지한다. 그런데 이 신축성은 섭씨 0도에 이르면 완전히 없어진다. 이 상태에서 鋼에 큰 힘이 가해지면 힘을 분산시키지 못하고, 鋼이 뚝뚝 끊어지게 되는데 이를 저온취성이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 한겨울 스키장에서 리프트가 뚝뚝 부러지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물론 저온취성 때문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 이면에는 리버티선에서 얻은 교훈이 작용했다. 리버티선이 사고를 일으킬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저온취성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그러나 사고가 계속 일어나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재질과 가공법 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鋼을 사용하는 기술과 용접하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 리버티선(Liberty Ship)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은 미국 상선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미국 해사위원회가 대량으로 건조한 전시표준선(戰時標準船)이다. 총톤수 7,185gt, 만재중량 10,920dwt, 길이 134.7m, 폭 17.1m, 속력 10-11노트, 정원 44명이다. 최소의 건조비로 신속한 건조가 가능하고, 운항조작이 비교적 간단한 것을 목표로, 1941년 이후 4,700척 정도가 건조되어 전시물자를 수송하였다. 전후에는 일부가 외국에 매각되었고, 허드슨강에 매어두어 창고 대신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개량한 전시표준선으로 빅토리아(Victoria) 형도 있다.
2) 120년전의 미국의 산업수준은 60-70년대 한국의 산업수준과 비슷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카이저가 한국의 故 정주영 회장과 매우 유사한 기업가라는 점이다. 둘다 赤手空拳에서 거만의 기업왕국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특히 건설로 시작하여 조선, 시멘트, 철강, 알루미늄 등 중화학공업에서 콩글러머리트를 이룩한 점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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