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다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가질까? 아마도 평소의 바다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지난 연평 해전, 최근의 연평도 포격, 유조선 사고로 인한 기름 유출, 태풍의 접근, 하절기에 휴가가기 위한 준비, 뭐 그런 정도일 것이다. 진부하지만 그래도 바다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타국과 소통하며 국부를 증강하고 패권을 쥐는 계기로 삼는 사람과 장애물로 간주하여 방치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결과는 한 쪽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여 패권을 쟁취하고 다른 한 쪽은 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장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역사의 메인은 언제나 농경문화권 중심에 기반을 둔 생산과 소비, 농민과 지배계층 간의 다툼, 지역 간, 대륙 간의 평화와 다툼에서 일어나는 소멸과 발전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에 관하여는, 문제가 발생하면 파급효과가 큰데도 전문지식이 부족하여 마땅한 대응수단도 제대로 찾기 힘든 골치만 아픈 장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방치, 소극적인 대처, 또는 아예 문제의 소지를 없애버리는 방법으로 대처해왔다. 이러한 발상은 쇄국정책, 고려말/조선초기부터 실시하여온 공도(空島), 해금(海禁)정책, 문화적 홀대, 국가조직이나 군 조직에서의 비중감소 등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역사를 잘 살펴보면 이런 홀대가 시작되던 때부터 그 조직의 흥망성쇠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를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500년 시점에서 중국의 총생산은 618억 달러, 인도는 605억 달러로 서유럽의 총생산 441억 달러를 훨씬 뛰어넘었고 1820년대 말까지는 중국과 인도의 총생산이 3,400억 달러로 전 세계 총생산의 50%를 차지하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경제중심과 패권은 점차로 서구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가, 2009년 세계 GDP의 총 규모 58조 1300억 달러 중에 1위인 미국이 14조 3천억 달러로 일본과 중국은 그의 3분지 1에도 못 미친다. 중국은 불과 200년 만에 세계 GDP의 10%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 추락했다. 그 원인은 근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도양 패권자가 바뀌면서 부터이다. 인도양은 오랫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해상교역의 중심무대였다. 아시아와 중동지역, 아프리카 모두 인도양을 통하여 교역하였고 서구유럽 또한 중동지역의 낙타 대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누가 이 지역을 차지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중국은 명나라시대 정화선단의 원정을 기화로 이 지역의 패권을 쥘 수 있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정화선단의 훌륭한 바다 교역 업적과 기록을 전부 말살하고 인도양 곳곳의 거점과 네트위크를 없애 버렸다. 그리고 바다 세력을 홀대하며 강력한 해금(海禁)정책을 써 지대물박(地大物博-중국의 땅은 거대하고 물자는 풍부하다는 뜻)만을 신봉한 채 대륙경영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도양은 국가에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군함적 상선대가 희망봉을 돌아 접근한 유럽인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상술에 폭력성과 잔인성으로 무장한 이들은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게 한 것이 중국이 세계의 큰 흐름에서 뒤 처지게 된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중국의 큰 흐름과 다를 바 없다. 신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백제와 발해이후 바다세력을 잘 이용하여 국력을 키워 대륙의 국가와 거의 대등한 힘을 키웠던 고려는 몽골에 맞서 수십 년을 버텼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원나라는 뱃사람이라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한반도 연안의 섬들을 바다세력의 본거지로 보고 섬 주민을 모두 육지로 옮겨 공도로 만들고 해상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강력한 공도(空島), 해금(海禁)정책을 폈다. 이런 정책은 원을 멸망시키고 명을 세운 주원장도 바다세력을 두려워하여 조선에도 강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 유민 이정기, 신라의 장보고, 후삼국시대의 수달장군 능창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바다세력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한때 한반도 인근 섬들을 근거지로 하여 남지나 및 동남아 지역을 활주하며 국부의 중심이 되었던 바다세력은 험난한 항로를 지키는 위대한 전사, 귀한 세력에서 육지에서는 할 일이 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여 육지 사람들이 뱃놈이라고 홀대해 불렀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적인 홀대로 이어지고 국가조직에서도 하부 비주류 세력으로 대접되어, 군 조직에서 또한 푸대접을 받게 된다. 그 이후의 고려와 조선은 바다로 향한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수동적으로 대처하다 찬란한 과거를 지키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 갔다. 무려 600여 년 동안 지속되던 공도 정책이 폐지된 것은 고종때다.  당시 조선은 이미 병들 대로 병들어 바다에 대한 기상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었다. 이후 이어지는 일제침략, 남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반 강제적으로 대륙지향의 기상이 차단되어 생긴 해양세력과의 활발한 교류로 우리는 과거 세계를 주름잡던 인도와 중국을 넘어 오늘날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해양세력인 미, 일, 서구와 자웅을 겨룰만한 위치로 가고 있다. 


늦었지만 중국은 바다의 중요성에 눈을 떠 국가적 차원에서 해상권과 해군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주도 일부, 민(民) 주도 일부로 그나마 해상권의 패권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 아니되는 것은 아무리 해상권이 발달하여 국부증대나 국력증대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기상이 지도자의 의지와 국민적 공감대가 일치하여 굳은 의지로 무장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적 공감대는 국민 스스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매우 오랜 세월과 엄청난 수업료를 지급하는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다. 여기서 지도자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국가의 지도자가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하여 관심을 갖고 챙기거나, 전문가집단의 의견을 현명하게 수렴하여 장기적으로 대처하면 빠른 시간에 국민적 공감대는 형성된다. 육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의 현실적인 관심사가 바다관련이 아니기 때문에 바다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조치는 부지불식간에 일어 날 수 있다. 


이러한 예를 몇 가지 찾아보면, 해양수산부가 비중 축소로 국토해양부에 합병된 일이다. 그로 인해 해양이라는 이름은 자주 거론되지만 실질적인 대표 수장이 없는 비주류로 전락되었다. 국민적 공감대 구축이나 주요정책 추진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비주류로 전락되어 있다.


연평 해전과 연평도 포격 사건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해 5도의 중요성과 해상 방위력의 증가는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것인데 우리의 월등한 군사력과 국민총생산만 믿고 안이한 평화무드에 빠져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오랫동안 평화지상주위 지도자의 지도력 아래서 해상영토 방어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국민적 공감대와 육군위주의 비전문가 집단의 조직 지배구조가 만들어 놓은 현상에 당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제라도 지도자와 국민들이 서해영토의 전략적 가치와 열악한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최신 무기와 함정을 갖춘 청(淸)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가 그보다 못한 장비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중국은 이것을 잊지 않으려고 옛 해군 사령부 자리에 북양함대 기함 정원(定遠)의 거대한 닻을 복제해 두었다. 정원은 세계 최신예, 최강의 전함이었다. 그러나 허망하게 침몰했다. 당시 청나라 서태후의 별장 건설에 해군 예산이 유용됐다.  패배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다. 리더십의 무기력, 지휘관의 무능, 전투의지의 결핍이 진짜 이유였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자는 다르게 대응했다. 일본의 지도층이 단결했다. 그들의 국가적 야심의 실천 의지가 확고하였고 잘 공감시켰다. 그래서 국가적 애국심은 확고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단결력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의지와 애국심에서 학습한 바 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군은 왜군에게 패배했고 한양(현재 서울)까지 빼앗겼다. 무능한 왕과 관료와는 달리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병력, 물자, 국민총생산 뭐 하나 일본과 비교하여 우세 할 수 없었던 조선 수군은 오직 수군통제사의 지도력과 군사들의 의지 하나로 전쟁에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명량해전 때는 겨우 12척의 군함으로 133척의 일본 군함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는 엄청난 수의 일본 배와 싸우게 된 이순신 장군은.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리라)"이라는 결연한 의지로 수군을 독려하여 대승을 거두고 만다.


시스템의 문제 예를 하나 들자, 조선 초기 태종대인 140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婚日疆理歷代國都之圖)는 아프리카, 유럽, 아라비아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 같은 시대의 유럽지도와 비교하여 훨씬 정확도가 있어서 당시 조선의 지리지식이 결코 만만치 않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런 국지적인 지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인 하멜 일행이 14년 동안 조선에 머무는 동안 조선이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조선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간 하멜 일행을 나가사키 지사가 심문했다. 아주 체계인 질문 54개로 하루 만에 매우 많은 정보를 얻어낸다. “국적, 출발지, 난파 지점, 배의 대포 수, 배의 적하물, 서울로 압송된 연유 등은 물론 조선의 산물,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 세세한 정보들까지 수집하였다. 체계적이고 세련된 접근방식을 갖지 못한 조선의 14년은 일본의 단 하루 만도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일본 관리 한 사람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의 문제이다.


즉 역사는 매우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바다는 절대로 장애물로 간주하여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다는 어렵고 멀리 있다. 그리고 그대로 두어도 단기간에는 별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 일 없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과거 위정자들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 세기 후에 국가의 위상이 바뀌거나 후손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지도자가 관심을 갖거나 적어도 전문가 집단에 의한 시스템과 조직의 효율적인 관리여건을 만들어 주어 장기적으로 유지하면서 국민적인 공감대를 지속하여 대륙에서 얻을 수 없는 엄청난 부와 힘을 누려야한다.


만약에 지도자들이 바다에 대하여 제대로 관리하였다면 과거의 조선의 시행착오, 1800, 1900년대의 빈곤, 일제 침략, 625전쟁, 서해에서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가능했을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가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던지 아니면 전문가그룹에게 힘을 실어주어 바다관련 행정조직과 해군력의 비중을 확대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고히 하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신 희 철 캡틴석유화학(주) 대표이사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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