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범선시대의 재산보호 중심의 안전제도

 모험항해와 모험대차
근대화 초기 탐험항해시대의 무역과 항해는 바로 모험이었다. 우선 사용하는 선박이 목조범선이

었기 때문에 강제기선과는 달리 감항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선박으로서 천재지변 등 불가항력적인 해난사고가 비일비재로 일어났고, 해도나 지리적인 지식이 완비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해상에서 길을 잃고 헤맬 가능성도 오늘날과 달리 매우 높았다. 게다가 교역지역의대부분이 낮선 곳이었기 때문에 국제법 체계가 잡힌 것도 아니고, 교역질서가 굳어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19세기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구상의 많은 지역이 교역을 공개적으로 개방하는 것보다 오히려 폐쇄하고 쇄국정책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교역을 개방하는 경우에도 현지인의 텃세가 매우 세기 때문에 외국사람인 무역업자나 선주로서는 그에 따른 위험이 컸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원양지역으로 출항하는 선박이 출항하였던 모항에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아니하였다.


그 대신에  해외교역이 매우 어렵고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여 이익도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고대 및 중세를 통하여 해외교역은 지금의 보험 기능과 금융 기능을 합한 모험조합을 결성하여 이 조합과 무역업자 또는 선장과 모험항해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여 수행하였다. 이 계약을 모험대차라고 한다. 모험대차의 투자자는 금융 기능과 보험 기능을 겸한다. 즉 모험조합은 출자자로부터 모험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공모한다. 그리고 이 자금을  무역업자나 선장에게 투자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내용은 투자대상이 된 무역이나 항해를 수행하여 이것이 성공할 경우, 수익금 중에서 사전에 약정된 바에 따라 모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요된 비용과 투자액을 공제한다. 그리고 잔여액을 당해모험을 수행한 사람과 투자조합 간에 역시 사전에 약정된 비율에 따라 배분한다. 모험조합은 이렇게 배정된 수익금을 투자비율에 따라 공정하게 투자자에게 배분한다. 만약 투자대상이 된 모험항해가 실패로 끝날 경우, 투자자들은 원금까지 손해를 본다. 극단적인 경우 투자액을 단 한 푼도 못 건지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물론 항해가 성공을 거둘 경우, 높은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모험조합은 올 오아 낫씽(all or nothing)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이 모험조합이나 모험항해와 관련된 계약이 매우 엄격하였고 아주 사소한 사항까지 계약에 모두 포함시키고 이를 준수하도록 하였다. 만약 계약을 위반하거나 모험결과의 수익을 속이거나 할 경우, 목숨까지 오가는 엄격한 벌칙도 뒤따랐다.


이러한 모험항해와 모험대차는 유럽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성행하였다. 특히 유럽에서는 지중해, 발틱해, 북해, 그리고 영불해협 등 해역에 따라 이러한 모험조합들이 성행하였다. 한자동맹이나 베니스와 같은 해양국가의 무역도 모두 이 방식을 기본으로 하여 수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험조합에 투자할 수 있거나 이러한 모함항해를 수행하는 선장이나 무역상인이 그 사회의 지도 계급을 형성하였다.

 

금융과 보험의 분업
이러한 모험조합에 의한 해외교역은 컬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그리고 마젤란에 의하여 촉발된 대항해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국제교역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모험조합이 수행하던 금융기능과 보험기능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 의한 동인도회사를 비롯한 많은 원양항해와 무역을 담당하는 특허회사들이 출현하였고, 뒤이어 네덜란드에서 암스델담은행이 개설되어 무역에 대한 금융지원을 개시한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부터로 짐작된다.


오늘날의 보험과 같은 보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88년에 에드워드 로이즈가 운영하던 커피숍에 관한 것이다. 이 커피숍에는 해외교역과 관련된 보험을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보험을 팔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로이드는 이들에게 커피를 팔면서 펜과 잉크 및 종이 등을 팔고, 동시에 바로 인접한 부두에서 얻을 수 있는 해외교역과 관련된 약간의 정보들을 수집하여 고객들에게 서비스 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로이즈 보험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보험은 오늘날과 같은 회사체제의 보험이 아니고 상인들이 특정한 무역을 놓고, 보험을 팔고 사는 형태였다. 이러한 개인별 보험의 판매방식이 발전되어 로이즈 보험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지금도 로이즈 보험은 다수의 보험 인수인들의 집합체인 독특한 보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보험의 발전과 선급제도
이 당시의 보험 대상은 특정한 항해나 무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투입된 선박과 무역상품이었다. 지금도 해상보험의 대상은 선박과 선박에 적재된 상품이 주류이고, 그 외의 손실에 대한 보상은 P&I 보험으로 따로 발전한 것만 보아도 그 당시의 보호대상이 선박과 재화에 한정되었고, 인명도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체와 재화에 대한 보험제도가 발달하면서 무역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무역업자나 선주 등 그 교역으로부터 이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항해가 실패할 경우, 보험에서 손해를 커버해주는 제도를 악용하여 무리한 항해를 강행하여 해난사고가 빈발하게된 것이다. 특히 항해를 하기 어려운 선박을 무리하게 출항시켰다가 다행히 성공을 하면 큰 이익을 얻고, 실패하였을 경우에도 보험금으로 손실을 보전 받게 되자 선주 등 항해 관련자들이 선박의 안전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보험제도의 발전이 해난사고를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험금을 노린 고의적인 해난사고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험업자들도 이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들도 자위책을 강구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보험을 인수하기 전에 보험대상 선박을 검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책정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생겨난 것이 지금도 해상안전에 관한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선급제도다. 세계 최초의 선급은 1760년에 로이즈 보험업자들에 의하여 설립된 로이즈 선급이었다. 로이즈 선급은 선박을 검사하여 등급을 사정하고, 이 등급표에 따라 보험료가 차등 책정되게 되었다. 이 로이즈 선급은 그 후 너무 보험업자의 이익에만 치중한다는 이유로 선주들끼리 따로 선급을 설립하는 사태까지 왔으나, 양측이 타협하여 선주와 보험업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현재의 선급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보험 제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안전제도의 특징은 선급검사를 통하여 선박의 감항성을 검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사고의 예방을 통한 해상안전의 확보 보다는 해난사고가 난 후의 사후처리라고 할 수 있는 손실에 대한 보상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고, 보험이 커버하는 위험은 선체와 여기에 적재된 화물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인명이나 다른 손실에 대한 보상은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기술수준으로서는 해난사고의 예방에 대한 기술이 매우 미숙하였고, 인명사고에 대한 보상까지 할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사회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해난사고로 인하여 사상(死傷)되는 사람이 여객보다는 주로 선원과 무역상인이었고, 지금과 같은 일반 여행객이 많지 아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 최초의 안전에 대한 관여 : 만재흘수선제도
이 때까지만 해도 해상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어디까지나 선주와 무역업자, 그리고 그들로부터 보험을 인수하는 보험자간의 관계로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항구에 따라 너무 과적하는 것을 단속하거나 세금징수 등을 위하여 정부관계기관이 관여하기도 하였으나, 안전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항해에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의 문제로서 정부 공권력이 개입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해당사자의 관계는 운송계약 보험계약 고용계약(선주와 선원)등으로 연계되어 있는 사법(私法)상의 문제였다. 공권력이 선박의 안전항해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법한 것은 1854년의 영국 상선법이 가장 최초의 것이다. 이 법은 선박의 안전 특히 해난의 구조에 관하여 주로 규정하였다.


그 후 1876년에는 영국의 상선법이 개정되어 만재흘수선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가 시행되게 된 것은 과적으로 발생하는 해난사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과적에 관하여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선박은 많이 적재할수록 운임수입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위험도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선주는 그 선박이 적재 가능한 한도까지 화물을 적재하는 운송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양만 적재해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으나, 당시는 선장과 선원들이 정상 운송 외에 상당량의 화물을 싣고 가서 현지에서 팔고 다시 현지에서 상품을 사 가지고 돌아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가 성행할 때였다. 그 보따리 장사용 화물이 상당량에 달한다. 선주가 만선계약을 한데다가 다시 선장과 선원의 화물이 추가되니 자연스럽게 과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항구에서 상선이 출항할 때 관리들이 과적을 단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적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법으로 어디까지 적재할 수 있고, 더 이상 적재할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하기로 한 것이 만재흘수선제도다. 이 제도는 영국의 정치가 플림솔에 의하여 고안되었고, 법제화되었기 때문에 플림솔 마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플림솔 마크는 각 계절별 해역에 따라 눈금을 세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계 바다의 해상상태가 각 계절별 지역별로 상이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따라 적재량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만재흘수선이 선주의 운항수지와 직결되는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제도에 의하여 선박의 안전은 많이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에 의하여 여객이나 승무원의 인명 안전도 향상되었으나, 이러한 효과는 부수적인 것일 뿐 처음부터 인명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P&I 보험 - 해사법 체제의 정비와 선주책임의 확대와 그 대책 -
국제무역과 해상운송제도가 발달하면서 그간 당사자간의 계약에 맡겨서, 오랜 관습에 의하여 형성된 관행을 중심으로 운영하던 해사법 체계가 점진적으로 정비되어 갔고, 이에 따라 그때까지 거의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던 새로운 선주 책임 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 대체로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854년의 영국 상선법에 의한 선주 책임의 강화였다. 그러한 선주의 책임에 대하여 기존의 선박과 재화(載貨)만을 대상으로 한 보험제도에서는 선주의 이러한 위험을 커버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 생겨난 보험제도가 바로 P&I 보험이다. P&I보험은 선주상호보험조합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보험이 선주가 새로 맞게 된 위험을 담보해주지 아니하자 선주 스스로가 조합을 형성하여 여기서 이러한 새로운 위험을 담보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해사법체제의 정비와 P&I보험 제도의 발달로 인하여 해난사고에 의한 손실에 대한 보상범위는 매우 넓어졌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민사법상의 책임과 관련된 것이고 공법상의 책임은 아니었다.

 

강제기선의 출현과 해상교통의 획기적인 발달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강제기선이 세계 해운 시장에 등장하였고, 이것이 급속하게 확산되어갔다. 목조범선시대의 일기불순에 의한 사고가 전천후 항해가 가능해지고, 선체의 강도도 목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에 옛날에 불가항력이었던 사고들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이를 믿고 안심하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종전에는 선박을 운항하는 선원이나, 이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는 상인, 그리고 아주 특수한 임무를 가진 사람 등 제한된 사람만이 선박에 승선하여 장거리 여행을 하였고, 오늘 날과 같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여행이란 모험을 좋아하는 소수의 특수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었다. 운송이 자연스럽게 화물위주였다. 그러나 강제기선이 국제항로에 정착하면서 이것이 역전되었다. 여객, 특히 여가를 즐기기 위한 여객과 이민이 급증하게 되자 이 수요를 겨냥하여 많은 여객선이 건조되었다. 여객선은 부유층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고, 호화스럽게 건조하였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여객선의 경향을 본다면 사치의 경쟁이라고 할 만큼 호화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안전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목조범선에 비하여 월등하게 향상된 안전도만 믿고 더 이상 사고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행인지 불행인지 잡다한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인이 깜짝 놀랄만한 사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해상교통의 태평성대였다고나 할까? 


사실 여객운송이 발전하고 여객선이 대형화된다면 당연히 해상안전에서도 우선 보호 대상이 선박이나 화물에서 여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전 불감증 때문이었는지 이 분야에 대한 제도적인 발전은 거의 없었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심지어는 국제사회까지도 막연한 불안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대처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깜짝 놀랄만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그때 가서야 화들짝 놀라서 대책을 서둔다. 해상안전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여, 대서양 바다 깊숙이 침몰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해상안전문제가 클로즈업되게 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SOLAS로 알려진 해상인명안전협약이 채택 발효되었고, IMCO라는 해사전문국제기구가 탄생하였고, SOS로 알려진 구조신호제도가 의무화되었다.


1967년 토리케년호가 좌초하여 해양을 대규모로 오염시키자 해양환경문제가 크게 제기되었고, 해상안전문제와 해양환경보존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크게 부상하게 되었다. 그 후의 새로운 안전조치들도 대형사고가 나고 나서야 서둘러 그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내리기를 거듭하였다.


해난사고는 아니지만 인재의 하나인 9. 11 테러를 맞고 나서야 선박과 항만을 국제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선박과 항만에 대한 국제적 보안대책인 ISPS가 채택 시행되는 식이다.

사전에 대비하였다면 막을 수 있었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꼭 뒷북을 치는 것은 인간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지만 다시 소를 키우려면 당연히 외양간을 고처야 한다. 이런 것은 보면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속담은 “소를 잃어야 외양간을 고친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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