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와 해운의 역할

중상주의와 부국강병
한때 유럽을 지배하였던 정치경제사상인 중상주의와 해운업에 관하여 여기 검토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15세기 초에 포르투갈의 왕자 헨리에 의하여 시작된 탐험항해가 결실을 맺어 대항해시대로 연결된 이후 500년 동안, 세계사의 큰 흐름을 보면 “백인지배, 유색인종 피지배”의 역사였다. 그들이 어떻게 500년 동안 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들이 다른 대륙 사람들보다 선박을 가지고 항해하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잘 하였던 것은 선박 조종만이 아니다. 전투력이라는 면에서도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화약을 이용한 총과 대포의 개발이었음은 전술하였다. 선박을 만드는 조선 기술과 항해술, 그리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유럽인들을 당할 수 있는 세력은 당시 지구상에는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었고, 유럽이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사는 백인들이 지구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지구 전체로 보아서는 유럽 백인의 절대 우세와 유색 인종의 절대 열세가 지구의 대세였으나, 유럽이라는 내부에서 볼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여기서 이기는 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패퇴하는 자는 유럽 사회에서도 주변으로 밀려난다. 비슷한 문화, 비슷한 생각, 그리고 비슷한 기술을 가진 국가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이 경쟁은 유럽과 지구의 여타 지역과의 무역과 식민(植民)의 권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었다. 즉 무역의 이권을 놓고 하는 경쟁이었다. 중상주의(重商主義)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이 중상주의 정책은 지금의 경제 정책이 지향하는 바와 같은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왕실로 대표되는 국가 재정의 부강 즉 국부(國富)였다. 


지금과는 달리 무역은 국력, 특히 군사력이 강해야만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단순한 무역이란 아주 제한적인 무역일 수밖에 없고, 보다 이익이 많이 나는 무역은 식민지 개척과 약탈을 겸한 무역이 아니면 안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지 저항 세력과 투쟁하기도 해야 하였지만 서로 보다 좋은 무역 상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국가간에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서양 항로와 아세아 항로의 독점이래 영국과 스페인간의 경쟁, 네덜란드의 독립,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무역, 운송권을 놓고 벌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쟁 등이다. 이러한 열강 간의 세계 무역 대권을 놓고 벌리는 경쟁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가 1차 및 2차 세계 대전이다.
국가간의 경쟁은 궁극에는 전쟁이라는 최후 수단으로 우열을 가린다. 그러므로 이것은 옳고 그르고의 결과가 아니라 누가 힘이 센가의 결과다. 그러므로 이 경쟁에서 살아남고,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국력, 그것도 무력이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그리고 무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당시의 중상주의 정치경제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부국의 원천으로서 식민 통상 항해
우선 급한 것은 경제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식민, 통상, 항해를 통하여 이것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인간이 원시 수렵생활에서 벗어나 농경사회를 이룩하였을 때 부의 원천은 농업이었다. 토지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로 이어지면서 항상 정치 지도자들은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重農)사상을 강조하였고, 쉽게 돈을 벌 수 있어 자칫 게을러지기 쉬운 상업을 경멸하였다. 유교사상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계급인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보는바와 같이 농업은 공업이나 상업보다 훨씬 중시되어 사(士)로 분류된 지배계급 다음의 서열에 있었다. 상(商)은 최하위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에도 상인들의 실질적인 사회적 신분은 지배계급 다음인 제2급인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업을 통하여 한 사회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 시대, 부국의 원천은 무역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단순하게 무역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식민 활동이다. 다시 말하면 무역을 할 수 있는 지역을 자기 구미에 맞는 무역을 하기 좋은 상태로 발전시키는 작업이다. 컬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과 같은 탐험 항해가들의 항해와 무역은 단순히 현지 산물을 있는 그대로 교역함으로서 충분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 교역이 안 될 경우, 약탈도 서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교역이 잦아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교역이나 약탈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자, 식민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교역상대지역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고, 그 곳에 본국의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이들 이주민들은 현지를 개척하고, 원주민들을 이용하여 본국과 교역을 할 수 있는 무역상품을 생산한다. 양모나 면화 등 공업 원료를 생산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고, 금은광을 개발하여 화폐의 원료를 조달하거나 설탕이나 연초를 재배하기도 하였다. 수입 원자재를 가공하여 다시 식민지에 완제품을 수출하여 차익을 챙기는 방식이 당시의 무역의 전형이었다. 


이렇게 식민지가 개척되면 이 식민지에 대한 무역을 그 종주국이 독점한다. 그 과정에서 영국이 네덜란드의 무역과 해운을 억지하기 위하여 시행하였던 항해법과 같은 자국화자국선 우선적취제도가 중요한 기능을 한다. 결과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면 이 식민지와의 무역과 운송은 종주국의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통상, 항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초의 식민지는 주로 미 대륙에 생겼다. 뉴잉글랜드, 버지니아, 메릴랜드, 카로라이나, 그리고 서인도제도의 일부가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현지 정권이나 토착 세력이 강력하여 정치적으로 완전히 지배하기 어려운 아시아지역에서는 우선 무역거점을 마련하여 상관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전술한 화란과 영국의 동인도회사 등 특허회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들은 국가 공권력을 폭 넓게 위임받아 이 공권력과 무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다. 세계의 지도는 유럽과 그들이 만든 식민지로 채워져갔고 다른 지역들이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식민지개척과 강병
이상과 같은 중상주의 실현의 첫 단계인 식민지 개척은 아무리 그 당시라고 해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이 거셌다. 이 저항을 억제하기 위하여서는 저항을 억제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하다. 바로 강병(强兵)이 필요한 이유다. 강병을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부국과 강병은 동전의 양면이 되고,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이 선후를 가리기 어렵다. 이때 필요한 강병은 해군이 주력이 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전쟁이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무력 자체가 본국을 떠나 그곳까지 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대형 고성능의 선박이 필요하다. 또 이 선박이 충분히 무장하고 적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병력이 승선하여야 한다. 이것이 해군력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국가무력의 중심이 육군에서 해군으로 이동하게 된다.


해군의 유지에는 강력한 군함으로 구성되는 함대가 필요하다. 군함은 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국가로서도 이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경비가 소요된다. 이 자금을 국민들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무리다. 가장 손 쉬운 방법은 현지에서 벌어서 조달하는 것이다. 식민지를 개척하여 여기와 통상하고 항해하여 얻는 이익으로 강병을 양성하여 다시 다른 식민지를 차례로 개척해 나가는 방식이다. 식민, 통상, 항해를 통하여 부국의 원천을 만들고, 여기서 축적된 국부로 강병을 만들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여기서 다시 새로운 국부를 창출하여 강병을 더 양성한다. 부국과 강병의 선순환이다.

 

 물론 이의 역전도 있을 수 있다. 바로 네덜란드가 그 좋은 예이다. 처음에는 통상과 항해를 통하여 국부를 만들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강병을 키우고, 식민지도 확충하는 선순환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이를 시기한 영국과의 3차례의 전쟁의 결과 국력이 쇠퇴하여 강병을 유지할 능력이 약화되었다. 이것은 바로 네덜란드의 식민지의 상실과 축소, 통상과 항해의 축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반면에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시 파워 쟁탈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둔 영국은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는 자꾸 늘어났고, 그만큼 영국의 무역은 활성화되었고, 해운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전쟁과 배상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전쟁은 철저한 국가이기주의적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고 나면, 그 전쟁을 결산하는 것이 곧 강화조약이다. 이 강화조약에서 승전국은 패전국으로부터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이 경우 가장 손쉬운 전쟁비용 보상방법이 전리품화된 식민지 영유권이었다. 승전국이 가장 탐내는 전리품도 바로 식민지 영유권이었다. 17세기 이후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이 끝나면 그때마다 많은 식민지의 종주국이 달라졌다. 17세기 중반이후의 경향을 보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식민지가 영국으로 하나씩 넘어가게 된다. 세계의 질서는 영국해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갔다. 팍스 브리타니카의 시대다.

 

중상주의와 선박의 역할 - 선박은 부국과 강병의 원천   
선박은 단순하게 운임수입으로 국부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의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국력의 척도이기도 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을 전후하여 상선과 군함의 분화가 뚜렷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상선과 군함의 분화가 확실히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전술한 영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이나 네덜란드의 독립운동 등이 다 상선을 동원하여 수행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박은 당시까지만 해도 평시에는 무역상품을 운송하여 돈벌이 하는 수단이고 전시에는 참전하여 적과 싸우는 군함으로 변신한다.


그 후 전쟁기술이 발전하고, 특히 대포의 개량으로 대포가 대형화되고, 대형 대포를 탑재하기 위하여 선체구조를 특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이 대두되고 식민, 통상, 항해를 통하여 국부가 어느 정도 충실화 되었고, 유렵 열강간의 중상주의적 패권 경쟁이 격화되자 상선과 선체구조를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군함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상선이 함대 결전과 같은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에 참가하는 일이 점진적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상선이 무장한 사략선 활동은 여전히 전시에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였고, 일반상선도 병력이나 전략물자 운송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한 가지 전투함에 승선 근무할 선원인력은 평시부터 대량으로 확보해 놓지 않으면 전시에 낭패를 당하기 쉽다. 특히 그때까지만 해도 해군 간부의 정규 양성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상선의 전시기능은 2차 대전을 거쳐 극히 최근까지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상선의 국부 창출 기능도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었다. 식민지의 개척과정의 전쟁에서 상선의 전쟁 보조기능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단 현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고 난 후의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상선의 기능은 더욱 빛난다. 우선 본국의 주민 상당수를 식민지 개척 예정지로 이주시켜야 한다. 이들은 그곳에 가서 정착하여 현지 정권을 제압한 군사력의 보호아래 경제개발에 착수한다. 농장을 개간하거나 광산을 찾아 개발하는 등이다. 농장이나 광산을 개발하는데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물론 가장 손쉬운 방법은 원주민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 하나로 조상대대로 살아 온 땅을 백인에게 손쉽게 내주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찾아 오지로 숨거나, 게릴라 방식으로 저항한다.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에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래서 필요한 노동력을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주축인 노예로 조달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백인 노예상들은 아프리카의 현지 추장들과 결탁하여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들을 사냥해 다가 선박에 실어 아메리카의 식민지에 운송하여 고가로 판다. 이 노예무역은 19세기까지 계속되었고 대단히 수지맞는 무역이기도 하였다. 이 노예무역이 상선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식민지에서 생산된 원재료의 본국으로 운송과 본국에서 가공된 공산품의 전 세계로 수출하는 것, 특히 자국의 식민지에 가져다가 비싼 값으로 파는 것도 상선의 몫이었다.

 

항해와 무역의 파급효과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영국의 식민지는 늘어났고, 그때마다 필요한 선박은 더 늘어났고, 항해법에 의하여 독점권을 가진 영국의 상선들은 독점이윤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 나갔다. 해운업과 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무역업이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연관 산업들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해운업이 발전하면서 이 모험항해가 가진 위험(risk)을 담보하기 위한 보험업이 급성장하였다. 해운업과 무역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금융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1694년에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은 해운업과 무역업에 자금을 충분하게 공급하였다. 지금도 런던이 세계보험시장과 금융시장의 센터로 기능하는 것은 이때부터 다져진 기반위에 선 것이다. 세계해운업과 무역업이 준수하는 관행들도 런던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해운업과 무역업은 공업 발전에도 한몫을 하였다. 식민지에서 생산된 각종 원자재들을 수입, 가공하여 이를 세계도처로 수출하는 산업도 발전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중상주의가 지향하는 부국강병을 이룩하는데 상선은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상선은 전시에는 강병의 원친이고 평시에는 부국의 원천이며, 이 부국과 강병은 동전의 양 면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중상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상선을 증강하고 해운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국가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적인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책이 항해법으로 알려진 해운보호정책이고 자국화자국선적취정책이다.

 

항해법과 해운보호정책의 전개
우리에게 항해조례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영국의 항해법은 이러한 해운업과 선박을 통한 영국의 번영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제도적인 장치였다. 1651년에 시행된 크롬웰의 항해법이다. 영국에서의 항해법의 역사는 크롬웰의 그것보다 수백 년을 더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당시는 국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항해법을 실효성 있게 집행할 수 없어 유명무실한 결과를 초래하거나 오히려 외국의 보복조치를 유발하는 역효과를 발생하기도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국의 항해법 제정 시행의 직접적인 동기가 네덜란드의 세계 무역업과 해운업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프랑스와의 전쟁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의 결과는 거의 항상이라고 할 만큼 영국에게 유리하였고, 그때마다 영국의 국력은 신장하였다. 그렇다고 영국이 세계 무역을 완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의 항해법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 입법들도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열강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국의 무역과 해운보호를 위한 법적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보호입법의 숲이 세계 무역과 해운을 둘러싸고 얼기설기 뒤엉킨 형국이었다고 할 것이다.

 

선박등록과 국적제도의 탄생
이런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어느 선박이 자국의 항해법에 의하여 보호해야 할 선박이고 어느 선박이 배척해야 할 선박인지를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제도가 바로 선박의 국적제도와 상선의 국적국기 게양제도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분쟁의 격화와 항해법의 예외조치 증가
전쟁은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인데 어느 나라도 일단은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국가간에 분쟁이 생기면 외교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누구의 주장이 정당하고의 여부를 떠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를 해서 양측이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을 찾아 낼 경우 전쟁을 피할 수 있고, 찾지 못할 경우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각국이 나름대로 제정 시행하는 항해법간의 충돌, 다시 말하면 다른 나라 항해법 때문에 자국의 이익이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는 국가들이 국제분쟁을 야기시키고 그때마다 외교교섭이 이루어지고 하는 과정에서 많은 예외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예외가 퇴적되면 될 수록 다른 불만 세력들이 나오게 된다. 예외가 예외를 낳기를 거듭하다 보면 원칙과 예외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어느 나라의 항해법도 당초 제정시와는 달리 헌 누더기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항해법이 반드시 자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이 아닐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항해법이 강력히 시행되게 되면 당해항로는 자국상선의 독점시장이 된다. 그러면 운임이 올라간다. 그것은 무역상인들이나 해상운송에 의존하는 생산업체의 부담 가중을 가져와서 산업전반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영국
영국이 해외식민지를 하루가 다르게 넓혀가면서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중 갑작스러운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영국의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의 하나였던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한 것이다. 영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의 지출로 재정이 고갈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식민지에 중과세를 하게 되었고, 본국 산업의 보호를 위하여 식민지의 경제활동에 대하여 다양한 제약을 가하였다. 충분한 자립능력을 갖춘 미 식민지로서는 영본국의 이러한 강압정책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 그 불만은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은 1774년 미 식민지의 대표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가진 때로부터 1783년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기까지 10여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 독립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데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영국 식민지 중 가장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독립하게 되면서 영국의 해운업과 무역업이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의 세계 지배의 대세는 크게 바뀌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영국의 가장 큰 경쟁국이었던 프랑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고, 뒤이은 나폴레온의 독재와 전쟁으로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폴레온이 유럽대륙을 거의 휩쓸면서도 영국만은 어쩌지 못하였던 것은 영국의 해군력이 프랑스 해군력을 훨씬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시 파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웅변으로 증명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독립과 미영간의 해운경쟁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영국의 항해법 시행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 본국간의 교역은 항해법에 의하여 모두 영국선에 유보되어 있었다. 영 본국에 등록한 선박도 아메리카식민지 선박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이 독립하고 나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등록하였던 선박들은 영국 선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항해법에 의하여 영국 관련 항로에 취항할 수 없게 되었다. 식민지에 등록하였던 상선들이 갑자기 일감을 상실해 버린 결과가 되었다. 해운업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인들을 설득하여 이러한 상황에 적극 대처하도록 대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것은 초기에 누슨 하였던 연방정부의 결속력을 크게 강화 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 연방의회는 서둘러 대항입법을 마련하였다. 이름하여 호혜주의법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 선박에게 차별대우를 하는 국가의 선박에 대하여는 그 차별내용과 똑 같은 내용의 차별대우를 미국 항구에서 하는 동시에, 미국 선박에 대하여 우대조치를 하는 국가의 선박에 대하여는 이에 상응하는 대우를 미국 항만에서도 부여한다는 요지의 법률이었다. 이러한 법률과 제도가 시행되면서 미국과 영국은 서로 타협하여 호혜적인 대우를 하는 평등한 교역질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도를 마련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보다 강력한 연방정부가 탄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최재수 한국해사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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