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 교류의 현장, 큐슈를 가다

이 글은 ‘바다의 날’ 기념행사로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선상세미나-올해 제 16차 행사인 ‘일본항만 시찰및 문화탐방’-에 동참했던 참가자의 기행문이다. 해사문제연구소의 선상세미나에는 총 55명이 참가했으며, 참가일행은 일본의 후쿠오카 하카다항만을 시찰한 뒤, 일본 3대 명성인 구마모토성과 일본 화산피해마을 시마바라 미즈나시 혼진, 운젠계곡, 임진왜란의 사적지 나고야 성터와 박물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등을 견학하며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했다.           -편집자 주- 

 

김형석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
김형석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이보다 더 상투적이면서도 한·일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도 없을 듯하다. 부산을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 따졌을 때 서울보다 오히려 일본 큐슈 북단의 후쿠오카 현과 더 가까울 정도로, 물리적인 거리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일본과의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감을 뛰어넘는,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 고대부터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역사적 악연 탓에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경쟁적이며, 꼭 이겨야만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상호간의 적대적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인 큐슈의 북쪽 지방을 여행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선상에서의 1박을 포함해 3박 4일의 짧은 여정에 올랐다.


우선 일본으로 가는 부산발 하카타(博多)행 여객선인 ‘뉴카멜리아’호에서의 기억부터 더듬어봐야 할 것 같다. 배가 출발하기 전 선상에서 최재수 박사님의 한·일의 근대사에 관한 강연을 들었는데, 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인상 깊은 강연이었다.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국제 환경,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본을 근대화로 이끈 지도자들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과연 우리에게 그런 환경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과연 우리의 사정이 나아지긴 한 것일까 싶기도 해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다자이후 천만궁
다자이후 천만궁

고대의 한·일 관계의 상징 다자이후
하카타 항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 일본 입국수속을 마치고 가장 먼저 이동한 곳은 우리 발음으로는 태재부(太宰府), 일본 발음으로는 다자이후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큐슈 북쪽 지역을 담당하던 지방관청 자리인데, 지금은 건물이 없이 터만 남아 있고 오히려 학문의 신이라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신 신사가 더 유명한 지역이다. 이 다자이후의 설치는 고대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먼 옛날부터 이어진 백제와 왜의 가까운 관계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대패한 후, 나당 연합군의 왜 정벌을 우려한 당시 야마토(大和) 정권이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세운 관청이라는 것이 유력한 설명이며, 그 증거로 큐슈 지역에는 곳곳에 당시 쌓은 방어시설인 한국식 산성이 여럿 축조되어 있다. 10세기 즈음에 이 지역에 정착했던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보다는 백제와 일본의 가까웠던 관계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느끼고자 노력했는데, 그때의 그 역사적 사건이 바로 한·일 관계의 잘못 끼운 첫단추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그리고 그 신라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이후의 한국 역사와, 백제와 가야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일본 역사를 생각했을 때 뿌리 깊은 대결의식과 경쟁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쿠마모토 성에서 역사의 인과응보 생각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다자이후에서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쿠마모토 현의 쿠마모토 성이었다. 쿠마모토 성(熊本 城)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선봉에 선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영지 내에 직접 설계해 쌓은 성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성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경험하고 좀 더 견고하게, 그리고 농성할 때에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성벽에 경사를 급하게 넣어서 쌓는다든지 우물을 백여 개 이상 판다든지 하는 등의 기법을 통하여 영지 내에서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반의 압도적인 전황은 조선 수군의 연승과 각지의 의병활동 등으로 인해 악화되었고, 그 결과 울산성에 고립된 가토 키요마사는 물이 없어 말의 피를 마시고, 먹을 것이 없어 흙을 퍼먹는 등의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겨우 살아 돌아왔고 그때의 경험이 쿠마모토 성을 탄생시킨 것이다. 일본의 주요 명승지가 조선을 침략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해 씁쓸했다.


쿠마모토 성에서 전쟁으로 인해 타버린 대부분의 건물 중 유일하게 축조 당시의 건물이라고 하는 망루인 ‘우토 야구라(宇土櫓)’가 있다. 가토 키요마사와 경쟁 관계였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이후 몰락하면서 그의 영지에 있던 건물을 가토가 옮겨다 쿠마모토 성에 지었다는 건물인데, 이 건물만 현존하게 되면서 그것이 코니시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전쟁의 희생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가토나 코니시나 둘 다 전쟁의 원흉이나 마찬가진데, 코니시는 당대에 몰락했고 가토는 그 아들 대에 막부에 밉보여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했으니, 역사에 과연 인과응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상념에 젖게 하기도 한 쿠마모토 성이었다.

 

 

나카사키 평화공원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나카사키 평화공원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잔인한 전쟁의 아픔을 느끼게 한 나가사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나가사키(長崎) 시로 이동했다.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는 일본의 근세라 할 수 있는 에도 막부 시절 유일하게 서양에 개방된 항구로,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주요 통로였다. 네덜란드 상인에게 개방된 개항장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멀리서 지켜보고, 바로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폭 평화공원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마치 평화라는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양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02분. 이 시간에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수많은 사람들, 군인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살이 타들어가며 그 생명의 불꽃을 꺼뜨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국사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숙연한 마음은 그다지 오래가진 않았다. 그 이유는 과연 이 사람들이 평화를 부르짖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화공원을 나와 원폭기념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령비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작은 규모로 세워져 있는 것이 조선인 피해자 위령비였다. 건설노동자 위령비나 전기·통신 노동자 위령비보다도 훨씬 작은 규모였다. 당시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사망자와 피폭 부상자를 합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데, 이 불쌍한 분들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일본인의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초라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더욱 마음을 착잡하게 한 것은, 그 비석조차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나가사키의 재일 조선인을 후원하는 한 시민단체에서 추진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일본 정부는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인 원폭 피해자, 그보다 더 많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등을 외면하고 지원의 장벽을 높게 둘러놨다. 조선인 피해자가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자 하면 일반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조건을 까다롭게 정해놓고 있다. 과연 일본인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증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원폭기념관의 전시내용은 더욱 더 가관이었다. 물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나가사키 시민들의 넋은 추모하고 기려야 하는 것이 맞으나, 원폭기념관에서는 그 참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인이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혀 무리하게 일으킨 전쟁임에도 원폭기념관의 전시내용만 봐선 일본이 오히려 가장 큰 피해자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충분하다고 느꼈다. 기념관에서 가장 익숙한 장면이 나이 지긋하게 드신 노인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되는 단체관람객에게 설명을 하면서 관람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교육을 통해서는 어린 학생들은 미국이 일본에게 큰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일본이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 수도 있겠다싶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처럼 교육을 받으니 매번 독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고 교과서 왜곡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 같아 오히려 일본 학생들이 안쓰러웠다.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해마다 자위대 군사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강시키고, 이번 원전사태 전까지 정체불명의 원자력처리시설을 운영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3개월 안에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일본이 정말 평화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의아하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고향을 떠난 도공의 삶, 그리고 일본문화의 힘
나가사키에서의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사가(佐賀) 현 아리타 시로 이동했다. 착잡한 마음은 일단 접어두고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었는데 기분전환은 커녕 아리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리타는 아리타야키(有田燒)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리타의 도자기는 그 특유의 아름다움이 널리 유럽까지 알려져 일본에 막대한 수입을 안겨다 주던 명품 도자기다. 그런데 그 역시 전쟁의 산물이며 조선인의 피눈물이 서려있는 것이라니…. 임진왜란 당시 아리타 지역의 영주가 조선에서 도공 이삼평을 전쟁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간 이후 아리타에 정착시켜 도자기를 만들게 한 것이 그 시초로,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진 일대 사건이었다. 일본은 그 당시만 해도 조선에서 대충 만들어 낸 찌그러진 밥그릇 같은 것도 명품으로 대우하며 거금을 들여 사가던 영주들의 사치품이었을 정도로 도자기 기술이 낙후되어 있었고  반면에 조선은 중국과 더불어 도자기의 2대 산지였으니 그 격차가 엄청났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상황이 역전되어 일본은 한때 도자기의 최대 수출국으로 군림하여 유럽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으나 우리 도자기는 그러지 못하고 단순히 우리끼리 만들어 사용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다. 이러니 임진왜란을 가리켜 ‘도자기전쟁’이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조선에서는 도공 같은 기술자에 대한 대접이 소만도 못한 수준이었으나 일본에서는 귀족 모시듯 했으니 일신의 영달에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었겠으나, 그리운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영주가 지시하는 대로 도자기만 굽는 인생을 살았던 도공 이삼평과 같은 처지의 도공들의 삶은 얼마나 불행했을까? 힘없는 국가의 민초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인지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다.


도공들의 안타까운 삶과 더불어 아리타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일본의 힘이었다. 조선에서는 외국에 수출할 생각도 하지 못하던 도자기를 유럽까지 수출해서 큰 부를 창출하고, 더불어 일본의 문화까지 널리 알린 일본의 힘. 도자기가 단순한 수출품이 아니라 일본 문화를 알리는 대표 문화상품이 되어 널리 알려진 것이 이미 일본의 근대화 이전이다. 당시 도자기를 수출할 때 포장지로 쓰이던, 일본에서는 너무 흔했던 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 그림 종이가 유럽에까지 전해져 고흐 같은 유명 화가의 그림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유럽에 일류(日流)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단순히 공산품뿐만 아니라 문화를 같이 수출해야 브랜드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나고야 성터 앞 가부섬
나고야 성터 앞 가부섬

조선 침략기지 나고야 성터
그 다음 간 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출병하는 군사들의 출발 기지였던 나고야 성(名護屋 城)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해 대륙까지 제 발밑에 놓고자 했던 그 야욕의 출발점인 것이다. 지금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터만 남은 상태지만 건물터와 지형을 봤을 때 원래는 상당히 웅장한 규모였을 것이다. 그곳에 십 수만의 군사를 배치해놓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찰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당시 심경은 어땠을까. 그 군사들이 수백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조선 방향으로 떠나는 것까지 바라본다면 모르긴 몰라도 무조건 승리를 장담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 선단이 도착하는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부산진첨절제사 정발 장군의 심경은 또 어땠을까. 그 무지막지한 대군단을 막아내고 나라를 수호한 선조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또한 쿠마모토 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가장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삶 역시 인과응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당대의 영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가문이 단절되고 한순간에 몰락한 도요토미 역시 죽을 때는 인생이 덧없는 꿈이라고 되뇌었다니 허무해지기도 했다.

 


나고야 성터 바로 옆에는 사가 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다. 이 곳은 주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와의 교류역사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곳인데, 박물관의 자료 역시 한국측 주요 박물관의 협조로 마련된 것이 많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곳에서는 우리말로 된 설명을 현지인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물관 직원은 부산 출신 아내를 맞아 한국에서도 몇 년 살았던 적이 있어 우리말이 유창한 편이어서 직접 우리말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더 도움이 되고자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일본의 침략 사실에 대해 반성하는 듯한 설명을 담담하게 이어나가는 그 분을 보며 일본에 아직 그래도 이런 분이 있어서 한·일 관계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뉴카멜리아'호
'뉴카멜리아'호

한·일관계의 아픔 치료 위한 교류확대의 필요성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그 후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까지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과연 한·일 관계의 실체는 어떤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데 이번 탐방은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다자이후에서는 고대의, 쿠마모토 성과 아리타와 나고야 성터에서는 근세의,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근·현대의 한·일간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며 한·일 양국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한·일 양국은 서로를 너무나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일본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국을 이용해야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태동기인 고대부터 그랬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한국으로부터의 선진 문화를 수입해 발전해왔고, 현대에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후의 피폐한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은 일본과의 평화가 공고히 정착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앞으로 양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더욱 더 협력이 강화되어야 하고 평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잘 보여준 곳이 우리가 일본에 발 내디딘 첫 번째 장소, 바로 하카타 항이지 않나 생각된다. 하카타 항은 고대부터 한·일 교류의 최전선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그 역할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하카타 항을 통해 오고가는 양국 국민들의 수와 무역 물동량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양국은 끊임없는 경제·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를 더욱 더 잘 이해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행이 배를 타고 이동하며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은 큰 시사점이 있다.


일본에서의 3일간 일본 43개의 현 중 4개 현을 순회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미 2년 전에 와본 곳도 있지만 이번에 처음 가본 많은 곳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아 뿌듯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좋은 탐방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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