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1984년 친한 부부사연 노래 인천 연안부두의 외항선원 이별 그려

왕성상
왕성상
3면이 바다인 우리는 해양국가다. 바다는 우리들 삶에 직결돼 있다. 부산, 인천 등 항구도시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섬은 말할 것 없다. 바다는 생활터전이자 곧 역사다. 자연히 바다와 관련된 문화들이 발전했다. 소리문화인 노래도 예외가 아니다. 그 속에 만남, 사랑, 이별, 눈물, 즐거움과 웃음이 담겨있다. 특히 노래 속의 바다와 섬, 항구는 한 시대를 증언하기도 한다. 바다, 섬, 항구를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사연과 에피소드를 시리즈로 싣는다.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눈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소리도 울리지 마세요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눈물지으며 힘없이 돌아 서네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잔 다 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4년에 인천연안부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가요다. 1979년 10·26사건 뒤 방송출연금지조치가 내려진 심수봉이 그해 이 노래를 취입, 연예활동을 다시 하게 돼 눈길을 끈다. 

 

 
 

 

1978년에 데뷔, 이듬해 MBC 10대 가수상과 KBS 신인가수상을 받은 그는 10·26사건 뒤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다 5년 만에 풀렸다.


심수봉은 자신이 부른 대부분의 노래들이 실제상황을 얘기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소재로 삼는 가수로 유명하다. 상상으로 꾸며낸 말이나 일들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가 취입한 노래가사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그 안에 담긴 생활모습이나 등장인물들의 얼굴, 주변 분위기, 삶의 현장들이 손에 잡힐 듯 어렴풋이 보인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도 마찬가지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풍의 이 노래의 탄생비화를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동년배 여성으로서 동병상련 노래로 만들어 취입
심수봉과 친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외항선을 타는 뱃사람이다. 어느 날 허전함과 쓸쓸함이 부부의 얼굴에 가득했다. 남편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나야해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심수봉은 그 부부의 사연을 알고 인천연안부두까지 배웅해주기로 하고 그들이 가는 길에 동행했다. 연안부두까지 따라가서 부부의 작별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헤어짐을 함께 아쉬워했다. 붕~붕~붕~, 배는 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미끄러지듯 떠나고 두 여성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안부두에서 헤어진 아내는 서울 신림동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차안에서 마냥 울고 있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 심수봉도 마음이 찡했다. 우는 모습이 너무도 절절하고 남편과 자식을 둔 같은 주부로서, 또 동년배의 여성으로서 동병상련의 입장이었다. 10·26사건 뒤 방송출연을 할 수 없었던 때로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다.  심수봉은 그 때의 느낌과 분위기를 메모해뒀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그가 그 때의 일을 악상으로 떠올려 노래 말과 곡을 만들어 취입한 게 바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다.

 

 

 
 

물론 가사를 쓰는 과정에서 남자에 대한 좋잖은 감정이 일부 드러나긴 했다. 그러나 노래의 큰 흐름은 그 때 부부의 연안부두 이별을 남녀관계와 인생에 빗대 음악적으로 적절히 그려냈다. 노래의 끄트머리 대목에서 ‘남잔 다 그래’로 표현하며 어릴 적 집안얘기를 은연 중 내비쳤다.


심수봉은 어릴 때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사랑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과부의 딸’이란 놀림까지 받는 고통 속에서 자라 마음의 상처가 적잖았다. 그래서 그의 노래엔 자신을 보호해주는 큰 그늘로서의 남자, 아버지 같은 남자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MBC 대학가요제’출신 가수로 32년째 활동 
이처럼 심수봉의 노래는 실제상황이나 실화를 담은 게 대부분이다. ‘노래를 들으면 심수봉의 근황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그래서 많다. 하고 싶고 가슴에 쌓인 얘기를 소리로 풀어내는 까닭이다.
올해로 가수생활 32년째를 맞은 심수봉(57)은 ‘그 때 그 사람’을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정치적 격랑기에 꽃피운 트로트의 예술성이 뛰어난 대중가수로 손꼽힌다.


그는 대중음악계에서 트로트가수로는 드물게 수준 높은 자작곡으로 앨범을 채워왔다. 월드음악장르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하늘이 내려준 비음(鼻音, 콧소리)’으로 불리는 독특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목소리로 ‘그때 그 사람’ ‘사랑밖에 난 몰라’ ‘비나리’ ‘백만 송이 장미’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내면서 대중들의 정서를 사로잡아오고 있다.


195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1978년 명지대 경영학과 학생으로 ‘MBC 대학가요제’에 나가 ‘그 때 그 사람’을 불러 눈길을 모았다. 그 때 입상은 못했지만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젊은 여대생이 트로트를 부른 것도 특이했다. 특히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로 법정에까지 서 화제가 된 연예인이다. 그는 50대 중반의 고참가수인데도 젊은 가수들 못잖게 부지런히 뛰고 있다. 2004년 11월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생활 25주년 기념콘서트를 가졌다. 이에 앞서 10년 만에 재회한 딸과의 애틋한 모정을 노래한 제10집 음반 ‘꽃’도 발표했다.


그는 2009년 3월 30일 서울 조선웨스턴호텔에서 ‘30주년 기념 콘서트-뷰티풀 데이 제작발표회’겸 기자간담회 때 의미 있는 말을 했다. 힘들고 아팠던 것을 이겨내기 위해, 호흡하고 싶어 노래했다면 이젠 한 단계 더 비상하고 싶다는 것.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얘기다.

 

 

10·26사건 현장인물, 가요생활 중단, 이혼도
그는 박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가수활동을 멈췄을 때부터 얘기를 풀어나갔다. “처음 10년은 가슴 울렁거리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던 때였어요. ‘왜 인생이 이렇게 될까’란 생각과 함께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계속 펼쳐졌습니다. 결혼생활도 비참한 가운데 첫 단추가 끼워졌죠. 어이가 없고 꿈을 빼앗긴 암울한 시절이었습니다. 다음 10년은 가정사로 힘들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배신해도 실망시키지 않을 한 남자를 향한 집요한 노력이 있었지만 이혼했죠”라고 털어놨다.


1985년부터 시작한 신앙생활이 크게 도움됐다고 했다. 이어진 10년에 대해선 “보람이 있었던 때였다”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는 그해 4월말 히트곡, 신곡, 개사한 북한가요, 이스라엘 노래를 담은 30주년 기념음반 ‘뷰티 풀 러브’를 내놨다. 언젠가 통일이 될 날을 생각하며 북한노래를 넣었고 우리와 정서가 닮은 이스라엘곡도 담았다.

 

 

[필자 왕성상]=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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