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기선의 등장과 세계해운의 발전

강제기선에의 대체에 실패한 프랑스 해운의 낙후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적대와 경쟁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이 두 나라의 경쟁관계는 대체로 유럽 대륙 안에서는 프랑스 우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의 해외 진출 경쟁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해상활동과 해외진출이라는 면에서는 영국보다 뒤떨어졌다. 특히 나폴레온이 유럽대륙을 온통 휩쓸고 있을 때에도 거의 유일한 예외로서 바다 건너의 영국만은 나폴레온의 침략으로부터 건재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해양 지배력에서 영국보다 열세라는 것을 매우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였고, 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19세기 후반에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이 항해법을 전면 폐지하자, 유럽의 다른 열강들도 이와 발맞추어 각종 해운 보호정책들을 폐지하였다. 그 결과 유럽 열강간에 해운업에 대한 자유경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다시 영국 우세 프랑스 열세로 나타났다.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 정부는 자국해운업자들에게 두터운 해운보조금을 교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의 해운업자들은 정부의 두터운 보조금의 우산 속에서 낮잠을 자게 되었다. 한편 경쟁자인 영국은 새로 등장한 강제기선을 계속해서 개량하여 보다 크고 성능 좋은 기선을 연속해서 시장에 내보냈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의 우산 속에 안주한 프랑스 해운업자들은 까다롭고, 성능이 입증되지 않은 강제기선을 제작하는 위험을 피하고, 보다 손쉽고, 운항비가 적게 드는 목조범선만 계속 건조하였다. 그 결과 목조범선의 강제기선으로의 대체 경쟁에서 다시 한번 프랑스는 영국에게 크게 뒤지게 되었다. 이 경쟁이 거의 끝나던 19세기말 20세기 초, 영국은 보유선박량면에서 세계 제1위의 해운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제기선 대 목조범선의 비율에서 강제기선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였으나, 프랑스는 불명예스럽게도 목조범선의 비율이 가장 높은 유럽 국가 중의 하나였다.

 

정기선의 출현

크립퍼선을 정점으로 하는 범선과 증기기관선의 발전에 힘입어 세계 해상무역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해운의 발전과 무역의 발전은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은 것이어서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발전중의 하나가 특정항로를 규칙적으로 운항하면서 불특정 다수의 화주로부터 운송을 위탁받은 화물을 운송하는 정기선이 나타났다. 정기선이 나타나기 이전부터도 특정항로에 고정적으로 배선하는 선주가 있어 왔고 이러한 해상운송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constant trader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기선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 정착된 것은 증기기관을 추진력으로 하는 기선이 나와 어느 정도 전천후 항해가 가능해진 이후의 일이다.

 

정기선을 영어로는 Liner라고 하는바 정기선 서비스라 함은 규칙적인 시간 간격을 가지고, 특정한 항만 간을, 사전에 약속한 스케줄에 따라 운송서비스를 제공하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나오는 운송 수요를 대상으로 하지만 집하량이 만선이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도 사전에 약속한 스케줄에 따라 운송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 정기선 사업은 용선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선자가 요구하는 항만 간에서 특정한 화물의 특정량을 운송 해주거나(항해용선),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선박의 사용권을 용선자에게 내어주어 운송에 종사하게 하는 용선(기간용선 및 나용선)사업과 구분된다. 그러므로 일정한 항만 간을 계속 반복하여 사전에 예정된 화물을 운송하지만 용선형태에 의하여, 특정하주와 사전에 약속된 바에 따라 운항을 계속하는 경우는 정기선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원유의 수출항에서 원유를 정유공장이 있는 곳까지 계속 반복하여 운송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 운송서비스는 정기선이라 할 수 없다.

 

정기선 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은 절대적인 규칙성과 확실성이다. 범선에서는 이러한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범선과 기선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세계무역은 급속하게 발전하였고, 몇몇 대선주들은 우편물 운송계약을 인수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였고, 상당수의 여객도 운송할 것을 약속할 수 있게 되면서 선박운항을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의 Black Ball사 등 아메리카 우편 선사들은 대서양 횡단 정기선사의 선두주자들이었다.

 

범선 최후의 주자들

범선 최후의 황금시대를 통하여 정예선의 대부분은 정기선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적어도 규칙적인 무역선(regular trader)이었고, 그 대다수는 상당한 규모의 선대에 소속하였다. 중국차의 수송에 종사하였던 크립퍼선의 대부분은 2, 3척씩 소유되어 있었다.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정기선이 나타난 것은 185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러시에 의하여 이민의 대홍수가 일어나면서다. 제임스 베인즈의 Black Ball Line(같은 이름의 미국 우편선과 혼동하기 쉬우니 요주의), 필킨톤과 윌슨 두 사람에 의하여 설립된 White Star Line 조지 톰슨의 Aberdeen White Star Line 등 런던/오스트레일리아간의 우편정기선은 런던/오스트레일리아 제항 간에 매월 취항하였던 다수의 정기선사들 중 특히 주목할 만한 회사들이었다. 

 

그 후 증기선이 크립퍼선으로부터 여객수송의 대부분을 빼앗아 가자 범선 선주로서는 매월의 정기배선에 의한 채산을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범선들은 19세기의 80, 90년대까지도 양모 운송 등 주로 대량화물 위주이기는 하였으나, 정기적인 배선은 계속하였다. 그러나 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여객이나 화물의 운송은 증기선에게 양보할 수박에 없었다.

 

유럽/오스트레일리아간의 항로에 규칙적인 배선을 위해서는 적어도 12척 정도의 선대가 필요하였다. 범선 최후의 주자였던 Colonial Clipper 한 척의 건조비가 3-4만 파운드 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서 이러한 선대를 확보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정기배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선박을 용선하여야 하였다. 한편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선박에 적재할 화물의 집하를 자기가 위탁받고, 그 선박에 자사의 사기를 달고 정기 배선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런던간과 같은 장거리 항로에서 범선은 한 척이 1년에 한 항차 배선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 선박의 운항소요시간이 왕복 항해에 꼭 1년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당시 무역상품의 대종이었던 호주의 양모나 중국의 차가 연중무휴로 출하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요면에서 운항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주항로를 운항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근거리 항로에 한 두 항차 취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화물을 찾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선박이 늘어나게 되자 이러한 선박을 이용한 무역이 발달하여 부정기선인 Tramp가 출현된다. 이렇게 되어 세계 해운시장은 정기선인 Liner와 부정기선인 Tramp로 크게 양분되게 된다. 여기서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관행적으로 Tramp를 어미에 er을 붙여 Tramper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선박의 대형화와 선박소유 제도의 발전
- 선박 공유제도 -

유럽에서는 선박을 공유하는 제도가 지중해의 해양도시국가시대나 한자동맹시대에서부터 보편적으로 유행되어 왔다. 초기에는 이러한 공유제도에서 공유의 비율 등에 관하여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1823년의 법률에 의해 선박의 지분을 8등분하여 소유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박지분의 8등분은 편의상의 분할에 불과한 것이며, 특별히 법적인 제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두세 개의 지분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고, 한 개의 지분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 것도 허용되었다. 실제 선박의 운항은 이러한 지분을 가진 사람 중 가장 우두머리격인 사람이 선장을 겸하여 책임지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었고, 그 외의 지분 소유자들도 지분의 소유에 의한 이익의 배당을 받는 것 외에 각자의 전문 분야별로 당해 선박과 관련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메리카 크립퍼 선은 대형화되기 시작하였고, 선가가 크게 앙등되었다 특히 우편제도의 발달로 선박의 정기적인 배선의 필요성이 크게 고양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한 항로의 유지에 적어도 12척의 선박이 필요하게 되자 종래의 척당 8주로 지분을 나누는 것으로는 이러한 수요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후 제정된 각종 법률에 의하여 영국선박의 지분은 64주로 분할하게 되었고, 그 중 한 주 이상을 가진 사람을 지분소유자로 등록하였다. 이 지분은 그 이상 더 세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였으나, 상한선에 대한 제한은 없어서 1주로부터 64주까지 얼마든지 한 사람이 보유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러한 선박에 대한 지분에 의한 공유제도는 범선과 기선에 관계없이 다 적용되었다.

 

해운의 발전과 회사제도의 발전

그러나 전술한바와 같이 기선은 그 대부분이 정기선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 척만으로는 기능하기 어려워서 부유한 자본가가 지배하는 기업이나 국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아 설립한 합자회사(joint-stock company)에 의하여 소유되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joint-stock company 제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joint-stock company의 경우 책임제도가 무한책임제도였기 때문에 투자에 따른 위험이 너무 커서 일반 대중의 자금을 회사로 끌어들이는데 한계가 있었다.

 

1862년에는 유한책임제로된 회사법이 제정되면서 해운업이 근대적인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최악의 경우에도 투자자가 부담해야할 위험은 자기가 투자한 금액을 한도로 하기 때문에, 회사에 대하여 채권을 가진 사람이 주주들의 재산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이렇게 되자 자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해운회사의 주식을 취득할 수 있게 되어, 정기선을 운영하는 해운기업이 필요한 선박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 계급에 한정하지 아니하고, 금액의 다과에 관계없이 자금을 모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업의 필요한 자본을 대중화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산층이 폭넓게 해운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면서 해운에 대한 국민적인 이해도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해운수요의 급증과 정기선의 분화

선박소유제도가 개선되면서 영국을 비롯한 선진 해운국들은 선박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해운업의 발달은 무역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바로 유럽 제국의 공업생산과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매년 많은 양의 식량과 공업원료를 해외식민지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민을 해외로 송출하게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국내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를 식민지에서 조달하게 하는 동시에 자국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식민지에 팔도록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운시장에 변화를 불러왔다. 몇몇 항로에서는 규칙적인 화물운송요구가 늘어나서, 여객 및 우편물 운송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선을 여객정기선, 화객정기선, 그리고 화물정기선으로 분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분화는 19세기 최후의 20년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여객정기선(Passenger Liners)은 대형, 고속, 호화선에 의하여 여객과 우편물의 운송을 주로 하고, 그 외의 화물운송여력은 그리 크지 아니하다. 다음으로는 화객정기선(Intermediate Liners)으로 여객정기선보다 저속이지만 보다 많은 화물적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운영의 중점은 여객보다 화물 쪽에 무게를 두었다. 끝으로 화물정기선(Cargo Liners)으로서 화물 운송을 주목적으로 건조한 선박으로서 부업으로 10여명 안팎의 여객을 운송하기도 하나 주목적은 화물운송이다. 그러나 이 화물정기선도 여객정기선이나 화객정기선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여 많은 화물을 운송하였다.

 

부정기선의 탄생

그러나 세계의 무역은 그렇게 규칙적인 것만은 아니다 밀이나 면화에서 보는바와 같이 계절적인 생산물이 많고. 이러한 화물은 수확기에 주로 출하되기 때문에 정기선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또 석탄이나 철광석 등에서 보는바와 같이 운임 부담력이 낮으면서 한 단위의 운송량이 많은 화물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화물은 한 건의 운송단위가 크기 때문에 화물정기선에 적재할 경우, 다른 화물의 운송에 지장을 준다. 그래서 이러한 화물을 따로 모아서 선박 한 척분을 만들어 정기선과 관계없는 선박을 구하여 운송하게 되었다. 부정기선(Tramp)의 탄생이다.

 

이러한 운송에 주로 종사하는 선박은 초기에는 증기기관선에 밀려난 범선이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범선은 바람을 이용하여 운항하기 때문에 연료비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며, 기관실이 따로 필요 없기 때문에 같은 선형이라도 운송능력이 매우 크다. 이러한 장점을 이용하여 계절적인 수요나 운임 부담력이 낮은 화물의 운송에서는 증기선에 비하여 비교우위를 갖는다. 이 점을 이용하여 여기 저기 찾아다니면서 정기선이 운송 못하는 화물을 찾아 운송하였다. 그러므로 범선의 기선으로의 대체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 후반이후 정기선 = 증기선, 부정기선 = 범선이라는 도식이 성립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증기선과 범선의 분업도 정기선이 분화되던 1880년을 전후하여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부정기선 시장에도 증기선이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유도한 원인은 ① 증기선의 일반화로 인하여 항로의 중간 기항지 여러 곳에 연료용 석탄저장소가 생겨나면서 증기선의 연료탄 적재 필요량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② 증기선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으로 연료 소비량이 많이 줄고 운송능력도 크게 증가하였고, ③ 증기선은 연간항차수가 범선의 몇 배로 많고, ④ 운송소요일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 다음 항차의 예약이 보다 쉬워 영업을 보다 탄력 있게 할 수 있다. 게다가 18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해저전선의 부설에 의하여 세계의 주요항구들이 서로 결합되어 영업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러한 탄력성은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부정기선 시장에서도 범선은 기선에 의하여 밀려나게 된다.

 

해저전선의 발명과 해운영업제도의 획기적인 변화

세계 해운업 사상 해저전선의 발명은 증기선의 발명에 결코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는다. 근대적인 무역의 획기적인 양적 증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증기선이 틀림없으나, 이러한 무역을 위한 상품의 매매, 운송 계약의 체결, 보험, 화물의 인도 등 무역계약의 체결로부터 이행완료까지의 복잡다단한 모든 단계를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체계화하는 시스템을 완성시킬 수 있게 한 것은  해전전선과 무선전신에 의한 원거리 통신이 실시간으로 가능하게 되면서 가능해졌다.

 

가장 큰 변화는 해운영업방식의 변화였다. 해저전선에 의한 통신이 가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선주는 일단 출항한 선박의 복항화물의 계약은 선장이나 화물감독(운송화물의 관리를 위하여 무영업자가 승선시킨 사람), 또는 자기와 특별히 계약한 선박대리점이나 기타 거래선에 전권을 위탁할 수밖에 없었고, 선주로서는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선박이 일단 모항을 떠나면 이 선박이 다시 모항에 돌아올 때까지 이 선박과 연락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전전선에 의하여 장거리 통신이 가능해지자 선주는 런던이나 리버풀에 앉아서 본선선장과 선박운항상황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의 시장상황을 수시로 파악하여 다음 항차의 영업계획을 사전에 수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선장의 다음 행동요령까지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선박은 모항을 떠난 후 선주의 지시에 의하여 세계의 각항을 돌아다니면서 영업할 수 있게 되었고, 선주는 자기 소유선박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계없이 항시 지휘 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주는 현지의 거래 관행이나 시장 사정 등을 잘 몰라서 그래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경우 선주는 본선을 3개월, 6개월 1년 등의 기간을 정하여 사용권을 내어주는 기간용선(Time Charter)에 의하여 선박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보다 집하가 용이한 다른 항만으로 본선을 이동시키면서 공선항해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선박을 특정한 선석에 계류시켜놓고 광고를 통하여 당해 항으로 가는 화물을 집화하여 마치 정기선과 유사한 방법의 한 항차 영업을 하기도 한다(placed on the berth).
 
정기선과 부정기선의 경영기법상의 차이

정기선은 일정한 간격에 의한 배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유사한 선형의 선박을 적정수 확보하여야 하고, 각 기항지와 모항에 상당한 규모의 육상 조직이 필요하고, 처리해야할 업무량도 많다. 그 때문에 정기선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경영조직도 방대하게 마련이다. 해운 기업 중 정기선회사가 거대한 주식회사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하여 부정기선의 경우 한척이 하나의 경영단위가 되고, 영업조직도 방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발탁 익스첸지(Baltic Exchange) 등을 통한 해운시장의 동향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필요할 경우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경영판단을 필요로 한다. 정기선의 성공비결이 방대한 규모의 자본의 동원과 정교한 경영 조직에 있다면, 부정기선 경영의 성공비결은 정확한 정보의 판단, 과감한 결단력, 해운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크게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선의 운영회사들이 주식회사제도를 위시한 회사제도로 크게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정기선의 대부분은 개인, 개인기업, 그리고 64주로 구선된 선박공유조합에 의하여 소유 운영되었다.

 

증기선의 발전과 호화여객선간의 경쟁

여객정기선(Passenger Liners)이 가장 발달하였던 항로는 대서양이었다. 기선의 신뢰성과 안전성의 매력으로 대서양 횡단 여객수는 급증하였다. 그레이트 웨스턴호의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항해를 뒤이어 유럽의 제항과 미국의 뉴욕을 연결하는 신항로가 해가 다르게 증가해갔다. 드디어 영국뿐만 아니라 해양으로 진출하기를 원하는 거의 모든 유럽제국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정기 여객편을 대서양 항로에 갖게 되었다. 당연한 결과로 경쟁도 치열해진다. 경쟁은 부유한 승객의 유치에 집중되어 얼마나 호화스러운 여객ㅇ누송서비스가 제공되는가가 경쟁 승패의 관건이었다.

 

19세기말이 되면 여객선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호화롭고 복잡한 사치품이 되었다. 크기는 1만 5천톤에 달하였고, 속력은 20노트를 자랑한다, 3단 팽창 기관이 4단 팽창 기관으로 개선되면서 안락성도 높아졌다. 당일 스크루가 2축 스크루로 바뀌고, 여객에게 보다 안락한 선내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넓은 라운지와 호화스러운 객실이 마련되었다. 세기가 바뀌자마자 증기터빈이 여객선에 도입되었다. 이 증기 터빈은 공간과 중량이 크게 개선되고 유지관리가 쉬울 뿐만 아니라, 선박의 동요가 적어지고, 속력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최초로 증기 터빈 기관을 장착한 대서양횡단여객선은 큐나드사의 ‘모레타니아’였는데 처녀항해에서 27.4노트의 평균속력으로 대서양을 횡단하였다.

 

상류사회의 승객을 유인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대형 정기선의 스페이스의 4n분의 3이 상류사회의 승객을 위하여 할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호화여객선 승객의 대서양횡단여행은 호화스러운 파티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승선해 있는 자체가 환락이고 기쁨이었기 때문에 여객선의 고속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던가. 과학기술에 대한맹신과 이에 도취한 바다무시가 호된 시련으로 인간에게 닦아 왔다. 1912년 호화여객선 타이탄닉호의 사고로 인하여 일어난 대참사는 인류로 하여금 오만이 가져오는 대참사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준 혹독한 교훈이다.

 

공존한 천국과 지옥

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호화스러운 대서양 횡단여행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것만은 아니다. 신세계로 살길을 찾아 떠나는 편도여행객인 이민승객도 많았다. 19세기 후반에만도 600만 명 가까이가 영국이나 아일랜드로부터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90년부터 1905년 사이는 구라파에서 미주로의 이주가 가장 많았던 시기로서 독일인 218만 6천명, 포르투갈과 스페인인 93만1천명,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인 90만 명 이상, 스칸디나비아인 62만 7천명, 이태리인 300만 명 이상이 바다를 건너 대부분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대 초 이주가 규제되기 전까지, 3천만명이상이 고국을 등지고 살 길을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이들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이주하는 것이므로 결코 여유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호화스러운 고급선실을 사용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배 밑바닥 층에 마련된 3등 선실로 밀려 내려갔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지옥을 방불케 할 만큼 열악한 것이었다. 호화객실의 천국과 서비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옥이 한 척의 배라는 좁은 공간 안에 공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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