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선창가 거닐며 옛 애인과의 추억 되새겨

1941년 예산출신 고운봉 취입, 가수입지 굳건히 다져

 
 
‘선창(船艙)’은 1941년 충남 예산출신 가수 고운봉(본명 고명득)이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곡이다. 극작가 겸 작사가였던 조명암(본명 조영출)이 노랫말을 쓰고 천재음악가로 유명한 김해송이 작곡했다. 4분의 2박자 트로트 곡으로 비 오는 날 선창가를 거닐며 헤어진 사람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린 국민가요다.
이 곡은 이별의 아픔을 절묘하게 그려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노랫말이 일제강점기 때 비 내리는 쓸쓸한 부두를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이별의 정한을 구성진 곡조에 담아 히트했다. 가수 고운봉의 슬픔을 머금은 창법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특히 학생, 지식인층 사이에서 애창
‘선창’은 고운봉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선창’을 발표할 땐 데뷔한 지 2년밖에 안 된 새내기 가수였다. 그는 이 노래로 가수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1941년 여름 구슬땀을 흘리며 취입한 ‘선창’은 공전의 히트곡이 됐다. 길에서 ‘선창’의 곡조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애창됐다. 훌륭한 노랫말, 흠잡을 데 없는 멜로디, 완벽한 창법으로 작사, 작곡, 노래의 3박자가 완전일치를 이룬다.

노래가 히트하자 1960년 9월 가사의 한 대목을 제목으로 붙인 영화 ‘울려고 내가 왔던가’도 나왔다. 김화랑 감독이 연출한 로맨스 멜로물로 김진규(태현 역), 도금봉(성실 역), 엄앵란(옥경 역), 황정순(태현의 어머니 역), 황해(윤식 역) 등 인기배우들이 출연했다.
이 노래의 또 다른 에피소드는 작사자와 작곡자 이름을 다른 사람(고명기 작사, 이봉룡 작곡)으로 바꿔 다행히도 금지곡 대상에선 빠졌다는 점이다. 제6공화국 들어서야 월북예술인들이 규제에서 풀리면서 원 작사가와 작곡가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 노래를 만든 사람으로 알려졌던 이들이 자신들 작품이라며 소송을 냈으나 결국 원작자가 밝혀진 일화도 있다.

 
 

월북 작사가 조명암은 북한에서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 5대 혁명가극을 무대에 올리는 대본의 창작책임자로 교육문화성 부상을 지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딴 ‘조명암가요제’는 ‘아산시민가요제’로 행사이름이 바뀌었다. 조명암은 광복 후 좌익 활동을 하다 월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위직을 지냈다. 작곡가 김해송도 6·25전쟁 중 행방이 묘연해져 월북설과 납북설이 떠돌면서 두 사람 이름을 오랫동안 들먹일 수 없었다. 북한에선 ‘선창’이 계몽기 가요로 분류돼 불렸다.

 
 
예산 덕산온천 원탕호텔 앞에 노래비
2000년 6월 고운봉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온천 원탕호텔 앞의 로타리 공원에선 ‘선창’ 노래비 제막식이 있었다. 가수 고운봉은 이날 ‘선창’을 눈물로 열창했다. 해마다 예산에선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고운봉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고 선생은 1920년 2월 9일 예산서 태어나 예산농업학교를 다녔다. 200여곡을 발표했던 그는 대중가요 작사가 고명기의 아우다. 짙은 우수가 깔려 있으면서도 점잖고 깔끔한 창법과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뿜어낸 가수다.

그는 17세 되던 1937년 가수가 되고 싶어 아버지의 돈 궤짝에서 돈을 훔쳐 상경해 강석연, 채규엽, 이난영, 이은파, 최남용 등 일류가수들이 많았던 태평레코드사를 찾았다. 그곳엔 극작가 겸 작사가이던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이 지휘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만주 등지로 악극단 공연을 떠나기 위해 바빴지만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고명득의 노래실력을 테스트하고 보살펴줬다.
그렇게 해서 그는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면서 ‘운봉’이란 예명을 얻어 1939년 데뷔곡 ‘국경의 부두’(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를 발표했다. 잔잔한 애수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압록강 국경지역의 처연한 분위기를 노래해 대중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뒷면에 실린 ‘아들의 하소’도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담은 애잔한 노래다. 고운봉은 이 2곡으로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2001년 8월 1일 뇌경색으로 별세
그는 1940년 초반까지 ‘홍루야곡’ ‘남월항로’ ‘남강의 추억’ ‘달뜨는 고향’ 등을 취입했다. 이 중 ‘남강의 추억’(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은 빅 히트곡이다. 무적인은 작곡가 이재호의 예명이다. 고운봉은 1940년 가을 이철 사장에 의해 오케레코드사로 스카우트돼 ‘홍등일기’ ‘선창’ ‘백마야 가자’ 등을 발표했다. 1942년엔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옮겨 ‘통군정의 노래’ ‘황포강 뱃길’ 등 몇 곡을 취입했다.

그 무렵의 작품들 중엔 친일성향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복이 되고 1946년 일본으로 간 고운봉은 10여년 재즈, 록, 칼립소풍의 미국대중음악에 빠져 연습하다 1958년 돌아와 이듬해 히트곡 ‘명동블루스’를 취입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명동에서 새 삶의 의지를 불태워가던 지식인들의 내면풍경을 실감나게 부른 명곡이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에 취임했고 1998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화려한 가요계 생활을 한 그는 2001년 8월 1일 노환에 따른 뇌경색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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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상
wss4044@hanmail.net
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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