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연재순
▶1회-대학진학이전 시기
▶2회-대학입학이후 도쿄상선학교 학창시절
▶3회-상선학교 학창시절
▶4회-졸업이후 취업과 마지막 승선
▶5회-육상(서울)에서의 새 생활
▶6회-전쟁, 그리고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7회-해양대학을 떠나 만학, 해사문제연구소 설립
▶8회-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9회-해운산업합리화위원장과 해운학회 설립



해운특강의 개최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연구소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노력은 위에 서술한 심포지엄의 개최 전후에도 끊임이 없었다. 그 방안으로 해운과 관련된 특강을 개최하였고, 해운관련 전문 서적을 출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충실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매우 열악하였고 내 능력도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먼저 연구소가 개최한 특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1972년 12월 12일과 13일에 성균관대학교와 공동으로 제1회 제2회 나누어 성균관대학교 무역대학원 강당에서 특강을 개최하였다. 제1회의 특강에서는 주요한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국제수지와 해운’이라는 주제로, 제2회의 특강에서는 이준수 한국해양대학 학장이 ‘기술혁신과 해운’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는데, 이 모두는 무역 업무에서 필수적인 해운을 무역학과 학생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는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교수와 주요한 사장 및 이준수 학장의 헌신적인 협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72년 6월 5일과 7일에는 일본의 해운학자이며 해운업체의 경영인이기도 한 일본의 오카니와(岡廷博)박사를 연사로 모시고, 2회의 특강으로 각각 ‘해운경영과 해운정책’ 및 ‘해운산업구조의 변화’라는 주제로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과 부산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국제해운에서의 새로운 흐름을 우리 해운업계에 인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에는 일본 이스턴 쉬핑(Eastern Shipping)의 지원이 있었다.
1972년 8월 3일에는 한일 간 교수 세미나계획으로 일본 교수단의 일원으로 내한한 일본 관서대학의 가메이(龜井利明) 박사를 맞아,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박사의 주선으로 대학무역진흥회관 수출정보센터 회의실에서 ‘해수유탁과 선주책임’에 대한 특강을 주최하였다. 이 뒤 특강의 개최는 한동안 없었다.

한참 뒤인 1978년 4월 27일과 28일에 걸쳐서 ‘1978년 유엔해상문건운송조약(1978 Hamburg Rules)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의 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이균성(李均成) 교수와 대한해운공사의 윤민현(尹玟鉉) 보험과장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한국선주협회의 지원으로 1978년 3월 6일부터 31일까지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유엔무역법위원회(UNCITRAL,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Trade Law) 주최의 함부르크규칙 채택회의에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파악한 함부르크규칙의 정확한 내용과 그것이 앞으로 한국해운에 미칠 영향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두 사람이 함부르크회의에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선주협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선주협회의 이러한 지원은 해운항만청이 권장한 결과였다. 해운항만청은 날로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해운 및 항만행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1976년 3월 13일 건설교통부장관 소속하에 설치되어 해운과 항만의 운용 및 건설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중앙행정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그 뒤 1997년 12월 해운항만청으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해운항만청이 교통부 외청으로 발족한 것은 상술하였듯 전문적인 식견이 요청되는 해운 및 항만 관련행정에 전문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해운항만청 자체는 물론 그 소속 공무원들 역시 대부분 전문적 식견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해운항만청 소속 공무원들은 함부르크규칙을 채택하기 위한 유엔무역법위원회(UNCITRAL,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Trade Law) 회의가 열리는 시점에도 함부르크규칙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나머지 선주협회로 하여금 국내 전문가 2인을 선정하여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던 바, 이들이 파악한 내용을 해사문제연구소로 하여금 널리 알리도록 한 것이 이 세미나였다. 해사문제연구소는 서울 세미나에 이어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콘테이너 수출입절차와 함부르크규칙 해설 세미나’를 부산 동해투자금융빌딩에서 개최하였다.

이 부산 세미나에서는 서울세미나의 경우와 달리 ‘콘테이너 수출입철차와 터미널의 운영’(이윤수, 고려해운 상무), ‘콘테이너 및 내장화물의 통관’(김동수, 부산세관 분석3과장), ‘부산항 콘테이너터미널 운영제도의 발전(최재수, 부산지방해항만청 항무국장) 및 ’함부르크규칙과 운송인의 책임(윤민현)이라는 4개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함부르크규칙과 관련된 이 2개의 세미나는 해사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유료로 개최한 세미나였다. 서울 및 부산 세미나 모두에 수많은 실무자가 참여하여 나로서는 매우 기뻐했지만, 해사문제연구소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소개해 두어야 할 사람이 최재수(崔在洙)씨이다. 최재수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으로 교통부에 근무한 공무원이었지만 나와 접촉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업무의 일환으로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하였는데, 당시의 사정은 4.6배판 80페이지를 채울 필자를 구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현안에 대하여 좌담회를 통하여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좌담회의에는 으레 당시 해운국장인 정영훈(鄭泳薰)씨가 동원되었는데, 정영훈씨가 동원되는 경우 최재수씨가 항상 수행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한 수행원인 줄 알았는데 외항과장이라는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아 수행하는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담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항상 정영훈씨의 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행정가로서 뚜렷한 식견과 과감한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해운에 대한 열정이었다. 말하자면 해운에 대한 전문가가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고자, 자신이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상하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 배우는 열정이었다. 후술되겠지만 이 사람이 해사문제연구소에 기여한 바는 참으로 컸다.

1978년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우리나라 해운업계 최초로 해운기업 최고경영자를 충청남도 도고호텔로 초청하여 ‘해운기업 최고경영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환경문제의 당면 과제’(노융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 ‘세계 해운구조의 최근동향과 한국경제의 과제’(고승제, 한국과학심의회 상임심의위원), ‘한국해운의 현황과 전망’(김창갑, 해운항만청 해운국장), 및 ‘새 시대의 경영인상’(안승욱, 숭전대학교 교수) 등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이 세미나는 최고경영인이 알아야 할 새로운 흐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해운업계 최고 경영자 간의 친목과 의사소통이었는바, 소기의 목적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79년 6월 15일에 제3회 해운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해운정보센터와의 공동 주최로 해운 및 항만 관련 분야의 최고 경영자를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주제와 강사는 다음과 같았다.

국제해운의 동향과 한국경제, 조동필, 고려대학교 교수
한국 해운업의 역사적 고찰, 조기준, 고려대학교 교수
한국 해운경제의 현황과 전망, 강창성, 해운항만청장

이 세미나는 당대의 석학인 고려대학교의 조동필 교수와 조기준 교수, 그리고 해운항만청 강창성 초대 청장을 초청하였다는 것 외에, 해운 및 항만관계 업체의 최고경영자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아 서로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행사였다. 그러나 이 역시 연구소 본연의 업무와 다소 거리가 먼 것들이었고,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재원의 조달과도 거의 관련이 없는 업무였다.

연구용역의 수행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연구를 수행한 것은 1974년 10월의 일이다. 즉 한국선주협회로부터 ‘해상법과 국제조약’에 대한 연구용역을 수탁 받아 수행하였다. 위탁기관은 한국선주협회였지만, 이 같은 연구용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선주협회로 하여금 이 연구를 위탁하도록 권장한 것은 교통부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국제해사기구를 중심으로 각종 국제협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에서 해상법과 관련되는 제반 문제가 시급히 대응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사정에서 교통부는 한국선주협회로 하여금 용역을 위탁하도록 하였다. 이를 적극 추진한 사람은 해운항만청 해운국 외항과장으로 있던 최재수(崔在洙)씨였다. 이러한 경위로 연구를 수탁한 해사문제연구소는 서돈각(徐燉珏, 전 동국대학교 총장), 손주찬(孫珠瓚,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장), 최재수(해운항만청 해운국 외항과장) 및 김선모(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등 제씨로 자문위원을 구성하고, 나와 배병태(裵炳泰, 한국해양대학 교수) 및 이균성(李均成, 인하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등으로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연구에 착수하였다.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해상운송인의 책임과 국제조약’에 관한 부분은 이균성 교수가, ‘선박채권자의 채권담보제도’에 관한 부분은 배병태 박사가 각각 연구한 결과를 기초로 이균성 교수가 집필하였다. 이 연구는 1974년 12월 완료되어 보고되었는데, 제1부(해상운송인의 책임과 국제조약) 및 제2부(선박채권자의 다보제도)로 된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즉 제1부는 제1장 서로(선하증권의 기능과 그 약관의 규칙의 필요성), 제2장 선하증권조약의 성립과 해상운송인의 책임, 제3장 선하증권조약 개정과 컨테이너운송 법제의 동향 및 제4장(결어)로 되어 있고, 제2부는 제1장(서론), 제2장 선박운선특권), 제3장(선박저당권) 및 제4장(결어)로 되었다. 이 연구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위수탁 계약에 의해 연구소가 수행한 연구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운 배병태 교수와 이균성 교수라는 인재를 발굴해 내어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큰 뜻을 지니고 해사문제연구소를 주도하여 설립하였다고 해도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수행할 수 없는 연구였다.

1975년 12월에는 인천지방해운국으로부터 ‘인천항 운영효율화 방안에 관한 연구’에 대한 용역을 위탁받아 수행하였다. 이 연구의 수탁은 뜻밖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동양 최대의 갑거 및 전면 도크화 공사가 1974년 5월 10일에 완공된 데에 따른 후속조치로, 인천항만의 운영 효율화를 모색하기 위해 당시 민영환(閔泳煥) 인천지방해운국장이 위탁한 것이었다. 연구소로서는 반갑기 한이 없는 연구의 수탁이었지만, 항만연구에 관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태여서 난감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사문제연구소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항만운영에 관한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나는 성균관대학교 한동호 교수와 의논하였는바, 한동호 교수의 알선으로 한동호 교수를 포함하여 고려대학교 경제연구소 조덕구 총간사, 원광대학교 사회개발연구소 조갑원 소장 및 해사문제연구소의 김희석 연구위원 등으로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집필은 해사문제연구소 황근식 상무이사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재일 상임연구원이 담당하였다.

이 연구에서 해사문제연구소는 첫째, 인천항이 지니는 일반적 여건, 자연적 여건 및 경제적 타당성 등에 입각한 수송체제 확립 등의 중요 문제점을 검토, 분석하고, 둘째, 인천항의 운영효율화 및 경제적 효과의 제고를 위한 조기 개발의 필요성을 도출하고, 셋째, 항만 투자시설 순위에 대한 정책수립 과정에서의 우선 채택과 아울러 바람직한 연차별 투자예산의 책정을 유도하고, 넷째, 인천항이 담당할 수 있는 화물과 선박의 유치방안을 제시하는 동시에, 끝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순응하는 인천항의 개발확충을 위하여 2000년까지의 장기전망을 시도하였다.

한동안 뜸했던 연구용역의 수탁이 1978년에 이르러서는 폭주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 첫째가 ‘공동배선문제를 포함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연안해상수송실태조사연구’였는바 한국해운조합으로부터 수주하였다. 해상수송은 수송의 대량성과 운임의 저렴성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연안수송의 경우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내부적으로 전근대적인 경영상태, 외부적으로는 과당경쟁, 해운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못한 데에 따른 적기 배선의 차질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 연구에서는 ① 연안 해운기업의 적정규모화 기준, ② 재정적 지원, ③ 선질의 개선 및 적정 선복량의 규모 및 ④ 연안화물의 확보와 배선 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내지 정책의 확보가 모색되었다. 이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해사문제연구소는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였는데, 연구비가 지나치게 소규모여서 외부의  전문 연구 인력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대안으로 나는 연구소 월간 해양한국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이원철씨에게 연구와 집필 모두를 위임하였는데, 별다른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이원철씨가 스스로 공부해 가며 연구를 완수하였다. 나는 이로써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7월과 9월 등 2개의 연구용역을 수탁 받아 수행하였다.
그 하나는 ‘한일간 콘테이너선 운항의 풀링 시스템 연구’였는데, 이 연구를 위탁한 단체는 당시 아직 실체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한일 간에서 컨테이너 피더선을 운항하는 업체와 그들이 투입한 피더선이 갑자기 늘어난 상태여서, 눈앞에 닥친 과당경쟁(過當競爭)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일 간 컨테이너 수송협의회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주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업체는 고려해운, 남성해운, 대진해운, 동영해운, 세방해운, 조양해운, 코리아라인, 현대엔터프라이즈, 협성선박 및 흥아해운 등 10개 업체였고, 이들이 투입한 선박은 30척에 이르러 있었다.

이처럼 투입된 선박만으로도 과당경쟁이 명약관화한 상태였고, 1981년 말에는 부산항 제2 컨테이너 터미널의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한일 간 컨테이너 피더 선사들이 대국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건설적인 공동행위를 시급히 모색하여야 할 시기였는바, 그에 필수적인 풀링 시스템의 합리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이 연구를 위탁한 것이었다. 이 연구를 발주한 협의회의 업체들 중에 이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던 것으로 보였지만,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중립성의 문제로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사문제연구소에도 이에 대한 전문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보험연수원의 김동수(金東洙) 간사와 오주해운의 안철도(安哲道) 부장을 연구 및 집필위원으로 선임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당시의 사정은 전문지식을 가졌든 아니든 높은 지위의 인사를 연구위원으로 선정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해운에 있어서 정기선사간의 ‘풀링 협정(pooling agreement)’에 관해서는 국내에 경험을 지닌 사람은 물론,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도 해운동맹의 운영방안 중 한 가지로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동수씨는 5.16 직후 시행된 보험회사의 통폐합 방안을 주도한 사람이었고, 안철도씨는 해운대리점 업계의 실무책임자에 불과하였지만 그 즈음 해운동맹과 관련된 논문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어서 말 그대로 적임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을 연구자로 선택하였다. 김동수씨를 천거한 사람은 한동호 교수였고, 안철도씨를 천거한 사람은 연구소의 이원철씨였다. 이 연구의 결과, 특히 선사별로 계산한 세어링(sharing)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뒷날 한일간콘테이너수송협의회의 결성과 그 운영에 매우 중요한 뼈대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관세협회가 발주한 ‘콘테이너화물의 원활한 유통에 관한 연구’로 1979년 12월에 완료하여 보고되었다. 이 연구는 당시 고려콘테이너터미날주식회사의 사장 박현규씨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한국해사문제연구소로서 이 연구의 수주는, 처음으로 해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단체로부터 수주한 것이라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각별한 신경을 경주하였는바, 나 스스로 연구책임자가 되어 민성규(閔星奎, 한국해양대학교수), 황근식(黃根植, 연구소 전무이사), 이윤수(李允洙, 고려해운 상무이사), 이원철(李源哲, 연구소 연구위원) 등 4인을 연구위원으로 하는 외에, 강영구(姜榮九, 한국선박대리점협회 상무이사), 강이수(숭전대학교 교수), 박현규(고려콘테이너터미날 사장) 및 한동호(성균관대학교 교수) 등 5인으로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1966년부터 세계 정기선업계에 컨테이너화가 도입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서 우리나라도 1974년에 인천항, 그리고 1978년에 부산항에 컨테이너 터미널을 개발하여 개장하였지만, 이에 대한 장기계획의 미흡으로 컨테이너 운송을 위한 시설, 제도 및 운영 면에서 하역, 보관, 통관, 감시 및 내륙운송 등의 유관시설과의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협의 및 조정과 주도한 사전 검토가 부족한 나머지, 컨테이너의 원활한 통관에 있어서 많은 애로와 문제점에 봉착하고 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제1장 서, 제2장 컨테이너운송, 제3장 컨테이너터미널, 제4장 우리나라의 수출입 무역화물, 제5장 우리나라 주요 항만시설과 컨테이너부두, 제6장, 컨테이너 운송과 통관제도, 제7장 컨테이너 유통 상의 문제점, 제8장 외국의 컨테이너 유통관계 제 제도, 제9장 개선방안과 대책 및 제10장 결론 및 건의로 구성되었는데, 중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된 부분은 제8장과 제9장이었다.

이처럼 1974년 이후 1979년에 이르기까지 제법 많은 연구를 수주하여 완료함으로써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연구소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점만 해도 나로서는 어느 정도 만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연구의 수주와 완성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의 재정은 아직도 열악하여 전문 인력을 스스로 갖출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물론 연구소 내부의 황근식 상무나 이원철 연구위원이 몇몇 연구에 참여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조치였다.

최재수
최재수
해운항만사의 집필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소는 모처럼 ‘한국해운항만사’의 집필이라는 연구다운 연구프로젝트를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수주하였다.
어떤 계기에서 해운항만청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또 이 프로젝트의 발주 및 제반 업무를 담당한 해운항만청의 부서는 해운항만청 재무국이었는데 어떤 연유에서 재무국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는가도 나는 알지 못하였다. 다만 당시 재무국장이었던 최재수씨가 밝힌 바에 따르면, 해운 및 주무 관청으로서 발족된 해운항만청으로서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해운 및 항만을 체계적이며 합리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세계의 관련 정보를 제 때에 수집하여 업계에 알리고, 나아가 구체적인 정책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내가 설립을 주도한 해사문제연구소는 순수 민간 연구기관이어서 관의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보아 선주협회 내에 한국해운정보센터를 설치하도록 하였는바, 한국해운정보센터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1979년 여름 어느 날 최재수 국장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상과 같은 경위를 설명하고는, 한국해운정보센터는 그만한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고 하니, 해사문제연구소가 맡아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서슴없이 해사문제연구소가 맡겠다고 하였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해사문제연구소 역시 충분한 인력을 갖지 못하였는데,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사문제연구소가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맡겨만 주신다면 외부의 전문 인력을 망라하여 모을 자신은 있습니다.”
“아시겠습니다만 정부의 일이란 까다롭기만 하고, 재정지원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계약기간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지체상금(遲滯償金)도 책임지셔야 합니다.”
나는 막무가내로 자신이 있으니 맡겨만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결과 이 프로젝트를 해사문제연구소를 맡게 되어 기획 및 편집 담당, 자문위원 및 집필자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기획 및 편집 : 윤상송, 황근식, 이원철
자문위원 : 김재근(한국선급협회 회장, 학술원 회원), 김선모(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석두옥(전 대한해운공사 사장), 윤기선(전 국회 교체위원회 전문위원), 조기준(한국경제사학회 회장, 학술원 회원), 최석환(세광종합기술단 사장), 최재수(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한동호(성균관대학교 교수)
집필 : 김희석(한국해운정보센터 이사장), 남동희(한국해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노창래(한국선박대리점협회 전무이사), 서병기(동지상선주식회사 사장), 손태현(한국해양대학 교수), 양재희(한국항만검정협회 전무), 윤기선(전 국회교체위원회 전문위원), 윤인석(전 에버렛기선회사 한국지배인), 이원철(한국해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준수(한국해양대학 교수), 황근식(한국해사문제연구소 전무이사)

이 프로젝트는 크게 ‘고대에서 근세까지의 항운’을 서술한 제1편과 ‘근대적 해운의 태동과 요절’을 서술한 제2편, ‘현대해운의 전개’ 과정을 서술한 제3편 및 ‘근대해운의 발전’을 서술한 제4편으로 분할되어 진행되었다. 제1편과 제2편은 우리나라라 일제강점기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의 기록인데, 이 가운데 제1편은 우리나라 역사 이래 근대해운의 도입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운활동 내지 우리 한민족의 해상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그리고 제2편은 근대해운의 도입움직임이 시작된 때로부터 좌절, 그 이후 일제 강점기시대의 해운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그리고 제3편은 광복 이후 우리 해운의 재건이 논의되고 준비되던 시대에 관한 서술이고 제4편은 1960년대 이후, 즉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추진된 이후의 역사적 서술이다.

최재수씨와의 얘기에서 인력동원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있는 것처럼 장담하였지만, 집필진을 찾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8.15 광복 이전까지와 광복 이후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시행되기 이전까지의 경우 해운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에 관한 전문가를 찾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내가 한국해양대학장을 역임하였던 결과 해양대학의 손태현 교수가 연세대학교에서 우리해운의 근대사를 연구하여 부산동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교통부에 근무한 남동희(南東熙)라는 분이 해운10년약사를 저술하였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 이 두 분을 찾아 필진에 참석시켰다. 그 결과 제1, 2편은 전적으로 손태현 교수가 담당하였고 제3편은 남동희씨가 담당하였다. 다만 제3편 가운데 선박대리점과 관련된 부분은 나의 4촌 아우이기도 한 윤인석(尹麟錫)이 담당하였다.

제4편의 경우 선원의 해외송출과 관련된 부분은 서병기씨, 해기사교육과 관련된 부분은 이준수씨, 그리고 항만과 관련된 부분은 황근식씨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연안해운 및 외항해운 등에 관해서는 이원철씨가 담당하였고, 기타 소소한 여러 부문에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는데, 전체적인 구성 및 교정 등은 이원철 씨가 전적으로 담당하였다. 결과론이지만 1년여의 짧은 기간에 200자 원고지 1만 7,000여 매의 원고를 작성하여 국배판 1,500여 쪽의 역사책을 서술하여 출간하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를 우리 연구소가 해내었다. 이는 두고두고 연구소 관계자 모두의 자긍심이 되었으며, 그 내용은 그 이후 관련 부문 연구자의 기본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던 것은 물론 반드시 해내겠다는 나 자신의 의지도 그 어느 때 보다 강력하였지만, 이원철씨의 헌신적인 사명감과 노력이 있었던 때문이다. 이원철씨 자신도 이를 부인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이원철씨는 마침 사무실 집기로 마련한 복사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꼭 남겨두어야 할 일은 선주협회 전무로 근무한 김선모씨의 인품이다. 해사문제연구소가 이 연구 프로젝트를 수탁할 무렵부터 김선모씨는 앓기 시작하여 출근하는 날보다 출근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이러한 사정과 선주협회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적에서 한국선주협회는 육군대장 출신의 김용배(金容培) 장군을 새 이사장으로 영입하고, 전무이사에 해운항만청 출신 최재수(崔在洙)씨를 새로 영입하였다. 이때까지 김선모 씨의 직위는 상무이사였는데, 새로 취임한 최재수씨와의 형평성 내지 장기 근무에 대한 예우로 전무이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이로써 김선모씨는 전무이사로서의 예우를 받았을 뿐, 전무이사로서의 업무는 한 번도 해보지도 못한 채 별세하였다. 그런데 별세 며칠을 앞두고 김선모씨는 이원철씨에게 자기의 집으로 들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이원철씨가 김선모씨에게 달려간 즉 자신의 집 지하실에 모아놓은 자료가 있으니 가져가 활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자료들을 모두 해사문제연구소로 옮기었는데, 좀 더 일찍 김선모씨의 자료를 인수받을 수 있었다면 보다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원철씨는 한탄하였다.

윤상송의 해운론을 기초로 박현규와 이원철이 다시 쓴 해운론
윤상송의 해운론을 기초로 박현규와 이원철이 다시 쓴 해운론
해운 전문서적의 발간
앞에서 조금 언급하였지만,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정식 직원을 둔 것은 1973년에 월간 해양한국의 창간을 앞두고 김효형씨를 영입한 때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정하여진 일도 없었고, 직원들의 월급을 지급할 능력도 없어, 천경해운에서 지원해 준 사환과, 김종욱(金鍾旭, 당시 천경해운의 상임감사)씨, 서병기씨가 지원해 준 대명 해기사(10기생 이향복, 12기생 박종무)들이 무보수로 출근하여 도와주는 일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서병기씨가 지원해 준 해기사들은 주로 일본 산코선박에 승선하던 해기사들로서 승선을 대기하고 있던 아주 우수한 해기사들이었지만, 어쩌다가 있는 특강 외에는, 그들 해기사들도 출근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낼 만큼 별다른 일이 없었다.

월간 해양한국을 10월호로 창간하기에 앞서 이원철씨를 편집담당으로 영입하였다. 이는 연구소를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데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을 뿐,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거나 가진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일련의 사업으로 1974년 6월 6일에 일본에서 출간된 ‘해상콘테이너수송실무지침’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때 마침 세계적으로 컨테이너화가 무섭게 진전되어, 컨테이너 피더선이 일본 몇 개 항구와 부산 사이에서 운항되고 있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해운업계에는 컨테이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컨테이너와에 대한 이론과 실무를 우리 해운업계에 전달하기 위한 조치였다.
1975년 3월 28일 개최된 이사회에는 천경해운 김윤석(金允錫) 사장과과 연구소의 황근식 상무를 새로 이사로 선임하고, 황근식 상무를 전무이사로 보임하였다. 황근식 전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해사문제연구소 방계 조직으로 1975년에 설립한 한국해외취업납세조합과 해사문제연구소의 살림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 데에 따라 상무로 영입한 분이었다.

1975년 8월 15일에는 내가 박사학위를 획득하기 위해 쓴 논문을 중심으로, 그동안 내가 경험한 해운경영 및 해운실무 등을 바탕으로 ‘해운론’이라는 저서를 써서 연구소에서 발행하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부족한 저술이지만, 중흥기에 접어든 우리나라 해운업계에 교과서조차 없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온 교과서여서 대학 및 대학교 무역학과 강의 대한 교재 및 업계 신입사원에 대한 지침서로서 뜻했던 것 이상으로 널리 읽혔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1976년 8월 15일에는 이균성(李均成) 교수의 ‘국제해상운송법연구’를 출간하였다. 이는 신진 학자의 연구의욕을 고취하고 까다로운 국제 해운 업무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대한 법적 지침을 업계에 제공하기 위하여, 이균성 교수 자신이 적을 둔 인하대학교로부터의 지원과 연구소의 일부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연구소로서는 큰 모험이었지만, 성과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연구소 운영의 어려움
이상에서 서술하였듯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연구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월간 해양한국을 창간하였고, 학술발표회 및 세미나를 활발히 개최하고자 노력하였고, 연구용역도 꽤 많이 수탁하여 수행하였으나 그런 활동이 연구소의 재정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다. 1974년 가을에 천경해운이 을지로 2가 163-3에 소재하는 보승빌딩을 매입하여 본사를 이전함에 따라 천경해운이 할애하여 준 40평 정도의 사무실을 무료로 사용할 뿐 아니라 사무실 집기까지 제공받는 처지를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꿈꾸어 온 연구 활동은 아쉬운 대로 수행하고 유지하는 형편이었지만,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재정상의 어려움에서는 벗어나지도 못하였거니와 가까운 장래에 벗어날 비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상만 가지고 있었을 뿐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만든 연구소를 해체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김윤석 사장을 조용히 만나 연구소를 인수하여 운영하여 줄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자 김윤석 사장은 펄쩍 뛰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운영이 정 어려우시다면 범양전용선이나 코리아라인과 같은 큰 회사에 말씀을 드리세요. 저는 그런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벅찬 일이고 소질도 없습니다. 설령 저에게 소질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맡고 싶다 하더라도, 기왕에 제가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소문이 난 터이므로, 제가 덜렁 운영을 맡고 나선다면, 결국은 저에게 다른 야심이 있어서 도와드린 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뒤 이 사람 저 사람 유력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천경해운 김윤석 사장에게 했던 제의와 같은 제의를 하거나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돈이 벌리지 않는 연구 사업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해외취업납세조합의 설립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원래 없는 법이지만, 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을 조직하기만 하면 해외에 취업하고 있는 우리 선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설혹 뜻과 같이 이루어지 않는다 해도 해사문제연구소에 큰 부담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은 부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한국해기사협회가 이미 오래 전부터 같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이 잘 하고 있는 사업을 뺏어 오는 꼴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납세조합의 설립을 적극 권유하였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에 납세조합이 또 생긴다면 해기사협회에서 영위하고 있는 납세조합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겠죠. 그러나 서울지역에 주거를 둔 선원가족에 대해서는 서울에 납세조합이 있는 것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한국해기사협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해사문제연구소도 영리기관은 아니지 않습니까? 해외취업선원과 그 가족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을 두려워 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1975년 1월 6일에 해사문제연구소의 산하기관으로 ‘한국해외취업납세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제정하고, 1월 16일자로 서울지방국세청장의 설립인가를 취득하였다. 이로써 해외취업선원이 취득하는 을종근로소득세의 납세의무를 대행하게 되어 해외취업선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납세의무의 대행에 따르는 정부가 지급하는 교부금 수입은 조합 자체의 운영이나 조합원을 위해서만 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조합원들의 월간 해양한국 구독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연구소의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납세조합이 설립된 첫 해인 1975년도의 연 납세인원은 9,622명이었고 연간 납세액은 5억 1,740만 원이었으며 조합에 가입함으로써 납세조합 공제 혜택을 받은 금액(산출세액의 20%)은 1억 1,966만 원에 이르렀다. 1976년의 연 납세인원은 7,971명으로 1975년도에 비하여 17% 정도가 감소하였는데, 이는 해외취업선원의 급여에 대하여 30만원 이상에 상당하는 금액을 비과세로 하였던 것을 1976년 1월부터 50만원으로 인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간 납세액은 7억 316만원으로 늘었는데, 이는 급여가 인상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간 납세인원이나 납세액은 해마다 세법의 개정이나 선원의 급여에 따라 들쑥날쑥하였지만, 이 같은 납세조합의 수입에 의한 지원(월간 해양한국의 구독료)으로 해사문제연구소의 재정은 한결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연간 결산이 끝난 어느 날 천경의 김윤석 사장을 찾아 내려가 큰 소리로 자랑하였다.

“김 사장, 김 사장 덕분에 해사문제연구소도 부자가 될 것 같아요.”
김 사장은 무슨 말인가 하여 나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해사문제연구소의 결산에서 처음으로 700만원의 흑자를 냈어요.”
“그래요? 축하합니다. 700만원이라는 돈이 큰돈은 아닙니다만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처럼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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