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부해운국에 의한 해운행정기능의 교통부 환원

1) 교통부해운국의 신설과 해운행정의 교통부 환원
미군정 당시 해상수송국 체제로 해상운송에 임하였으나, 해운행정(선박, 선원, 선박검사, 선박등록 등) 업무는 전담 부서가 있어야 마땅한 교통부(미군정시는 운수부)에 두지 않고, 해안경비대 등에 이관함으로써, 종전의 해운행정 기관인 해사국은 휴면상태에 들어갔음은 전호에서 기술하였다.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는 신생 국가답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교통행정을 전담하게 된 교통부는 민간해운업에 바탕을 둔 해운을 육성, 발전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교통부내에 해운국을 두었다. 이 해운국이 군정시의 해상수송국의 업무를 인계받아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해운국이 할 일은 신생 대한민국이 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해운을 적극 육성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군정체제하에서 각 부처로 분산되었던 해운행정 업무를 교통부로 환원하여 해운 조장행정을 펼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해운행정 업무를 교통부로 일원화하는 문제는 정부 기구들이 전부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비교적 원만하게 단시일 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업무를 주도한 사람은 조선우선에서 김용주 사장을 도와서 조선우선의 발전을 실무적으로 이끌어 오다가 조선우선 사장인 김용주의 추천을 받아 해운국장으로 취임한 황부길이었다.

2) 정부수립직후의 해운행정기구
1948년 7월 17일에 정부조직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 제24조에 “교통부 장관은 육운, 수운, 항공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고 규정하여, 해사행정 전반을 교통부가 관장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1948년 11월 4일에 교통부의 직제가 공포되었다. 이 직제의 특징은 과도정부 시에 분리하여 해안경비대 등으로 분산시킨 해사행정 업무(선박검사, 선원, 등록 및 항무 등)를 교통부 해운국으로 환원시킨 점이다.
교통부 직제에 의한 각과와 그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다.
해운국 - 서무과 : 서무, 인사, 사고처리 등, 자재구입 및 운용 등
- 해정과 : 해사관련 규제행정, 선박검사, 선박등록, 선원 및 항만관리
- 업무과 : 부영선박1)의 운영
- 표지과 : 표지의 설치와 관리운영

3) 해운업체간 업무협력기구로 한국해운조합 설립
일제 강점기의 말기 태평양 전쟁이 임박하면서 일본정부는 해운에 대한 정부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해운조합법을 제정하여 해운조합을 설립하고, 그 운영경비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원하였다. 8. 15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해운조합은 사실상 휴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해상수송수요가 있고, 이러한 수송수요의 대부분은 외국(주로 미국)의 원조물자가 부산으로 대형선에 의하여 운송되어 오면, 이것을 각 연안항으로 2차 수송하는 업무였다. 이것이 이권화되면서 이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많은 해운관련 임의 단체가 난립하여 활동하였다.

각 부처로 분산되었던 해운행정기능을 교통부 해운국으로 통합한 정부가 다음에 한 일은 난립된 해운관련 민간단체들을 정비하여 해운조합으로 통합 일원화하는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해운조합법도 총독부가 일본 법률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도 해운조합법이 시행중이었고, 이 법률은 헌법 부칙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도 의용법률로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었으므로 이 법률을 이용하여 해운조합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해운조합의 설립은 1949년 말에 대체로 다 이루어졌고, 각항별로 설립된 해운조합들이 모여서 대한해운조합연합회도 결성하였다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의 설립과 운영

1) 부영선박의 엄청난 적자와 대한해운공사의 설립
전술한바와 같이 해방 정국 하에서도 해운활동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에 적응할 수 있는 선대를 우리는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량 건조한 미국의 전시표준선박을 이용하여 해결하였다. 미국은 전시에 수송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1차 대전시에 뼈저리게 느껴서 2차 대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전시용 선박의 긴급건조를 서둘렀고, 약 5천척의 전시표준형 선박을 건조하였다. 이 선복량이 어느 정도냐면 1939년 말 현재의 전 세계 선복량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선박들은 2차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조기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종전이 되고나자 이 많은 선박이 처치 곤란이 되었다. 종전으로 전시수요가 격감하였고,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 세계경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해상운송수요가 격감하였다. 미국정부는 이 선박들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약 3분의 1은 예비선대로 하여 평소에는 계선해 두고 비상시에 활용하기로 하였고, 3분의 1은 미군용으로 활용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미국민과 동맹국 선박회사에 매각하기로 하였다.

이들 선박중 미군용으로 배정된 선박중 약 100척은 일본의 전후복구용으로 무상 대여되었고, 우리나라에도 2~30척의 선박이 배정되어 우리나라 연안에서 운송에 종사하였다. 우리나라에 배정된 30여척은 약 반은 운수부내에 해상수송국을 두어 군정에서 직영하였고, 나머지는 조선우선에 무상 대여하여 운항하도록 하였다.
미군정이 끝나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 미군 대여선은 그대로 교통부 해운국으로 이관되어 국가에서 운영하였다. 조선우선에 대여한 선박도 그대로 조선우선이 운영하였다. 그런데 정부가 인수하여 운항한 미군대여선이 불과 1년간의 운항결과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라 할 수 있는 30억 원의 운항적자를 기록하였다. 같은 선박을 같은 조건으로 대여 받아 운항한 조선우선은 관리권 인수 후 계속해서 흑자운영이었다. 똑 같은 미 전표선을 똑 같은 조건으로 대여 받아 운항하였는데 한 쪽은 계속 흑자 운영하는데, 정부직영선박은 3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기록하였으니 문제가 안 될 수가 없다. 이 30억 원이라는 금액이 어느 정도인가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참고로 말한다면 후술하겠지만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결실되어 국영기업체로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의 자본금이 5억원이었다. 그러니 국영기업체 6개사의 자본금이 1년 적자로 날아갔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가 국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교통부장관이었던 허정장관이 국회에 불려가 호되게 추궁을 받았고,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안을 마련하여 보고하고, 시행할 것을 강하게 요구받았고, 그렇게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2) 부영선박의 위탁운영 제의와 국영해운기업체 설립 안으로의 발전
국회로부터 호된 추궁과 함께 대책안 마련에 대한 숙제를 받아온 허정 교통부장관은 심사숙고 끝에 부영선박을 조선우선에 위탁하여 운영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같은 전표선을 운영하는데 한쪽은 막대한 적자이고, 다른 한쪽은 흑자이니 적자를 흑자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조선우선에 위탁 운항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허정 장관은 조선우선의 김용주 사장을 만나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부영선박을 관리 위탁할 것이니 맡아서 운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제안을 받은 김용주 사장은 심사숙고 끝에 이 안을 한 단계 높여서 역제안을 하였다. 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생각하건데 해운사업은 본래 대자본을 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 몇 사람의 힘으로는 원만한 운영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장관에게 해운사업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며 지금 같은 여건 하에서는 개인으로서 기천만불의 외화를 구할 수도 없어 개인 힘으로는 불가능한 사실이니 부영선박과 조선우성 선박을 합하여 반관반민의 정부출자회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더니, 허정장관이 적극 찬성하였다.

조선우선 사장의 훨씬 앞서나가는 역제안을 받은 허정 장관은 이를 적극 추진하여 1950년 1월 1일에 국영기업체로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의 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역시 국영기업체로 하여 대한조선공사도 설립되었다.

해운관련 양 국영기업체의 설립의 의의
①대한해운공사의 설립은 우리나라 해운발전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해운업이라는 것이 조선우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백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하여 국가가 직접 해운업 발전의 일선에 나서지 아니하였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은 지금보다 수십년은 늦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를 정부수립 후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②대한해운공사 설립에 결정적인 동인을 제공한 김용주 조선우선 사장이 당시 술회하였던 것과 같이 해운업은 국제적으로나 국내 경제적 환경으로 미루어, 개인 기업으로 국가 경제를 앞서서 이끌어갈 만 한 대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김용주 사장은 스스로 터득하고 자기가 맡아서 그런대로 잘 키워나가던 조선우선을 선뜻 내 놓고 정부가 국영기업체로 발전시켜 해운업을 진흥하도록 앞장섰다는 것은 대단한 용단이 아닐 수 없고, 우리나라 해운발전의 가장 크고 가장 처음 나타난 해운업 선각자가 아닐 수 없다.

③국영기업체로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한 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영기업체 설립으로 아주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일이었는데 이에 더하여 하나 더 덤으로 얻은 것이 대한해운공사와 함께 대한조선공사도 같이 국영기업체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대한조선공사의 설립 모체가 된 조선중공업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주도로 설립된 회사였는데 이 회사도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일본군의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해방을 맞이한 회사였다가, 대한해운공사와 동시에 국영기업체로 전환되었는데 어떻게 이 회사가 국영기업체로 전환되었는지는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다. 다만 이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에 있는 해운업과 조선업이 교통부 해운국에서 같이 관장하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의의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업은 해운업에 필요한 선박을 제작하는 산업으로 중공업 중에서도 가장 크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기계공업의 핵심 산업이다. 이 조선공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운업자가 가장 원하는 선박을 가장 저렴하고, 성능 좋도록 제작하여야 한다. 그런데 국가 기간산업에 속하는 해운업이나 조선업은 그 중요성 때문에 국가의 지도감독과 지원이 필수적인 산업이다. 그러므로 조선업의 전방산업이라 할 수 있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후방 산업인 조선업은 가까울수록 좋고, 그 지도감독과 지원을 전담하는 정부기관도 여러 가지 면에서 가까울수록 좋다. 이러한 두 산업이 교통부 해운국이라는 한 부처 안의 한 국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조치로 인하여 교통부 해운국 안에 조선과가 새로 설치되어 조선 산업의 육성과 발전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운업과 조선업의 동거상태는 1954년에 해무청이 신설된 후에도 계속되었다가, 1961년의 5. 16 혁명 후에 해무청이 갑자기 해체되어 해무청 업무가 각 부처로 분산, 이관되면서 조선 산업에 대한 관장업무가 상공부로 이관되었다.

조선 산업에 대한 업무가 교통부로 이관되고 국영기업체로 대한조선공사가 설립된 후 교통부는 의욕적인 조선 산업 육성계획을 수립, 추진하였으나, 뒤이어 일어난 6. 25사변과 그 후의 전후복구계획의 시행과정에서 자금조달면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양 국영기업체의 설립과 해운국 직제개편
1950년 3월 31일 교통부의 직제가 개정되어 해운국의 과의 업무가 다음과 같이 조정되었다.
이 직제 개정의 핵심은 1950년 1월 1일에 운영을 개시한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와 관련하여, 그간 군정 때부터 계속해온 부영선박의 운영을 대한해운공사로 이관하면서, 그간 부영선박의 운영을 담당하여온 업무과를 폐과하고, 역시 해운공사와 같은 날짜에 대한조선공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간 기계공업이라는 견지에서 상공부에서 담당하던 조선행정을 교통부로 이관하고 조선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서무과의 명칭을 감리과로 개칭한 것은, 그전의 서무과의 주 업무였던 부영선박의 운영에 대한 지원업무가 없어져서 업무량이 축소된 데에 따른 조치였다. 즉 그간 해정과가 담당하였던 항무업무를 서무과에 나누어 주고, 신설된 해운공사와 조선공사에 대한 감독업무를 서무과에 부여하게 됨으로써, 그 업무 내용에 맞추어 명칭을 감리(감독 및 관리)과로 바꾼 것이다.

해운국 - 감리과 : 서무, 감독, 항무
- 해사과 : 관리, 선박, 검사
- 조선과 : 조선, 조기.
- 표지과

설립초기 대한해운공사의 주요활동과 업무실적
1950년 1월 1일에 출범한 대한해운공사는 출범이래 1967년에 민간에게 불하되기 까지 별 문제없이 경영이 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조선우선의 관리권을 김용주가 위임받아 사장이 된 후 20년 이상을 정상적으로 잘 경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년간에 30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적자를 기록한 부영선박도 대한해운공사로 넘어 간 후로는 정상화되었다. 다만 부영선박을 이관할 때 선원들도 같이 이관되었는데 이 선원들의 질과 인원과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에서 기존 선원들과 교통부에서 이관된 선원간의 융화가 잘 안되어 이를 조정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다. 이하에서는 대한해운공사의 설립 후, 초대 사장 김용주가 사임하기의 기간까지의 주요활동사항에 관하여 이하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다만 이 기간 중의 활동사항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시항에 대하여 김용주 사장이 기록을 남긴 것이 있는데 그 하나는 1984년에 김용주 자신이 풍설風雪시대 80년, 나의 회고록이라는 자서전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에 여러 가지 참고 될 것이 많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말에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한국해운사를 발간할 때, 김용주가 자기의 해운관련 경험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힌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 무자료 중 나중 것은 사료보관차원에서 필자가 정리하여 해양한국 12월호에 발표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그 부분은 아주 간략하게 기술하거나 생략하고 여기서는 6. 25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일화만 간략하게 언급한다.

6. 25 동란과 해운의 역할
대한해운공사가 출범한지 6개월도 안되어, 6. 25 동란이 일어났다. 전시에 해운은 병력만큼, 아니 어느 면에서는 병력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서는 해공 소속 선박 전부를 징발하여 해군의 산하에 두어 군 작전에 활용하였는데 중요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전진과 후퇴 과정에서 수송임무 수행 : 북한의 기습남침이므로 아무 준비도 없던 남측은 전쟁 초기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발발 3일 후에 수도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정도였다. 후퇴이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당시 해공 선박은 대여선박까지 합하여 30여척이었는데 이들 선박은 주로 우리나라 연안에서 수송 활동 중이었으므로 군의 작전지시에 따라 인근 항만으로 가서 후퇴하는 군 병력과 정부기관요원 들을 운송하는 임무를 담당하여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이 후퇴작전은 전선에 가까운 인천항과 묵호항에서 시작하여 적의 남침속도와 발맞추어 작전에 참여하였다.

9. 28 수복 후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밀리기 시작한 속칭 1. 4 후퇴가 시작되면서 피난민 대열의 대홍수가 났다. 통일을 기원하면서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 및 국군, 그리고 북한 공산정권의 학정에서 겨우 해방되었다가 며칠도 안 되어 다시 북한정권하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한 많은 북한 주민들이 피난민 대열에 참여하면서 전국의 도로와 철도 그리고 항만은 대 혼잡을 겪게 되었다. 가장 심각하였던 곳은 북한 중에서 철도나 도로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빴던 함경도 피난민 들이었다. 죽을 각오로 피난길에 올라, 원산항 함흥항에 왔으나 더 이상 남진이 어려웠다. 수많은 피난민이 거기서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것을 본 해공 선박들이 국군 후퇴병력을 수송하면서 갑판에라도 태울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그 공간을 다 할애해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피난민을 어렵게 수송하여 부산에 내려놓게 되었다. 지금도 부산에는 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특히 함경도 피난민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때 수송한 피난민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누구도 수만 명은 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②LST 등 선박으로 직접 작전에 참여 : 상선도 필요에 따라 군함과 똑같이 전투에 참여하기도 한다. 6. 25전쟁 수행과정에서 제공작전과 제해작전은 UN군이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나 우리니라에도 해군이 엄연히 존재하였으므로 해상작전에 참여하여야 하나 당시 우리 해군은 군함을 거의 못 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미군 대여선이었던 LST나 FS형, 선박을 이용한 해상작전이 수행되었는데 영화를 만들어도 걸작이 될 만한 작전이 수도 없이 많았다.

③후방 수송 작전 : 전선지역의 해상작전은 온전한 장비를 갖춘 UN군이 담당하였으므로 우리 해군은 주로 후방수송 업무를 담당하였다. 최악의 전시경제하에서 그래도 해공선박들이 원활하게 활동하였으므로 부산에 대형선으로 입항한 원조물자들이 해공선박으로 연안항으로 재 운송되어 경제난 완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원조물자 말고도 생필품의 품귀로 어려움이 많았는데 군에서 수집한 탄피 등 고철을 모아서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이것을 팔아 시급한 생필품을 사오기도 하였다.

④선박과 선원의 동시동원 관행의 정착 : 6. 25 전쟁에 해공선박들이 동시 동원되면서, 그 부산물로 우리나라 해운은 아주 소중한 자산을 덤으로 하나 얻었다. 그것은 전시 선박 징발시 선박과 그 선박에 승선중인 선원의 동시동원 관행을 정착시킨 것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전쟁이 나자 해공선박은 전부 징발되어 해군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해군은 이 많은 선박을 운항하는데 필요한 고급 기술을 가진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이 운항 중에 해상에서 징발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선박동원과 동시에 선원도 같이 동원되었다. 선원들은 자연스럽게 군속신분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가장 간편하고 효율성이 높은 방법이었으므로 누가 제안할 것도 없이 그대로 시행된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 양상을 보이면서, 해기사를 중심으로 필요한 예비원의 확보 문제도 제기되었다. 병력자원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당연히 해기사도 징병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해양대학을 졸업한 해기사들이 육군으로 징집될 경우 졸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상선을 운항할 운항요원 부족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해양대학 당국과 해군, 그리고 해양대학 졸업생으로 해군에 징발된 선박에 승선중인 해대 졸업 고급해기사들이 협의하여 해양대학을 졸업한 해기사에 대한 징집면제제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해양대학 졸업한 해기사는 정해진 기간 동안 해기사로 승선근무하면 이것을 병역 이행으로 간주하여 징집을 면제해 주는 제도가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거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민소득이 2만불이나 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후에도 우리나라 선박에 우리나라 해기사가 승선하는 국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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