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해운과 해양정책:① 해운정책편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집권기간(`948~1960)중의 역사기술의 대부분이 건국초기의 다양한 정치적인 움직임과 그 후 바로 일어난 6. 25 동란으로 인한 전시비상체제, 그리고 휴전 후의 전후복구에 밀려서 해운이나 해양 정책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본 결과 이 기간 중에도 몇 가지 괄목할만한 해운과 해양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하에서는 이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국영기업체로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여 해운과 조선에 관하여 힘쓰겠다는 정책의지를 밝힌 것이다.
둘째는 1952년 1월 18일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일본과 한국간의 해양에 관한 경계를 확실하게 설정하여 우리 해역으로 획정된 해역 안에서 일본 어선들의 불법어로작업을 강력하게 단속하였다는 점이다. 이 해양주권선언인 평화선의 설정과 이 평화선을 지키기 위한 행정체제의 정비에는 신성모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한국해양대학의 교육을 정상화시킨 점이다. 여기에서도 영국선장 출신으로 알려진 신성모씨의 역할이 컸다.

1. 대한해운공사의 설립
 건국초기인 1950년 1월 1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기업체로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가 설립되었다. 건국초기에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다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경제정책방향이 대외진출을 통한 국부 창출에 역점을 두었음을 나타내는 좋은 상징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뒤이어 일어난 6. 25동란으로 인하여 당초 기대하였던 대외적인 진출이나 해양입국이라는 원대한 꿈은 일단 몇 년 뒤로 미루어야 하였으나, 전란 속으로 휘말려든 우리나라를 전란속에서 구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전술하였으므로 생략하고, 여기서는 대한해운공사 창립의 실질적인 주역을 맡았던 김용주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기술하면서 건국 초기와는 달리 이승만 정권이 약간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김용주의 능력을 인정한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주는 원래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던 두 사람이 정부 수립후 갑자기 가까워진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김용주가 상당한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어렵게 조선우선주식회사의 관리권을 획득하여 몇 년을 고생하여 경영정상화 한 후, 김용주 스스로가 자진하여 상당한 경제적인 이권(거액의 재산)인 조선우선주식회사의 관리권을 포기하고, 이를 흡수하여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하도록 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상당히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대한해운공사 창립과정을 설명한 자료들을 보면 정부안에서 주도한 것은 당시 교통부장관이었던 허정이고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아니한다.

그러나 건국초기에 최초의 국영기업체를 그것도 둘씩이나 한꺼번에 설립하면서 대통령과 상의 없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대통령이 깊이 관여하였을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용주가 해운입국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자기의 이권을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임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김용주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김용주 스스로가 그 자서전에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두 번째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진 이유에 대하여는 김용주는 그 자서전 ‘풍설시대 80년’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김용주와 이승만이 가까워진 것은 대한민국 건국후 있었던 대일선박반환청구 교섭과정에서 김용주가 전력을 다하여 교섭에 임하였고 그 경과를 중간보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지침을 하달하는 등 업무상 잦은 접촉을 통하여 이대통령의 김용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이해와 신뢰로 발전하였다.

2) 현직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로 임명

이승만 대통령은 그 후 김용주를 상당히 신임하여 자기의 오른팔로 활용하였다. 이에 관하여 김용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선 이승만이 김용주를 어느 정도 신임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김용주를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로 임명한 점이다. 이에 관한 그의 자서전의 진술을 요약한다. 김 용주는 1950년 1월초 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뜻 밖에 상공부 장관 취임을 제의받았다.

몇 달 전에도 그런 제의를 받았으나 정중히 사절하였는데 다시 제의를 받았고, 이번에는 거절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마지못해 수락하였다. 그때 이승만은 김용주에게 국무총리와 재무장관도 누구를 시키면 좋겠는가하고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김용주에 대한 신임을 짐작하게 하는 요소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개각은 단행되지 못하였다. 그 두 달 쯤 후 다시 이대통령으로부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주일 특명전권공사직의 제의를 받았다. 너무 뜻밖의 제의여서 사양하였는데 대통령이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라고 해서 나왔는데 얼마 후 다시 경무대에 들어가 보니 이미 특명전권공사에 대한 아그레망이 와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김용주의 주일 특명전권공사 재임 중의 다양한 할동에 관하여는 그의 자서전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가 주일공사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6. 25라는 국난을 비교적 쉽게 극복하고 되살아 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정도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다만 그 내용은  이 글의 주제밖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특이한 사실의 하나는 주일공사로 부임하기 전에 인사 겸,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에 대한 사표 제출과, 가능하면 후임사장의 추천도 하려고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방문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의외로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해서 대한해운공사장직과 주일 특명 전권공사직을 동시에 갖는 우리나라 외교사상 처음 있는 관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약 1년 몇 개월이 경과된 후 김용주는 주일공사직을 후임인 신성모에게 인계하고 귀국하여 다시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으로 복귀하였다.

2) 주일공사 재직 중 해운발전에 기여한 김용주
이하의 글은 김용주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기록 중 확실히 해운업 발전과 관련된 부분만 옮긴 것이다.

①고려호 재생과 외화대부
극동해운 남궁련 소유선 고려호는 원래 일본 상선이었다. 태평양전쟁 중, 미국공군기에 격파되어 부산항내에 반 침수상태로 있던 것을 미군정시대에 남궁련이 불하받아 그것을 수리 재생시키고자 일본 나가사끼長琦에 끌어다 놓고, 수리비 70만 불의 외화대부를 정부에 신청하였으나, 2년이 걸려도, 이것이 실현되지 아니하여 결국 폐선, 고철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었다.

이에 남궁련은 도쿄에서 김용주 공사를 찾아와서, 그 배를 고철로 팔면, 4만불 밖에 안나간다고 장탄식했다. 때마침 김용주는 업무상 1951년 1월 초 부산에 나오게 되어 그 기회에 이대통령께 일본에 끌어다 놓은 고려호 문제를 보고하고, 이 선박을 70만불 가량 들여 재생시키면 200만 불짜리 선박이 될 뿐만 아니라 대형기선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에 1만톤 급 기선이 생기게 되니 국가적으로도 유리한 일이므로 70만불의 외화대부를 허락하시어 이 배를 재생토록 하시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은 선박수리자금으로서의 70만불 대부 건은 말은 들었으나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그러면 김공사가 그 선박을 수리하여 꼭 우리나라에 가져온다는 것을 책임지겠느냐고 반문하셨다. 김공사는 그것을 절대 책임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즉석에서 비서를 불러, 70만불 대부 건을 곧 집행하도록 재무부장관에게 지시하라 하명하시고 다시 김 공사에게, 최순주 재무부장관을 만나 그 사실을 잘 말해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1년 수개월을 끌어온 70만불 외화대부가 실현되고 고려호가 수리 재생되어 우리나라 해운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 외화대부의 시발점이 되었다. 평소 이 대통령의 고집불통은 유명하지만 김용주가 경험한 고철대일수출문제와 고려호 수리비 문제 등을 통해 김용주는 이대통령이 내용을 충분히 인식하시면 사리판단과 이해가 올바른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김용주는 그의 자서전에서 평하고 있다.

②미지급 용선료의 청산과 재무장관과의 관계악화
당시 해운공사는 해군에서 매월 지급하는 용선료에 의하여 운영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재무부에서는 용선료를 전혀 지급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 해운공사는 부채가 60여억 원이나 누적되어 선원급료나 식량대금의 미불 등으로 경영이 매우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당시 재무부장관, 교통부장관이나 해군참모총장에게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간청해 보았으나 정부 지불 일체가 중지되어 있어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용주는 대한해운공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하여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찾아가서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비서를 시켜 즉시 미불된 용선료를 지급하도록 지시하여 주어 3일 만에 60억 원을 받아내어 회사 경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재무부장관과 김용주 사이에 좋지 못한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3) 이승만 대통령 주변의 인의 장막帳幕과 주일공사직의 사임
정부수립 초기를 지나면서 이승만 대통령 주변에 인의 장막이 쳐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의 장막이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나 김용주가 자서전에 기술한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외무부와 재외공관 간에는 정기적으로 외교 파우치가 오간다. 이 외교 파우치는 재외공관과 외무부에 왕복하는 문서의 수발신이 주목적인데 당시에는 이 파우치를 경무대에서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입회하에 외무부의 지정된 어느 특정인이 개봉하고 둘이서 그 내용을 검토하고 처리하였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외교에서 외무부가 바지저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특정인이 실질적으로 외무부를 컨트롤하고 있었던 것이다.

②김용주 공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업무가 너무 폭주하니 참사관 두 사람을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 대통령이 이를 쾌락하고 누구를 했으면 좋겠느냐고 해서 사람까지 추천하였더니 대통령이 쾌락하고 그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프란체스카 여사와 그 특정인의 방해로 인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 특정인 모씨는 그 당시 한 달에 한번 정도 일본 동경으로 나와서 약 일주일씩 공관에 머물면서 무언가 일을 하고 가는데 공사인 자기에게도 무슨 일로 왔다는 것을 보고하지 아니하였는데 여러 가지 소문이 안 좋아서, 그에게 이를 꼬집어서 충고하였더니 다시는 그가 일본에 오지 않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 김공사와 이대통령 사이의 연락이 사실상 두절되고 말았다.

③그 일(모 특정인에게 충고한 일)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주일공사관에서 대통령이나 외무부로 가는 거의 모든 공문서가 사라지고 전달이 안 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이 그것을 모두 빼내서 폐기 처분해 버린 것이다.  그간 잘되던 이대통령과의 통화도 안 되게 되었다. 한번은 이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맥아더 사령부와 교섭하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교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파우치 편에 보냈는데 이것도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아니하였다. 대통령이 지시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서 다시 보고서를 보냈는데도, 그것도 전달되지 아니하였다. 하도 답답해서 변영태 당시 외무부장관에게 전화하였더니 재외공관문제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그 사람이 다 처리하니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④이러던 어느 날 어느 사람으로부터 김공사가 일본의 명승지에 별장을 사고, 일녀를 첩으로 두고 공무를 소홀히 한다는 정보가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고 하면서 그 증거라고 하면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김용주 공사는 더 이상 임무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공사직을 사임하기로 결심하고 1951년 4월 중순에 공사직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그 4개월 후인 8월에 사표가 수리되어 후임인 신성모씨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귀국하였다.

4)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복귀와 사임
1951년 8월 김용주는 주일공사 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다시 해운공사 사장직으로 되돌아왔다. 1952년 4월 해운공사 선박에서 큰 밀수사건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군인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당시 시가 10억 원에 상당하는 보석과 시계를 해공선박으로 밀수입하였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대한해운공사 직원에 의해 발견된 사건이었다. 당시 당국은 이 밀수사건을 이대통령에게 해운공사 배에서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고하였으며, 이대통령은 해운공사라면 김용주가 사장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고, 보고자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이 사건이 해운공사가 저지른 일로 인식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김용주는 1952년 6월에 해공 사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이 이 사건에 기인하였던 것을 사임당시에 그는 알지 못하였다. 밀수사건의 적발에 대하여는 해공이 오히려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이었는데 반대가 된 셈이다. 

시마비형(CI)선 두 척 외국에서 구입
김용주가 해운공사 사장 재임시, 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일은, 당시 경무대에 ‘미노코’라고 하는 영부인 비서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해공사장을 찾아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CI형선 2척이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가 이 배를 수배하여 구입하려 하고 있는바, 척당 120만 불로 결정되었으니 선박을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김용주는 즉석에서 이를 거절해버렸다. 이유는 그 당시 그러한 형의 배는 일본에 많이 입항하고 있었으며, 부산항에서 인도하는 조건으로 척당 70만 달러면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도장소가 스톡홀름이라고 하면, 이 배를 한국까지 회항하는 비용을 포함하면 140만 불이 된다는 계산이었으며, 그렇다면 반가격이면 충분히 일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주 사장이 해운공사를 그만두게 되었던 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밀수사건도 있지만 이 선박구입에의 반대가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이 2척의 선박은 해운공사의 선박담당 상무 윤상송을 대표로 한 인수요원이 현지에 가서 현지인 선장, 기관장을 승선시켜 부산항으로 회항시켰는데 그 당시 한국 최초의 5,000톤급 디젤선이 입항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위시한 다수인사가 환영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5)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주 사장간의 괸계에 대한 해석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주 사장과의 관계는 크게 두 단계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양인간의 관계가 매우 원활하고 밀월관계라고 할 만큼 소통이 잘 되던 기간으로서 건국 후로부터 1951년 초의 소위 한국전의 1. 4후퇴 전후까지의 약 2년 반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양인의 관계는 매우 생산적이고 우국충정으로 열심히 두 사람 다 최선을 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김용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사실상 해임으로 사임하기까지의 약 2년의 기간으로서, 이 기간 동안은 두 사람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안 되어 관계가 많이 소홀해지게 된 기간이었다.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는 결과는 자명하다. 얼마 후 김용주 사장은 자기가 상당한 자기 재산을 사실상 헌납하여 창립하였던 대한해운공사를 떠나게 되었다. 사회생활에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김용주가 경무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사임권고를 받았을 때 이유를 묻자 자기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그렇다면 직접 물어볼 테니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것도 허용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김용주 사장은 왜 자기가 물러나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전혀 모르고 사임한 셈이다. 그는 막연하게 추측하기로는 전술한 시마비형 선박 두 척의 선박 구입을 반대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이 문제에 관한 한 김용주는 충분히 해명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경무대가 사려는 가격의 반값으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정책과 해운에 대한 인식
1) 김용주 사장 재직중의 제반사항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 해운발전에 대하여 매우 강한 의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근거는 다음 몇 가지다.
그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이 김용주 사장을 신임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일본으로부터 선박을 돌려받는 대일선박반환청구에서 김용주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임을 전술하였다. ①김용주는 군정기간 중 갖은 노력을 다하여 일본으로부터 5척의 선박을 반환받았고 ②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해서 나머지 선박을 반환받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선박반환 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이 교섭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미군정당국이 처음에는 치적주의 원칙을 적용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 원칙을 수정하여 종전 당시 선박이 있던 장소에 의하여 속지주의(선박의 소속을 결정하는 원칙주의로 종전 당시 그 선박이 존재하였던 장소를 기준으로 한다)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므로 김용주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이었다. ③그러나 김용주는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대형선 한 척을 찾아오는 성과를 거양하였다. 즉, 그는 미군정당국(일본과 한국 등 미국이 승전국을 표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이 방침을 선회하자 새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 찾아올 것이 없는가를 찾기 시작하여 종전 당시 한국해역에 있던 선박을 각 항구의 급수일지 등을 조사하여 찾아내어 새로운 기준에 의한 속지주의로 우리나라에 귀속하도록 되어 있는 선박(평안호)을 찾아 이것을 찾아오는 성과를 올렸다.

둘째,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좌초되어 있던 대형선박(고려호로 명명)이 인양 후 수리비가 없어 폐선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김용주 주일공사의 설명을 듣고 그렇게 아끼던 정부 보유 외화 70만불을 선뜻 내어주어 이 선박을 수리하여 우리나라로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야 말로 옳다고 생각할 경우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결단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셋째 이것도 전술하였지만 대한해운공사가 전쟁으로 징발되어 해군의 통제하에서 운항될 때 정부가 용선료를 사실상 지급하지 아니하여 해운공사가 파산직전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용선료 정산을 건의한 바, 그 문제도 즉석에서 해결해주었다. 전시 긴급비상경제상황 하이면서도, 대통령이 이렇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대통령은 해운업의 중요성을 그만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요소다.
이상 세 가지는 이 대통령과 김용주 간의 소통이 아주 원활하던 시기의 일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인의 장막이 드리워지면서 일어났던 일 중의 하나로 시마비 형 선박(부산호와 마산호) 두 척과 그 후의 이대통령의 해운관련 제 조치에 경청할만한 요소들이 많다. 시마비형 선박 두 척을 구입하는데 김용주가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임이유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김용주가 무조건 이러한 제안을 반대했을 리가 없다. 대한해운공사 사장인 김용주가 정부 자금으로 선박을 사주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김용주가 반대한 것은 그 가격이다. 그의 말대로 일본에서 사면 70만불이면 살 수 있는 선박을 140만불(선박가격 120만불 + 회항비 20만불)에 산다고 하니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반대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의 장막이 짙게 드리워진 상황 하에서는 진실이 장막에 가려지기 쉽다. 김용주를 찾아왔던 프란체스카의 여비서가 돌아가서 무엇라고 보고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해명이 없다. 그러나 짐작하건데 김용주사장이 일언지하에 반대하더라고만 보고했을 개연성이 너무 높다. 장막의 주인들은 그때는 이미 김용주를 몰아내지 못해서 안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 말을 그대로 전할 리가 없다. 그대로 전하였다면 외화 절약에 그렇게 철저하던 이대통령이 적어도 한번쯤은 재검토해 보라고 하거나 김용주를 불러서 왜 반대하는가를 물어는 보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김용주의 일언지하의 거절도 옳은 행동이었고, 이 대통령의 선박을 구입하여 해운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만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다. 문제는 인의 장막이 너무 두꺼워 소통이 안되었던 것이다.  

3. 김용주 사장 사임 이후의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해운정책
1) 고려호의 대미항로 취항과 이승만 대통령

부산항에 좌초하여 반 침몰상태에 있던 고려호를 인양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70만불의 대화대부 지시로 수리하여 정상운항이 가능한 선박으로 재생되었음을 전술하였는데, 이 고려호가 1952년 10월에 부산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고철을 적재하고 출항식을 갖고 미국으로 취항하였다. 

그런데 이 고려호의 대미항로 취항에 한 가지 큰 애로가 있었다. 그 애로란 이 대형선을 운항하여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선장, 기관장 이하 사관들을 선발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현역 해군을 승선시키기로 하고 선장에 박옥규 현역 해군준장, 기관장에 권태춘 현역 해군 대령등 해군의 현역장교들을 상선에 승선시켰다. 이 결정을 누가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전해지는 것은 없다. 다만 합리적으로 추측하자면 민간상선이 상업목적으로 항해하는데 현역 고급장교(더구나 당시는 전시중이었다)가 승선하도록 하기 위하여는 당시로서는 대통령이외의 그 누구도 이러한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더군다나 현직 대통령이 취항식에 참석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해운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2) 대한해운공사의 계속된 선박 증강
전술한 바와 같이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김용주가 재임하고 있을 때 경무대 주도로 시마비형 선박 두 척의 도입과 관련하여 김용주 사장이 타의로 사장직을 사임하여야 하였지만 이 일은 어디까지나 이승만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짙게 깔려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일어난 해프닝이고 이 사건이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발전에 관한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4월까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선박을 증강하였다.

①김용주 사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임 사장은 경무대의 뜻에 따라 인수단을 보내 부산호와 마산호로 명명된 두 척의 시마비형 선박을 인수하여 운항하였다.
②그 얼마 후 천지호로 명명된 당시로서는 대형선으로 분류되던 유조선도 도입하였다. 이 유조선은 너무 노후하고 성능이 안 좋은 선박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인수하여 우리나라로 회항해 오는데 상당한 애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천신만고 끝에 우리나라 항구로 들어온 후 몇 년 안 되어 항해 중 침몰하고 말았다. 전문지식이 필요한 해운업을 비전문가를 통하여 선박을 구입한 비싼 대가라고 반성할 일이다.
③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대한해운공사가 보유하고 있던 선박중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도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선박이 대한해운공사 소속으로 운항중이었다. 우선 당시로서는 대형선으로 분류되던 1만 DWT 만톤급의 동해, 서해, 남해호 3척이 도입되었는데 이 선박은 미 전표선중 대형선인 리버티형 선박들이었다. 그리고 언제 어떤 과정에 의하여 도입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6. 15 군사혁명후인 1960년대 초에 우리나라 항만의 이름(인천, 장항, 군산, 목포, 여수, 통영, 마산, 부산, 포항, 묵호, 제주호 등)이름을 선명으로 한 10여척의 시마비 형 선박이 대한해운공사 소속 선박으로 운항중이었는데 이러한 선박이 실존하였다면,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든 도입에 관여하였을 수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3) 해공사장으로 남궁련을 중용
김용주 사장이 해공사장직을 퇴임한 후 이순용과 정운수 두 사람이 각각 1년여씩 합계 2년 반 정도 사장으로 재임하였는데 이분들의 경력이나 해공사장 재직 시의 업적에 대하여 지금까지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 후 해공사장에 전술한 고려호의 선주격인 극동해운의 남궁련이 취임하였고, 그는 이승만대통령이 4. 19혁명으로 하야하기 까지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한해운공사 및 우리나라 해운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해공 사장으로 발탁된 배경에 대하여는 전해지는 사실이 없으나 대일 선박반환청구활동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김용주의 능력을 인정하고 중용하였던 것과 같이 남궁련의 경우도 고려호의 수리비 70만불 외화대부와 이 자금으로 고려호를 수리하여 우리나라로 다시 들여온 것, 그리고 이 선박을 운항하던 중 대망의 대미항로에 이 선박을 취항시켜 성공시킨 것 등을 통하여 남궁련의 사업수완과 해운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궁련의 해공 사장 재직 중 이승만 대통령의 남궁련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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