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양대학의 설립과 발전

 
 
1. 한국해양대학의 설립
1) 해방정국 하에서의 혼란과 한국해양대학 설립의 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이에 수반된 해방정국은 우리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 가능성과 함께 해방 정국 하에서 내가 신생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등 의미있는 고민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 하에서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아니하였다. 범위를 좁혀서 해운업계의 동향만 살펴본다면 해방 정국 하에서 첫 번째 이루어진 것이 일제강점기 하에서 사실상의 관영 해운기업이었던 조선우선의 경영권 인수와 경영정상화 문제이고, 그 다음으로는 앞으로 한국해운을 이끌어갈 해기사를 양성하기 위한 대학의 설립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이미 이 글의 도입부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듯이, 해방이전부터 포항에서 일본의 대해운회사인 오사카 쇼센大阪商船의 대리점업무와 내항해운업및 항만하역업 등을 경영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자, 신생조국을 위해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상경한 김용주가 미군정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조선우선의 관리권을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결정은 매우 잘한 결정임은 이미 상술한 바 있다.
다음으로는 해기사 양성기관인 해양대학의 설립문제가 남았다. 해방 정국 하에서 해운에 뜻을 둔 사람들로서는 신생조국의 발전을 위해 선박(해운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 선박을 능숙하게 운항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해기사를 양성하는 문제가 시급한 과제라는 것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해방 정국 하에서 어느 것 하나 정돈이 안 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학생들에 의하여 제기된 의견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제기되었다. 8월 15일은 여름방학 중이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운영되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에 재학했던 학생들은 해방을 방학중 고향집에서 맞이하였다. 8월말이 되어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었으나, 학교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갑갑해진 몇몇 재학생들이 진해의 고등해원양성소를 찾아가보니, 교사는 텅빈 채로 방치되어 있고, 관리인도 없는 상태였다. 기숙사의 식당에는 먹다 남은 얼마간의 쌀 등이 남아 있어 이것으로 밥을 해먹고 어떤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비슷한 처지의 학생 몇 명이 더 모였을 뿐 책임 있는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들은 누구도 찾아오지 아니하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선배로 통영에 있는 보통해원양성소의 교관으로 있던 방상표를 찾아가 상의키로 하였다. 학생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방상표는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상경하여 조선우선 앞의 다방에 찾아가서 이시형을 만났다.

이시형은 일본의 전통 있는 해기사 양성기관인 도오쿄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의 기관사로 취업한 이래 해방될 즈음에 기관장으로 승진, 한국인 직원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고 직급도 높아서 조선우선 재직 한국인의 대표격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강력하게 일을 추진하는 그는 해방이 되자 한국인 재직자들의 대표로 한국인 선원들의 밀린 임금 및 퇴직금 정산 등을 위하여 일본인 사장과 담판을 하는 등 한국인 재직자들의 권익옹호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인 사장이 사실상 그 직무가 정지된 상태였으므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우리가 조선우선의 경영권을 인수, 운영해보자고 해서 나섰으나 조선우선의 관리권이 전술한 바와 같이 김용주에게 넘어갔으므로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상태였다.

방상표의 방문을 받고 진해고등해원양성소의 현 상황을 듣고 이를 정상화해줄 것을 요청받은 이시형은 무슨 대책인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공감하였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일단 알았으니 해기사 선후배들과 협의를 하여 결정하겠다는 언질만 하였고, 해기사의 선후배를 만나서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반응들은 한결같았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해기사 양성기관은 필요불가결한 사항이므로, 누군가가 나서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당장 맡은 일이 없는 이시형이 가장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3) 미군정 운수부 해운담당 해밀톤 중령을 만나
이런 과정을 거쳐 진해고등해원양성소의 운영정상화 문제를 떠맡게 된 이시형은 방상표와 함께 미 군정청 운수부 해운담당관인 해밀톤 중령을 만나 방문목적을 이야기했고, 해밀톤 중령은 매우 좋은 의견이라면서 적극 찬성하고 돕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도 정상화에 필요한 협조 요청사항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으나, 업무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은 약속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시형이 요청한 사항은 대개 다음 세 가지 정도였다. ■일제강점기하에 운영하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인수하여 고급해기사 양성기관을 설립, 운영할 것이니 진해고등해원양성소의 시설과 장비의 관리권을 넘겨줄 것 ■고급해기사 양성의 특성상 전액 관비로 하고, 재학생 전원의 기숙사 수용이 필수적인데 이를 가능하도록 해줄 것 ■새로 탄생할 고급해기사 양성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군정청에서 지급해 줄 것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해밀톤 중령으로부터 진해고등해원양성소의 시설과 장비 등 일체의 관리권을 이양받아 고급해기사 양성기관을 설립할 것을 인가한다는 문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이 시설과 부속물 일체의 실제 인수는 본인들이 직접 가서 하라는 이야기에 따라  방상표 등과 진해를 찾아가서 당시 빈 교사를 활용하고 있던 중학교 관계자를 찾아가 시설의 이양을 요청했더니 그들은 알았다면서 순순히 물러났다. 이렇게 해서 해양대학 설립의 첫 번째 관문인 정부의 인가와 시설 및 사무집기 등 물적 요건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 설립에 필요한 예산 등에 관하여는 그저 막연하게 적극 협조하겠다는 추상적인 약속 외에 아무런 보장도 받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군정은 갑작스러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점령군의 입장에서 군정을 실시했으나, 군정시행에 필요한 예산 등 물적인 보장은 현지에서 적당히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립자 이시형의 약간 무모하면서도 용기 있는 용단이 작용하게 된다. 신중을 기하는 전통적인 교육자라면 이렇게 불안정한 조건 하에서 신설학교를 개설한다는 것은 무모하므로 망설이면서 해결안을 찾고 나서 학교를 개설할 터이지만, 이시형은 거꾸로 일단 출범시키고 나서 부닥치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적극적이고 약간은 저돌적인 자세로 이 일을 추진하였다. 만약 설립자인 이시형이 이러한 용단을 내리지 아니하였다면 오늘날의 해양대학은 아마 설립이 크게 늦어졌을 가능성이 있거나, 영원히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군정은 이 사업에 대해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체제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해양대학의 케이스가 바로 그런 것이다.
         
4) 새로 설립된 해양대학의 개요
이렇게 설립된 해양대학이 벤치마킹한 것은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아니라 4년제 대학과정과 같은 수준인 일본의 고등상선학교였다. 새로 출범한 진해고등상선학교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진해고등상선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한 것은 1945년 11월 5일로 이 날을 한국해양대학교는 지금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학교명 : 진해고등상선학교 ■학사과정 : 대학과정과 같은 4년제 ■입학자격 :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서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 ■재학생 특례 : 전원기숙사에 수용하고, 학비 면제 등이다.
일제강점기 하에 존재했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와 달라진 점은 우선 교명이 진해고등해원양성소에서 진해고등상선학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입학자격도 업그레이드되어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초등학교 6년 과정을 마친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학하던 초등학교 부설의 고등과(2년제) 졸업이상의 학력이면 입학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는데, 진해고등상선학교에서는 4년제 중학교 이상이 되었고 재학기간도 대학과정과 같은 4년제로 됐다. 교명을 대학으로 하지 않고 고등상선학교로 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대학교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경성제국대학 하나밖에 없었고, 그 외의 고등 교육기관은 전문학교였기 때문에 대학과정에 보다 가까운 일본의 고등상선학교를 벤치마킹해 상선학교로 했던 것이다.

이후 진해고등상선학교는 시국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개명됐다. 참고로 간략하게 기술한다. 진해고등상선학교가 개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전문학교들이 학제 개편에 따라 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따라서 4년제 대학을 벤치마킹하여 설립한 진해고등상선학교를 구태여 상선학교라고 하지 아니하고 진해해양대학으로 개명했다. 그이후 경위는 후술하겠으나,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 설립되었던 인천해양대학과 진해해양대학이 합병하였기 때문에 교명을 조선해양대학으로 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교명 앞에 붙인 것은 그때는 아직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으므로 오래전부터 불러오던 조선이라는 국명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북한이 우리보다 먼저 정부를 수립했고, 조선을 북한의 국명으로 사용하였기에 조선해양대학이라는 교명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교명에서 조선을 빼버리는 대신 국립해양대학으로 개명했다.

그 후 남한에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대로 국립해양대학을 유지하다가 해무청 설립을 전후해 해양대학의 관할이 교통부가 관장하는 특수대학으로 있다가 문교부로 이관되면서 문교부 소속의 정식대학이 되다. 그리고 학장으로 신성모가 부임한 후 대학 명을 한국해양대학으로 다시 고쳐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국해양대학의 명칭은 그 후 해양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교명의 끝에 ‘교’자를 하나 추가돼 한국해양대학교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2. 해양대학 설립 후의 고난과 군산에서 정착
1) 학교 모양새 갖추기

■신입생의 모집 등
급한 대로 서둘러 해양대학을 설립했으나, 개교당시 그런대로 학교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시설과 비품 등 일제때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인수한 것이 전부였다. 개교는 했으나 새로운 학교에 학생도 없었고, 교수요원도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고 학교를 운영할 예산도 사실상 없는 상태에서 출범한 것이다. 서둘러 학생모집을 공고하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신입생을 선발했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과 통영보통해원양성소 재학생중 본인이 희망할 경우 별도로 전형하여 성적이 괜찮은 학생들을 선발하여 신입생 속에 포함하도록 배려했다. 이러한 신입생 선발과정에는 당시 해양대학보다 먼저 경영을 정상화한 조선우선의 김용주 사장이 해기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로써 신입생 선발은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교수요원의 충원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교수요원의 확보였다. 교수요원은 크게 두 부류의 전문가가 필요하였다. 하나는 해양대학이 고급 해기사의 양성을 목표로 한 학교이기 때문에 고급해기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할 전문과목을 강의하는 교수요원이 필요했고, 또 해양대학이 4년제 대학과정을 지향했기 때문에 대학과정에서 필요한 교양과목 등을 교수할 수 있는 교수요원도 필요했다. 해방정국 하에서 이러한 교수요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해양대학은 예산확보 등에 대하여 거의 보장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출범하였기 때문에 교수 적임자를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설령 적임자를 찾았을 경우에도 생계대책의 보장이 없어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시형을 위시한 일본의 고등상선학교 출신 고급해기사와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졸업생들이 해기사 양성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거의 보수가 없다시피한 상황에서도 교수요원이 되어주었다. 그도 어려운 경우에는 시간강사 형태로 출강하는 등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학생 급식문제
학생모집은 전원 기숙사 수용과 학교가 의식주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모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정도였고, 이에 대한 보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숙소는 있었으나 급식이 문제였다. 다행히 군정을 실시하는 미군이 원조물자로 양곡을 얼마간 공급하였기 때문에 교통부에 부탁해 이들 원조양곡의 일부를 배정받아 활용했다. 어떤 때는 이것도 공급이 되지 아니하여 급식을 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학교를 임시 휴교하여 학생들을 귀가시켜 자기 먹을 쌀을 가지고 오도록 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때로는 가공하지 아니한 옥수수를 그대로 인수하여 삶아서 급식하기도 했다.

2) 해방병단 병학교와의 합병문제와 유랑생활
학교가 어려운 가운데 출범하여 1년도 안된 1946년 10월 어느 날 미 군정청 담당자가 찾아와 갓 출범한 해안경비대의 간부요원을 양성하는 해방병단 병학교를 설립해야 하는데 진해해양대학과 교육내용이 유사하니 두 학교를 통합하여 진해해양대학 시설에서 같이 교육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안은 제안이기는 하지만 관리권을 가진 미군정의 안이므로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해양대학 당국자들은 당황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는 안이었으나 깊이 있는 토의 끝에 해양대학 관계자들은 일단 통합을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더욱 어려운 상황은 그 얼마 후에 다시 찾아왔다. 군정청의 조직이 개편되어 운수부의 해사국 조직이 사실상 없어지고 해상운수국이 신설되며 해사국이 담당하던 선박 및 선원관리행정업무는 통위부로 이관되어 해안경비대가 관장하도록 했다. 고급선원 양성업무인 해양대학의 관할도 운수부에서 통위부로 이관되었다. 이에 따라 해양대학의 관할 부처도 통위부가 되었다. 해안경비 업무를 담당하는 통위부로서는 해안경비대의 간부요원 양성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단 해안경비대의 간부요원양성학교인 해방병단병학교를 위해 해양대학이 사용 중인 시설을 해방병단 병학교가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으니 학교 건물을 비우고 나가라고 통보해왔다. 이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 명령자가 학교의 관할권을 가진 통위부였기 때문이다. 해양대학은 다른 건물을 구해서 나가라는 것이다. 이미 해방병단병학교와의 합병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시설물의 관리권자가 건물을 비우라니 나갈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일단 인천으로 가서 당시 인천에 설립인가만 된 상태에서 개교도 못하고 있는 인천해양대학과 합병문제까지 포함하여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들어갈 교사도 마련하지 않고 무작정 상인上仁하게 되었다.

3) 인천해양대학과 합병, 조선해양대학이 됐으나
집 없는 신세
해양대학이 인천으로 올라가자, 개교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던 인천해양대학이 진해해양대학과 합병하여 하나의 대학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해 왔다. 협의 끝에 두 대학을 합병하여 교명을 조선해양대학으로 하기로 했다. 인천해양대학에서 선발해 놓은 학생들도 새로운 조선해양대학에 수용하기로 했으나 교사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하게도 해안경비대가 진해교사를 비우고 나가라고 하면서, 허허벌판으로 내몰 수 없다고 여겼는지 인천에 있던 해양경비대가 사용하던 일제강점기 요정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접수 사용하다가 조선해양대학에 관리 이관해주어, 학교 본부 등은 그곳에 옹색한 대로 입주했다. 그러나 정상수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학교가 들어갈 만한 건물을 백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경인지구에서는 찾을 길이 없었다.

4) 군산으로 이전 정착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군산에서 해양대학을 유치하고자 나섰다.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전북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항만을 개발, 항만도시로서 상당히 호황을 누리던 항구도시였는데, 해방으로 일본세력이 물러나고 대외교역도 거의 전면 중단되자 항구기능이 완전히 쇠퇴하여 거의 폐항 위기에 직면한 상태였다.  군산의 유지들과 행정당국은 군산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군산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로서는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항만이용자는 아니지만 해운이나 항만과 밀접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조선해양대학이 집 없는 신세로 갈 곳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유치에 나선 것이다. 군산으로서는 조선해양대학의 유치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쌀 보관용의 상당히 넓은 창고가 많이 있었는데 이것이 텅 비어 있으므로 내부만 정리하면 교사나 숙소를 마련할 수 있고, 일본인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주택이 많이 비어 있어서 대학 교직원들에게 숙소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군산시 행정당국은 해양대학이 군산으로 온다면 어느 정도의 재정지원도 약속하고 나섰다.

이러한 군산시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해양대학은 1947년 하반기에 인천에서 군산으로 이전했다. 교사는 미곡 창고를 개조할 때까지는 초등학교 교사를 이용하기로 하고, 학생들은 군산에 있는 여관에 분산 하숙하도록 했다. 그 후 약속대로 교사와 숙소가 마련되어 1948년 초에는 학교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학교 재정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군산시가 해양대학을 유치할 때 어느 정도의 재정지원도 약속하였는데 이 약속을 충실히 지켜주었고, 관할이 통위부 관할로 이관되면서 해양대학 예산도 국방예산의 일부로 간주되어 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5) 6. 25 사변으로 피난생활
그러나 군산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6. 25동란으로 학교는 군산에서 버틸 수가 없어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첫 번째 부산 피난은 이론적으로는 그리 길지 아니하였다. 9. 28수복으로 군산이 적 치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해양대학도 당연히 군산으로 되돌아가야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군산으로 가보니 폭격으로 교사가 상당히 파괴되어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모두 어려울 때라 수리비 예산을 마련할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뒤이은 1. 4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얼마 후 전쟁은 소강상태를 지속하게 되었고, 군산으로 돌아갈 수는 있게 되었으나, 교사를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고심 끝에 차라리 부산에서 다시 살길을 찾기로 하게 됐다.

그 때는 이미 학교관할이 다시 교통부로 환원되어 있었다. 해양대학은 관할관청인 교통부와 협의하여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교사를 구할 수 없어 철도관사 부지의 일부를 빌려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이 천막을 교사로 활용하고 학생들의 숙소는 철도관사의 일부를 빌려 사용하는 글자 그대로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피난생활은 영도에 새로운 학교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한 1955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6) UNKRA유엔한국부흥기구 자금에 의한 교사의  신축
휴전이 성립되고 우리나라도 전후복구에 나서게 되었다. 전후복구라고 하지만 당시 경제 사정으로는 자력 복구가 불가능하였으므로,  공공시설의 복구는 주로 원조자금을 활용하였는데, 해양대학도 이 자금을 이용해 영도의 동삼동에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게 되었다.

2. 이승만의 해양대학에 대한 자세와 인식
1) 다시 불거진 해군사관학교와의 합병안

해양대학이 교사를 신축하게 되면서 해양대학과 해운사관학교의 합병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었다. 해방병단병학교(해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손원일 제독이었으므로 첫 번째 해양대학과의 합병문제도 손원일이 주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손원일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거쳐, 당시(해양대학 교사 신축) 국방부장관의 직에 올라있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을 합병하는 것이 교육의 효율성이나 예산 절약 등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던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해양대학과 해군사관학교를 통합할 것을 건의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여 대통령의 유시로 통합을 지시했다. 두 학교(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의 통합이 옳으냐 상호 독립이 옳으냐의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필자는 본다. 각기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까지 나왔던 것을 보면 통합은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사실상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미국측의 반대 때문이다. 미국의 원조당국은 전후복구 원조자금은 군사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통합을 반대하였으므로,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도 그 고집을 접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대통령의 해운관과 해양대학에 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으므로 그에 관한 자료를 여기 싣는다.   
   
2) 이승만 대통령의 힐책
해양대학 신축교사는 1955년 11월에 준공되었는데, 공사가 한창이던 1955년 4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콜터 운크라 단장과 함께 신축 현장을 비공식으로 방문했다. 황부길 학장이 신축 경위와 현황을 설명하고 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황부길 학장을 공사 현장의 빈터로 불러내었다. 그 자리에는 대통령과 황부길, 그리고 콜터 장군 등 세 사람뿐이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약 50분간에 걸쳐 황부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 무엇 때문에 이러한 거금을 들여 한국해양대학 단독교사를 짓느냐는 것이었다. 해군사관학교와 한국해양대학을 합치면 예산이 절감될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얘기를 덧붙였다.

“나는 전후 부흥을 위해 극도로 재정이 핍박한 가운데에서도 직접 해외공관에 지시하여 대형 선박을 사들이도록 하였다. 본국에서 구매관을 파견하면 파견경비가 붙기 때문에 그 경비라도 절감하기 위해 현지에서 그러한 임무를 맡도록 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해운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있던 해운국을 해무청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했다. ..중략..그런데 해운 종사자들은 이 같은 정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다. 거액을 들여 구입한 선박을 인수해 오도록 선원을 보내면 손발이 맞지 않고, 기술이 부족해 제대로 배를 끌고 오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고장을 일으키는 등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해군에서는 함정 인수단을 보내면 자기 능력으로 배를 잘 몰고 온다. 그런데 민간이 그것을 못하는 것은 해운 책임자로 있던 자네의 행정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냐? 한국해양대학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우수한 선원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원들이 배를 타고 나가기만 하면 사고를 내기 일쑤이고, 기술의 향상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밀수에만 눈이 어두워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선원들이 기술의 향상에는 염두도 두지 않고 밀수에만 눈이 어둡다는 힐책에 대해서 황부길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생활이 어려운 선원들, 특히 일본항로에 취항하던 선박의 선원들이 승선을 계기로 돈벌이로 밀수하다 관계 당국에 적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인수한 선박, 특히 기술이 부족하여 기관 고장을 일으킨다는 얘기는 ‘부산호’ ‘마산호’ ‘천지호’ 등의 인수과정을 말하는 것이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이 하도 흥분한 상태여서 대꾸할 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황부길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또 대통령이 해운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잘못 알고 있는 탓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반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바다에 대한 원대한 꿈을 해군 내지 해군사관학교에 두고 있던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기본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민간 상선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해운과 그 역군인 해기사의 중요성을 설명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그럴 계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부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한국해양대학 교사의 신축을 해군사관학교에 넘기지 않은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배석했던 콜터 장군이 대통령 앞에서 쩔쩔 매는 황부길의 모습이 민망스러웠던지, 운크라의 자금은 자금의 성격상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이 운크라 자금의 대부분(80% 정도)을 출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자금을 출연한 국가 중에는 북한과 친한 나라도 있습니다. 만일 한국이 이 자금을 군사목적으로 전용하게 되면 해양대학의 신축계획은 취소될 수 있을 것이며, 대한對韓 원조도 그만큼 축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어조를 바꿔 “아 그런가?” 하더니 “맡은바 소임을 성실히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공사장을 총총히 떠났다. ..중략, 콜터 운크라 단장과 이 대통령의 면담으로 해양대학과 해군사관학교의 합병 문제와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한 번의 유시와 도합 일곱 번에 이르는 지시각서를 하달했는데, 마지막 각서에 의하여 두 학교를 통합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3) 힐책 내용에서 읽을 수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관
이승만 대통령의 위와 같은 힐책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해운과 관련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하 간단히 요약해보자.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해운발전에 대하여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씀내용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선박구입에 대한 정책결정, 경비절약을 위하여 재외공관을 활용한 점, 구입한 선박의 인수와 회항과정 등에 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운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대한민국이었지만 상선 몇 척을 사는데 대통령이 그만큼 신경을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은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해군과 해운을 비슷한 관점으로 비교하면서 해군은 모든 것을 잘 처리하는데, 해운은 기술 수준도 부족하고, 해기사 등 선원들이 밀수에 정신이 팔려 본연의 업무에 소홀하다고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군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고, 해운에 대하여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승만대통령의 해운관 및 해양대학관은 바로 얼마 후, 해양대학 학장의 신성모로의 교체로 나타나게 된다.     

3. 신성모의 학장 취임과 개혁
1) 신성모의 학장 취임

영도 신축교사가 준공되어 해양대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 1년 쯤 뒤인 1956년 11월 28일 신성모申性模가 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 일이 있기 전인 7월 14일, 해무청의 창설(1955. 2. 17)과 함께 교통부에서 상공부로 이관되었던 학교의 관할이 문교부로 이관되었다. 학교의 명칭도 한국해양대학으로 개칭되었고, 학장에 대한 인사권도 문교부로 넘어갔다. 그 얼마 후 신성모가 신임학장으로 부임해왔다.  

2) 신성모의 개혁
중국과 영국에서 상선사관 교육을 받은 신성모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의 상선사관교육을 부정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해양대학의 교육방향을 서구식으로 개혁하는데 착수했다. 그 내용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로 인해 한국해양대학이 비로소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주요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양대학의 교재와 커리큘럼을 서구제도로 대체
일본식 교육으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부임한 신성모는 미국의 해군사관학교와 상선사관교육기관인 킹스 포인트의 교재를 구해 이를 바탕으로 해양대학의 커리큘럼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그것도 영어로 된 원서를 그대로 해군의 인쇄창에 부탁, 복사하여 그대로 교과서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생래적으로 영어에 약했던 교수와 학생들이 공히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 끙끙 거리면서도 국제어라 할 수 있는 영어실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고 면학분위기도 조성하기 위해 취임 후 바로 학생들의 외출을 주말을 포함하여 거의 모두 금지시키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교내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교수들의 강의를 직접 청강
신성모 학장은 시간이 나는 대로 강의가 진행 중인 교실을 찾아가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강의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날 때 쯤, 강의내용 중 몇 가지에 대하여 예리한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에 교수가 자신있게 답변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고, 그렇지 못할 경우 학생들에게도 정답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수업 중인 교수와 학생 공히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질문은 어떤 제도에 대하여 그 내용이 무엇인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설명하라는 통에 교수들도 합리적으로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당시 재학 학생들의 전언이다. 반드시 그 결과였는지는 모르나 많은 교수들이 학장실에 불려가 “공부 좀 더하고 와” 또는 “배 좀 더 타고와”라는 권고 아닌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빈자리에는 해군 사관학교의 교관 등 자기 나름으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삼고초려 해서라도 해양대학으로 영입했다. 교수들의 면모도 일신되었다. 당시 대학교수라고 해도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던 해양대학에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들이 늘어나게 되어 전반적인 교육수준이 크게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성모가 학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해양대학 교수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 등에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해오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교수들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이나 승선경력을 쌓기 위한 승선에도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취업을 알선하는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지원했다.

■해양대학 예산의 획기적인 증액
신성모가 한 일중 두드러진 하나가 한국해양대학의 예산을 크게 늘렸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 한국해양대학 학생들에게는 관비학교로서 수업료가 면제되고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정부가 숙식을 제공했으나, 비슷한 여건에서 교육을 받는 사관학교와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처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신성모가 취임한 이후 이것이 사관학교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과 관련된 다른 교육예산들도 크게 증액하여 교직원들의 복지에도 힘썼기 때문에 학교의 경제적인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국영기업체 등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업체들에 부탁하여 예산부족을 메웠기 때문에 가난에 찌들었던 학교에 윤기가 돌게 되었다. 당시 재학했던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신 학장 부임 전에는 급식이 너무 부실하여 학생들의 영양실조가 크게 문제되었는데 신 학장 부임 후에는 급식이 남아 돌고, 당시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고기국이나 돈가스 등이 자주 배식되었다. 학생들의 영양실조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해군예비원령의 제정 시행
해군예비원령을 제정하여 해양대학 재학생들이 재학 중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고, 졸업과 동시에 해군 소위로 임관하고, 동일자로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도록 하여 해양대학을 졸업한 상선사관들이 해군예비역 장교 신분을 갖도록 하고, 해양대학 졸업생들의 병역문제도 말끔하게 해결했다.

■실습선 ‘반도호’의 확보
해양대학은 그때까지도 실습선을 보유하지 못한 채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선박에 대한 현장감 있는 이론과 현장실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산을 확보하고, 국영기업체였던 대한해운공사와 교섭하여 동사 소속 선박 한 척(김천호)을 매수하여 실습선으로 개조하여 반도호로 명명하여 운항하도록 했다. 이 실습선 ‘반도호’는 그 후 1970년대 중반에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실습선 ‘한바다호’를 신조할 때까지 해양대학의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주 연료로 사용하던 무연탄을 산지인 묵호에서 부산, 인천 등 해안에 위치한 대도시로 운송하여 우리나라 연료난의 해소에도 크게 기여했다.

4. 신성모에 대한 평가
1) 신성모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흔히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면서도 그의 정치인생의 평가에서는 인의 장막에 가려 여러 가지 실정을 저지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주변의 둘러쳐진 인의 장막의 구성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이승만 대통령과 소통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 신성모였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반 국민들은 신성모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고, 국무총리 서리도 겸했다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아주 무능한 인물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일 것이다.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는 이러한 일반국민들의 신성모관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을 정치적인 사유로 사임한 후에도 ■주일특명전권공사 ■해사위원회 위원장 ■한국해양대학 학장을 역임하여 하루도 이승만 대통령과 떨어져 살지 아니하였다. 그가 그 동안 한 일은 평화선의 설정과 평화선의 수호체제의 정비, 한국해양대학의 발전의 기틀을 다져서,한국해운의 발전을 뒷받침할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기반을 다지게 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할 때 흔히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평가하는데, 신성모의 정치입문 실패후 신성모에 대한 인사를 보면 신성모의 최대 장점인 해양법과 해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장 적절히 활용한 적재적소를 잘 갖춘 모범인사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의 신성모에 대한 신임이 대단히 두터웠다. 그 증거로는 신성모가 해양대학에 재임하고 있던 기간 중에 해양대학에 재직했던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유당시절 인의 장막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이를 이용해 2인자의 지위를 굳힌 상태였던,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이 어떤 일로든 부산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한국해양대학이었고, 학장인 신성모를 예방하고 안부를 묻고, 이번에 무슨 일로 부산에 오게 되었습니다고 인사를 정중하게 드린 후, 자기 출장목적을 위해 떠났다고 한다.

공적으로 이기붕과 신성모는 직접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없다. 사회적인 신분도 이기붕은 국회의장이고, 실질적인 2인자였고, 신성모는 일개 단과대학의 학장이다. 누가 보아도 이기붕이 일부러 찾아와 인사해야 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성모가 그들이 쳐 놓은 인의 장막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임의롭게 만날 수 있는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2) 청렴강직이 몸에 배인 신성모
자유당이 판을 치던 독재정권 체제하에서 그 최정점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비교적 자유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권력(?)이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크게 출세하거나 치부도 할 수 있을 것이나, 신성모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과 오랫동안 소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대통령과 친숙하다는 권한 아닌 권한을 국가 목적을 위하여 활용한 흔적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자. ■신성모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평화선의 일선 수호기관인 해양경찰대를 창설할 때 해군의 장비(경비정)와 인력을 할애받아 사용해야 했는데, 이 일은 공무원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군이 저항했을 것이지만 이 일을 거뜬히 무리 없이 단시간에 이룩했다. ■평화선의 관리기구로서 해양경찰대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해사관계 중요정책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만들 때, 교통부 해운국의 핵심요직이라 할 수 있는 부산지방해사국장을 전화 한통화로 불러올려 한 달 가까운기간 해무청 조직안을 작성하도록 했다는 것도 역시 보이지 않은 권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양대학 학장직으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해양대학을 개혁할 때 그가 한 개혁 행위의 대부분이 많은 정부 예산과 국가 관련기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실력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모의 이러한 주어진 권한의 행사는 항상 국가발전과 관계되는 분야에만 사용되었지 자기나 자기 가족, 그리고 심지어 자기의 일을 충실하게 도운 아래 직원에게도 이러한 권한을 행사하여 이익을 준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와 관련 신성모의 학장직 재직시에 해양대학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해무청 설립을 준비할 때 당시 부산지방해사국장을 불러 올려 한 달간의 작업을 시켰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공무원에게 가외의 일을 시키고 나면, 일을 한 사람에게 인사상 특혜(승진 또는 원하는 자리로 보직 이동)를 주는 것이 관직사회의 관행이다. 그러나 신성모는 한 달간 고생한 사람을 보내면서 “수고했다”는 한마디로 대신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자기도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도 국가를 위해 일하는데 다른 보상을 바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역시 학장 재직 때, 그의 아들이 현역 육군 소령이었다고 하는데 한번은 그가 군용의 업무용 차량을 타고 아버지의 관사를 방문했다. 이를 본 신성모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는 것은 사무인데 어떻게 군무에 쓰라고 정부에서 내어준 군용차를 타고 왔느냐고 매우 심하게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그 아들은, 해양대학 관사까지 가는 버스가 없던 때이므로, 할 수 없이 군용차를 이용해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아버지의 꾸중이 무서워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자리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만났는데, 그가 신성모의 아들 이름을 대면서 “아무개 소령을 이번에 중령으로 승진시키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크게 화를 내면서 군인사는 군사비밀에 속하는데 어떻게 그런 군사비밀을 민간인인 내게 발설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아마 신성모의 이러한 생활 자세를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국방부장관으로 실정을 하였음에도 그 후 그를 중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3) 해운계의 큰손이었던  신성모
아래 글은 이시형 학장 밑에서 해양대학 학생과장으로 있으면서 이시형을 보좌하여 신성모와 자주 마났던 이준수 전해양대학장의 회고이다.
원래 이시형은 영국의 엑스트라 마스터Extra Master인 신성모를 흠모하고 존경했다. 신성모가 가지고 있던 영국의 엑스트라 마스터라는 자격은 당시의 우리나라 고급해기사들로서는 감히 넘보기 어려운 권위있는 해기사 자격증이었다.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영국의 선장 중의 선장자격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영국정부의 선박검사관, 해기사시험관 및 상선학교의 교원이 될 수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같은 선장이라도 엑스트라 마스터는 특별히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증이었다.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는 영국사회에서는 이 자격에 대한 사회적인 대우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권위 있는 자격증이었기 때문에 유색인종인 동양인이고 더구나 국권을 상실하여 일본의 식민지 상태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러한 자격증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고 자랑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성모의 이 자격증의 획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성모는 엑스트라 마스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무척 많은 공부를 했고,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이 붙었을 때 응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면접시험에서 시험관이 우리는 동양인에게 엑스트라 마스터 면허를 줄 생각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다. 이에 신성모는 “당신이 시험관 자리를 물러난 뒤에 다시 와서 엑스트라 마스터가 꼭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물러나왔고, 실제로 그 후 다시 응시하여 합격했다고 한다.

신성모에 대한 존경심은 당시 고급 해기사 사회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이시형은 광복 얼마 뒤 신성모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신성모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해양대학의 학장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신성모도 이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냈으나, 신성모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내무부장관 및 국방부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이시형은 그 뒤에도 계속하여 해양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신성모를 대선배로 깍듯이 모셨다.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을 물러난 얼마 뒤 일본 주재공사를 거쳐 해사위원회海事委員會의 위원장으로 취임했는데, 이 해사위원회는 해운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형은 정부의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모를 방문하여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보고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신성모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의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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