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海上運送의 鬼才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최초의 해상운송가
최봉준(1858~1917)은 조선시대 후기에 필적할 이가 없는 무역상이자 최고경영자CEO로 성진항에 동북아 4개국을 아우르는 종합무역상사를 차렸다. 화물선, 여객선을 보유하고서 자신이 새로 개척한 항로를 통해 화물 및 여객운송 사업을 한 진정한 해운물류 경영인VOCC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1,400t급 화륜선을 앞세우고 귀국한 45세 조선인 무역상은 최봉준이었다.
그는 1859년 함경북도 성진城津에서 출생, 12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가까운 친척하나 없게 되자 그런 유민들과 가난한 품팔이꾼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그 무렵 많은 함경도 사람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듬해 봄까지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서 품을 팔았는데 연해주로 이주한 이들은 삽과 곡괭이로 농토를 개간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막심했다. 최봉준도 겨울에는 러시아인이 사는 도시나 마을에 가서 품삯을 벌었다. 하루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만났다. 계속 걸어도 광대한 눈밭뿐이었고 추위는 살을 에는 듯했다. 그러다 늑대 떼에 내몰려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러시아 귀족인 야린스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생명의 은인 야린스키와의 인연
러시아 귀족 야린스키와 조선 소년 최봉준. 생명을 구해준 이 인연으로  야린스키가 73세로 눈감을 때까지 7년 동안 최봉준은 그의 양아들 겸 별장지기로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야린스키의 교육을 받으며 19세의 어엿한 청년이 된 최봉준은 러시아말을 완전히 익히고 러시아 국적도 갖게 되었다. 야린스키가 별장에서 한겨울을 지내고 봄이면 도시로 나갔다가 다음 해 겨울 다시 돌아올 때까지 최봉준은 홀로 별장을 지켰다. 별장에는 꽤 큰 산과 농장도 딸려 있었다. 최봉준은 여름에는 농장관리인으로, 겨울이면 야린스키와 함께 날마다 개의 목에 위스키병과 담요를 감아 길 잃은 나그네를 구하는 일을 했다. 그동안 야린스키와 최봉준이 보낸 개 덕분에 구조된 사람도 수십 명이 넘었다. 최봉준은 야린스키에게서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최봉준에게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유훈으로 야린스키 처세정신 10조를 남겼다. 그리고 별장과 농장도 넘겨주었다. 실제 상속자가 된 최봉준은 밤마다 야린스키가 했듯이 사람 구하는 일을 똑같이 실천하며 근면하게 살았다. 최봉준은 야린스키 유훈 처세정신 10조를 첩牒으로 만들어 평생 머리맡에 두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첫째,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둘째, 명확한 목표를 세워라.
셋째,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해낼 수 있다.
넷째, 상대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다섯째, 자기 계발에 힘쓰라.
여섯째, 기회는 역경의 시기에 찾아온다.
일곱째, 성공은 냉철한 자기 분석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덟째, 경쟁보다는 협력을 하라.
아홉째, 실패를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라.
열째,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조선·러시아 무역계의 샛별로 등장
최봉준은 23살이 되자 야린스키의 별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러시아 국적의 야심만만한 청년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부터 한·러 무역장정에 따른 러시아와 함경도 무역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러시아 큰 상인들이 함경도와 무역을 하기 위해 한국말과 러시아말에 밝은 사람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1888년 ‘한·러 국경육지무역’이 정식으로 허용되고부터 함경도 사람들의 러시아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러시아인 세베레프는 재빨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까지 잇는 정기 항로를 열었다. 그때 세베레프의 정기 항로는 15년 기한으로 조선의 원산·부산항에도 들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때부터 러시아 무역은 화물선을 이용해 엄청난 물량을 교역하기 시작했다. 세베레프의 원산·부산 항로가 등장한 것은 1891년부터였는데 그 뒤에도 러시아 선박은 해마다 30척쯤 머물러 왔고 1892년에는 40~50척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러시아 무역계의 샛별로 최봉준이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 조선 정크선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45척쯤 오가고 있었다. 조선 정크선들의 척당 적재량은 약 1,000파운드였으며 10~30명씩 승객들을 싣고 다녔다. 함경도 지방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던 시기는 겨울을 뺀 연중 8개월. 그들은 바다가 꽁꽁 얼어붙지 않는 그 8개월 동안 보통 5~6회씩 오갔다. 이때 최봉준은 갑판에 올라 직접 정크선들을 진두지휘하며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경도 사이의 검푸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최봉준이 자리를 잡은 곳은 고향 함경도 성진(현 김책시)이었다. 그는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홍콩·상하이·일본까지 활동무대로 삼았다. 러시아·일본·중국에서 각종 수입품, 특별히 비단이며 광목·석유를 들여와 함경도 일대는 물론 부산에서 동해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지배하는 거상이 되어 갔다.

광목이니 석유니 하는 것은 구색 맞춰서 하던 장사였고, 최봉준 야망의 진면목은 그보다 훨씬 큰 활동무대, 드넓은 아시아에 있었다. 그는 거대한 화물선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부산과 인천·마카오·홍콩·상하이·대만·일본·블라디보스토크까지 취항하면서 온 바다를 주름잡고 다녔다. 국제적 해운왕으로 불리는 최봉준. 얼른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120년 전인 그 무렵만 해도 화륜선火輪船 한 척이면 하늘을 흔들 만큼의 재력을 상징했다. 그때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던 국유 화물선은 겨우 세 척. 그것도 고장 나서 제대로 운항을 못해 팔아버린 형편이었는데, 최봉준은 자기 소유 화물선을 당당하게 국제항로에 취항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자신이 개척한 항로를 통해 화물·여객운송사업 독점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무용을 떨친 일본 전함을 인수해 원산, 성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정기선으로 운항했다. 이듬해에는 선적을 한국으로 이전하고, 이름도 준창호로 개칭했다.
대한제국 정부도 차관을 얻어야 겨우 도입할 수 있었던 기선을 개인의 자금력만으로 인수한 것이었다. 더욱이 최봉준은 기선을 인수하고도 한 달에 1,000여 마리의 소를 매입할 수 있는 자금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에서 고생 속에 청년기를 보낸 최봉준은 34세 되던 1895년 러시아 공직을 사임하고 연추로 이주해 러시아 군대에 쇠고기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해 군수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최봉준은 러시아 군대에 쇠고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그는 러일전쟁 기간 동안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기타큐슈, 상하이, 옌타이, 하얼빈, 원산, 성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광역 무역항로를 개설했고 준창호를 위시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동양의 바다를 주름잡은 일본 군함 가운데 거함으로 손꼽힌 후시미마루를 포함하여 3척의 기선을 도입해 해운업에도 뛰어들었다.
준창호를 경영하면서 후시미마루로 다달이 1,000여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수출했으며, 광목과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을 취급해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해마다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나가는 계절노동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또한 최봉준의 배를 타고 건너갔으니 원산과 성진은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와 조선 사이 모든 수출입을 최봉준이 독점했던 셈이다.
 

대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
최봉준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베리아에 한국국민회韓國國民會를 조직, 재정적 후원을 맡았다. 그의 남다른 기백과 대인다운 면모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 비용을 모두 대주고 유족의 생계비를 남모르게 후원한 일에서도 뚜렷하게 빛난다.

최봉준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을 발행했다. 1908년 2월 펴낸 창간호에서 “우리의 문명제도를 본받아 가던 일본에 보호라 하는 더러운 칭호를 받으니”라고 분개하며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였으며, 발간사에서 ‘일반 국민의 보통 지식을 계발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완전하게 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밝힌 것처럼 애국독립투쟁을 고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신문보급도 러시아 영내뿐 아니라 경성·원산·인천·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고 선편으로 원산항을 거쳐 국내 방방곡곡으로 배포했다. ‘해조신문’은 조선 민족의 잠을 깨우는 논설, 국내외 소식, 교민사회의 동향, 계몽기사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매호마다 격렬한 항일구국 논설을 실어 애국지사의 피를 들끓게 하고 일본제국 통감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해조신문’이 국내에 흘러들어와 조선 민중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자 이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1908년 4월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뜯어고쳐 국내 판매를 금지하고 ‘해조신문’을 압수했다. 그 뒤 ‘해조신문’은 발매반포금지 횟수가 17회, 압수된 부수가 1,569부에 이르렀다. 이렇듯 국내 보급이 어려워지고 일제가 사장 최봉준에게 폐간을 강요하며 그의 사업체에 온갖 압력을 가하자 1908년 5월 26일자 제75호를 끝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폐간하고 만다.
 

진정한 독립운동 후원자
또한 성진 신평의 학교 교장은 물론 연해주 명동학교, 크라스키노(연추) 성흥의숙 설립 등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계몽 운동가답게 안창호와 가깝게 교유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밖에 한국국민회의 기관지 ‘대동공보’의 운영자금을 맡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 후에는 그의 변호비와 유족의 생계비를 위하여 많은 금액을 전달했다.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 유인석, 김학만 등이 시베리아 신한촌에서 한인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성명회의 선언서에 서명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열강의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극동정책 실시를 호소하는 데 적극 동참,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고려족 중앙총회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조선 독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1917년 9월 11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조선의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선 젊은이들은 이 땅의 자연적 약속을 깨우치고 역사적 사명에 눈을 떠야 한다. 지금껏 작은 이익에 집착, 서로 헐뜯는 기질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망하게 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 백성이 살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옳게 깨달아야 한다. 조선은 오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반도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 전체의 무궁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귀고리다. 신이 아시아를,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조선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레이스로 삼면이 둘러싸인 칠보이고 자수정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깎여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보석 같은 나라 조선이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잊어버린 바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깨달아, 그 가치를 발휘하고 지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다와 더불어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러싸인 조선 젊은이들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조선을 바다에 우뚝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사람만이 오늘의 조선을 구해 낼 수 있다. 남방 대양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국민 의기를 드높이고 국가경제를 일으켜, 조선 민족의 성실함과 총명함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 조선을 세계 으뜸 나라로 세워나가자.”
최봉준에게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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