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트용선의 법적성질과 해상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 11. 2. 선고 2017나48187 판결-
 

 
 

1. 서론
슬로트(스페이스)용선(slot charter/space charter)이란, 주로 정기선사들이 확정된 선박일정을 가지고 운항하는 경우, 용선자인 슬로트용선자가 다른 운송인이 운항하는 선박의 일정한 선복을 빌려서 자신이 운송인으로서 영업활동을 하는 것이다.1) 슬로트용선계약의 용선자는 선복을 빌려서 운송인이 된다는 점에서는 정기용선자와 비슷한 지위에 있으나, 상사사항에 있어서 항로의 지정권은 용선자에게 있지 않고 선박소유자에게 있고, 용선자가 선박의 자유사용권이나 선원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슬로트용선은 정기용선과 항해용선의 성격을 모두 갖는 특수한 용선계약이지만 항해용선계약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주류 견해이다.2) 슬로트용선의 법적성질과 슬로트용선자를 운송인으로 선택하여 운송계약을 체결한 해상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를 다룬 최근의 의미 있는 하급심 판결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2. 사실관계
원고는 농산물의 해외 수출업을 영위하는 회사이고, 피고는 운송주선업을 영위하는 회사이다. 원고는 2016. 8. 18. 피고에게 싱가포르까지 미화 15,300달러 상당의 거봉포도를 운송하여 줄 운항사를 주선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피고는 이에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K해운과 운송계약을 체결하였고, 구체적인 운송선박으로는 K해운과 공동운항계약을 체결한 H해운 소유의 선박(이하 ‘이 사건 선박’이라고 한다)을 선택하였다. 원고는 피고가 보내 준 운송스케줄에 따라 2016. 8. 27. 위 거봉포도(이하 ‘이 사건 화물’이라고 한다)를 이 사건 선박에 적하하였다. K해운은 원고를 이 사건 화물의 송하인으로, 싱가포르의 수입업자를 위 화물의 수하인으로 기재한 선하증권을 발행하였다. 이 사건 선박은 2016. 8. 27. 예정대로 부산항을 출발하였으나, H해운이 2016. 8. 31.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채권자들에 의한 선박 압류를 피하기 위하여 싱가포르항에 접안하지 않은 채 대기하였고, 2016. 9. 22.에야 싱가포르항에 접안하여 위 수입업자가 이 사건 화물을 반출하였으나, 위 화물은 이미 부패 등으로 상품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전량 폐기처분되었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가소422033호로 피고가 운송주선인으로서의 선관주의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운송주선계약상의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3. 사건의 경과
가. 이 사건의 제1심 법원은 2017. 6. 27. “피고가 운송인으로 선정한 해운회사는 K해운이고, 위 K해운이 해운회사간의 운송업무 상호교차서비스를 통하여 H해운의 선박을 이용하여 이 사건 화물을 운송한 것이므로, 피고가 운송주선인으로서 해운회사의 선정 등에 어떠한 귀책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나. 원고는 이에 불복하여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나48187호로 항소하였다. 항소심 법원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피고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피고의 항변 등에 관한 판단은 생략함), 다만 손해액을 70%로 제한하여 원고의 청구를 일부 받아들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가 대법원 2017다283189호로 상고하였으나, 2018. 3. 27. 상고기각(소액사건심판법 제3조 각호의 사유가 없는 경우)되어 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에서 선하증권상 운송인인 K해운이 스스로 운송행위를 하지 않고 H해운으로 하여금 그 소유의 선박으로 이 사건 제품을 운송하도록 한 것은 운항사들 사이의 공동운항계약에 따른 것임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다. 그런데 공동운항계약은 선박을 공동운항에 제공하는 정기선사들 상호간에 슬로트 용선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슬로트용선계약이란 일정한 항로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운항하는 정기 컨테이너선의 선박소유자가 선박 슬로트 중의 일부를 물건의 운송에 제공하기로 약정하고 용선자가 이에 대하여 용선료를 지급하기로 약정하는 계약을 일컫는다. 위와 같은 슬로트용선계약에서 용선자는 컨테이너선에 대한 자유 사용권을 가지지 못하고 컨테이너선의 선복의 일부를 빌릴 뿐이며, 선박의 운항과 관련된 비용 또한 슬로트용선자가 아닌 선박소유자가 부담한다는 점에서 슬로트용선계약은 항해용선계약과 유사하며 그 성질에 반하지 않는 한 항해용선계약에 관한 규정이 준용되는데, 선박소유자는 슬로트용선자가 제3자와 체결한 운송계약에 관하여 그 계약의 이행이 선장의 직무에 속한 범위 안에서 제3자에 대하여 슬로트용선자와 동일한 책임을 지는바(상법 제809조) 운송물의 멸실, 훼손 또는 연착으로 인한 손해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며, 운송에 관하여 선원이나 그 밖의 사용인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가지므로 실제운송인의 지위에서 제3자에 대한 불법행위책임 또한 부담한다.

위와 같이 공동운항계약 및 슬로트용선계약에서는 선하증권상 운송인인 슬로트 용선자는 실제 운송행위에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고 오히려 선박소유자가 실제운송인의 지위에서 제3자에 대하여 운송인과 같은 책임을 지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운송주선인은 운송주선을 함에 있어 슬로트용선인에 불과한 선하증권상 운송인의 선택뿐만 아니라 실제운송인인 선박소유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당해 운송에 적합한 신용 있는 운항사를 선택하기 위하여 그 주의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피고는 이 사건 제품의 운송인은 H해운이 아닌 K해운이므로 피고가 H해운의 법정관리로 인한 이 사건 제품의 운송지연에 따른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나, 이 사건에서와 같은 공동운항계약에 따른 운송에서의 선박소유자의 지위 및 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는 앞서 본 바와 같으므로 피고는 실제운송인인 선박소유자의 선택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지 아니하면 이 사건 제품의 운송지연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데, 피고가 선박소유자의 선택에 관하여 그 주의를 다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고, 오히려 피고가 이 사건 제품에 관한 운송주선을 할 당시 이미 H해운의 법정관리가 임박하였다는 취지의 언론 보도가 다수 이루어졌던 사실, 이 사건 제품의 선적일인 2016. 8. 27.을 전후로 한 K해운의 운항 일정 중에는 H해운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는 운항도 다수 있었던 사실 등이 인정되고, 위 인정사실에다가 운송의 주선을 업으로 하는 피고로서는 더욱 각 해운사의 신용도를 면밀히 살펴 이 사건과 같은 운송인의 신용도 하락에 따른 운송 지연 등을 미연에 방지하여야 할 것인 점 등을 보태어 보면, 피고는 운송주선인으로서 이 사건 제품의 연착으로 인한 원고의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4. 검토
위 판결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 쟁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슬로트용선의 법적 성질에 관한 법리이고, 둘째는 해상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의 범위이다.

 
가. 슬로트용선의 법적 성질
이 사건에서 법원은 “슬로트용선계약은 항해용선계약과 유사하며 그 성질에 반하지 않는 한 항해용선계약에 관한 규정이 준용”된다는 법리를 전제로, 선박소유자는 상법 제809조에 의하여 슬로트용선자가 제3자와 체결한 운송계약에 관하여 그 계약의 이행이 선장의 직무에 속한 범위 안에서 제3자에 대하여 슬로트용선자와 동일한 책임을 진다는 법리를 설시하였다. 이는 슬로트용선의 법적 성질과 슬로트용선에 대한 상법 제809조의 적용 가부에 관하여 다룬 최초의 판결이다. 슬로트용선의 법적 성질은 특히 슬로트용선자와 선박소유자의 화주 등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등이 문제되는 대외적 법률관계를 둘러싸고 문제된다. 예컨대 슬로트용선자가 상법 제809조의 운송인에 해당되는 경우 선박소유자의 책임에 관한 제809조의 (유추)적용 가부가 쟁점이 된다. 이 사건의 사안과 마찬가지로 슬로트용선자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선하증권을 발행하여 운송인이 되고, 이 경우에는 슬로트용선자가 선하증권상 운송인으로서의 책임을 부담하게 된다.3) 그렇다면 슬로트용선자와의 공동운항계약 하에 자기 소유 선박의 선복을 운송에 제공한 다른 정기선사의 책임은 어떠한가. 상법 제809조는 “항해용선자 또는 정기용선자가 자기의 명의로 제3자와 운송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는 그 계약의 이행이 선장의 직무에 속한 범위 안에서 선박소유자도 그 제3자에 대하여 제794조 및 제795조에 따른 책임을 진다.”고 규정한다. 슬로트용선은 ‘정기용선과 항해용선의 성격을 모두 갖는 특수한 용선계약’이라고 설명되므로, 항해용선과 정기용선을 모두 규율 대상으로 포섭하고 있는 제809조가 슬로트용선에 대하여도 (유추)적용 된다고 봄이 타당하다.4) 따라서 선박소유자인 다른 정기선사 또한 운송계약상의 손해에 대해 운송인인 슬로트용선자와 공동하여 부진정 연대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와 달리 슬로트용선에 따라 선박이 운항 중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경우와 같이 운송계약과 관련 없는 선원들의 귀책사유로 인한 불법행위가 발생한 경우에는, 항해용선계약과 마찬가지로 선박소유자만이 책임을 부담한다고 할 것이다.5)
한편, 서울중앙지방법원 2018. 4. 18. 선고 2017가합17851 판결(확정)은 한진해운과 공동운항 및 선복할당계약을 체결하였던 정기선사가 한진해운의 파산관재인을 상대로 한진해운에 대한 2016. 9. 1.자 회생절차개시결정 후에 목적항에 도달한 항차에 관한 정산금(한진해운의 해당 정기선사에 대한 선복사용료와 해당 정기선사의 한진해운에 대한 선복사용료를 상호 정산하고 남은 돈)이 재단채권에 해당함을 주장하면서 그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이 사건 정산금 채권은…실질적으로 선복사용료에 해당하며, 이는 항해용선계약의 용선료 또는 운송계약의 운송료로서의 법적 성질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위 채권이 재단채권인지 파산채권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우리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등에서 도급계약에 따른 보수청구권의 취급에 관한 법리6)가 (유추)적용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는 법리를 전제로, 그 전액이 재단채권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위 정기선사의 청구를 인용한 바 있다.7) 위 판결 또한 슬로트용선이 기본적으로 항해용선으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나. 해상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의 범위
일반적으로 운송주선인이 활동할 수 있는 계약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송하인이나 수하인의 대리인으로서 본인인 송하인이나 수하인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경우와, 둘째, 우리 상법 제114조에서 규정하는 경우와 같이 운송주선인이 직접 운송인의 권리 및 책임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계약당사자로서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8) 전자의 경우에는 대리의 법리가 적용되고, 상법이 예정하고 있는 운송주선인에 관한 법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9) 후자의 경우에는 상법이 예정하고 있는 운송주선인에 관한 법리가 적용되는데, 이 사건의 사안은 후자의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운송주선인은 자기나 그 사용인이 운송물의 수령, 인도, 보관, 운송인이나 다른 운송주선인의 선택 기타 운송에 관하여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하였음을 증명하지 아니하면 운송물의 멸실, 훼손 또는 연착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상법 제115조). 이는 운송주선인이 부담하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된다(상법 제123조, 제112조, 민법 제681조). 그런데 상법 제115조는 운송주선인의 주의의무의 내용으로서 ‘운송인이나 다른 운송주선인의 선택’을 명시하고 있다. 그만큼 상법의 전형적인 운송주선계약에서 운송주선인이 유능한 운송인(또는 운송주선인)을 선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10)
우선 비슷한 쟁점을 가진 선행판례를 본다. 대법원 2003. 2. 14. 선고 2002다39326(본소), 2002다39333(반소) 판결은 운송주선인이 세계 10위권 컨테이너선사인 甲회사를 운송인으로 선택하여 운송계약을 체결하였고, 구체적인 운송선박으로는 甲회사와 선복교환합의(슬로트용선계약을 말한다)를 체결하고 있던 乙 회사의 선박을 선택하여 그 선박의 선복에 화물을 적재하여 운송이 이루어졌는데, 위 乙 회사가 도착항의 접안료를 연체하여 도착지의 항만당국으로부터 접안허락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하역이 지체되어 화주에게 손해가 발생한 사안에서, “운송주선인인 피고로서는 이 사건 선박의 접안료가 연체되었다는 점을 미리 확인하거나 예견하여야 할 주의의무까지 부담한다고는 할 수 없고, 따라서 피고가 운송인이나 운송선박의 선택에 있어서 운송주선인으로서 부담하는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고 판단한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수긍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이 사건에서 법원은, ① 피고가 이 사건 제품에 관한 운송주선을 할 당시 이미 H해운의 법정관리가 임박하였다는 취지의 언론 보도가 다수 이루어졌던 점, ② 이 사건 제품의 선적일인 2016. 8. 27.을 전후로 한 K해운의 운항 일정 중에는 H해운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는 운항도 다수 있었던 점, ③ 운송의 주선을 업으로 하는 피고로서는 더욱 각 해운사의 신용도를 면밀히 살펴 이 사건과 같은 운송인의 신용도 하락에 따른 운송 지연 등을 미연에 방지하여야 할 것인 점 등을 근거로 운송주선인인 피고의 주의의무 위반을 긍정하였다.

위 판결들에 따르면, 해상운송주선인은 운송인과 슬로트용선계약을 체결한 다른 해운회사가 도착항의 접안료를 연체할 위험까지 확인하고 예견할 의무까지는 부담하지 않지만, 그 해운회사가 도산할 위험까지는 확인하고 예견할 의무는 부담한다고 할 수 있다. 해상운송주선인이 운송인의 선택(또는 구체적인 운송선박의 선택)에 관하여 부담하는 주의의무의 범위는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달리 평가·판단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주의의무위반이 인정되는 사례와 인정되지 않는 사례의 경계는 모호하다. 해상운송주선인으로서는 운송인의 선택(또는 구체적인 운송선박의 선택)에 관한 자신의 주의의무가 광범위하게 인정될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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