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를 살펴보면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간사회에서 생산이 소비를 초과한 적이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생산이 소비를 초과하는 것을 잉여라고 하고, 이것을 주고받는 것이 상거래이다. 상거래를 촉진시키는 배경에는 항상 도시(인구밀집), 귀족, 군대가 있었다.
 
그럼 근대 이전에는 어떠한 형태로 상거래를 했을까?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많아 농사짓기에 유리한 곡창지대라도 식량생산이 늘어난 만큼 인구도 늘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굶주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물며 산악지대나 바다 밖에 없는 지역에선 어떻게 했을까? 그 시기에 부족한 생산을 충당하기 쉬운 방법은 무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전쟁과 약탈 그리고 노예의 소유가 근대이전에는 부족한 생산을 채우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에는 생산능력의 증대로 많은 잉여가 창출되어 상거래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
조선의 경우는 생산력에서 남다르지 않았고 인구 또한 그러했다. 대도시라고 해봐야 평양과 한양에 20만 정도가 있는 것이 고작이었고, 지배층인 양반은 상대적으로 금욕적이었던 데다, 군에 대해서도 크게 투자를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생산력도 부족하지만, 소비는 더욱 부진하여 잉여에 대한 욕구가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압록수를 넘어 오랑캐나 중국을 넘볼 필요가 없었다.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인 선비들은 명조 멸망이후 세계 최고의 문명국임을 자부하는 가치관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건너 국가들은 야만인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본인 왜구의 끊임없는 약탈, 두 번에 걸친 상륙침공, 프랑스와 미국함대의 위협 등으로 혼비백산, 그리고 바다 건너 왜에게 36년 간 치욕적인 지배…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나쁜 기억들인데 바다는 항상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에도시대에 일본은 인구 100만의 계획도시 에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따라서 쌀이 주된 잉여였던 각 번주들은 쌀을 에도에 팔아 번을 운용할 재정을 마련하고 무사를 양성했다. 그렇다보니 상거래가 왕성하여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거의 최상위 신분인 무사들과 견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상인들이 글로벌한 활동을 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추어진 셈이다.
 
14-16세기 경 일본 연안 일대의 생활이 궁핍한 중소 무사, 농어민 가운데 해적이 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조선과 명국의 영토를 상륙약탈하여 자국의 부에 일조를 하며 동남아까지 진출하는 무역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개항하여 발전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일본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전후(戰後)에는 경제 숨통을 바다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로 충당했으며 노동집약 산업인 조선에 투자하여 일본의 수많은 실업자들에게 일감을 주었다. 자연히 바다는 일본인의 눈에 귀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서구 유럽에는 대표적인 해양세력인 바이킹(Viking)이 있었다. 바이킹은 대략 800년에서 1050년 사이 활약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양 상인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 북동쪽 해안 각지에 정착·약탈 등을 일삼아 당하는 국가에서는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에서는 구국의 영웅이며 부족함을 해결해 주는 믿음직한 전사요 가장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유럽귀족의 문화사랑과 사치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를 위한 소비재들은 바다를 통한 무역상인들이 조달하였다. 지중해를 누비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동남아시아며 일본을 누비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던 이슬람의 상인 또한 그렇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과 상선대의 도움으로 지구상에서 해가지지 않을 만큼 많은 영토를 차지했었다. 그러니 바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쟁과 약탈, 상거래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같은 세상을 서로 다른 편(偏)에서 보게(見)하는 고정관념을 갖게 한다. 새로운 정보를 인지적으로 받아들여 고착시킨 것이 고정관념이라면 선입견은 고정관념의 영향으로 어떤 정보대상을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편견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고정관념과 선입견의 영향을 받는다. 편견은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으로 인식되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차별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편견을 형성하는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첫째, 개인 또는 집단이 가지는 경험과 가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 둘째, 한 개인의 특성을 그가 속한 집단의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경우 셋째, 자신의 가치관으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판단하는 경우, 넷째 잘못된 전통적인 가치나 사회적 통념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우 다섯째,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은 우월하게 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은 낮은 것으로 보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기준에 의하여 우리 자신의 바다에 대한 편견을 반성해 본다면 어떠할까? 혹시 바다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외국의 정보나 우리역사의 특정사례를 보고 바다를 평가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관과 대륙지향사상으로 바다를 판단한 것은 아닌가? 바다 또는 선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자신은 해상생활을 하지 않고 바다와 관계없이 살아간다는 우월감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미래를 아름답게 보고 희망을 갖는 이유는 국민들이 바다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많이 인식하고 있고, 국가의 부를 형성하는 데에 바다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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