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날 기념] (5) 심천·홍콩 문화 체험

 

업계 70명이 함께한 해사문제연구소의 바다의 날 기념행사
중국의 미래, 현재, 과거 표현하고 있는 심천·홍콩·마카오
중 정부, 홍콩·마카오 반환 이후에도 독립체제 50년간 유지

 

올해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마련한 바다의 날 기념행사는 중국 심천의 옌티엔 항만을 견학하고 심천과 홍콩, 마카오의 문화를 탐방하는 것으로 기획됐다.
해사문제연구소의 동 행사는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제정하고 정부기념일로서 기념하기 시작한 1996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어 올해 13회를 맞이한 바다의 날과 그 회를 같이한다. 이번 행사는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고려해운과 광양선박, KCTC, 한국해양연구원 등 업계관계자 70명이 함께했다. 해사문제연구소의 동 행사는 경직된 일정이 아니어서, 가족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번 행사에도 많은 참가자들이 배우자 혹은 자녀, 외손 등을 동반해 보기 좋은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즘이라지만, 일반 여행으로는 할 수 없는 항만을 시찰할 수 없는 점을 고려하면, 업계의 특성상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가족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거나 선보일 수 없는데, 이런 일정을 이용하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한 제13회 바다의 날 기념 '심천 항만시찰 및 홍콩, 마카오 문화탐방'행사 참가자 단체사진(일부).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한 제13회 바다의 날 기념 '심천 항만시찰 및 홍콩, 마카오 문화탐방'행사 참가자 단체사진(일부).

 

한족이 꿰차고 있는 한국인 대상 가이드
너무 짙은 중화사상으로 반감드는 심천의 공연

심천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한국보다 무더운 날씨와 한국해사문제연구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현지가이드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차츰 모여든 우리 일행은 1, 2호차로 나누어 심천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심천에서의 가이드는 놀랍게도 한족(漢族)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을 맞이하는 가이드는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공식이 깨지고 있는 추세다. 그 대표지역이 중국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족들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조선족을 넘어 한족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의 축소모형을 모아놓은 심천의 '세계지창'입구. 축소모형이라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할 정도로 규모가 큰 건물도 있다.
세계각국의 유명 건축물의 축소모형을 모아놓은 심천의 '세계지창'입구. 축소모형이라고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할 정도로 규모가 큰 건물도 있다.


누군가 해외여행객이 많은 것도 국력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쉼 없이 들어오는 한국관광객들을 가이드하기 위해 저 사람은 또 얼마나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을까하는 생각이 앞섰다. 언젠가 갔었던 유럽여행지에서 아직은 보조역할만 했던 현지외국인 가이드가 우리일행의 인솔을 보조하면서도 틈틈이 한국어 책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공부했던 모습이 떠오르며, 그 외국가이드는 이제 혼자서 한국인을 맞이하고 있을까도 궁금했다.


문화체험은 첫날 옌티엔 항만시찰 등 공식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난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첫 관광지로 찾아간 곳은 심천만 부근에 위치해 있는 세계지창. 세계적 자연 풍광과 인문경관 등을 모방해 설치해 놓은 문화공원인 세계지창은 그 규모에서 이곳이 중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총 48만㎡의 대지에 130여개의 조형물들은, 이와 비슷한 컨셉의 세계 여러 공원들 중 가장 큰 규모가 아닐까 싶다.


둘러보던 중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형물도 보았다. 처음에는 ‘어! 우리나라 것’이네 싶어 반가웠는데 그 조형물이 북한과 남한 각각 1개씩 비교적 작게 표현된데다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모양에, 바로 옆이지만 중앙쪽에 제법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는 일본의 것과 비교가 되며, 약간 빈정이 상했다. 이래서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나보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심천의 공연. 하지만 극심한 중화사상 일색의 공연 내용은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심천의 공연. 하지만 극심한 중화사상 일색의 공연 내용은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오후 일정으로 둘러본 것은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민간예술, 풍속, 민속건축물 등을 한 곳에 모아 만들어 놓은 대형문화 유람지와 그곳에서 열리는 민속공연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영토확장을 위해 벌였던 전쟁을 주제로 한 것과 중국의 성립부터 각 소수민족과 그들의 융화 등을 담은 것 등 총 3개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비슷한 종류의 공연을 한자리에서 3편을 연속해서 보는 것이 조금은 피곤했지만 또 언제 심천을 오겠느냐며 이참에 확실히 보고가자는 인솔자의 권유로 묵묵히 객석을 지켰다. 이번 여행으로 심천하면 공연이 떠오를 정도가 됐으니, 확실히 보긴 한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일행들과 잠깐 나눈 얘기 속에는 하나같이 공연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화사상이 너무 짙어 적개심이 들더라는 내용이 태반이었고, 한국관광객들의 호응을 가장하며 공연되는 아리랑은 한국을 자신들의 소수민족쯤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격한 반감이 일었다고는데 입을 모았다.

 

반환과 함께 ‘동상이몽’을 꿈꾸는 중국과 홍콩
여자들에게 호화로운 홍콩의 생활문화

다음날 우리 일행은 심천에서 홍콩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심천에서 홍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도의 출입국 심사가 필요하다. 지금 중국은 1국 2체제, 아니 마지막 여행지였던 마카오까지 3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중국정부는 홍콩은 영국으로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로부터 이미 반환됐지만 향후 50년 동안은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결정하고 속사정은 어찌됐든 표면적으로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약속한 50년이 지난 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중국과 홍콩, 마카오가 융화될지 궁금하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때가 기억난다. 97년 여름, 잠깐 중국에 머물러 있던 날 중에 마침 홍콩 반환일이 속해 있었다. 그 즈음에서 중국은 온 나라 곳곳에 D-day를 알리는 전광판을 곳곳에 설치해 놓았었고, 그 당일에는 하루 종일 폭죽과 불꽃놀이로 자축했다. 그 사실이 즐겁지 않은 나와 같은 이방인에게는 너무도 시끄럽고 짜증나는 하루로 지금까지도 기억날만큼 중국은 그야말로 환희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좁혀지지 않은 이 두 나라는 결국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싶다. 
중국과 홍콩의 차이는 심천을 출발해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홍콩지역에서 타고 내리는 여성들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활기차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중국 본토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중국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홍콩의 생활문화는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여자들에게는 천국이다. 홍콩 여성들의 부러운 생활은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성비에서 출발한다. 결혼을 하고 싶은 홍콩 남성들은 맘에 드는 여성에게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고, 혼례비용 일체는 물론 신부집에 줄 지참금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으로서의 바깥일을 하면서도 집안일 일체가 남자의 몫이다. 부럽다는 탄성을 연신 쏟아낸 끝에 그래도 한국식 사고가 지배적인 나로서는 홍콩 남성들이 왠지 모르게 측은하게도 느껴진다.


홍콩에서의 첫날 일정을 보내고 숙소로 가는 길에 침사츄이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홍콩치안은 세계적으로도 꼽을만할 정도로 잘 돼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더욱 용기를 얻어 감행한 개인여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악용해 같은 길을 몇 번씩이나 돌고 그것도 모자라 거스름돈까지 떼어간 젊은 택시기사로 한껏 부풀었던 홍콩의 좋은 이미지가 조금 물색해졌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리틀 유럽’의 정취가 풍기는 마카오
마카오의 핵심, 카지노에서의 게임

이번 일정 중 마카오는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마카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떠나오는 순간까지 심천이나 홍콩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맛이 있었다. 특히 우리일행을 인솔한 심천의 가이드가 말투 등 여러 면모로 보아 북한사람인 것 같다는 중론은 자유롭게 생활하는 북한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가깝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에 더욱 배가됐다.

 

작은 유럽을 연상시키는 마카오의 거리 풍경
작은 유럽을 연상시키는 마카오의 거리 풍경


포르투갈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마카오는 홍콩과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바울 성당과 그 앞의 세나도 광장은 ‘리틀 유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아와 생각해보면 마카오에서 전해지는 유럽의 정취는 돌길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 돌길은 한마디로, 마카오의 부를 갈취한 포르투갈인들의 잔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카오에서 생산되는 많은 물자들을 포르투갈로 실어 나르고 나서 다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인의 배에 실린 것이 바로, 그길 위에 깔려있던 돌이었던 것. 그 돌의 용도는 풍랑을 이기기 위한 것으로 결국 자신들의 생명 부지를 위한 것이었다. 일용한 양식이나 값나가는 물자를 한껏 실어 빼돌리고 다시 뱃머리를 돌려 실고 온 것이 고작 돌이라니, 그 시대 마카오인들은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남의 나라 일이고, 오랜 과거사이지만 조금은 씁쓸한 맘이 스친다.


카지노로 유명한 마카오까지 가서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가는 것은 찐빵을 먹으며 속에 꽉차있는 앙코를 먹지 않는 일과 같은 것, 우리 일행에게는 약 30분간 카지노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좀 더 필요했던 홍콩달러를 환전하고 슬롯머신을 즐기는데, 운이 좋았던지 아님 소질이 있는 건지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고도 돈을 좀 더 챙겨 나오는 행운이 있었다.

 

그렇게 카지노에서 신나게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딜러가 이끌며 펼쳐지는 테이블에서의 진짜 게임을 어깨너머라도 보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쉽다. 하지만 이보다 아쉬웠던 것은 화려하게 마카오를 장식할 현란한 카지노의 네온사인이 하나둘씩 켜질 때 다시 홍콩향 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다음기회에 마카오를 다시 오게된다면 하루를 꼭 묵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되돌아오며, 우리의 일정도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번 중국문화체험은 단순히 중국의 한 지역만을 다녀온 것보다 볼거리가 다채로웠던 것 같다. 또한 중국이라는 거대국가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이면들을 한목에 비교해가며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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