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도선과 배를 인도하는 선비, 도선사(導船士)

우리나라의 도선은 그 원형인 조운제도를 통해 삼국시대인 4세기부터 일제의 침략 이전인 조선후기까지 꾸준하게 계속되어 왔으며,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의 격동기를 헤쳐 나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의 도선은 현재와 같은 형태의 업무가 아니라 단순히 물길을 잘 아는 그 지역 안내인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형태의 도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9세기 중반에 증기의 힘으로 대양을 건널 수 있는 증기선이 만들어졌다. 선박 운항의 패러다임이 기존의 바람(돛)과 사람의 힘(노)으로 움직이던 목선(木船)에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선(鐵船)으로 바뀌었고, 도선 역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는 조선이 쇠락한 국력으로 일본 및 구미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국내 항만을 개항하던 때였으며, 힘겹게 버티던 조선은 20세기 초인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방된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인천항 갑문공사(1911년) 등 항만건설공사를 하는 한편 일본의 「수선법(水先法, 1899)」을 근거로 조선총독부령인 「조선수선령(朝鮮水先令, 1915.9)」을 제정·시행한다. 이 법령으로 도선사의 역할과 위상, 지위 등에 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규정이 시행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조선총독부령 제103호로 조선수선인 시험규칙을 공포·시행하여 수선인(도선사)을 선발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우리나라의 도선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수탈하기 위해 도선제도를 도입하고 일본인 도선사를 양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가 도선(導船)이라 표기하는 것을 수선(水先)이라 한다. 즉, 도선사는 수선인(水先人)이다. 도선사를 영어로는 ‘Pilot’이라 표기하지만 각 나라마다 자국의 언어로도 표기한다. 
일본의 경우는 ‘수선인(물水, 먼저先, 사람人)’이고, 대만은 ‘인수인(끌引, 물水, 사람人)’, 중국은 ‘인항인
(끌引, 배航, 사람人)’이라고 하며, 우리나라는 ‘도선사(이끌導, 배船, 선비士)’라고 한다.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는 나라지만 서로 조금씩 그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 무척 흥미롭다. 

1915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조선수선령을 제정·시행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도선제도는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 체제하에서 1947년에 해사법규 정비를 단행하였는데, 이때 일제하의 ‘수선제도 및 수선인 제도’가 ‘도선제도 및 도선사 제도’로 명칭을 바꾸어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1961년에 대한민국 법률 제812호로 「도선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법률에 ‘도선사’라는 명칭이 쓰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 정도의 ‘사람人’을 쓰는 것과는 달리 ‘재능이 있는 인재’를 뜻하는 ‘선비士’를 쓴다. 선비는 사전적 의미로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해상안전은 물론 항만운영의 효율성 제고와 해양환경보호의 공익적 활동을 하는 도선사에게 선비의 정신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배를 인도하는 선비, 도선사’라는 용어를 어느 선배님께서 많은 고민 끝에 만들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랜 기간 인천항에서 활동했던 故 배순태 도선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도선사는 항만에서 최고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유혹이나 압력은 이겨내야만 한다. 도선사는 정도를 걷고 최고 어른으로서 품위와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후배 도선사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따라야할 선비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최초의 도선사, 역사가 기억하는 도선사

모든 일에는 꼭 최초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도선에도 최초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는 유항렬(1900~1971)이다. 충남 공주 출신의 유항렬은 일제 치하에서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외항선 항해사 및 선장으로 일하다 1937년에 인천항에서 도선사면허를 취득하여 개업한다. 당시 국내의 모든 도선사가 일본인이었음을 감안하면 식민지 국민으로서 도선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도선사가 되고나서 해방이 될 때까지 유일한 한국인(조선인) 도선사로서의 어려움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해방 후 유항렬은 미군정 아래 전속도선사로 일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우리 정부로부터 면허를 갱신받아 이후 약 25년 동안 인천항에서 활약한다.
한국인 최초의 도선사라는 자부심과 도선업이 항만시설이라는 공개념을 가슴에 품고 항만과 도선발전을 위해 일하다 퇴임한 그를 기리기 위해 후배 도선사들은 인천항 갑문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도 유항렬은 유일한 한국인 도선사였다.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다음날인 8월 16일자로 제2호 도선사인 홍순덕이 부산에서 개업한다. 당시에는 도선사를 선발할 때 법에 명시된 별도의 시험제도를 거치지 않고 알음알음 적당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임명하였는데,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인재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도 시험을 치루지 못했던 원인일 것이다. 

홍순덕 이후에는 6명의 도선사가 더 임명되어 인천, 부산, 군산에서 활약하였으며, 1958년에 들어서야 도선법에 명시된 시험을 거쳐 도선사를 선발하였는데, 최초의 국가자격 도선사 시험 합격자는 한국인 최초 세계일주 선장, 인천 내항 갑문 최초 선박통과 도선사, 한국도선사협회 창립 초대회장 등 다양한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배순태(1925~2017) 도선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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