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로 읽는 세계사‘는 일본 교토산업대 경제학부 교수 다마키 도시아키(玉木俊明)가 쓴 책이다. 그의 저서로는 해양물류 역사를 다룬 ‘근대유럽의 탄생’, ‘해양제국 흥륭사’, ‘유럽의 패권사’,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등이 있다. 물류는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물류의 역사는 세계화의 역사다. 세계화는 현대 사회를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용어가 됐다. 인터넷 발달이 세계화를 불러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물류의 발달이 세계화의 토대였다. 전 세계 상품이 우리 집으로 배달될 수 있는 것도 국제 물류시스템 때문이며, 덕분에 일상생활이 편리해졌다. 물류시스템은 현대에 들어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발달을 거듭해왔다. 어떤 사회든 완전한 자급자족이 어려워 물자를 교환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교환의 범위가 매우 좁았으나 서서히 넓어져 세계 물류가 실현됐다. 세계화 탐구는 곧 물류시스템 발전을 연구하는 일이 됐다.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물류시스템 안에 세계사의 흐름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의문을 품고 ‘물류로 읽는 세계사’를 썼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한 페니키아

페니키아인은 에게문명의 일부인 크레타와 미케네문명이 쇠퇴한 이후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한 민족이다. 페니키아인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살며 내륙무역에 종사하던 아람인과 대비된다. 아람인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사막에서 낙타를 이용한 대상무역을 했고, 페니키아인은 주로 배로 해상무역을 했다. 아람인은 히브리와 아라비아문자의 모체가 된 아람문자를 만들었고, 페니키아인은 오늘날 알파벳의 초석을 마련했다. 페니키아인은 무역을 위해 문자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동지중해 남해안을 거점으로 지중해 무역에 진출했다. 처음엔 레바논 백향목으로 불리는 삼나무를 수출하다가 그것으로 배를 만들어 해운업을 시작했다. 페니키아인의 무역 네트워크는 전 지중해에 걸쳐 있었고, 전성기에는 서아프리카, 홍해를 거쳐 인도양까지 뻗어 나갔다. 지중해 물류를 지배한 페니키아인은 세력이 날로 커져, 기원전 12세기에는 지중해 물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식민지도 여럿 건설했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국가는 시돈과 티루스이며, 티루스의 식민도시 중에 대표적인 곳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20년에 건설된 도시로 서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부근에 있던 항구도시로 수심이 비교적 얕아 닻을 내리기 쉬워 배를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지중해를 동서로 나누었을 때 중앙에 위치하고 시칠리아섬에 가까워,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까지 직선으로 지중해를 관통하는 경로의 시발점이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시돈과 티루스를 함락시키자 수많은 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로 이주했다. 이들을 받아들여 상업국가로 번성한 카르타고가 군사력까지 갖춰 시칠리아, 사르데냐에 이어 이베리아반도로 뻗어 나가며 세력을 키우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신흥강국 로마와 패권을 겨룬 싸움이 포에니전쟁이다. 3차에 걸친 오랜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여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자국의 내해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복한 드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카르타고의 물류 시스템을 수용했다. 고대 로마가 카르타고의 물류 시스템을 활용하지 못했다면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래 고대 유럽에는 항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로마도 조선이나 항해 기술이 거의 없었기에 카르타고의 해상활동과 물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나라로 끝났을지 모른다. 로마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물류 네트워크를 계승했기에 오랫동안 나라를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슬람 왕조는 어떻게 국력을 키웠나

7세기는 이슬람 세력의 전성기였다. 622년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이슬람 세력은 순식간에 거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슬람의 영토는 아라비아에서 서아시아까지 확대됐고, 시리아, 이집트, 이란,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까지 정복했다. 이처럼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팽창했던 배경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이슬람 왕조는 아바스 왕조때 한층 더 융성했다. 그 까닭은 아랍인이 아니면 무슬림도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내야 했는데, 아바스 왕조가 이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아바스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이슬람교는 아랍인만의 종교가 아닌 민족을 따지지 않는 세계적 종교가 됐다. 8세기 중반부터 200년 동안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상징이자 부의 원천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열대와 아열대 지역의 다양한 물자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서 생산된 상품을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했는데, 활동영역이 홍해, 동아프리카 해안, 인도 서해안은 물론 중국 광저우까지 미쳤다. 이들의 폭넓은 교역에 힘입어 부와 물자가 바그다드로 집결했고, 아바스 왕조는 크게 번영했다. 당나라 초기에 이슬람 상인들은 푸젠성의 취안저우까지 진출했으며, 원나라 때는 취안저우에 이슬람 상인들이 북적거리며 남방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16세기에는 힌두교도인 구자라트 상인이 인도양 동부의 벵골만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동아프리카와 중동 사이의 무역을 벌여 나갔다. 구자라트 상인은 말라카에서 독자적 공동체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자 무슬림과 항구 운영에도 협력했다. 이렇듯 이슬람 상인 외에도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양 해안에는 다양한 종교와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이문화 간의 교류가 활발했고, 나중에 포르투갈와 네덜란드의 기독교도도 비교적 쉽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15세기 초 영락제가 명나라를 통치할 때만 해도 중국은 대외정책에 적극적이었다. 무슬림 출신 정화를 보물선이라 불렸던 거대한 배에 태워 아라비아반도 원정에 나설 정도였다. 하지만 영락제가 죽은 후 대외정책이 돌변하여 대양항해용 선박의 건조까지 중단시켰다. 만약 바스쿠 다가마가 15세기 초에 인도양에 도착했더라면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영역을 늘려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외로 진출하던 중국이 거세게 저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대륙중시와 해금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인도양의 물류가 서서히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이킹이 한자동맹에 패배한 이유

중세에 북해와 발트해 무역을 주도한 세력은 바이킹과 한자동맹이었다. 바이킹의 뒤를 한자동맹이 잇고 한자동맹의 뒤를 네덜란드 상인이 이었다. 최근까지도 바이킹을 약탈자, 해적으로 보았으나 바이킹이 건설한 여러 도시의 유적이 발굴된 이후 인식이 바뀌어 상인으로 보기 시작했다. 영국의 요크, 아일랜드의 더블린, 프랑스의 루앙 등이 바이킹의 도시적 집락이자 교역의 거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이킹 하면, 대개 덴마크 바이킹을 뜻하므로 서쪽으로 진출했던 바이킹만 관심을 쏟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동쪽으로 진출한 바이킹도 많았다. 이들은 스웨덴 바이킹으로 불리는 사람들로 이슬람 세계와 거래했을 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비잔틴 제국과도 교역했으며 그들의 네트워크가 흑해와 카스피해까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한자동맹을 13세기경 북부 독일에서 새로 생긴 상업공동체로 생각하지만, 이들은 바이킹의 상업 네트워크를 계승했다. 만일 바이킹이 없었더라면 북유럽 상권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바이킹이 썼던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바이킹들은 이 롱십을 타고 약탈이나 무역을 하다가 한자동맹이 생긴 뒤 코그선이 보급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얕은 롱십은 훨씬 튼튼한 데다가 선수에서 선미까지 성곽 같은 구조물이 있는 코그선을 이길 수가 없었다. 한자동맹으로 알려진 북유럽 도시의 상업공동체의 독일어 명칭은 그냥 한자(Hansa)다. 이것은 상인 무리라는 의미일 뿐 동맹을 뜻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자는 동맹이 아니라 도시의 상업연합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자동맹의 총회가 뤼베크에서 계속 개최된 것을 보면, 이 상업연합의 중심지가 뤼베크라는 것은 확실하다. 12세기 이후 발트 및 북해의 무역은 주로 뤼베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울러 뤼베크뿐만 아니라 함부르크와 예테보리, 단치히 등도 함께 번창했다. 하지만 뤼베크가 유럽의 유통 거점이던 시대는 15세기 말로 끝이 났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그동안 항해의 난관이었던 외레순 해협의 해상경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항해기술을 발전시켜 조류가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는 경로를 개척함으로써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로써 발트해 지방의 상품들이 네덜란드 배에 실려 지중해로 보내졌다. 발트해가 지중해를 삼켜버린 것이다.

지중해의 쇠퇴와 발트해·북해의 번영

15세기의 이탈리아와 영국을 비교하면, 이탈리아의 경제적 미래가 영국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같은 시기의 북해 및 발트해와 지중해를 비교해봐도 지중해의 무역이 더욱 발전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경제는 정체하고 북해와 발트해 경제는 발전하여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북해와 발트해 지방이 근대 유럽의 주역이 됐다. 이렇듯 이탈리아와 지중해가 쇠퇴한 이유는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해운업과 물류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발트해 연안에는 해운 자재인 타르와 밧줄에 쓰이는 아마와 목재, 닻과 못을 만드는 철이 흔해 서유럽으로 수출됐다. 이들은 해상 발전에 꼭 필요한 자재였다. 지중해는 발트해보다 훨씬 넓어 대규모로 무역하기에 적합한 바다였다. 하지만 드넓은 지중해 연안의 제국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 장기간 지배하기에 벅찼다. 그리고 지중해가 발트해보다 풍요로울 것 같지만, 생태학적으로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지중해에선 삼림이 한번 훼손되면 회복되는 일이 거의 드물었으나 발트해 연안의 숲은 재생이 가능하여 지금도 여전히 울창하다.

근세 이후 영국, 네덜란드 등 북유럽 선박이 지중해로 속속 진출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지중해 물품을 지중해 내의 다양한 항구로 운반하는 해운업이 발달했다. 스웨덴 선박의 예를 들면, 스웨덴과 핀란드 땅에서 출발한 배는 6월 출항했다가 이듬해 항해철에 귀국했다. 스톡홀름에서 떠나 프랑스의 지중해 마르세유와 이탈리아 리보르노, 사르데냐섬 칼리아리 등을 거쳐 귀항했다. 스웨덴 상품을 싣고 출항한 배가 마르세유에 들러 짐을 풀고 포도주와 브랜디 같은 상품을 실어 지중해 내의 다른 지역으로 간 다음, 거기에서 다시 짐을 내리고 이탈리아산 소금을 싣고 본국까지 운송하는 식이었다. 스톡홀름에서 마르세유로 보낸 철이 동방과 북아프리카로 재수출되기도 했다. 또한, 포르투갈로 갔던 스웨덴 배가 그곳의 식민지 물건을 싣고 지중해로 귀항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북유럽 선박들도 지중해에서 해운사업을 벌였다. 이렇게 지중해 내의 물류 주도권이 북유럽으로 넘어가자 이탈리아 해운업은 급속히 쇠퇴했다. 그 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국들은 유럽의 원양진출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희망봉 경로로 뒤바뀐 아시아와 유럽의 위상

1488년에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닫았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가마 일행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도달했다. 이렇게 희망봉 경로가 개발되자 이탈리아는 인도 및 동남아시아 무역에서 배제됐다. 오스만제국과 무역을 계속했지만, 동남아시아 무역에서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에서 별로 역할이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의 귀한 물품인 향신료 운송에 희망봉 경로가 활용되자 홍해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경로는 서서히 쇠퇴했다. 초기에는 지중해 동안인 레반트 경로와 희망봉 경로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으나, 1641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희망봉 경로를 이용한 탓에 레반트 경로는 거의 소멸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무역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아시아의 원료와 생산품이 유럽으로 흘러갔으나 나중에는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제품과 상품이 들어갔다. 이 현상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력이 역전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이 이탈리아였으나 포르투갈이 등장한 이후 이 구도가 흔들렸다. 그 후 해양제국 포르투갈도 쇠퇴하여 그들이 아시아에서 점령한 지역이 대부분 네덜란드 또는 영국령이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제국이 쇠퇴한 이후에도 포르투갈인들은 독자적인 상인조직을 만들어 상업활동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동남아시아에는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우선, 이슬람 상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인도 출신이었다. 인도양에서는 이슬람 상인과 함께 힌두교도인 구자라트 상인이 활약했고, 중국의 화교도 동남아시아로 흘러왔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포르투갈 상인의 시장 진입이 비교적 수월했다. 아시아인이 지중해에 진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회사가 없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은 신세계와 아시아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활동을 벌였다. 이런 교역 덕분에 포르투갈 상인은 18세기 이후에도 아시아와 대서양 무역에서 활약하며 아시아와 신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반면에 아시아 상인은 희망봉을 넘어 유럽이나 대서양에 진출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럽 상인과 아시아 상인의 결정적 차이였다.

동인도회사의 역할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에 각각 설립됐다. 유럽인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자 그곳을 인도라 생각하여 신대륙을 서인도, 아시아의 인도를 동인도라 불렀다. 네덜란드에는 그전부터 동인도와 무역하는 회사가 있었으나 영국과 경쟁하기 위해 정부가 그것들을 통합하여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동인도는 지리적으로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본국에 의견을 묻다 보면 때를 놓치기 일쑤여서 일종의 국가처럼 상업활동을 보호하고 촉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출범했다. 두 회사는 군대를 보유했으며, 본국의 지령을 받기도 하고 본국에 보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도 있었다. 중세 유럽 상인들은 거래를 위해 이동할 때 누군가에게 경호를 맡기고 상응한 비용을 치렀다. 이런 지출을 보호세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은 동인도회사의 보호를 받았기에 보호세를 낼 필요 없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런 독창적 시스템이 동인도회사의 특징이었다. 아시아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거대한 회사를 만들지 않았고, 국가 권력으로 상업활동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먼저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 상인을 쫓아내는 일은 없었고, 서로 협력했다. 이처럼 국가의 경계를 넘는 상인 네트워크가 강력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무역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통치에도 가담했다. 18세기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산 면직물인 갤리코 즉 옥양목을 영국에 수출했고 이는 서유럽에서 널리 쓰였다. 아르메니아인은 영국 동인도회사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영국의 대리자가 되어 무굴제국과 사파비왕조와의 교섭과 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에 영국 상인들은 아르메니아의 상업 네트워크를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허점이 많았다. 직원과 현지인이 손을 잡고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고, 본국의 명령을 어기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먼저 해산됐고, 한참 뒤 영국도 동인도회사를 해산했다. 그 후로는 본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였다. 증기선과 전신의 발달로 인해 본국이 아시아를 직접 통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패권국이 된 네덜란드

패권국이란 역사학 용어로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가장 막강한 경제력을 지난 나라라는 뜻이다. 가장 강력하고 막강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한 마디로 세계 경제의 규칙을 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경제 패권국은 네덜란드였다. 당시에는 네덜란드의 거래방식이 유럽 전체의 표준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든 네덜란드의 뜻을 거스르면 필요한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등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봤다. 네덜란드는 유럽 이곳저곳으로 상품을 운송하며 유럽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네덜란드 경제에 가장 중요한 사업은 무엇보다 발트해 지방의 해운업이었다. 발트해 지방에서 수입한 곡물, 철, 목재, 해운 자재를 유럽 각지로 운반해 막대한 이득을 얻는 물류 센터가 됐다. 네덜란드의 물류 시스템이 없었다면 당시 유럽의 경제활동은 상당히 위축됐을 것이다. 이렇듯 발트해 지방과의 무역은 네덜란드에 확실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기에 발트해 무역을 네덜란드 무역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유럽 전역의 인구가 급속히 늘었으나 곡물을 비롯한 농산물은 크게 늘지 않아 유럽국가들은 극심한 식량부족 상태에 빠졌다. 서지중해의 식량 상황은 더욱 나빠져 기근과 궁핍이 지중해 도시들을 덮쳤다. 그러자 이탈리아의 무역도시 제노바, 베네치아, 리보르노는 최대 곡물 수출국 폴란드와 정기적인 수입계약을 맺고, 그 운송을 거의 네덜란드 선박에 맡겼다. 네덜란드가 발트해 무역에서 주로 사용한 선박 플라이트선은 이전의 선박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운송비가 저렴했다. 플라이트선은 적재공간이 거의 정사각형이라 대량의 물건을 실을 수 있는 데다가 무게도 가벼웠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발트해뿐만 아니라 지중해 물류까지 장악했다. 폴란드 곡물의 대부분은 발트해 외레순 해협을 지나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어디로 운반할지를 결정했는데, 그 일을 네덜란드 상인이 도맡았다. 이 무렵 네덜란드 선박은 유럽 선박의 3분의 2나 됐다. 거의 모든 상품이 네덜란드에 의해 운송되는 네덜란드 경제의 황금시대였다. 곡물의 시대가 끝나고 원료의 시대가 오자, 발트해 무역에서 네덜란드 선박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유럽의 대외진출에 필요한 해운 자재를 여전히 여러 나라로 운송했다. 네덜란드의 물류시스템이 없었다면 유럽은 외부세계로 진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는 18세기 말 이전의 네덜란드 물류시스템이 크게 공헌한 셈이다.

팍스 브리태니카를 실현한 해운물류

네덜란드에 이어 패권국이 된 나라는 영국이었다. 팍스 브리태니카는 영국이 가져온 세계 평화라는 말이지만, 그보다는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대영제국을 뜻한다. 영국은 세계에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그 배경은 무엇보다 영국이 세계 물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함대뿐만 아니라 상선단을 파견하여 대영제국을 유지했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상선대를 보유하여 세계의 물품을 실어날랐다. 영국은 네덜란드를 지켜보면서 해운업을 지배하고 물류를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해운업 우선정책을 채택하여 성공시킨 유일한 나라였다. 영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동인이 산업혁명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앞서 그들이 네덜란드 선박을 밀어내고 물류를 지배했던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국은 1651년부터 여러 차례 항해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영국이 수입하는 모든 물품은 반드시 영국 선박에 실리도록 했다. 그 당시 이미 모든 수출품을 영국 선박에 싣고 있었기에 수입에서만 네덜란드 선박을 배제하면 영국 무역에서 네덜란드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과 해외 물류를 모두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항해법은 역대 영국 정부가 펼친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고 말했다. 해양사학자 랠프 데이비스도 “1560년까지 영국의 해양국가 지위는 매우 낮았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 함부르크, 뤼베크 같은 도시보다도 낮았다. 그러던 영국이 국가 주도하에 해운업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1651년 크롬웰이 항해법을 제정한 것이 변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교역 특히 유럽 이외의 세계와 무역량을 크게 늘렸는데, 데이비스는 이를 상업혁명이라고 불렀다. 넓게 보아 영국은 보호무역이 아닌 해운업보호 정책을 썼는데, 이는 물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영국 선박이 세계 선박의 절반을 차지하고 전 세계 상품을 운송하는 물류강국이 됐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면직물 공업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의 공업국가가 된 영국이었으나 무역수지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해운업에서 발생한 수입이 늘기 시작했다. 영국이 세계에 증기선을 보내 국제 물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분명 산업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하지만 영국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만들고 팍스 브리태니카를 실현한 일등공신은 해운업이었다. 항해법이 공포된 후인 17~18세기에 영국은 자국과 무역 상대국 사이의 물류를 장악했고, 마침내 19세기 후반에는 세계 물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물류를 중시한 덕분에 패권국이 되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실현할 수 있었다.

교역의 민족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라는 말에는 종교적 박해 때문에 일어난 강제이주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해 흩어진 일을 뜻하는데, 그 후 유대인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오랫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야 했다. 중동 주변에서 주로 활동한 아르메니아인도 디아스포라 민족이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화한 나라로 영역은 서쪽으로 소아시아 고원, 동쪽 이란 고원, 북쪽 남코카서스 고원, 남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까지였다. 이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을 육로로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라는 나라가 여러 번 생겼다 사라진 것도 이런 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89년에 시작된 아르메니아 왕국은 서기 10년 멸망했고, 그 후 페르시아, 튀르크 등의 지배를 받았다. 교역의 민족으로 알려진 아르메니아인은 왕국이 사라진 뒤 오랫동안 고향, 즉 근거지가 없었다. 1606년 페르시아의 사파비왕조가 현재의 이란 중부 이스파한에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신졸파를 건설하자, 15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옛 수도 구졸파에서 이주했다. 그들에게 고향이 생긴 것이다. 당시 아르메니아인은 유라시아대륙의 다양한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류지는 중동은 물론 유럽에까지 펴져 있었고, 러시아의 거류지는 볼가강 하류의 아스트라한이었다.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제국의 시장에도 진출하여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에 버금가는 유력한 외국 상인으로 활약했다. 그들의 중요한 상업활동 중 하나는 은과 비단을 교환하는 일로 유라시아대륙의 은과 비단 유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르메니아의 러시아 무역은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인도를 국제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무굴제국의 아크바르 왕은 졸파에 살던 많은 아르메니아 상인을 인도로 불러들여 인도에서 가장 풍요한 지역인 벵골에 정착시켰다. 인도양 네트워크의 핵심 항구도시는 현재의 첸나이인 마드라스였으며, 그곳은 아르메니아 상인으로 인해 더욱 번창했다. 이들은 육상으로 티베트, 해상으로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과의 무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아르메니아 상인의 무역 경로는 매우 광범위했다. 아르메니아 상인의 존재는 오스만제국과 무역으로 깊이 얽혀 있던 유럽국가에도 긴요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도 아르메니아 상인의 도움을 받으며 동인도 무역을 전개했다. 19세기 후반 이후 증기선이 발달하고 무역항 배후지가 더욱 넓어지자, 아르메니아 상인의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그러나 그들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중요했다.

해양개척자 미국

18세기 중반 미국에는 영국화 현상이 일어났다. 미국인들은 영국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흉내 내어 홍차를 마시는 바람이 불었다. 이는 대서양 양 끝에 있던 두 나라에 공통문화권이 형성됐다는 뜻이었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인 7년전쟁으로 큰 빚을 진 영국 정부는 식민지 미국도 부담을 나눠질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은 “대표 없이는 세금도 없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본국에 미국을 대표하는 의원이 없다면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리하여 발발한 미국독립전쟁이 1783년 파리조약으로 정식 종료됐고, 미국은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에 영국 법의 보호를 받으며 상업활동을 했던 미국이 독립 후에는 영국의 보호 없이 홀로서야 했다. 독립전쟁 이전엔 영국령이었기에 영국 본토까지 자국 배를 자유롭게 보냈으나 이젠 영국 항해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경제위기에 빠질 위험에 처했다. 과연 미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사람들은 서부개척이 미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18세기 말에 이미 영국 다음으로 많은 선박을 보유한 해운국이었고, 조선업도 크게 발달한 상태였다. 미국이 독립하자마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한 것도 행운이었다. 미대륙에 해운 자재가 풍부하여 조선업 발전에 적합했다. 또한, 미국은 외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중립을 선언하여 해운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의 주요 항구는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볼티모어로 프랑스의 보르도를 비롯한 여러 항구와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미국이 보르도에서 수입한 상품을 동해안으로 일단 가져왔다가 최종 시장으로 재수출하는 일이 많아져, 미국 동해안의 항구들은 세계의 창고였다. 미국의 선주들은 중립정책을 최대한 활용하여 선박을 계속 늘릴 수 있었다. 미국 선단은 남미 대륙 남단의 혼 곳을 지난 뒤 태평양을 횡단하여 아프리카 남부의 희망봉을 돌아 지중해와 발트해까지 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휩싸인 유럽으로선 중립국 미국의 선박이 없었다면 필요한 물자와 자재를 제때 조달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 선박이 대서양을 건너 미주와 유럽의 물류를 원활히 이어주었다. 이처럼 미국에는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의 개척자도 많았다. 영국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미국 역시 전 세계에 선단을 보내 물류를 개척하고 경영했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먼로주의를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영국에 대해 해운업 보호조치를 선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로주의를 발표함으로써 특히 영국 해운업을 미 대륙에 진출시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 오대양에 함대를 보내 바다와 물류를 지배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의 경제성장은 해운업 발전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

새해가 시작됐다. 연초부터 선거 열기로 뜨겁다. 끝없는 보수와 진보 논쟁으로 소통과 화합이 실종된 우리 사회. 원형과 본질, 개방과 관용의 가치는 서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tim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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