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대지진으로 기억되는 '충격의 도시'

 

일본 서부지방의 아름다운 항만도시 고베(Kobe, 神戶)는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인에게 여전히 ‘충격의 도시’로 기억된다. 1995년 1월 17일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일어난 대지진으로 순식간에 6,4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재앙 때문이다.

 

한때 세계 3위 항만이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나락
150여년간 한번도 큰 지진을 경험하지 못한 고베시민들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지진이 남긴 후유증은 지워지지 않는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때 세계 3위권을 오르내리던 고베항만의 경쟁력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거의 모든 항만시설이 파괴되었고, 고베항으로 몰리던 일본의 수출입 화물은 물론이고, 주변국가의 환적화물 조차 인근 항만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번 끊긴 발길은 10여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돌아올 기미조차 없다. 지진 여파로 기항을 포기한 컨테이너선 운항의 특성상 다시 스케줄을 재조정하려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고, 모든 시스템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몇년전 화물연대 파업으로 부산항이 마비되었을 때 행여나 고베항이 반사이익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무너지고 말았다.

 

발길 돌린 선사들 10년 지난 지금도 저멀리..

지진후 2년여만에 시설은 예전 모습대로 복구했지만, 활기 넘치던 고베항의 모습은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진 직전인 1994년 27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해 홍콩, 싱가폴, 부산, 카오슝과 동북아의 허브항만 경쟁을 다투었으나 이젠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지난 10년 동안 200만TEU를 넘은 게 고작 2번에 불과할 정도로 고베항은 이제 허브항만 경쟁대열에서 탈락한 느낌이다.


그나마 지난해는 고베 대지진 이후 최고치인 225만 9,000TEU의 컨테이너 처리량을 기록해 혹시 부활의 신호탄이 아닐까 고베항 당국을 들뜨게 하고 있다. 전년대비 성장률도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높은 3.8%를 기록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내 자국 연안화물 처리량이 37만 4,000TEU로 14.7%의 증가한 반면, 수출입과 환적을 포함한 외항 물량은 188만 5,000TEU로 1.8% 증가에 머물러 크게 실속이 없었다.

 

작년 컨화물처리량 225만 9,000teu에 불과
고베항의 하드웨어는 다른 어느 항만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섬세함으로 다듬어 놓은 항만시설 또한 뛰어나다.


일본 본토인 혼슈(本州)와 네번째로 큰 섬인 시코쿠(四國) 사이에 세토나이가이라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혼슈쪽으로 쑥 들어간 곳이 오사카만으로 바로 여기에 고베항이 자리한다.

고베항은 컨테이너선 뿐만 아니라 자동차선, 여객선, 벌크선 등 거의 모든 화물선이 기항할 수 있는 다목적 항만이다. 컨테이너 선석수만도 27개로 기본조건은 충분하다.

 

1900년대 초기부터 단계적으로 개발된 기존의 다목적 터미널들외에도 고베항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역시 인공섬‘포트 아일랜드(Port Island)’와 ‘로꼬 아일랜드(Rokko Island)’ 터미널이 가동을 하면서 부터다.

 

고베항의 명성 로꼬아일랜와 포트아일랜드 가동부터 시작됐었다
‘포트 아일랜드’는 고베 앞바다에 1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81년 131만평의 규모로 4개의 컨테이너선 선석 등 총 19개의 선석을 갖추고 개장했다. ‘로꼬 아일랜드’는 그 보다 10여년후인 1992년 175만평에 컨테이너선 선석 13개와 기타 여객선 선석 등울 포함해 26개의 선석으로 출발했다. ‘포트 아일랜드’는 그 후 2단계로 추가로 6선석을 추가해 현재는 32개의 선석을 갖추고 있다.


고베항의 ‘포트 아일랜드’와 ‘로꼬 아일랜드’는 개발단계부터 터미널 시설과 함께 물류기지, 창고, 도시 기반시설 등을 완벽히 갖췄다. 배후 수송망 또한 빈틈이 없다. 항만의 수출입 화물을 수송하기 위한 고속도로가 고베시내를 관통하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도록 고가도로 방식 등으로 건설되었고, 철도 또한 거미줄처럼 일본 전역을 커버한다. 바지선 등 해상을 통한 수송망도 잘 발달돼 있다.


매년 4,000여척의 선박이 전세계 130여개국 500여 항만으로 운항된다. 일본의 해운회사는 물론 해외 각 선사들이 고베항에 터미널을 임대하여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허브항 경쟁에서 주도권 상실한 고베 부활 요원
그러나 과거의 榮華를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고베항의 부활이 더딘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고베항과 동북아 허브항만 경쟁을 벌이던 기존 항만에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환적화물의 원천이던 중국은 이미 자국의 상해항과 심천항 등을 발전시키면서 세계 3, 4위 항만으로 키워놨고, 인근 부산항과 카오슝항도 예전만은 못하지만 신항만을 건설하는 등 옛 영화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고베로 몰려오던 일본내 화물 또한 도쿄/요코하마, 나고야 등지로 옮겨갔다. 동북아 허브항만은 고사하고, 일본내에서 조차 4위 항만으로 뒤처진 것이 고베항의 현실이다.


앞으로도 물동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 더 근본적인 악재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갈수록 일본의 상품경쟁력이 떨어져 수출물량이 감소하고, 결국 컨테이너 화물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일본경제가 장기침체를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고베항의 부활을 이끌만한 처방이 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용에 편리한 항만만들기 노력 고육지책에 그쳐
지진 이후 지난 1997년 각급기관, 업계, 노조 등 26개 단체대표들로 고베항 이용촉진협의회를 구성하고, 항만이용료 삭감, 수속간소화, 항만전산화, 피크타임때 혼잡완화, 환적화물 유치책 등 이용하기 편리한 항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나 고육지책이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1980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 주요항만의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세가 부산, 카오슝, 홍콩, 상해 등 경쟁항만에 비해 뒤처지는 이유를 복잡한 수출입화물수속 절차와 타 국가 보다 30%~40% 이상 높은 항만이용료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중국경제의 급성장과 더불어 증가추세에 있는 아시아 물동량의 일본유치를 위해 2002년부터 대책마련에 착수하여 수출입화물 수속절차 간소화, 항만시설이용료 인하, 물류기능 개선/강화 및 규제완화(교통망 정비, 복수버스관리체제 도입, 세관/하역업무 24시간 체제 구축) 등의 세부 지침을 마련했다.

 

정부 슈퍼중추항 프로젝트 실행방안 실체없어
그  가운데 항만시설 이용료 인하 등 항만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도입한 핵심정책이 바로‘슈퍼중추항만’프로젝트다. 이에 따라 케이힌항(동경항,요코하마항), 이세만(나고야항, 요카이찌항), 한신항(코베항, 오사카항) 등 각각 두 개 항만을 통합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통합이 성사될 경우 두 항만중 한 곳에만 입항신청서를 내면 서류수속에 원스톱으로 끝나 양쪽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입항료도 단일화되고, 국세인 톤세도 한곳에만 내면 된다. 선박도착부터 제품인도까지 걸리는 시간을 현행 3일에서 1일 이내로 단축시키게 된다. 특히 고베항과 오사카항의 통합으로 장기적으로 오사카항은 수출품 중심으로, 고베항은 수입품 중심으로 특화시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정작 이 정책이 발의된 지 2년여가 흐르고 있지만, 아직 정부의 예산편성 등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발표되지 않고 있어 자칫 口頭禪(실없는 말)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뜻하지 않은 천재지변으로 세계 3위에서 10여년만에 20권 밖으로 추락한 고베항. 일본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인공섬을 만들어 항만으로 육성한 일본인들의 과감한 도전정신과 무한한 독창성이 다시금 고베항의 부활을 이루어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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