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기사로서의 업적과 사(私)·자연인으로서의 모습-

1. 첫 만남·첫 가르침

 

1947년 7월 하순, 해양대학 1기생 약 80명은 미군정 부산항만청 소속선 LST형 KBS2호(천안호)에서 단체실습을 하게 되었다. 실습생 지도교관은 초대학장을 역임한 해당 이시형(海堂 李時亨), 선장은 해위 이재송(海偉 李哉松)이었다.

 

해위는 신호(神戶)고등상선학교(신호상선대학 전신) 출신으로, 1944년에 일본운수통신성의 갑종선장면장을 취득하고 있었고, 해당은 동경고등상선학교(동경상선대학 전신) 출신으로, 1939년에 일본 체신성(운수통신성의 전신)의 갑종기관장면장을 취득하고 있었으므로 인재난의 당시로서는 초호화판의 인사배치였다고 하겠다.

 

필자의 기억으로서는 해위의 첫 가르침은 부산항 제7묘박지(錨泊地)(적기(赤崎)앞바다)에 정박 중인 천안호 갑판 상에 있어서의 성좌와 별에 관한 설명이었다. 당시의 여름밤의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청명한 천궁(天穹)1)에 무수의 별들이 신비의 광망(光芒)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해위는 천정(天頂) 북측의 북두칠성을 가리키면서 그 중 2개의 밝은 별(1등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북극성의 발견법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책도 교재도 없는 상태에서의 가르침이었다.2)

 

특히 광도(光度)가 높은 카페라(Capela), 아르크투르스(Arcturus), 베가(Vega) 등의 별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안타레스(Antares)를 설명하실 때에 일본사람들은 이 별이 속한 성좌를 사소리(さそり: 전갈(全 ))좌라고 한다고 일본말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해위의 박식함에 경탄하면서 한 마디의 말씀도 놓치지 않겠다는 긴장감으로 어둠 속에서 열심히 연필로 받아 적었다.

 

■ 맨 손으로서의 해기사 교육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써의 그의 가르침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해도(海圖)를 보는 방법, 육상물표에 의한 선위(船位)의 측정방법, gyrocompass의 원리, true course와 magnetic course, leeway 등등의 초보 지문항해(地文航海)에서 천문항해에 이르기까지 성의 있는 가르침이었다. 하역장치가 없는 LST선인지라 가르침의 대부분은 초보적 항해술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최신식 계기를 갖춘 미군용선 LST에 있어서의 해기사로서의 실무교육은 칠대양 웅비를 꿈꾸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해위는 눈부신 후광 속의 권위자였다.

 

2. 진정(眞正)·진수(眞髓)의 해기사 상(像)

1949년 만춘(晩春), 해양대학 근무가 일천(日淺)하였던 필자는 부학장인 해위의 장항출장을 수행한 일이 있었다.

 

용무를 마치고 장항 부두에서 군산행 연락선(ferry)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5,000G/T급 외국선적 신조선 한 척이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말없이 그 배를 쳐다보는 해위의 표정은 황홀 그 자체였다. 그는 넋 빠진 사람처럼 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도 저런 배를 지휘해 봐야지」라 독백하였다. 그 때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진정·진수의 해기사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어 강한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야간항해 중 선장실 문을 열어놓고 침대에서 취침하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아 가면(假眠)상태를 취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회상되어 숙연한 마음으로 해위를 바라보게 되었다.

 

3. 약력에서 보는 사인(私人)으로서의 특징과 공인(해기사)으로서의 공적

■1909년 6월17일, 평양 출생

■1930년, 평양광성학교(5년제 중학교, Christian Mission School)졸업

■1936년, 신호(神戶)고등상선학교 졸업

※동경고등상선학교에는 구한말시대에 파견된 유학생과 그 후 유항렬(劉恒烈),황부길(黃富吉)등조선인(당시)으로서 졸업한 예가 있으나, 신호고등상선학교의 경우에는 이 재송이 최초의 졸업생이다.

■1936년, 야마시타(山下)기선(주) 입사, 해기사로서 승선 근무

※당시,야마시타기선(주)은 일본 유수의 해운회사였다. 조선인이 고급선원(해기사)으로서 취업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44년, 갑종 선장면장 수령(일본운수통신성)

※그 당시 조선인으로서 일본운수통신성 갑종 선장면장을 받은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유항렬, 황부길은 미상) 1945년 8월 15일, 광복

■1947년, 엘리사호(선장 호주인), LST KBS4호(선장 일본인) 인수

: 외국 선장과 대등 또는 우위의 자격으로 선박을 인수할 수 있는 인재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해위에 대한 예우는 극진하였다.

■1947년, LSTKBS2호(천안호)선장으로서 해양대학 1기생 단체실습·훈련 담당: 고등교육을 받고 일본운수통신성의 갑종 선장면장을 취득한 유일한 인사였으므로, 한국 최초의 바다의 역군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의 연습선 선장으로서 해위 이외에 적임자가 없었다.

■1948년, 해양대학 부학장 취임:해양대학장 이시형은 고등교육을 받은 갑종 기관장(1939년 9월18일, 일본 체신성 갑종 기관장면장 수령)이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은 항해과 출신자가 아쉬운 처지였으므로 극진한 예로써 해위를 부학장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1950년, 단양호(LST)선장으로서 해양대학 3기생 단체실습·훈련 담당 1950년 6월 25일, 공산군 남침

■1951년, 해군중령 임관, PF-62함장으로서 압록강 하류 신미도 근해에 서적 YAK기 4대와 교전, 1대 격추, 1대 격파, 후에 대령으로 진급, 해군본부 인사국장 역임:해위의 갑작스런 해군입대에는 긴박한 시대적 요청도 있었지만 해군당국의 극진한 예우로써의 권유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즉, 6·25전쟁 초기, 기습해 온 공산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력(戰力)강화가 시급하였으며, 해군으로서는 새로 인수한 최초의 구축함(frigate형)PF-62를 능숙하게 조함(操艦)할 수 있는 지 휘관이 화급히 소요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해군참모총장 손원일(孫元一, 1909년 5월 5일생)과 해위는 동년배로서 평양 광성학교의 동기·동창생이었으므로 격의없는 예우로써의 해위 영입이 가능한 것이었다.

■1952년,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음

■1953년, 예비역 편입(대령), 한국 최초의 대형 유조선 천지호(天池號)의 인수 선장에 임명됨

※ 한국최초의 대형 유조선(5,000G/T급)의 선장

■1953년-1966년, 대한해운공사 해외취업선의 선장 등으로 승선 근무함

■1954년, 미국의 금성무공훈장을 받음 ※한국해기사출신 군인으로서 미국 금성무공훈장을 받은 최초 의 인물로 기록되었다.

■1964년, 제5회 3·1문화상을 받음

■1964년, 도선사 자격 취득 권유 사절: 해위의 해기사로서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었다. 해사관련인사들은 황부길의 전례에 따라 해위에게도 부산항 도선사로서 취업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해위는 이를 사절(謝絶)하고 선장직에 전념하였다.

■1997년 10월 7일, 향년 88세로 영면

■2000년 5월 20일, 국립묘지에 안장

※ 해기사 출신 군인으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예이다.

 

상기한 해위의 약력에는 뚜렷하게 눈에 띄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즉 ※로 표시한 곳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인으로서의 최초의 업적(8·15전)과 해기사로서의 최초의 업적 또는 영광(8·15후) 그리고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은 극진한 예우로써의 권유에 의해 전직(轉職)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인(私人)으로서는 해위만큼 높으신 자존심과 긍지의 삶을 일관하고자 힘쓴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인(해기사)으로서의 해위는 바다의 역군을 양성하는 한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해양대학 제1기생의 단체실습선의 선장직을 맡는 등 신생국가에 있어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새로운 일에 당면해야 하는 선구자로서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그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역으로써 상호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평화의 사도로서의 해기사의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였고(해기사로서의 역할), 이와는 반대로 국가 유사시에는 과감하게 해전(海戰)의 제1선에 나서 국토수호의 의무에 정신(挺身)하여 용감무쌍한 전사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해기사 출신 해군장교로서의 역할) 해기사로서의 해위의 업적은 우리의 귀감이며,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한 자연인으로서의 해위

제자로서 스승의 사람됨을 논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 하겠으나 피상적인 관찰에 의한 속론(俗論)의 폐(弊)를 불식하기 위하여 스승의 참 모습의 일단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정서적으로 일정한 거리 이내의 접근을 준거(峻拒)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민이나 심정을 남에게 토로하는 일은 없었다. 고독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며 자기의 약점을 타에 노출시키는 일은 없었다.

 

선박을 암벽에 계류(繫留)할 때의 그의 노호(怒號)와 고함은 유명하나, 그것은 평소의 억압된 심리의 폭발현상이지 결코 그의 참 모습은 아니다. 그 실(實)에 있어서 그는 수치심 많고, 남(그것이 가족일지라도)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겸손함을 본성으로 하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

(1) 일본군인(장교)으로서의 특권행사에 대한 수치심

군국주의시대 일본에 있어서 군인(장교)의 특권의식은 대단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원거리 철도여행 차표구매는 어려운 일이었으며 역에서 밤을 새는 것은 당연지사가 되고 있었다.

해위는 역장실에 들어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豫備海軍中尉 嘉山 哉松」(예비해군 중위 가야마 사이쇼)라는 명함을 내보이고 즉각 차표를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군인(장교)행세를 한 것을 비열한 행위라 하여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2) 결혼주례 사절

해위는 「나 같은 사람은 결혼주례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주례 맡기를 사절하고 있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그가 결혼주례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3) 대일(對日)감정

해위가 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호고등상선학교 시절 일본해군병학교(사관학교)와 유도시합을 했을 때의3) 일본인들의 비신사적 행위에 심한 불쾌감을 나타낸 적이 있었으나 그들에 대한 욕설(辱說)은 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어를 사용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성좌를 설명할 때의 「さそり」(사소리, 전갈)뿐이었다. 그가 일본이나 일본인을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일은 없었으나 필자들이 불식 중에 오모태(ぉもて,선수부(船首部)), 토모(とも,선미부(船尾部)) 등의 관용적 일본어를 사용하면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의 반일감정은 보통수준 이상이었다.

 

(4) 음주불란(飮酒不亂)

해위는 주석(酒席)에서 수다스럽게 떠드는 일, 고성방가하는 따위의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노래를 요청하면 마지 못해 「옛날의 금잔디」를 부르거나 「할미꽃」이라는 시를 암송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예외는 없었다. 그가 일본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5) 해위와 영어

LST, 선장실에 비치된 타자기로 영어공문을 직접 작성하고, 학생들의 영문신분증을 작성해 주는 해위를 보고 그의 탁월한 영어능력에 경탄하고 있었는데, 해사용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해위의 모습을 세 번 목격한 바 있었다.

 

첫째, 1947년 초가을, 미군정 장관 William. F. Dean장군이 KBS2호를 시찰한 적이 있었는데 해위는 통역 없이 시종 직접 응접·설명하고 있었다.

둘째, 1947년 만추, 상해행 KBS2호에 수명의 미국인이 편승하였는데 그들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해위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셋째, 시기는 미상(未詳)이나 적하(積荷)에 있어서 sulfur(유황)와 flour(소맥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미국인에게 주의환기하고 있는 것을 방청한 적이 있다.

평소 그는 영어를 안다는 시늉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6) 청산가리에 얽힌 사연

1997년 어느 날이라 생각된다. 동대신동의 거처에 와주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병상의 해위를 방문하였다. 가족의 부호(扶護)로써 앉은 자세를 취한 그는 필자와 단둘이 되자 내방을 반긴 다음, 안면의 상처를 가리키면서 그 사유를 설명하였다.

 

보행곤란으로 벽에 장착한 손잡이를 잡고 겨우 변소출입을 하는데 몇 번이나 전도(顚倒)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안면 부상을 하고 가족을 놀라게 하는 것이 큰 마음의 부담이 된다고도 하였다. 말씀을 마치고 무언으로 한참 필자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임자, 청산가리를 구해줄 수 없겠는가」라 하지 않았겠는가.

 

그 순간 필자는 전격(電擊)을 받은 것처럼 경직절구(硬直絶句)하였다.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계시는 늙으신 스승께서 이 못난 제자를 이처럼 믿으시면서 아마도 최후가 되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에 응하지 못하는 딱한 처지를 어찌하리까.」

평소 높으신 자존심과 긍지의 삶을 일관하신 스승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 스승의 흉중을 촌탁(忖度)하니 만감이 교차하여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오호(嗚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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