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과 의료분쟁으로 어수선한 3월, 태크마린 후원으로 열린 3월 콤파스의 강사로 국제해사기구 IMO의 사무총장이었던 임기택 씨가 나와 ‘국제해사 기후변화 전략과 뒷얘기’를 들려줬다. 임 총장은 한국해양대학을 나와 천경해운에서 항해사 생활을 했고, 선박직 공무원이 되어 해운정책과장, 해사안전담당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을 역임하다가 부산항만공사 사장을 거쳐 유엔 기구인 IMO의 수장이 되어 8년간 일한 후 최근 퇴임했다. 그동안 국제해사분야 발전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며 국위선양을 하였다. 이날에도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발표로 청중을 압도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임기택 총장은 주제 발표에 앞서 자신은 이제 FM(free man) 즉 백수라고 소개하고, 초청에 감사하며 이런 모임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오늘 참석자들은 모두 역경에서도 한국해운을 육성 발전시킨 분들이라며, 그동안의 분투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IMO 사무총장직을 연임하며 8년간 일할 수 있도록 성원해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임기 중에 특히 민감한 사항인 저유황유, 기후변화에 대한 초기 및 중장기 전략에 초점을 맞추어 일했다며, 국제기구에서 일하다 보니 전문지식과 외교능력이 절실함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런던 주재원들은 엘리트이자 외교관이므로 그들과 대등하게 어울리며 자료를 교환하고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는 노력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며, 발표를 이어갔다. 

 

국제사회는 글로벌 박애정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국제회의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요체다. 유엔의 각종 회의에서 개도국과 선진국이 대립하는 이유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도국 입장은 ‘차별적 공동책임 원칙’ CBDR(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을 내세우고, 선진국은 LPF(Level Playing Field) 즉 ‘대등한 경쟁’을 주장한다. 개도국의 입장은 선진국이야 갖추어진 상태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자신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경제적 기술적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여 국제의무를 차별화하자는 논리와, 국제사회의 현안이 안전에서 공동대처가 필요한 환경으로 바뀌고 있는데, “언제까지 개도국이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주장이 맞물려 국제회의의 쟁점이 되고 있다. 시급한 지구촌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글로벌 박애주의가 요청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채택된 IMO 전략은 예정대로 추진될 것이다. 따라서 균형 있는 집단 리더십이 필요하며, 우리나라도 사안을 전략적 정책적으로 접근하여 대처해야 한다.

 

IMO의 주요정책

지난 8년간의 IMO 주요정책은 기술적으로는 환경과 안전 문제였다. 우선 환경은 밸러스트 협약, 저유황유 채택 및 집행, 선박해체를 중심으로 한 홍콩협약 발효, 해양 플라스틱 퇴치 전략, 기후변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여 많은 성과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안전 분야에서도 자동화선 개발 및 운항에 따른 안전 확보와 아덴만과 서아프리카에 출몰하는 해적 퇴치와 최근의 홍해의 후티 반군의 공격을 국제공조로 대처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곡물수송 문제와 코비드 확산에 따른 선원 문제도 주요 현안으로 삼고 풀어나갔다. 코비드 팬데믹 기간의 선원 인권 문제는 IMO와 국제노동기구 ILO가 합동 컨퍼런스를 개최하여 공론화하고,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여 조치했다.

 

문화적으로 요즘의 트렌드는 콜라보 즉 융합문화이므로 파티로 유대를 강화하고 신뢰 외교로 풀어나가야 한다. 국제무대는 드라이하기에 협조와 지원으로 한국문화를 접목해야 한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는 국제무대에서 매우 좋은 여건이다. 개도국 지원을 강화함으로써 상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 높아지고 영향력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 전략

최근 국제사회의 최우선 현안은 기후변화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IMO의 방침은 탄소 문제를 “금세기에 해결한다”와 “50%를 감축한다”로 2015년에 결정했다. 2018년 초기 전략은 2030년과 2050년의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다는 ‘목표 플러스 로드맵’을 수립했으나 페루대사와 사우디대사의 이의제기로 탄소감축보다 기술개발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산유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다. 2023년에 채택된 중·장기 전략은 지역과 국가별로 확연히 나뉘었다. 이 전략은 EU의 주도로 국제정치가 반영된 것인데, EU의 입장은 미국에 동조하며 대응하는 관계였다. 핵심은 2030, 2040, 2050 달성 목표이며,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술 및 경제조치는 탄소매출권거래제인 ETS와 MBM이다. MBM은 국제해운 분야에서 배출권거래제도처럼 경제적 인센티브를 활용하여 비용적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는 방안이다. 경제적 인센티브는 고효율 선박 건조, 탈탄소화 기술개발,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 등이다. 

 

한편, 로드맵(Roadmap) 2025와 2027을 둘러싸고 주요국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유럽은 북유럽과 남유럽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 유럽은 프랑스, 스페인, 독일이 주도하고 있는데, 북유럽 국가들은 그리스, 키프러스, 몰타 같은 남유럽 국가에 끌려가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같은 입장이고, 영국은 미국을 따라가는 실정이다. 미국의 존 케리 기후특사가 워낙 강력하게 이끌고 있어 과도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중국은 시간을 벌려 하고 있고, 중동은 석유 소비에 영향을 줄까 망설이며, 남미는 석유 소비 감축에 따른 손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는 중도적 입장이며, 대다수 아시아·아프리카 AA 개도국들은 빨리하자며, EU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유럽의 속내는 게임 체인저로서의 역할을 하려 한다. 온실가스 문제는 매우 까다롭고 복합적이다. 하지만, 국제무대와 각종 회의에서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르헨티나와 UAE가 그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 의해 사안의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사실상 국제해운을 제대로 하는 나라는 20개 내외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입장은 EU의 눈치를 보며, 연료유 문제도 있어 자국 해운을 염려하고 있다. 이렇듯 해양환경 문제를 둘러싸고 IMO 역사상 최대의 샅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독특한 트러스트 그룹이 생성되어 작동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환경문제는 조선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조선업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친환경 선박건조라는 특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외교는 왜 필요한가

국제사회에서는 글로벌 외교가 필요하다. 글로벌 비즈니스는 고품격 마케팅으로 중장기 미래투자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 선점하여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최근 환경에 대한 인식은 선진국 논리인 대등한 경쟁인 LPF로 가고 있어 이에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해수부 등 정부의 IMO 대응 노력이 활발하다. OECD 국가 중에 해양수산부가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고, 우리의 역할을 세계가 기대하고 있다. NGO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IMO의 업무와 활동 중에는 NGO와 정보를 교환하며 협력하는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해양관련 글로벌 동향

IMO는 기후변화 전략을 추진하며 디지털화도 함께 추구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주창했던 지속가능목표 SDG 14와 환경 및 자원보호 차원에서 추진한 ‘해양생물 다양성 보존 및 지속가능 이용협정’ BBNJ도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2025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해양 컨퍼런스(Our Ocean Conference)’와 ‘유엔 해양정상회의(UN Ocean Summit)’도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세계는 지금 해양환경 분야에서 한국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양 및 해사산업이 도약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한국의 해양수산 위상과 진로

우리나라의 해양수산부의 설치는 선견지명이 있는 조치였다. 해수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큰 장점이며, 우리나라의 저력이다. 따라서 해양관련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 해운, 조선, 해양정책, 수산산업, 원양어업정책을 통합적인 기반에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해야 한다. 글로벌 외교무대에서는 일당백의 전사(warriers)들이 필요하다. 전사의 요건은 영어와 전문성이다.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뛰어난 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인의 저력은 이미 증명됐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은 우수하고 국제경쟁력이 뛰어나다. 글로벌 역량의 요소로는 전문지식, 성실, 정직, 친화력, 박애와 홍익정신, 파티문화, 경로사상이다. 세계적 축구선수 손흥민을 예로 들 수 있다. 언어는 영어가 필수이며, 글로벌 식견을 가지고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의 투자 전략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해양산업의 미래

우리나라는 해운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최고의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해운 생태계가 잘 갖추어져 있고, 우수한 해기사도 확보하고 있다. 가장 우수하고 지속가능한 해운산업과 해양산업의 저변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개도국의 경험이 있는 선진국 우리나라는 개도국과 윈윈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선도국에 걸맞는 전략적 정책적 대응이 절실하다.

 

이어 질의응답이 있었다. 기후변화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지구촌 도처에서 자연재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워낙 피해가 광범위하고 커서 선진국들도 속수무책이다. 기후변화가 임계치를 넘으면 재앙과 위기를 불러올 정도로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국제동조로 함께 풀어야 한다. 북극항로 개발이 중국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우리가 선점해야 하지 않겠는가? 북극항로는 러시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벙커링 문제도 있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제7광구 한일공동개발이 인재와 기술부족으로 지연되고 있다. 부산항의 벙커링 센터 설립도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현안이며, 7광구 개발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7광구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1970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기술부족으로 일본과 공동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해양법이 배타적 경제수역 개념으로 바뀌고 있어 일본 쪽에 유리해지자, 일본 정부가 시간을 끌고 있다. 2025년에 한일공동개발조약이 종료되므로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좋은 질문 감사하다. IMO의 주요 업무는 국가 간의 디테일한 문제 해결보다는 글로벌 차원에서 국제해사 분야의 현안을 공동대처하여 개선하는 일이다. 

 

‘한국인의 탄생’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라는 부제의 ‘한국인의 탄생’은 프리랜서 작가 홍대선이 쓴 책이다. 작가는 한국인의 정체성 아니 미스터리를 역사 속에서 반추하며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한국인은 모순적이다. 한국인에게 “이놈의 나라는 망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내뱉으면서도 한국을 비하하는 외국인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이 모순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의 발전과정과 한반도의 역사까지도 외국인으로선 매우 이례적이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인과란 논리적인 법이다. 한국인은 겉으로 이중성을 띠지만 본질은 이중적이지 않다 모순은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이자 목표물이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나선처럼 교차를 거듭하며 이어진 줄이다. 이 책은 한국인에 대한 이해다. 이해에는 지름길이 있으며, 있다면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혼혈민족이되 배타적 혼혈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혼혈이 완료된 시점부터는 더 이상의 혼혈을 거부해왔다. 어디서 어디까지 유전적 혼혈이고 문화적 혼혈인지 복잡하다. 큰 뿌리인 예맥인과 한인은 유전적으로 차이가 없거나 적을 수 있다. 한국인은 한 번 형성된 후로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유전적 차이가 너무 적어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유전적 동질성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문화적 특성이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부터 만들어진다. 한국인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다. 천박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지닌 민족성의 비밀을 푸는 일은 쉽고도 어렵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이며, 실질적 인구밀도는 더욱 높다. 평지의 비율이 너무 낮고 그나마 곡식을 키워 먹을만한 평지는 정말 적다. 한반도는 농사 환경에서 보면, 이웃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한국인은 남의 불행을 바라기엔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어차피 보고 살아야 하며, 어느 순간 서로 도와야 한다. 타인과 환경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다. 애증이다. 애증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감정이다. 한국인은 삶에 집착하지만, 삶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선조로부터 걱정하는 습관을 물려받았기에 생각을 많이 해 지능이 높다. 그러나 인간의 목표는 행복이지 지능은 아니다. 한국인의 높은 지능과 많은 불행은 한 몸이다. 우리 민족은 한과 흥이 많은 민족이다. 한을 흥으로 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족은 전쟁을 통해 탄생한다는 말은 과장일지 모른다. 평시에도 민족은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꼴을 갖춘다. 전쟁은 민족의 탄생에 있어 아이를 낳는 통증과도 같다. 한국인 역시 전쟁을 통해 형성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땅에 대한 애증

한국인에게 전쟁과 평화는 숙명과도 같다. 한반도 주민은 가난으로 죽음의 위협 아래 살아왔고, 한반도 왕조는 외침으로 인해 소멸의 위협 아래 명멸했다.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념적 동의에서 굴러가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어디까지나 현실적 필요를 위해 타협된 결과다. 국가는 도구이지만, 한국은 운명이다. 운명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다만 조국은 감수해야 하는 신성하지 않은 운명이다. 한반도는 어떻게 강대국 중국과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 맞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적은 인력과 물리력 및 물리적인 충돌로는 중국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다. 그래서 적은 인구와 물량으로 외적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방식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첫째가 산성이다. 한국인은 생존의 민족이요 흥과 한의 민족이자 산성의 민족이다. 산성에 틀어박힌 채 적을 만나면 그때부터는 정신력, 신체적으로 인내력을 발휘해야 한다. 오래 버틸수록 좋다. 계절이 바뀌기 때문이다. 산성방어의 첫 번째 단계는 청야다.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모조리 없애는 것이다. 성안에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우고 남은 것은 깡그리 불태운다. 주민의 자발적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평시의 한국인은 평범함을 거부하지만, 전시의 한국인은 특별함을 거부한다.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 IMF 외환위기시 금 모으기 운동, 코로나19 때의 방역협조도 같은 맥락이다. 외국인의 눈엔 그저 신기할 뿐이다. 평소엔 미워하고 푸념하지만, 위기에는 달라진다. 놀라울 정도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한반도가 생존한 비밀이다. 한반도 주민에게 자연과 농토는 애증의 대상이다. 저주하지만,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 삶을 저주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한국인의 인생관과 직결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과 유림이 전국에 발송한 격문도 한반도 주민에게 “땅은 곧 삶이며 애증의 덩어리지만, 지금은 사랑을 발휘할 때”라고 외친다. 깊은 이해는 사랑이다. 한국인은 자연에 감사하지 않지만, 숭고함보다 진하고 끈끈한 애착을 느낀다. 우리는 한국의 자연과 인간이 한국인에게 가장 미움받고 또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은 천박한 숭고함이다. 한국이란 인간집단은 숭고한 속물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민족성의 얼개가 잡힌 틀이지, 민족성 자체는 아니다. 민족성이 형성되려면 먼저 하나의 민족이 탄생해야 한다. 

 

민족의 탄생

“고구려는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를 장식한 세 나라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다. 고구려 역사는 세기적 강대국 중국과 당당히 맞섰다는 점에서 짙은 로망을 안겨준다. 현실은 로망이 될 수 없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 이루었다가 잃은 것만이 로망이 된다. 한국인은 고구려 영토와 함께 정신적 소중함까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은 지나치게 객관적인 나머지 주관적이다. 우리에겐 ‘진실이 내가 바라는 대로일 리 없을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 그래서 고구려가 통치했던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아쉬워한 나머지, 고구려 영토뿐 아니라 고구려 자체가 사라졌다고 착각한다. 고구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다. 고구려 시대부터 고구려와 고려는 동의어였다. 고구려는 첫 번째 고려고, 고려는 두 번째 고구려다. 고려의 삼한재통일은 신라의 첫 번째 삼한통일과 달리 진정한 통일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도 그는 고려 권지국사(權知國事) 즉 고려의 임금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 고친 새로운 정식 국호는 고려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려 초기 당시의 최강국 거란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흥화진의 양규 장군이다. 양규는 국가와 군인 정신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줬다. 절대적 열세에서 흥화진을 지켜낸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성 밖으로 나가 고려의 평민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에서 다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세계였다. 고려왕조에 영웅은 많았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므로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마침내 현종은 국가가 백성과 계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11세기에 받아들였다. 백성이 소유물이 아니라 계약당사자일 때 국가는 백성에게 책임을 진다. 책임이란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이다. 현종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한국사와 세계사 모두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다.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한 현종은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조선의 사관뿐 아니라 왕들까지도 현종을 한반도 역사를 다시 세운 위인으로 받아들였고, 역사 자체가 현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인식했다. 오직 전쟁만이 민족을 탄생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과 아군의 무덤 위에서 탄생하는 경우라면, 민족의 역사는 비명이다. 싸움터에서 생존한 자들만이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새길 수 있다. 민족이 비명을 새기는 것은 아니다. 비명을 함께 읽고 기억함으로써 민족이 되는 것이다. 민족은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 공동의 적에 맞서 살아남은 이들은 공동체가 된다.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발해계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그들보다 훨씬 강하고 이질적인 적에 맞선 이야기는 생명력을 가진다. 한반도 주민들은 함께 고통을 받았고, 승리의 기억 역시 함께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승리와 극복의 서사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양규의 영웅적 죽음, 하공진의 절개 그리고 강감찬의 빛나는 승리는 전설이 됐다. 현종이 겪은 끔찍한 굴욕과 공포는 모든 고려인이 겪은 고난과 함께 숨을 쉬었다. 말 탄 귀족들이 평민 보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돌진한 결과 고려인은 하나가 됐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한민족이 탄생했다.

 

민족성의 탄생 

명(命)과 영(令)은 옛날에는 같은 글자였다. 방울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말 그대로 명령을 뜻한다. 고대에 청동방울은 절대적 권위를 상징했다. 방울 소리는 신령을 부르는 신호였다. 방울 소리를 동반한 명령은 신탁이며 헌법이었다. 명은 하늘이 부여한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개인에게는 사명이고, 국가를 허락하는 힘은 천명 즉 하늘의 명령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치할 권한은 원래 없었다. 그러므로 국가와 왕조는 천명을 받아야만 했다. 아니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해야 했다. 일반 백성은 우리나라가 정당한 국가인 이유를 철학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다만,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원할 뿐이다. 이런 좋은 나라를 표방한 국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조선이다. 조선을 건국한 철학자들에게 인간의 도덕성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왕씨에서 이씨로 왕성을 바꾸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일은 혁명, 역성혁명이었다. 그들은 혁명으로 좋은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혁명이란 명 즉 천명을 갈아치운다는 뜻이다. 천명은 받는 것이고, 혁명은 하는 것이다. 조선의 주권자는 임금이었고, 혁명 주체는 사대부였으며, 혁명의 목적은 백성의 삶이었다. 삼봉 정도전은 젊은 시절 선배이자 동지인 포은 정몽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은밀히 건네받았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백성의 삶에 있다고 주장한 불온서적이다. 맹자의 사상에서 인간은 도덕성을 타고난다. 국가와 군주의 의무는 백성을 지도하는 게 아니라 잘 살도록 돕는 관리자가 돼야 한다. 맹자의 철학에서 국가의 권위가 뚝 떨어졌다. 맹자에 의해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의 뜻이 달라졌다. 정도전은 맹자에 의해 투사가 됐다. 그는 백성을 위해 왕에게 목숨을 내놓고 직언할 수 있는 사대부를 꿈꿨다. 성인과 군자는 다르다. 성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와 도덕을 잃지 않는 위인이고, 군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최대한 품위를 갖출 줄 아는 교양인이다. 조선은 유물론적인 동시에 가장 유교적인 나라였다. 조선 사대부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자신을 도구로 인식한 엘리트’였다. 조선의 사대부는 기본적으로 양민 즉 평민이었다. 양반은 원칙적으로 과거급제를 통해 신분을 얻은 평민이었다. 조선 사대부가 진정 추구한 가치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명예였다. 사대부의 가치는 다수를 위한 소수로서 사용될 기회가 오면 피하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서삼경과 유학에 매달려 살았던 사대부는 현학적이고 고리타분해졌다. 그런 사대부가 쓰임 받지 못하는 세상이 오자 조선은 멸망했다. 사대부는 망국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품지 못할 만큼 망가진 세상을 탓하기 이전에 애초부터 그런 세상을 유지 보수하기로 약속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결국 그들이 이끄는 나라였다. 현재를 사는 한국인 역시 사대부의 피가 흐르며, 그 도덕심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평등은 모두가 꼭대기를 향해 질주할 기회를 얻는 동등함이다. 좋은 건 손에 쥐고 봐야 하는 게 한국인의 속성이다. 한국인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다. 사다리를 오르다가 떨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다리는 있어야 한다. 한국의 좌파와 진보정당은 이 사실을 습관적으로 망각하여 불리함을 자초했다. 고도경쟁과 상승 욕구는 한국인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질이다. 한국인은 몸도 마음도 쉬는 법이 없다. 매 순간 열등감과 우월감을 넘나드는 난기류 타는 철새와 같다. 따라서 고통은 한국인의 가장 친한 벗이자 헤어질 수 없는 원수다. 융통성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유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법처럼 쓰이는 단어다. 한국에서 융통성이란 형식적으로 원칙은 지키되 안 될 일을 되게 하고, 돼야 할 일을 너 좋고 나 좋게 하는 일이다. 조선은 원칙과 융통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편에 붙어 있는 나라였다. 민본의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 융통성이라는 생물이 꿈틀거린다. 진보성의 한계는 결국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상에서 굴러떨어진 동전의 양면이다. 이상이 현실을 극복하는 만큼 진보하고, 현실에 패배하는 만큼 모순이 발생한다. 조선은 죽었다. 대한민국은 조선의 무덤 위에 세워진 집이다. 한국은 진흙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은 문명의 물질적 한계 속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탄생했지만, 민족성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조선은 한국인에게 혁명적 기질과 못된 성깔도 물려주었다. 조선인의 몸에서 한국인이 태어났다. 

 

한국의 미래

원칙적으로 한국인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생했다. 한국인이라면 수없이 들어서 알고 있는 노년층의 고생담은 요즘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도 굶주렸다. 그러나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 국토와 자연이 허락한 생산력이 전부인 1차 산업사회에서 모든 한국인은 웬만한 나라에선 반드시 부자가 될 정도로 고생했다. 무한에 가까운 생산력이 보장되는 2차 산업사회 즉 산업화시대를 맞아서도 한국인은 오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쓰러져 죽기 직전까지 경쟁했다. 한국인에게 쉴 겨를이 없다. 몸이 쉬어도 정신은 쉬지 않는다. 그 결과 한국은 자살률이 가장 높고 행복지수는 가장 낮은 선진국이 됐다. 게다가 출산율마저 OECD 국가 중에 꼴찌다. 한국인의 생존본능은 두 겹이다. 한편에서는 내가 잘 되어 잘난 인간이 돼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정복당하지 않는 강한 민족이 돼야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한국인은 내부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중심제국의 문물을 게걸스럽게 받아들였고, 동시에 강대국의 야욕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국을 모방하고 따라잡아야 했다. 또한,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은 세계 제일과 최고를 지향했는데, 그것이 요즘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빛을 보고 있다. 조선 성리학의 통(通)처럼 한 글자로 동학을 설명하면, 그것은 접(接)이다. 접의 가치는 통과 반대다. 접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연대, 공감, 협동이다. 통은 수직적이다. 하늘의 가르침이 사대부의 통치로 백성으로 이어졌다. 접은 수평적이다. 동학은 하늘의 이치에 닿기 위해 핵심 사상 인내천(人乃天)을 목표로 했다. 인내천 사상은 인과 민의 구분을 지웠다는 면에서 혁명적이다. 서구의 근대 철학사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었다. 루터가 기독교에서 믿음의 방식을 바꾸고,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의심했으며, 스피노자는 신의 성격을 바꾸었다. 칸트와 헤겔에게 신은 일종의 이론이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이르러 인간은 독립적 개인이 되고,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숙명을 다뤄야 하는지 고민하는 실존주의가 탄생했다. 현재 한국의 성공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맹자에서 탄생한 정도전의 민본, 민본을 대체한 인내천, 현재의 서양식 민주주의까지 한국의 정치사상은 끊기지 않는 역사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선조와 후예의 관계도 애증으로 묶여 있다. 한국인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한국인은 한이 많고 화도 많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성격이 그러하니 행복할 수가 없다. 한국이 앞으로 어떤 위기에 처할지 알 수 없지만, 결국엔 극복하고 회복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기엔, 한국인의 성격은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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