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한국 발행사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4월 1일로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이에 연구소는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창립자인 윤상송의 자서전을 발간했다. 이에 본지는 9회에 걸쳐 연구소 창립자 삼주 윤상송의 자서전을 특별 연재하고 있다.

 

연재순
▶1회-대학진학이전 시기
▶2회-대학입학이후 도쿄상선학교 학창시절
▶3회-상선학교 학창시절
▶4회-졸업이후 취업과 마지막 승선
▶5회-육상(서울)에서의 새 생활
▶6회-전쟁, 그리고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7회-해양대학을 떠나 만학, 해사문제연구소 설립
▶8회-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9회-해운산업합리화위원장과 해운학회 설립

 

도쿄고등상선학교로 진로 전환
그러나 7, 8개월 뒤에 응시하기 위해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은 지루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참에 도쿄고등상선학교에서는 1년에 두 차례씩 학생을 모집하는데, 9월에 2차 모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상급학교에 대한 진로를 수정하였다. 상선학교는 일본 내에서 경쟁률이 매우 높고 인기가 있는 일류의 학교로서, 상선을 타고 외국에 드나들 수 있는 학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관비학교라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섰다.


그동안 잊고 지내 왔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상선에 대한 승선을 동경하고 있었다. 보통학교에 다니던 때 기선회사의 청진 대리점사인 북선우선주식회사(北鮮郵船株式會社)에 근무한 큰형을 찾아갔다가 큰형을 따라 배 위에 올라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으리으리한 선장실을 들러 보았고, 또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살롱에서 선식(船食)을 먹어 본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고보시절에는 대 선배인 경성고보 제1회 졸업생인 황부길(黃富吉)씨가 도쿄고등상선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수재로 소문이 나 있어서 모든 재학생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상선학교를 졸업하면 예비역 해군장교로 임명된다는 것도 조선인으로서 크나큰 매력이었다. 비록 예비역일망정 조선인이 해군장교가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이런 등등으로 나는 나 자신의 진로를 고등공업학교에서 고등상선학교로 수정하였지만, 우유부단하다는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 부모형제에게도 비밀로 하고, 수험순보의 예비시험지 성적에 의한 상선학교 합격률을 묻고, 평상송(平常松)이라는 가명으로 조선인의 입학에 제한이 있느냐는 등의 내용을 학교에 직접 문의하였다. 그런데 상선학교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란 전혀 없거니와, 그때까지 몇 명의 조선인 학생이 배출되었다고 아주 상세한 내용의 답장을 보내 주었다.


이러한 답장을 받고 결심을 굳힌 나는 9월 이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하고, 집에서는 공부가 안되니 히로시마로 보내주기를 부모님께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 날부터 나는 책상 위에 점 하나 찍어 놓고 책을 펴 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상에 잠겨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그러다 말겠거니 하는 눈치였으나, 사흘 째 계속 그러자 은근히 걱정이 되는 지 두 분이 수군거렸다. 그리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둘째 형이 귀가하자, 당시 군청에 근무하던 큰 형과 함께 가족회의가 열렸다.


나로서는 일부러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일종의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이 된 셈이었다. 어쨌든 가족회의까지 열리게 된 것은 보고, 나는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마 뒤 두 형이 내 방으로 들어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형이 내 방을 나가 한 시간 쯤 뒤에 나를 불러내어 말했다.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안 된다고 하니, 네 뜻대로 히로시마로 가서 공부해라. 히로시마는 도쿄와 달라 문화도시이고 교육도시이니까 네가 마음만 다잡는다면 괜찮을 게다. 학비는 보내 줄 터이니 가서 공부만 열심히 하여라.”


그래서 나는 8월 말에 도항하여, 도쿄고등상선학교의 가을 모집에 뜻대로 응시하기는 하였으나 입학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도쿄고등상선학교에 재도전
상선학교 진학에 실패한 나는 히로시마고등학교 응시 때 이용하였던, 하와이에서 귀국한 노부부의 집을 다시 찾아가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상요연꼬라는 학원에 적을 두고 말 그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많은 일본인 학생들이 이른바 재수 차 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학원이 끝나면 당구를 치고 술집에도 드나들었지만, 나는 그러한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고 일곱 여덟 시간 계속 공부만 하다가 졸도까지 한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런 때마다 나는 무산에서 아버지로부터 훈련받았던 일을 되새기고 극복해 냈다.


일본에는 온돌방이 없기 때문에, 이층 방에 숯불을 피워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리는 추위를 무릅쓰고 고생을 감내하였다. 주인 할머니는 이따금 일본 노인들이 입는 일본 고유의 저고리를 입으라고 주기도 하였다, 노인들의 독특한 냄새 때문에 입기 싫었지만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 입는 체 하다가 주인 할머니가 나가버리면 벗어버렸다. 그러면 다시 들어와 다시 권유하고는 했다. 그처럼 주인 할머니는 나를 각별히 귀여워하였다.


어쨌든 도쿄고등상선학교의 입학시험을 다시 치르게 되었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영어, 수학 및 일본어를 총 정리하는 데에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특히 작문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른바 일본정신에 대해 힘을 기울여 메이지(明治)천황의 시를 백 여 수나 외워두었다. 어떤 문제가 작문의 제목으로 나오든 작문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인용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그 결과 상당한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면접시험의 경우 다른 학생들은 2, 3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나에 대한 면접은 50여분이나 걸쳐 이루어졌다. 그만큼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윤 학생 전보 왔어요.”
며칠 지난 어느 날 주인 할머니가 전보를 내밀었다. 전보를 받는 순간 무언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합격’이라는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외쳤다. 나는 이로써 내 인생 가운데 몰아닥친 폭풍의 시절, 치욕의 시절, 인내의 시절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입학식에 지각하다
도쿄고등상선학교 입학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학교의 위치를 확인할 겸 전차를 타고 학교에 가 보았다. 도쿄도 후카가와구(深川區) 에츠지마(越中島)에 있는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신학기를 맞아 귀교하는 학생들이 많이 눈에 뜨였다. 학생들의 복장은 매우 단정하였고, 그 태도도 매우 혈기 왕성해 보였다. 한 가지 대학에 입학하면 당연히 머리를 기르게 될 줄 알았는데, 모두가 머리를 빡빡 깎고 있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다음날 나는 입학식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일찍 가야 하는 줄 알았지만 워낙 잠꾸러기였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서둘러 전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였을 때 문 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단 한 학생이 서성이다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네가 윤상송이냐?”
평안도 사투리의 우리말이었다. 경성에서 더러 평안도 사투리를 듣기는 하였지만, 평안도 사투리는 그다지 익숙한 억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말이라는 점에 대번에 친밀감을 느꼈다. 이 분이 당시 최 상급생으로 있던 유일한 조선인 학생인 이용운(李龍雲)씨였다.


이용운 준장
이용운 준장
“너 오늘 입학식인데, 왜 이렇게 늦게 왔니? 내가 몇 년 동안이나 조선인 학생을 기다렸는지 아니? 몇 년 동안 아무도 입학하지 않았는데, 오늘 네가 입학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니? 그런데 이렇게 늦게 오다니, 참으로 멍청한 놈이구나. 빨리 따라와.”


그래서 졸래졸래 따라가니, 그는 담당 교관과 학생에게 잘 부탁한다며 나를 인계하였다.


부속실에서 학교에서 준비해 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입었던 옷은 집으로 보내기 위해 짐으로 꾸렸다. 학교의 기숙사는 남, 북 및 중 등 3동이었고, 300명 정도의 전체 학생이 항해과와 기관과 각 6개 분대씩 12개분대로 편성되었다. 홀수는 항해과 짝수는 기관과였는데 나는 8분대에 배속되었다. 분대의 인원은 30명에 약간 미치지 못하였다. 침실은 2층에 있었고, 아래층의 자습실은 10명이 같이 쓰도록 되어 있었다. 10명에는 상, 하급생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신입생인 나는 말할 나위 없이 말석이었고, 내 바로 위의 학생이 데스크 메이트(desk mate)로서 나를 일일이 지도할 책임을 맡은 상급생이었다.


그날부터 기숙사내의 생활은 상급생이 정하여 지시하는 바에 철저하게 따라야 했다. 그런데 나를 지도하는 상급생은 나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이용운 선배가 그 상급생을 일부러 찾아 조선인이어서 일본인의 생활을 잘 모를 것이니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으나, 군사훈련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매우 큰 어려움을 느꼈다.


얼마 뒤부터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외출하자면 소총 등 병기의 손질이 필수였다. 일본인 학생들은 중학교 때부터 군사훈련을 경험한 나머지 손쉽게 소총을 분해하여 손질하였지만, 나는 전혀 경험이 없어 상당히 애를 먹었다. 심지어 제식훈련의 구령마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담당사관의 특별지도까지 받아야 했다. 상급생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기숙사 생활도 매우 엄격하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손님대접을 해 주겠다. 그러나 1주일 뒤부터 너희들은 손님이 아니고, 학생들일 뿐 아니라 하급생이다. 정신적인 각오를 단단히 가져야 한다.”

 

본격적인 도쿄고등상선학교 생활
일주일 뒤부터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그 첫날 상급생을 제외한 기관과 학생 전원이 강당에 집합하여 2시간 동안이나 부동자세로 상급생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내용은 신입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합이었다. 자세가 나쁘다고 큰 소리로 호령하는 것은 물론, 뺨을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쓰러지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쓰러진 학생들을 수돗가로 끌고 가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2시간 동안 똑바로 서서 견디기는 하였지만, 머리가 팽팽 도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끝난 뒤에는 상선학교 학생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었다.


당시 일본의 고등학교에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심하게 다루는 스톰(storm)이라는 것이 유행하였다. 상급생의 처지에서 스톰이라는 것은 하급생을 훈련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하급생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야만적인 기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상선학교의 스톰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단체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이를 묵인하였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경우에도 상급생들은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기합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전원 집합’이라는 구령이 떨어지면 이는 기합을 의미하였다. 전원이 모여 일렬로 늘어서면, 어떤 이유를 들고 죽 뺨을 때려 나아갔다. 엉덩이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뺨 몇 대를 맞고 나면 불이 번쩍 나고, 나중에는 무감각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일이 다반사이고 보니, 나중에는 맞고 나야 오히려 시원함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이런 기합을 견디지 못하여 밤중에 도망가는 신입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상선학교에 입학하면 해군예비병으로 등록되는데, 일단 해군예비병으로 등록되고 난 후에 도망가는 것은 탈영이 되므로, 도망을 가더라도 등록되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상선학교에는 일본 각 지역의 학생들이 거의 골고루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 도쿄 출신들이 비교적 되바라진 편으로 말썽을 피는 일이 많았지만, 단체기합이 되풀이되자 그들 역시 별 수 없이 순응해 갔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단체기합이라는 것도 필요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체기합에는 개인의 감정이 개입할 틈이 없는 것이어서, 기합이 끝난 뒤엔 곧바로 기합을 준 상급생들과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기도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 상급생이 전원을 집합시켜 기합을 준 뒤에는, 차하 상급생이 기합을 주는 일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 개인감정이 개입된 기합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는데,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3학기 때인가 4학기 때인가, 성격도 좋고 인품도 좋을 뿐만 아니라 분대장도 맡고 있는 매우 현명한 상급생이 분대장으로 있는 분대에 배속되었다. 대부분의 분대원이 재수 없게 걸렸다고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쑥덕거림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별 잘못도 없었는데 그로부터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기합을 받았다. 나는 그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아직까지 모른다.


하루의 일과는 오전 6시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상 이후에는 걷는 것이 일체 허용되지 않아 늘 뛰어다녀야 했다. 아침 식사 이전에 어디서이든 몇 번이든 상급생을 만날 때마다 경례를 해야 했다. 그리고 뛰는 자세나 체위도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상선학교 학생들은 어디에서나 그랬기 때문에 뒤에서 보아서는 상, 하급생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뒷짐을 져서도 안 되었다. 외출할 때 긴자(銀座) 같은 곳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하급생을 발견하면 귀교한 다음, 언제 어디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학생은 자진해서 나오라 하여, 단체기합을 주고는 했다.


기숙사 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청결을 매우 중요시하여 청소를 매우 철저하게 시켰다. 기숙사 안의 교실 청소는 모두 학생들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식사 전에 청소를 마쳐야 했다. 그래서 상선학교 학생들 스스로가 고등상선학교가 아니라 고등소제학교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변소의 청소에도 매우 철저하였는데, 왜 그랬는지 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냄새나고 더럽다고 기피하는 변소 청소를 자청해서 하였다.


일상생활에서는 시간엄수를 철저하게 요구하였다. 5, 6분쯤 늦어도 큰 지장이 없는 육상의 경우와는 달리 선박이 출항할 때에는 1분만 늦어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박이 출항할 때에는 스탠바이(stand by)라고 해서 출항 5분전까지 준비를 완료하도록 되어 있는데, 상선학교의 경우 외출하였다가 귀교할 때의 스탠바이는 15분 전이었다. 그리고 식사시간의 스탠바이는 5분 전으로 되어 있었다.

 

즐거운 저녁 식사시간
규율에 억매인 상선학교 생활에서 즐거운 때라면 아무래도 식사시간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저녁 식사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늘 양식에 가까운 일식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일정량 배식하였는데, 체중이 20관으로 다른 학생에 비해 큰 편인 나에게는 모자라는 양이었다. 그래서 항상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배고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저녁 식사 뒤에는 다소간의 여유가 있어 매점으로 달려가 호콩을 넣은 사탕이나 가락국수를 사먹을 수 있었다. 이런 때이면 대개 같은 고향 학생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었는데, 조선인인 나에게는 동향인이 없었다. 다행히 일본인 학생들이 자기들 틈에 끼워주어 그들과 어울려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고등상선학교는 일본해군사관학교의 모든 제도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사관학교는 고등상선학교의 경우와 달리 체중이 20관이 넘는 생도에 대해서는 특별 배식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상급생일 때 20관이 넘는 학생들을 모아 학교당국에 특별 배식을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교생활에서 음주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으나, 흡연은 허용되었다. 일본의 육군은 독일의 편제를 따랐고 해군은 영국의 편제를 따랐는데, 독일의 제도는 술은 허용하되 담배는 금했고, 영국의 제도는 반대로 담배는 허용하되 술은 금했다. 즉 영국의 제도를 따른 결과였다.


학비는 전액 관비였기 때문에 따로 필요하지 않았으나, 개인적인 용돈은 필요하였다. 최소한으로 줄이면 한 달에 5원이면 충분했는데, 나의 경우에는 집에서 매달 15원 정도를 보내 왔기 때문에 부잣집 아들로 통하기도 하였다. 용돈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에 송금을 요청하기 마련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터빈이나 비앤더불유(B&W) 등을 사기 위해 필요하다고 엉뚱한 용처를 대었다는 사실이다.

 

외출과 도쿄
도쿄고등상선학교는 도쿄도 후카가와구(深川區) 에츠지마(越中島)에 있었기 때문에 에츠지마라고 약칭되었다. 그래서 도쿄고등상선학교 출신을 에츠지마 출신이라든가, 본교 출신이라고 했는데, 본교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도쿄의 스미타강(隅田川) 하구에 있는 스기토시마(越島)라는 조그만 섬에 있는 수산전문학교에 대한 말이었다. 즉 이 수산전문학교는 농림성 소속이어서 학교라 불리지 못하고 수산양성소로 불리었다. 이 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수산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토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요일에는 오전부터 오후 7시까지 외출이 허용되었지만, 외박은 일체 허용되지 아니 하였다. 그러므로 외출하였다가도 긴자의 네온사인이 켜질 무렵이면 반드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외출이라 해 보았자 클래스메이트와 함께 긴좌 근처의 다방(喫茶店)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밖에 나는 이따금 중학교 동기생의 하숙에도 들렀다.


외출할 때에는 깨끗한 와이셔츠에 정복을 입어야 했다. 두 세 벌 있는 와이셔츠는 한 번 입으면 반드시 세탁을 해야 했는데, 한 달에 50전만 내년 얼마든지 세탁해 주었다. 그러나 정복은 외출하기 전날 침대 밑에 깔아 주름을 세우고 청결여부를 교관으로부터 점검받아야 했다.


나 외에 조선인은 앞에 얘기한 이용운씨가 유일하였는데, 이용운씨는 내가 입학한 지 불과 6개월 뒤에 졸

어린시절 영친왕
어린시절 영친왕
업하여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이 분의 동생인 이교문(李敎文)씨는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재학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영친왕인 조선인 학생들은 이왕(李王, 英親王) 전하가 마련한 숙소에서 기거하였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도쿄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은 그 곳으로 몰려가 조선 음식을 즐겼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이종찬(李鍾燦), 채병덕(蔡秉德) 씨 등이 최 상급생으로 재학하였고, 신응균(申應均)씨는 최하급생으로 재학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체리 마크를 목표로
여름철 방학은 상당히 길어 귀향할 수 있었다. 나는 대개 쓰루가(敦賀)나 니가타(新潟)를 통해 청진항까지 40시간이 걸리는 연락선을 이용하기도 하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서울을 경유하기도 하였는데, 관부연락선을 이용하면 청진까지 약 30시간이 결렸다. 2학기 때인가 청진항에서 신경환이라는 조선우선의 선박을 타고 오다가 폭풍설을 만나 니가타 근처에서 조난을 당해 귀교가 늦은 일이 있었다. 배가 좌초하여 조그만 보트로 옮겨 타 상륙하는 바람에 열 몇 시간 만에야 기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난 중에 학교에 ‘신경환 조난, 귀교 늦을지도 모름. 몸은 무사. 윤상송’이라는 전보를 쳤는데, 귀교하여 전보문이 간결하다고 해서 칭찬을 들었다.


겨울방학은 약 2주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귀향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친구들의 하숙집을 전전하기도 하였고, 하숙집을 얻어 도쿄 생활을 나름대로 즐기기도 하였다.
고등상선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였다. ‘체리마크'(cherry mark)라는 제도를 두어 우등생에게는 견장(肩章)에 벚꽃 마크를 부치도록 하였고, 최우등생의 경우에는 그 이름을 금색으로 새긴 간판을 게시하였다. 그래서 나도 체리마크를 붙여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되지 못하였다. 몇 분의 선배만이 체리마크를 붙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시험도 그 결과의 처리도 매우 엄격하였다. 한 과목이라도 낙제하면 인정진급이라 하여 진급만은 인정하였고, 두 과목을 낙제하면 유급을 시켰다. 신학기에 게시되는 일람표를 보면 인정진급생 이름에는 크로스마크(cross mark), 그리고 유급생의 이름에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래서 크로스마크가 붙은 학생을 크로스헤더(cross header)라고 불렀다.


시험 때에는 촛불을 켜 놓고 공부하였다. 소등시간 이후에는 물론 자습시간 이외에는 일체 공부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공부가 부족한 학생들은 소등 후에 변소 같은 곳에 가서 공부하였다. 위에서 나도 체리마크를 붙여보고 싶어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처음에는 대학에 입학만 하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비록 6개월간이기는 했지만 이용운씨의 많은 타이름과 질책, 그리고 감시를 받았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혹시 낙제를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시험 때에 외출하려고 들면 이용운씨의 감시는 더욱 심하였다.


“너 어디 가니?”
“도서관에 갑니다.”


이로써 그치지 않고, 이용운씨는 도서관까지 따라오기 일쑤였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척 하기도 하였다.


2학기 때인가 중간 성적이 나빴던 관계로 생도감으로 있는 전기 담당 교수인 은사에게 호출을 당하였다.


“너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입학할 때는 성적이 꽤 좋았는데,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낙제이다.“


나는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3등인가 4등으로 입학한 것을 알았다. 어쨌든 이 분의 말에 자극을 받아 공부하기 시작하여, 그 뒤의 본 시험에서는 거의 만점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수업시간에는 열심히 강의 내용을 노트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나태했던 탓에 수업시간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이 많았는데, 그런 경우에는 무조건 베껴 적었다. 그 바람에 글씨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특히 기계공학, 전기교류이론, 기계학, 고등수학, 금속재료학 등이 매우 어려웠다. 비교적 쉬웠던 것은 독일어였는데, 이는 독일어 선생이 너무 점잖은 분이어서 학기가 끝날 때까지 배운 것은 구트(gut) 뿐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인식한 민족의식
상선학교, 특히 기관과의 경우에는 실습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실습은 대부분 좌학이 끝난 후 공장 현장에서 이루어졌지만, 좌학 시에도 기초적인 실기실습이 자주 있었다. 실습은 단조(鍛造)로부터 시작해서, 기계분해, 치핑(chipping), 전기 및 가스용접 등, 이밖에 제도 및 공작도 있었다. 나는 원래 이러한 실습에 취미를 갖지 못해서 남의 흉내만 내고 열심히 하지 않았다.


당시는 또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등 시국이 어수선하였던 때였던 만큼 이따금 이에 대한 특별 강연이 있었다. 만주사변이란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사건(柳條溝事件, 만철폭파사건)을 조작해 일으킨 만주침략전쟁이었다. 상선학교에는 만주국 출신 유학생들도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육군사관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이 허용되었지만, 해군사관학교에는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군사관학교 대신에 상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클래스에도 2명의 만주 출신 학생이 있었다. 그래서 만주국 황제의 친척 등 고위급 인사들이 상선학교를 견학하거나 시찰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시국 강연에서는 조선민족 관계 등등이 거론되었는데, 그런 강연이 오히려 아무런 의식도 갖지 못하였던 나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대한 관념을 갖게 하였다. 나는 솔직히 말하여 민족의식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상선학교 생활 중 교관이나 학생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본 일도 별로 없었다. 적어도 상선학교 학생들은 상, 하급생을 막론하고 동료 학생들이었을 뿐이었다.

 

유도에서 실력발휘
상선학교는 전교생 모두에게 운동을 하도록 하였다. 누구든 운동부에 가입하여, 방과 후에는 그 운동부에 가서 운동하도록 하였다. 특히 수영은 정식 과목으로 매년 6월부터는 비가 오든 안 오든 학교에 마련된 풀에서 수영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름방학 직전에는 전교생이 원양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또 겨울에는 새벽에 유도나 검도를 단련하도록 하였다. 또 운동선수라고 해서 수업을 면제하거나 하는 특전을 베푸는 일도 없었지만, 어떤 운동이든 일본 전문학교 대항전에 나가면 늘 1, 2등을 하였다. 그만큼 상선학교 학생들은 투쟁심이 매우 강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유도를 하고 싶었는데, 유도부에는 희망자가 많아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나는 유도를 해 본 일이 없어 시험을 포기했는데, 조선인 학생은 무조건 축구부에 들라고 해서 축구부에 들었다. 이왕에 축구부에 들었으니 선수가 되고 싶어 열심히 했지만 실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용운 선배가 특별히 부탁한 덕분으로 나는 유도부에 가입하게 되어,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나는 유도에 열중하였다. 미후에 8단이라는 일본 유도의 최고 권위자가 상선학교를 통해 일본유도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열심히 한 결과 나는 반년 만에 초단 단위를 땄고, 1년 만에 2단의 실력을 쌓았다. 그 뒤에도 계속 정진하여 좌학이 끝날 무렵에는 학교 내 홍백조 시합에서 홍조의 주장으로 출전하여, 같은 급이 백조의 주장과 겨루어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백조의 주장은 나에게 유도를 지도해 준 학생이었는데, 그의 실력은 내가 사범이라고 부를 만큼 실력이 출중하였다. 그 뒤 나는 실기보다는 투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미후에 사범으로부터 3단 인증을 받았다.


또 한 학기에 한 두 번은 나가시노(長篠)나 후지스소노 등지로 민박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상선학교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성격은 바뀌어 있었다. 나는 꿈도 크고 명랑하고, 용감해서 선도적이었지만, 학교에서는 약간 말썽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상선학교는 항해과와 기관과의 최 상급생이 학생들을 다스리는데, 항해과와 기관과가 대립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고, 상급생이 바뀔 때마다 통제방식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식사시간의 스탠바이는 5분전으로 사이렌이 울리면 전원이 식당 앞에 정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기관과 상급생이 지휘하면서부터 사이렌이 끝나는 시간까지 정렬하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른 학생들은 전례처럼 사이렌이 울리는 시점에 정렬하였지만, 나는 바뀐 규정대로 사이렌이 울릴 때 동작을 시작하여 천천히 식당 앞으로 걸어가 사이렌이 그침과 동시에 정렬하였다. 이러한 나를 발견한 항해과 상급생이 나를 불러 따귀를 때렸다. 나는 이에 항의하였다. 이 때문에 항해과와 기관과 상급생 사이에 월권이다 아니다 해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학생간부가 되어
드디어 6학기 상급생이 되었다. 좌학 기간은 3년이었지만, 1년에 두 번씩 모집하였기 때문에 몇 학년생이라 하지 않고 몇 학기생이라고 하였다. 6학기생이 되면 전체 학생들의 통솔을 맡게 되어, 새로운 학생 지도방침을 세워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처럼 6학기생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성적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지, 제2 분대의 차장이 되었다. 기관과 학생은 대체 성적순으로 분대장이 되는데, 2분대장은 기관과 전체를 통솔하는 분대장이 되기 때문에, 분대 차장이 분대장의 역할을 맡았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분대장이 아닌 분대 차장이 된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분대 차장이었지만, 분대장으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였다. 학생들을 통솔함에 있어, 일일이 구령을 붙이는 것이 무척 번거롭게 생각되어 호각을 준비하여 호각과 손짓만으로 지휘하였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일주일 쯤 뒤에 신입생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기합을 주는 신입식을 여는 게 전통처럼 내려왔다. 학교 당국에서는 이러한 관습을 폐지하려고 별러 왔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6학기생으로 신입식을 시행하는 중에 교관이 개입하여 큰 소리로 해산을 명령하였다. 교관의 명령에 따라 모든 학생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때 내가


“차렷,”


하고 명령하여 해산을 막았다. 그랬더니 교관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신입식이 끝난 뒤 나는 교관을 찾아가 정식으로 항의했는데, 교관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그 뒤 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을 조사하여 그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 있는 송신함과 수신함의 편지 통수를 조사하여 학기별 및 학과별로 통계를 내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통계학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기관과 학생들은 실습선 메이지마루(明治丸)에 항해과 학생들과 함께 승선하여도, 교가에도 나오는 그 마스트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나는 기관과 학생이라고 해서 한 번도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다른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과거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을 유일한 조선인 학생이었던 내가 과감히 주장하여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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