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최백호 가수데뷔초 친했던 영일만 벗 그린 노래
배경은 포항 앞바다…독재시절 젊은이들의 희망메시지


3면이 바다인 우리는 해양국가다. 바다는 우리들 삶에 직결돼 있다. 부산, 인천 등 항구도시일수록 더욱 그렇다. 섬은 말할 것도 없다. 바다는 생활터전이자 곧 역사다. 자연히 바다와 관련된 문화들이 발전했다. 소리문화인 노래도 예외가 아니다. 그 속에 만남, 사랑, 이별, 눈물, 즐거움과 웃음이 담겨있다. 특히 노래 속의 바다와 섬, 항구는 한 시대를 증언하기도 한다. 바다, 섬, 항구를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사연과 에피소드를 시리즈로 싣는다.

 
 
영일만을 끼고 있는 경북 포항의 알리미 역할을 하고 있는 ‘영일만 친구’는 낭만파 가수 최백호(61)의 데뷔초기 노래로 1979년에 만들어졌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 그가 가사를 만들고 곡까지 붙인 뒤 직접 통기타를 치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불러 인기를 모았다. 특히 남자들의 진한 우정을 그린 가요로 눈길을 끈다.
이 곡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최백호의 친구를 그렸다. 많은 이들은 최백호가 포항(영일)사람으로 알지만 아니다. 부산 출신이다. 1970년대 후반 영일만에서 음악카페를 하는 양산출신 친구를 찾아간게 계기가 됐다.

울산MBC 라디오PD와 술자리서 작사·작곡
노래제목이 된 영일만 친구는 누구일까. 울산문화방송(MBC) 라디오PD를 지낸 고 홍수진씨다.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됐지만 노래가 만들어질 때 홍씨는 영일만의 오두막에 살면서 음악다방DJ로 이름을 날렸다. 둘은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우정을 다졌다. 그러던 중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이들은 영일만의 한 해변술집에서 만나 유신독재시대상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둘이 청년들을 암울한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노래를 만들자며 그 자리에서 작사·작곡한 게 바로 ‘영일만 친구’다.
노래는 처음엔 히트하지 않았다. 음반이 나왔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게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밤 세상을 떠나고 정권이 바뀔 무렵인 1980년부터 대학가에서 불리며 뜨기 시작했다. 노래가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영일만 친구’는 대놓고 분노할 수는 없어 우회적으로 울분을 쏟아내던 통로구실을 했다. 유신독재가 무너진 뒤 민주화를 원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자유의 외침’ 쯤으로 여겨졌다. 가사를 잘 들여다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 돛을 높이 올리자 / 거친 바다를 달려라 / 영~일만 친구야’

최백호는 한 언론에서 “그 시절 젊은이라면 가졌을 억눌린 세상에 대한 답답함, 갑갑함, 그것을 풀어낼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영일만 친구’는 혹독한 유신정권 아래서 패배주의와 무력감, 비애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위한 메시지였다. 이 노래는 앞서 취입한 ‘입영전야’(1977년) 등과 함께 인기를 모았다. 

‘영일만 친구’는 포항시민들 애창곡
‘영일만 친구’는 포항의 대표가요가 됐다. 포항시민들 애정도 남다르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고부터 포항엔 ‘영일만 친구’가 자주 불린다. 취임식 전날 밤 이 대통령 고향(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실마을)에서 열린 전야경축음악회 때도 흘러나왔다. 그날 밤 포항문예회관에서의 경축행사 때도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영일·포항출신 5급(사무관) 이상의 중앙부처공무원 모임 ‘영포목우회’에서도 주제가처럼 자주 부른다고 한다. 포항시는 때맞춰 지역노래를 통한 시민화합과 홍보를 위해 CD와 테이프를 1,000개씩 만들어 나눠줬다.

1995년 영일만 들머리의 등대박물관 앞엔 ‘영일만 친구’ 노래비가 세워졌다. 최백호의 친구인 고 홍수진씨 고향(양산 원동면 원리) 매화공원에도 섰다.
‘영일만 친구’와 관련해 유명한 곳들이 많다. 10여년 전 개명한 호미곶(虎尾串)은 조선시대에 영일만을 감싸는 장기현에 속했다. 그땐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을 뿐 풍토가 사나웠다. 장기곶은 호랑이의 갈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지명해석으로 장기곶(호미곶)은 호미 끝처럼 튀어나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1월 1일 새벽이면 해맞이 인파로 북적인다. 해맞이광장 옆엔 국내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밝힌 호미곶 등대와 최초의 등대박물관, 등대과학관, 등대공원도 있다.

 
 
장기곶은 한양(서울)과 멀리 떨어진 변방이어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지세가 역모의 기운이 많이 있다고해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의 시신이 6토막으로 능지처참 당해 전국에 흩어진 것들 중 그의 왼팔이 여기에 버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등대 앞바다엔 사람 손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 있다. 화합을 뜻하는 '상생의 손'이다. 하나는 공원에서 바다를 향해, 또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육지를 보고 서있다. 1999년 말 만들어진 이 조형물은 21세기를 맞아 모든 국민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도우며 살자는 뜻이다.

호미곶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구룡포가 나온다. 그곳 겨울바다엔 과메기덕장이 줄지어 있어 장관이다. 감포로 가는 국도엔 푸른 바다와 작은 백사장, 울창한 숲이 나온다. 감포의 문무왕 수중왕릉은 또 하나의 볼거리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수중릉이다. 돌아오는 길엔 감은사지 3층 석탑을 볼 수 있다.
포항은 과메기, 물회, 고래고기가 유명하다. 데친 물미역, 쪽파, 마늘을 초고추장에 찍어 김에 싸서 먹어야 제 맛이 나는 과메기는 전국적 음식이 됐다.

 
 
친한 친구 매형소개로 가수의 길 걸어

‘영일만 친구’를 부른 최백호는 우리들 삶이 그렇듯 희로애락이 많은 가수다. 한창 잘 나가던 때 탤런트 김자옥씨(60)와의 결혼이 화제가 됐지만 둘은 얼마 못가 헤어졌다. 지금은 각자 갈 길을 잘 가고 있다. 김자옥은 탤런트로서 음반까지 내며 끼를 발휘하고 있고 최백호는 가수, 방송인으로 맹활약 중이다. 김자옥은 그 뒤 가수 오승근과 재혼했다. 아나운서 김태욱씨는 친동생이다.

최백호 노래엔 인생과 낭만이 있다. 가슴으로 부르고 곡절 많은 인생사가 묻어있는 노랫말과 리듬 때문에서다. ‘가을 남자’ ‘고독과 낭만의 가수’로 불리는 그에겐 가을과 이별을 읊은 게 많다. 성숙기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가 그렇다. 지나간 청춘을 그리는 파격적 노랫말로 크게 어필했다. 첫 히트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1976년)도 마찬가지다. 정감 넘친 허스키보이스의 애잔한 이별의 노래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소리~’로 나가는 ‘낭만에 대하여’(1994년) 또한 진한 맛이 난다.

최백호는 1950년 부산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현재 부산시 기장군)에서 태어났다. 산을 넘으면 바다가 보인다. 그는 창고업을 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6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마저 별세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친구들은 “그 때 백호가 어려웠지만 어머니 영향으로 예의가 반듯했다. 노래는 물론 운동, 그림 등에 뛰어난 만능재주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고교를 졸업, 미술대 진학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20살 때다. 그해 가을에 떠난 어머니를 그리며 만든 노래가 첫 음악앨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다. 이후 ‘낭만에 대하여’ ‘입양전야’ ‘그쟈’ ‘영일만 친구’ 등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최백호는 1970년대 후반 최병걸, 최헌과 함께 가요계의 ‘3최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그가 가수가 된 건 친한 친구 매형 소개로 라이브카페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면서다. 1주일 만에 통기타 가수들이 모이던 부산 서면의 킹클럽으로 스카우트되는 행운을 잡았다. 킹클럽은 송창식, 하수영, 이장희 등 쟁쟁한 가수들이 거쳐 간 곳이다. 어느 날 하수영씨가 ‘음반취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 서울서라벌레코드사에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머리 곡으로 첫 음반을 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 때가 1976년이다. 그 뒤 4?5년 전성기를 맞았으나 1980년대 들어 슬럼프를 맞았다. 가수로서 마이크를 놓고 부산의 나이트클럽 운영, 미국 이민생활을 하는 등 아픔을 맛봤다. 1990년대 초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그는 2~3년에 한 장 꼴로 앨범을 내면서 다시 일어섰다.

부산출신 최백호, 환갑나이에도 맹활약
그는 요즘 환갑나인데도 바쁘다. 가수, 방송인 등으로 열심이다. 지난해 7월 24일 포항시 형산강체육공원에서 열린 ‘제7회 포항국제불빛축제’ 때 포항명예시민증서와 메달을 받았다. ‘영일만 친구’를 통해 포항 알리기에 이바지한 공로다. 그는 포항브랜드 막걸리 ‘영일만 친구’ 홍보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필자 왕성상
wss4044@hanmail.net]=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